Turkey Kusadas Ephesus
지금은 황폐하고 황량한 이 땅에 부서지고 깨어져, 흩어져 나딩굴고, 널부러진 돌 무덤에 불과하지만 오래 전 황제가 살던 화려하고 사치한 궁전이고 목욕탕이고 신전이었으며 찬란한 그리스 문화를 자랑했던 곳이고 한 국가의 수도 였던 곳이다.
흩어진 돌 조각과 부러져 꺽인 돌 조각에서 흘린 피와 땀을 생각해 보았고, 꿈과 이상을, 의지와 소망을 더듬어 보고 회상해 보았다.
우리는 뒷문으로 들어가서 정문으로 나왔으니 28번 목욕탕을 보고, 20. 제단, 19. 도미티아누스 신전, 2. 극장 등 도표에 있는 모든 유적들을 둘러 보고 1. 하버 스트리트(항구거리)로 나왔다.
비록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깨어진 돌 조각들이 말 없이 어지러이 널부러져 있지만 당시의 문화가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안내판
1. 하버 스트리트(항구거리) 2. 극장 3. 항공 4. 하드리아누스 신전 5. 도미티아누스 신전 6. 유물관 7. 켈수스 도서관 8. 집회장 9. 공회당 10. 라트리나 11. 스콜라스틱 목욕탕 12. 오디언(소도 표정한 극장) 13. 스콜라스틱 14. 클리니어스 15. 신들의 집 16. 마케도니아 비밀도서관 17. 성모 마리아 교회 18. 고대 수도원 19. 도미티아누스 신전 20. 제단 21. 쿠레트스 도로 22. 님파이움 23. 클리오의 분수 24. 프리타네 25. 이시스 사원 26. 이고라 무대 27. 바실리카 목욕탕 28. 바리우스 목욕탕.
고대 로마 도시 에페소
에페소의 역사는 기원전 6000년경 신석기 시대에 에베소 주변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3000년경인 청동기 시대에도 정착지가 있었고, 소아시아 한 국가의 수도가 될 정도로 번성했다.
기원전 10세기 그리스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왔다. 아테네의 왕자 안드로클로스는 부왕이 죽자 아테네를 떠나야 했으며, 그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나머지 주민들과 연합해 에페소를 도시로 만들었고, 이오니아 연맹 도시에 가입했다. 그의 통치 동안 도시는 번영했다.
기원전 650년경에서 335년경까지 300여 년 동안 김메르인 공격, 폭군 통치, 백성 반란, 공의회 개최, 리디아 정복, 페르시아 통치,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이오니아 반란 참여,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아테네와 동맹, 스파르타 동맹, 다시 페르시아 통치로 이어지는 험난한 과정을 겪었다. 이 전쟁들은 에페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에페소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인 방식이어서 쉽게 낯선 사람들과 통합했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리디아 통치 기간인 기원전 550년 세워졌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물리친 후 그리스 도시들은 해방되었으며,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자, 에페소는 알렉산더 휘하 장군이었던 리시마코스가 통치하였습니다.
수세기 동안 카이스트로스 강이 침식되어 퇴적물을 쌓아 해안을 채우면서 해안선은 서쪽 바다로 이동하였습니다. 습지가 넓어지면서 모기가 창궐하고 말라리아 전염병이 돌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당시 리시마코스는 아르테미스 신전 주변의 항구와 초기 정착지를 버린다. 2km 떨어진 장소로 사람들을 이주시켰고 하수구를 막아 고대 도시를 범람시켜 이 새로운 정착지가 지금의 에페소다.
