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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諡號에 대하여
본자료는 필자가 집필 중인 가칭 <한국의 시호>에서뽑은 자료로
시호에 대한 자료는 확정 된 자료는 아니다.
樂民 張達洙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列傳包含)
高麗史節要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韓國金石全文
淸選考
增補文獻備考
東史綱目
文集
門中資料
‘시諡란 행동의 자취(‘諡行之迹也’, 『說文解字』)’이니 시호는 곧 나라에서 지어주는 최후의 총체적 이름이다.
諡號는 正二品 이상을 지낸 인물의 死後, 생존시의 행적을 대상으로 國王으로부터 받게 되는 새로운 號를 말한다. 易名之典(이름을 바꾸다, 다른 이름)이라고 하여 가문의 영광으로 널리 불려졌다.
諡號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周나라 周公으로부터라 전해지고 우리나라에서는 新羅 法興王 元年(514년) 父王이 죽자 智證이라 贈諡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諡法의 처음으로 보여진다. 처음에는 王과 王妃, 宗親을 비롯하여 實職 正二品 이상의 文, 武官과 功臣에게만 주어지던 것이 차츰 제도가 완화되어 賢臣, 名儒, 死節臣, 忠臣에게도 贈職과 함께 諡號가 내려졌다. 이때 實職 正二品 이하인 자는 正二品 이상의 贈職敎旨를 내린 다음 請諡와 함께 諡號를 내렸다.
일반적으로 諡號라 하면 무조건 명예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본래는 易名之典의 의미처럼 死後에 생존 시의 행적과 학문, 성품, 평판 등을 종합하여 公議에 부쳐 엄정하게 평가하고 두 글자로 요약하여 부여하는 새로운 이름, 즉 새로운 號이므로 그 성격에 부합하는 諡註(諡號의 글자 및 의미)를 결정하였으니 惡諡(나쁜시호)를 받은 경우도 여럿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죽은 사람의 선악을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과 징계의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朝鮮初期 成宗大王 이전까지는 인물의 정확한 묘사가 이루어졌으나 그 후에는 대부분 명예로운 諡號만 사용되고 있다.
현재 新羅 이후 諡號 인물은 3168명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찾지 못하였다. 이 가운데는 王과 王妃, 宗親이 모두 포함되고 高麗시대에는 僧侶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朝鮮시대에는 開國功臣을 비롯한 여러번의 功臣과 壬辰, 丙子亂의 忠臣, 各 士禍의 節臣들이 贈職과 함께 諡號를 받고 있다.
1, 諡號의 基準
1) 宗親 및 文,武官의 實職 正二品 이상인 자.
2) 親功臣(종친공신 및 王을 옹립한 공신)은 비록 관직이 낮더라도 시호를 준다.
3) 儒賢, 死節, 忠臣, 功臣으로 追封된 자로서 세상에 드러난 자는 비록 正二品이 아니라도 贈職 후 시호를 준다.
4) 大提學은 비록 從二品이라도 시호를 준다. -續大典-
위와 같은 엄격한 기준이 朝鮮初期까지는 잘 지켜진 듯하나 中期 이후 3)항의 贈職 후 諡號의 규정이 설정되면서 實職의 품계와 관계없이 儒賢, 死節臣, 忠臣에게 諡號가 주어졌다. 生六臣 金時習, 南孝溫, 成聃壽 등은 벼슬이 없는 선비였지만 1782년(정조6년) 正二品 贈職과 함께 淸簡, 文貞, 靖肅公의 諡號를, 宣祖시절 正二品을 거치지 않은 眉岩 柳希春이 죽자 왕은 諡號를 내릴 수가 없어 특명으로 贊成에 贈職하였다는 기록(왕조실록)이 있다. 壬辰, 丙子의 亂을 거치면서 의병을 일으켰던 수많은 인물들이 追諡되었고, 특히 堂上官 이상의 벼슬을 얻기 어려웠던 영남의 남인들이 朝鮮후기 다수 贈職과 諡號를 받게되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2, 諡號의 節次
1) 請諡 : 인물의 死後 자손이나 門徒들이 行狀(諡狀)을 써서 禮曹에 제출.(王,王妃는 諡號都監)
2) 禮曹에서 행장을 검토 奉常寺(봉상시)로
3) 奉常寺에서 행적과 부합되는 諡議(諡號의 글자, 文節, 敏節, 忠武 등)를 정하여 弘文館으로(보통 三望이라 하여 세가지 추천, 單望도 있었음)
4) 弘文館에서 諡註를 검토 吏曹로
5) 吏曹에서 諡號望單子를 작성 國王에게 제출
6) 國王이 諡號를 결정, 敎旨를 작성 하달
7) 敎旨를 전달 받은 집에서는 焚黃告由라 하여 靈座(장례이전 諡號,과거 장례는 3개월 이상이 소요)앞이나, 사당, 묘소에서 敎旨의 副本(황색 종이에 복사)을 불태우면서 제사를 지내고 年譜나 墓碣, 문집, 비석이 작성되 있었으면 이를 첨가 수정하는 걸로 절차를 마친다. 또 贈職과 追諡 때에는 잔치를 베푸는데 그 비용의 부담이 큰 폐해가 된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朝鮮初期까지 諡法의 제도는 거의 의무사항이었던 걸로 보여지니, 보통 문집에 실리는 行狀을 완성하는 데는 오랜 시일이 소요되는데, 아마도 訃告와 함께 간략한 行狀으로 諡狀을 제출한 듯 하다.
-응당 諡號를 받을 사람이 죽으면, 그 本家에서 곧 行狀을 갖추어 해당 관부에 보내었으니, 비록 평일에 공덕이나 명예가 없더라도 諡號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혹시 煬(양), 荒(황), 惑(혹) 등과 같은 나쁜 諡號가 내려져도 또한 거부하지 못하였다. 근래에 와서 이러한 기풍이 갑자기 변하여 처음에는 物議가 있는 집에서나 나쁜 諡號를 받을까 두려워 諡號를 청하지 않던 것이 마침내는 名臣이나 큰 공덕이 있는 자 까지도 諡號를 청하지 않고 있다. -(許 筠, 識小錄)
私家에서 諡號를 받는 의식을 焚黃禮, 焚黃告由라 하였는데 1421년(世宗3년)에 반포한 策贈儀에 그 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喪家에서 喪主가 靈座 앞에서 諡號 敎旨(붉은종이에 기록)의 副本(누런종이에 기록)을 불태운다고 되어있어 焚黃告由라 하였다. 이는 장례이전의 의식이고 장례이후이면 사당이나 묘소에서 焚黃禮를 똑같이 행하였다. 이때 贈職과 追諡일 경우 집안의 경사라 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으니, 그 비용이 어려워서 諡號를 받지도 사용하지도 못하는 폐단도 있었다고 한다.
3. 諡號의 意味(諡號에 사용된 글자)
諡號에 사용되는 글자 역시 字意에 따라 별도로 정해져 있었는데 周禮의 諡法에는 28字, 史記에는 194字로 朝鮮朝에서도 194字를 써 오던 것을 字數의 부족으로 行狀등의 내용과 맞도록 묘사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世宗20년 107字를 추가하여 총301字를 정하였으나 주로 사용된 글자는 文, 貞, 恭, 襄, 靖, 良, 孝, 忠, 莊, 安, 景, 章, 武, 翼, 敬, 和, 純, 英 등 120字 정도였다. 그러나 위의 것들은 대부분 좋은 의미만을 포함한 글자이고, 夸, 荒, 惑, 幽, 厲, 糠 등은 나쁜 의미의 글자이다. 諡號 글자가 같더라도 그 글자를 의미하는 諡註가 여러 의미를 달리 하였다. 가령 “文”字만 보더라도 經天緯地, 道德博聞,勤學好問, 忠信愛人, 博聞多見, 敬直慈惠, 敏而好學 등으로 20여 가지나 사용되었고 “忠”은 危身奉上, 事君盡忠 등으로 “敬”은 善合法典, 夙興恭事 등으로 나쁜 글자인 “夸”는 華言無實로 “荒”은 好樂怠政, 凶年無穀 등으로 글자와 諡註를 조합하면 수천가지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었다.
朝鮮時代 王의 諡號를 살펴 보면 네가지의 號가 부여되었다.
1) 諡號와 尊號 : 중국의 황제로부터 부여 받았다.
2) 廟號 : 종묘에 위패를 안치할 때 쓰는 명칭, 일반적인 왕의 명칭.
3) 陵號 : 왕릉의 명칭
4) 徽號 : 신하들이 왕에게 올린 諡號와 찬사를 담은 문자.(존호와 휘호의 구분이 불명확)
예를 들어 太祖대왕의 경우 “太祖康憲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이 정식 명칭인데 太祖는 廟號, 康憲은 諡號, 그 이하가 尊號와 徽號이다. 또 世宗은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으로 太祖를 康憲大王, 世宗을 莊憲大王으로 부르기도 한다.
王의 諡號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생시의 공덕과 행적을 논의하여 그 성격에 합당한 글자를 선택, 묘사하였다.
예) 松隱先生文集 박익(朴翊) 1332년(충숙왕 복위 1)∼1398년(태조 7).