기원전 88년 로마 정부의 과다한 세금에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반란을 일으켰다. 폰투스 군대는 소아시아의 많은 도시를 정복했고, 그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로마인과 주변 국 시민 80,000명 이상이 죽었다. 3년 후 로마가 탈환했지만, 도시와 마을은 상당한 파괴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에페소를 속주 아시아의 수도로 삼은 후 에페소는 총독의 관저이자 상업 중심지가 되면서 다시 번영을 누린다. 개선문, 송수로를 시작으로 오랜 기간 화려하면서도 실용적인 공공건물들이 들어섰는데 당시 에페소는 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하고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재위 306년~337년)는 도시를 재건했지만,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후 에페소는 더욱 쇠퇴한다. 고대 어머니 여신 아르테미스를 숭배는 금지되고 각종 신전은 기독교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에페소는 더는 항구로 이용 가치가 없어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면서 점점 소도시로 전락한다.
1090년에 셀주크가 들어섰고 1200년 오스만이 지배하면서 에페소는 15세기에는 사람들의 시야에서조차 사라진 완전히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1839년에 첫 발굴이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오스트리아와 튀르키예 학자들이 발굴을 이어오고 있으며, 현재 발굴된 유적은 전체 30% 정도라고 한다.
아르테미스 동상
잘 알려져 있는 상태로 발굴된 이 여신상은 파손 흔적이 없다. 기독교가 공인되었을 때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에페소에 있는 신상들을 파괴했다.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페소 사람들이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하던 대상이었으며, 아르테미스 여신을 사랑했던 에페소 시민들은 그 파괴를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여신상을 땅에 묻었다. 그로 인하여 여신상이 파손 없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라고 한다.
멤미우스 기념비 (Memmius Monument)
기원전 87년, 폰투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의 과다한 세금에 지쳐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3년 후, 독재자 술라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에페소를 탈환하였으며, 서기 1세기경 술라의 손자 멤미우스가 에페소 탈환을 기념하는 승리의 아치 형태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4면에 있는 로마 개선문 아치 형태였다고 한다. 이 기념비 정면에는 술라와 그의 군대의 위엄과 도시 해방을 알려주는 비문이 있으며, 술라, 그의 아들 가이우스 멤미우스, 그의 손자(가이우스 멤미우스)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림이 기념비 부조에 묘사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이들 중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다.
오데온(Odeon)
에페소 유적지에 들어서서 처음 만난 유적으로, 오데온은 소극장이면서 회의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예술 공연도 열고 관료들이 모여 토의를 하는 장소였다. 서기 150년경 에베소의 부자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안토니누스(Publius Vedius Antoninus)의 후원으로 지어졌으며, 지붕이 있고 22개의 계단을 가진 관중석에는 약 1,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페리스타일과 프라이타네움 셀수스 도서관 (Library of Celsus)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2세기 로마의 소아시아 총독이었던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셀수스 폴레마에누스'를 위한 도서관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책을 사랑했던 아버지를 위해 그의 아들 아퀼라가 서기 110년 건축을 시작했지만 그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서기 135년 후손들이 완성한 셀수스는 도서관 지하 실에 대리석 석관에 고이 모셔 놓았습니다.
도서관 정면 외관은 2층입니다. 각 층은 각각 4쌍의 기둥이 받치고 있고, 1층 기둥 사이에는 3개의 출입구가 있으며, 1층과 2층에는 창문 2개씩 있어 열람실을 비추고 있습니다. 내부에는 10.90 ~ 16.70m의 큰 열람실이 하나 있으며, 약 12,000개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날개 달린 여신 니케(=나이키) 상
니케의 한 손에는 승리를 상징하는 올리브 잎으로 엮은 왕관과 다른 한 손에는 승리의 열매를 상징하는 야자수 가지로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으며,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매서운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나이키 로고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디안 페리스타일은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27년 ~ 서기 14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격화된 카이사르와 로마 여신 혹은 아르테미스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헌정된 신전이라고 합니다. 이곳을 발굴하던 중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여신 동상 2개가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쿠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모자이크)
쿠레테스 거리는 에페소 주요 도로 중 하나며, 헤라클레스 게이트에서 켈수스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길로 남쪽에서 북쪽을 따라 뻗어 있습니다. 이 거리는 기원전 3세기에 건설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