請諡狀 묘갈명에 卞春亭之諡狀
시호를 청하는 장
고(故) 예부시랑 중서령(禮部侍郞中書令) 박천익(朴天翊)은 명현이자 열사인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한마음으로 의를 지켰는데, 사실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습니다. 정몽주는 경연(經筵) 신하의 진달로 인하여 비로소 은전을 입어 유지(諭旨)가 내림에 유허(遺墟)에 분향하고 고유(告由)했으니, 보고 듣는 사람이 누구인들 충절에 감격하는 뜻이 없었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의 전례(典禮)에는 지위가 정경(正卿)에 이르렀으면 모두 시호를 내렸습니다. 하물며 이 박천익은 세 임금을 두루 섬기면서 부지런히 도와 나라를 다스려 공적이 북쪽 변방에서 드러났고, 몸이 다하도록 의를 지켜 충록(忠錄)에 이름을 드리웠습니다. 큰 절의를 수립함이 이처럼 환히 빛나니, 즉시 성상께서 들으시도록 하여 두 글자의 시호를 얻게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故禮部侍郞中書令朴天翊。與名賢烈士鄭夢周同心秉義。載在國史。鄭因筵臣陳達。始蒙恩典。諭旨之下。焚香告于遺墟。凡在觀聆。孰不有感忠之意哉。竊考麗典。位躋正卿。皆有贈諡。況此朴天翊。歷事三朝。勤亮幹國。功著北藩。沒身秉義。垂名忠錄。樹立大節。炳煥若此。行贊成卞季良。以賜諡事筵白得旨。豈非廟堂至公之典乎。幸望卽徹九重之聽。俾獲二字之贈。千萬幸甚。
諡號三望
忠肅
忠僖
僖敏
事君盡節曰忠。剛而能莊曰肅。
임금을 섬기는 데에 절의를 다한 것을 충(忠)이라하고,
강직하여 능히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을 숙(肅)이라한다.
降諡
建文 元年十月日 1399(정종 1)
성종실록 13년 임인(1482,성화 18)
한명회(韓明澮)·윤필상(尹弼商)이 의논하기를,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평생의 선악(善惡)을 기록해서 시장(諡狀)을 만들게 하여 성상께서 재결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심회(沈澮)·윤호(尹壕)·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행장(行狀)은 그 집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반드시 모두 지나치게 아름답게 꾸미니, 그것에 의거하여 정할 수 없습니다. 평생의 선악을 기록하여 시호를 의논하는 것도 옛 제도입니다. 또 봉상시(奉常寺) 관원이 모두 어질면 겸관(兼官)이 없더라도 좋을 것이니, 이조(吏曹)로 하여금 사람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편(便)하겠습니다.”
하였으며,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시호를 바치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적당한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일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비록 1백 명의 겸관(兼官)이 있더라도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 해서 그 법을 고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전대로 하는 것이 편(便)합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대저 관의 일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여 갑자기 그 인원을 보태면 그 보태는 것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시호를 의논하는 것은 예로부터 봉상시(奉常寺)의 직책인데, 공정한 사람을 선택하여 맡기면 관원이 많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행장은 그 족친에게서 나오므로 전부 이것만 믿고 정할 수 없으니, 예조로 하여금 옛 제도를 상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와 같이 생존 시의 행적에 따라 諡號를 결정하다 보니 諡號에 불만인 후손들이 諡號를 고쳐 줄것(改諡)을 요청하는 경우와, 奉常寺의 三望에 논란이 자주 일어났다.
成宗 甲辰9월 金良璥의 諡號를 논의하는데 恭威(공위), 偏肅(편숙), 齊極(제극)으로 王에게 三望되어 올라왔다. 별로 좋은 글자가 아니었다. 王이 이유를 물으니 “金良璥이 偏僻된 병통이 있어 諡號가 모두 이러하옵니다.”라고 답하였다. 成宗은 “지난번 金國光, 尹繼謙의 諡號에도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는데 너무 공론을 따라 편벽하다 하면 과하다.”하고 三望의 글자를 섞어 恭肅이라 쓰고 나갔다. -(謏聞瑣錄)
中宗이 慎承善의 諡號 改諡를 명 하였다가 반대에 부딪히자 “慎承善이 功이 있어 忠으로 주려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諡號의 법이 特恩과 달라 고칠 수 없으므로 議定에 따라 章成이라 한다.” 하였다. 中宗25년 실록에도 “諡法은 지극히 중대하여 한번 내려지면 백세토록 고칠 수 없다 하였는데 어찌 자손들이 청한다고 고칠 수 있겠는가.”라는 기록들로 보아 중기 이후 諡號를 아예 청하지 않는 사례가 생기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즉 이때 까지는 인물의 평가가 諡號에 잘 반영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陰崖日記에 “武官으로 中宗反正 1등공신에 책록된 張 珽이 죽자 측근 安彭壽가 奉常寺正이 되어 諡號를 忠烈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諡號에 ‘文’ ‘忠’ 두 글자가 없으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라는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文”字 “忠”字를 모두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자료에서 나쁜 諡號가 많지 않은 것은 諡號가 있었더라도 후손들이 기록에서 삭제하고 사용하지 않음으로 사라지고, 좋은 諡號만 남고, 諡號는 명예로운 것으로 인식되어 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영남의 諡號에서는 “文” “忠” 과 다른 글자들이 평균적으로 분포되는데 壬辰亂 인물에서 “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文”은 純祖 이후에 내려진 諡號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논란이 된 諡號의 예를 實錄에서 살펴보면 光山府院君 金國光에게 丁靖이란 諡號가 내렸는데 “丁”이란 “述義不克” 즉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한다, 라는 의미다. 아들 金克忸(뉵)이 여러번 改諡를 청하였으나 고치지 못하였다. 또 尹繼謙의 경우 “威襄”이란 諡號가 議定되었는데 “威”란 “猛以剛果” 즉 사나워서 굳세고 과단한 것이다. 成宗이 “人臣은 진실로 강직함이 마땅하나 尹繼謙은 어진 사람인데 사나운 이름을 더하는 것은 무었 때문인가?”하고 “威”字를 고칠 것을 명하자, 金首孫이 당시 奉常寺正이었는데 “猛은 강직하고 너그러움이 적은 것인데 尹繼謙은 너그러움이 적기 때문입니다.”하고 반대하였다. 또다시 成宗의 요구에도 金首孫은 “諡號란 實德을 기록하고 勸戒를 드리우는 것인데, 尹繼謙의 實德이 이 諡號에 불과 한데도 이제 만약 고치면, 臣은 諡法이 가벼워 질까 두렵습니다.”라고 반대하였다. 그 후의 경과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모든 자료에는 尹繼謙의 諡號가 “威襄”이 아닌 “恭襄”으로 기록되어 있다. 林百齡의 경우 처음 “昭夷”라 불렀는데 “夷”는 克殺秉政 즉 尹元衡과 함께 乙巳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文定王后가 권세로 文忠이라 고쳤으나 1570년 모두 삭탈관직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번의 諡號와 諡註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특히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상소가 많이 보인다. 고려말기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은 死後 황목공(荒繆)公이란 諡號가 내려졌는데 “정사에는 게으르고 놀기만 좋아하며, 올가미를 쒸워 남을 해친다”라는 惡諡의 전형이다.
좋지 않은 시호를 받은 예
유은지(柳殷之) 문화
황호(荒胡) 好樂怠政荒, 彌年壽考胡
음악을 좋아하고 정치를 게을리 한 것을 황(荒)이라 하고,
나이가 많도록 수(壽)하고 강녕한 것을 호(胡)라 하였다.
이숭지(李崇之)
과려(夸厲) 華言無實夸, 暴慢無親厲 지중추원사
좋게 꾸미어 말하지만 실상이 없는 것을 과(夸)라 하고,
난폭하고 교만하여 친한 이가 없는 것을 여(厲)라 한다.
오백창(吳伯昌) 두원(荳原)
양체(襄替) 因事有功襄, 言行相違替
일에 공(功)이 있는 것이 양(襄)이고
언행(言行)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 체(替)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오백창은 이재(吏才)가 조금 있었는데 권귀(權貴)를 잘 섬겨서 대관(大官)을 얻기에 이르렀다. 항상 재리(財利)를 일삼으니, 세상에서 재물을 탐하는 자를 말하면 반드시 ‘오백창’이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간(臺諫)의 논죄(論罪)를 입어 근심하고 분해 하다가 죽었다.” 하였다.
송처관(宋處寬) 청주(淸州)
평양(平煬) 治而無眚平, 去禮遠衆煬 예조참판 지중추부사
다스려져서 허물이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하고,
예(禮)를 떠나고 무리[衆]에서 먼 것을 양(煬)이라 한다.
김국광(金國光) 광주(光州)
정정(丁靖) 述義不克丁 恭己鮮言靖 좌의정 光山府院君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정(丁)이요,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정(靖)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은 이간(吏幹)이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 치밀하고도 명료하였다. 세조조(世祖朝)에 함안(咸安) 사람 최옥산(崔玉山)이 그 아비를 죽였다 하여 옥사(獄事)가 거의 이루어지자, 세조가 놀라서 말하기를, ‘어떻게 이같은 일이 있는가?’ 하고, 김국광을 보내어 다시 국문하게 하였는데, 김국광이 그 옥사를 모두 뒤집으니, 최옥산은 마침내 죄를 면하게 되고, 추문(推問)하던 관리들이 모두 중죄(重罪)로 연좌(緣坐)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자못 임금에게 사랑받게 되었었다. 상정국관(詳定局官)이 되어서는 주대(奏對)하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으니, 세조가 사리(事理)를 아는 것이 제일이라고 지목하였다. 몇 년이 되지 아니하여 판서(判書)에 발탁되고,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니, 총애(寵愛)를 받아 임명된 것이 견줄 데가 없었다. 오랫동안 무선(武選) 을 관장하니, 문정(門庭)이 저자[市]와 같았고, 집안이 크게 부유하게 되었으며, 아우 김정광(金庭光)과 사위 이한(李垾)이 모두 장죄(贓罪) 로 패몰(敗沒)하였다. 재상(宰相)이 되어 대간(臺諫)에게 두 번이나 논박(論駁)을 받았는데, 주상 또한 그 간악(奸惡)함을 알았다. 무릇 대신(大臣)으로서 졸하면 으레 특별한 부의(賻儀)가 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구례(舊例)를 써서 바치니, 명하여 정지시켰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諡號)를 정(丁)으로 의정(議定)하자, 아들 김극유(金克忸)가 여러 번 글을 고칠 것을 논하였으나, 끝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하였다.
송익손(宋益孫) 여산(礪山)
양묵(襄墨) 因事有功襄 貪以敗官墨 부호군 정난공신
일로 인하여 공이 있는 것이 양(襄)이고
탐함으로써 관직에서 파면된 것이 묵(墨)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송익손(宋益孫)은 본래 재능(才能)이 없었는데, 처형(妻兄) 홍달손(洪達孫)으로 인하여 정난 공신(靖難功臣)에 참여함을 얻어 2품 벼슬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탐하고 지저분하여 남의 전토와 노비를 거리낌없이 빼앗는데, 마침내 양민을 억압하여 종으로 삼으려다 망하였다.” 하였다.
윤계겸(尹繼謙) 파평(坡平)
공양(恭襄) 不懈于位恭, 因事有功襄 형조판서 鈴平君
벼슬에 게으르지 아니함을 공(恭)이라 하고,
일을 통하여 공(功)이 있음을 양(襄)이라 한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윤계겸(尹繼謙)은 척리(戚里) 에서 나서 일찍 벼슬에 참여하여, 좋은 요직(要職)을 여러 번 지내고, 자못 자세히 살피는 것[詳察]으로 일컬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어서 대체(大體)에 어둡고 성미가 급하고 가혹(苛酷)하여 무릇 남을 해치는 일에는 솔선하여 소매를 걷고서 하고, 명성과 지우가 이미 지극하여도 항상 부족한 뜻이 있었으니, 작록(爵祿)을 오래 누리지 못한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 성(李 晟)
여도(戾悼) 不悔前過戾 中年早夭悼 창원군(昌原君) 세조 아들
지난 허물을 뉘우치지 않은 것을 여[戾]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이 죽은 것을 도(悼)라 한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성은 오만하고, 포학하며 음란하여 장인을 하인처럼 대우하고, 노상(路上)에서도 광포(狂暴)를 부려 재상(宰相)을 욕보이기도 하였으므로,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자주 꾸짖었으나 그래도 뉘우치지 않았고, 또 음란하고, 투기한다 하여 계집종을 죽였으니, 시호를 여(戾)라 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하였다.
근빈(謹嬪) 박씨(朴氏)가 아뢰기를,
“지금 죽은 아들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에게 시호(諡號)를 여도(戾悼)라고 내렸는데, 주(註)에 이르기를, ‘전의 허물을 뉘우치지 아니함을 여(戾)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성이 어렸을 때에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고 계교함이 없었으며, 그 뒤에 심질(心疾) 을 얻어서 바깥 사람과 사귀지 아니하였는데, 이름을 여(戾)라고 하였으니, 이는 백세(百世)에 고치기 어려운 것으로서 매우 민망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에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이극배(李克培)·윤호(尹壕)·김겸광(金謙光)은 의논하기를,
“성(晟)이 주색(酒色)으로 그 몸을 마쳤고, 또 고읍(古邑)을 때려 죽인 형적(形跡)이 이미 드러났는데 성상의 물음을 받고도 불복하였으며 그 밖에 드러난 행적(行蹟)이 없었으니,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시호(諡號)를 내려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임금이 대신을 우대하는 예(禮)이니, 그 사랑하는 영광이 지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생의 행적을 살펴서 시호를 정하기 때문에 착하고 악함이 여기에 드러나며, 권장과 징계가 여기에 있는 것이니, 이는 천하의 공의(公議)인지라 바꿀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시호를 의논할 즈음에 선과 악을 마땅히 서로 맞게 할 것이요, 하나의 실수로써 그 큰 덕을 버릴 수 없으며, 작은 착함으로써 큰 악함을 덮을 수 없습니다. 평생에 행한 바를 통해 의논하고 강구(講究)해 정하면 거의 사실에 어긋나지 아니하고 정리(情理)에 합할 것입니다. 성(晟)이 고읍(古邑)을 죽인 일은 진실로 광패(狂悖)하나, 이는 특히 나이 어릴 적에 계획 없이 일시에 분(憤)을 발한 일인데, 어찌 이로써 그 평생이 모두 이와 같다고 평가하겠습니까? 성은 뒤에 허물을 고친 일이 있으니, 여(戾)라고 이름하는 것은 과할 듯합니다. 예전에 한(漢)나라 태자(太子) 거(據)가 군사를 일으켜서 승상(丞相)과 더불어 경사(京師)에서 서로 싸웠기 때문에 여(戾)로써 시호를 하였는데, 성의 악함은 이와 같은 데에는 이르지 아니한 듯합니다.”
하고, 서거정(徐居正)·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이름을 유(幽)·여(厲)로 하면 아무리 효도한 아들과 사랑하는 손자라 하더라도 백세에 고칠 수 없습니다. 한(漢)나라 도태자(悼太子)는 선제(宣帝)의 조부인데 시호를 여(戾)라고 하였으나, 선제로서도 그것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신하로서 이미 내린 시호를 받고서 다시 고칠 수 있겠습니까?”
정양군(定陽君) 이순(李淳)
정도(丁悼) 述事不弟丁 年中早夭悼 임영대군 아들
일을 행하면서 공손하지 아니한 것을 정(丁)이라 하고,
나이 중년(中年)에 일찍 죽은 것을 도(悼)라 한다.
사산군(蛇山君) 이호(李灝)
정도(玎悼) 逑義不勉玎 中年早夭悼 義昌君 아들
의를 하는데 힘쓰지 않은 것이 ‘정(玎)’이고,
중년(中年)에 일찍 죽은 것을 ‘도(悼)’라고 한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호(灝)의 어머니 김씨(金氏)가 막내딸 신종호(申從濩)의 아내를 사랑하여 값진 보물을 많이 주니, 호가 이를 미워하여 신종호를 구타하고자 하므로, 신종호가 늘 피하였다.” 하였다.
이염의(李念義) 아산(牙山)
호려(胡戾) 彌年壽考胡 不悔前過戾 지중추부사. 세조의 동서
오래 수(壽)하는 것이 호(胡)이고
전의 허물을 뉘우치지 아니하는 것이 여(戾)이다
김여석(金礪石) 광산(光山) 공목(恭繆)
不懈于位恭 名與實爽繆 형조판서
게을리 하지 않고 지위를 구한 것을 공(恭)이라 하고,
이름이 실속과 다른 것을 목(繆)이라 한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여석은 젊어서부터 총혜(聰慧)하여 사후(伺候)를 잘하고 청탁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세상의 명예를 곡진히 꾀하여 승낙한 일의 시행을 지체하지 않았다. 일찍이 병조 좌랑(兵曹佐郞)이었을 때에는 남의 뜻을 따르기를 힘써 얼른 들어주지 않는 일이 없었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드디어 재능이 있다는 이름이 있어, 화요(華要)한 벼슬을 지내고 고현(高顯)한 지위에 갑자기 올랐다.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였으며, 임금의 뜻을 잘 헤아려 알아서 이리저리 잘 적응하여 은우(恩遇)를 바랐다. 늘 서간을 쓰되 나는 듯이 붓을 휘둘러 잠시 사이에 수십 장을 써서 사리(私利)를 꾀하였다. 남의 질병이나 상조(喪弔)를 당하면 반드시 다 친히 갔으므로, 붙좇는 자가 많았다. 무릇 남에게 요구하매 응하지 않으면 곧 화를 냈다. 집이 대대로 가난하고 검소하였으나, 갑자기 부유(富裕)해졌다. 평소에는 거마(車馬)가 거리를 메웠으나, 졸(卒)하자 문에 조객(弔客)이 없었다.” 하였다.
정현조(鄭顯祖) / 편정(褊玎)
본관은 하동(河東). 영의정 인지(麟趾)의 아들이다.
1455년(세조 1) 세조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혼인하여 하성위(河城尉)에 봉하여졌고, 1466년 1월 의빈부의빈(儀賓府儀賓)이 되었으며, 1467년 10월 하성군(河城君)으로 개봉되었다.
이듬해 온양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부마로서 과거에 응시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1468년(예종 즉위) 10월 남이(南怡)의 옥사에 공헌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고 수록대부 하성군에 봉하여졌으며, 1471년(성종 2) 3월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전명(傳命)에 능하여 세조의 《경국대전》 찬정(撰定)에 공헌한 바 있으나, 만년에는 작첩(作妾)과 불교를 너무 숭상한 것 때문에 대간으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편정(褊玎)이다.
선조실록 6년(1573 계유 / 명 만력(萬曆) 1년) 11월 26일(임인)
노진(盧禛)·김성일(金誠一)이 나아가 행장(行狀)을 기다리지 말고 이황(李滉)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기를 계청하였고, 노수신(盧守愼)과 특진관(特進官)·참찬관(參贊官) 이하는 다 행장을 가져다 본 뒤에 시호를 내리기를 바랐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명현(名賢)의 행장은 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유(先儒) 주자(朱子)의 행장은 수십년토록 오래 기다렸고, 이천(伊川)은 문인(門人)·고제(高弟)가 다 먼저 죽었으므로 끝내 감히 지은 자가 없었으니, 그 어렵기가 이와 같습니다. 대현(大賢)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상규(常規)에 얽매여서는 안 되니, 어찌 행장이 없다 하여 정(程) 주(朱)의 시호를 내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빨리 시호를 내리고 싶지만 전에 없던 예(例)를 시작하여 뒤 폐단을 열 수는 없다.”
하였다. 김성일이 인하여 이황의 바른 학문과 높은 조예를 말하고, 김우옹도 그 학문은 우리 동방에 한 사람뿐이라고 말하였다
선조 7년(1574 갑술 / 명 만력(萬曆) 2년) 7월 16일(무자)
응교 정탁(鄭琢)이 서면(書面)으로 퇴계(退溪)·한훤(寒暄)·일두(一蠹) 세 선생의 의정(擬定)한 시호(諡號)에 대해 합당한지 여부를 물으므로, 유희춘이 답하였다.
“세 선생의 시호를 의정(擬定)한 것은 이의할 것이 없습니다.
숙종 34년(1708 무자 / 청 강희(康熙) 47년) 7월 22일(병신) 2
김종직의 시호를 회복하기를 예조에서 상소하자 윤허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기사년14429) 정월에 영의정(領議政) 김수흥(金壽興)이 고(故) 판서(判書) 김종직(金宗直)의 시호(諡號)를 정하고 직위(職位)를 추증(追贈)하는 일로써 진백(陳白)하여 임금으로부터 상고하여 품처(稟處)하라는 일로 명령을 내린 자가 이제 20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렀는데도, 아직까지 복계(覆啓)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중간의 곡절(曲折)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없지마는, 대저 김종직의 처음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는데, 뒤에 문간(文簡)으로써 고치었습니다. 그 연대가 매우 멀어서 또한 상고할 만한 문자(文字)가 없으니, 그 중간의 사실(事實)은 비록 상세히 알 수 없지마는, 대신(大臣)이 계달한 것으로써 살펴본다면 또한 변별(辨別)할 만한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대개 이원(李黿)은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의논한 사람으로서, 연산조(燕山朝)에 좌죄(坐罪)되어 곽산(郭山)으로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이르러서는 이원까지 가죄(加罪)를 받게 되었으니, 문충(文忠)을 문간(文簡)으로 고친 일은 그 사이에 있었다고 상상(想像)됩니다. 중종(中宗)께서 정국(靖國)하는 데 미쳐서는 제일 먼저 김종직의 원한(寃恨)을 씻어 이미 그 관직(官職)을 회복시켰으며, 또 그의 아내에게 녹미(祿米)를 주고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였으니, 문충(文忠)의 복시(復諡)도 마땅히 그 때에 있었어야 할 것인데도 아들이 어리고 화란(禍亂)이 겨우 진정(鎭定)되자, 원통함을 호소하여서 복시(復諡)를 청할 수 없어 적요(寂寥)하게 수백 년이 지나도록 이제까지 복시(復諡)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충의(忠義)의 선비가 개석(慨惜)하고 억울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청컨대 지난날 대신(大臣)의 진청(陳請)에 의하여 그 시호를 회복할 것을 윤허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까지 천취(遷就 : 시일이 지체됨)된 것은 진실로 매우 미안하니 즉시 복시(復諡)하라.”
동 8월
고(故) 판서(判書) 김종직(金宗直)의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으로 고치어 내려 주었다.
고종 4년(1867 정묘 / 청 동치(同治) 6년) 4월 29일(임자)
우의정 유후조가 임금이 학문에 힘쓰는 데 대하여 진술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가 임금이 학문에 힘쓰는 데 대하여 진술하고 나서 아뢰기를,
“고(故) 부제학(副提學) 이준(李埈)은 신의 선조인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을 스승으로 섬겨서, 독실하게 배우고 실천한 것은 연원이 있는 바였고 충성스러운 말과 훌륭한 계책들은 간책(簡策)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대개 선조(宣祖)와 인조(仁祖)의 융성한 시대를 만나 우뚝하게 한 시대의 명신이 되었는데, 영남(嶺南)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높은 덕과 훌륭한 행실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 감역관(監役官) 이익(李瀷)은 학문이 천인(天人)을 꿰뚫고 식견이 고금(古今)의 것을 다 통달하여 실천함에 조예가 있고 경술과 문장에 뛰어났으니 실로 당대의 대유(大儒)였습니다. 영조(英祖)의 융성하던 때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으로 천거되어 제수를 받았으나 나오지 않고 물러가서 책을 저술하여 뒷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었고, 바야흐로 서양 책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편파적이고 불순함을 통렬하게 논변하고 원류를 파헤쳐 논하였습니다. 바른 학문과 밝은 식견으로 사학(邪學)을 배척하고 막아내는 데 큰 공로가 있었는데 아직까지 표창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이라 할 것입니다.
좌참찬(左參贊)의 벼슬을 추증한 안정복(安鼎福)은 바로 이익의 훌륭한 제자입니다. 학문이 순수하고 바르며 실천이 독실하여 계방(桂坊)으로서 서연(書筵)에 나갔는데 정조(正祖)는 일찍이 그를 칭찬하여 여러 번 고문(顧問)으로 두었습니다. 갑진년(1784)에 이르러 서양 책이 한번 나타나서 점점 그에 물들게 되는 폐단이 있게 되자 《천학고(天學考)》·《천학혹문(天學或問)》 등의 책을 지어서 엄한 말로 변론하여 배척하였습니다. 순조(純祖) 신유년(1801)에 대간(臺諫)에서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특별히 좌참찬의 벼슬을 추증하였는데, 대개 그가 크게 열어 놓은 공로는 스승에게서 전하여 받은 것으로 세상의 교화를 위하여 도움을 준 것이 많습니다.
이준(李埈)·이익(李瀷)에게 특별히 정경(正卿)의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주는 은전을 베푸는 동시에 안정복도 그와 함께 시호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성호 이익은 고종 4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장을 성재 허전(許傳)이 지었는데 결국 시호를 받지 못했다.
고종 8년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였다.
증 이조 판서 임훈(林薰 갈천)은 효간공(孝簡公)으로, 증 이조 판서 이민환(李民寏 자암)은 충간공(忠簡公)으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 삼봉)은 문헌공(文憲公)으로, 증 좌참찬(證左參贊) 안정복(安鼎福 순암)은 문숙공(文肅公)으로, 증 이조 판서 김숙자(金叔滋 강호)는 문강공(文康公)으로, 증 좌찬성 최현(崔俔 인재)은 정간공(定簡公)으로, 증 이조 판서 이노(李魯 송암)는 정의공(貞義公)으로, 증 이조 판서 이준(李埈 창석)은 문간공(文簡公)으로,증 영의정 이원정(李元禎 귀암)은 문익공(文翼公)으로, 증 이조 판서 송희규(宋希奎 야계)는 충숙공(忠肅公)으로, 이조 판서 이현일(李玄逸 갈암)은 문경공(文敬公)
예) 인물의 졸년과 시호가 내려진 해
이 색(李 穡) 1328년(충숙왕 15)~1396년(태조 5) 1396(태조 5) 文靖 당년
정몽주(鄭夢周)1337년충숙왕 복위 6)~1392년(공양왕 4) 1401(태종 1) 文忠 9년뒤
정도전(鄭道傳) 1342년(충혜왕 복위 3)∼1398년(태조 7)1871(고종 8년) 문헌(文憲)473년뒤
권 근(權 近) 1352년(공민왕 1)~ 1409년(태종 9) 1409(태종 9) 文忠 당년
김종직(金宗直) 1431년(세종 13)~1492년(성종 23) 1493(성종 24) 文忠
1494(성종 25)文簡으로개시 사화로 박탈. 1708(숙종 34) 文忠으로 복시
권 벌(權 橃) 1478년(성종 9)~ 1548년(명종 3) 1571(선조 4) 忠定 23년
이언적(李彥迪) 1491년(성종 22)~1553년(명종 8) 1569(선조 2) 文元 16년
이 해(李 瀣) 1496년(연산군 2)~1550년(명종 5) 1784(정조 8) 貞愍 234년뒤
이 황(李 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 1576(선조 9) 文純 6년 뒤
조 식(曺 植) 1501년(연산군 7)∼1572년(선조 5) 1615년(광해군 7) 文貞 42년
구봉령(具鳳齡) 1526년(중종 21)~1586년(선조 19) 1841(헌종 7) 文端 255년
정 탁(鄭 琢) 1526년(중종 21)~1605년(선조 38) 1635(인조 13)貞簡 30년
이 이(李 珥)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 1624(인조 2) 文成 40년
김성일(金誠一) 1538년(중종 33)~1593년(선조 26) 1679(숙종 5) 文忠 86년
류성룡(柳成龍) 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 1629(인조 7) 文忠 22년
정 구(鄭 逑) 1543년(중종 38)~1620년(광해군 12) 1625(인조 3) 文穆 5년
1678(숙종 4) 시주 개시
장현광(張顯光) 1554년(명종 9)~ 1637년(인조 15) 1657(효종 8) 文康 20년
허 목(許 穆)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1692(숙종 18) 文正 10년
김장생(金長生) 1548년(명종 3)~ 1631년(인조 9) 1657(효종 8) 文元 26년
송시열(宋時烈)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1695(숙종 21) 文正 6년
이현일(李玄逸) 1627년(인조 5)~1704년(숙종 30) 1871(고종 8) 文敬 167년
윤 증(尹 拯) 1629년(인조 7)~1714년(숙종 40) 1723(경종 3) 文成 9년
남이(南怡) 1441년(세종 23)∼1468년(예종 즉위). 충무(忠武) 순종 3년(1910)
연시연(延諡宴)
조상에게 내린 시호(諡號)를 받고서 경축하기 위해 여는 잔치이다
선시관(宣諡官)이 시호(諡號)를 받들고 나오면 그 본가(本家)에서 시호를 받는 이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나와서 의식(儀式)을 행하고 맞아들이는 일.
승정원일기 정조 9년 1월 27일
傳敎曰, 昨年因嶺儒疏請, 故大司憲李瀣贈謚事, 特命許施, 宣謚日, 使之致祭於先正文純公李滉。予意蓋欲賜謚·賜祭, 竝設於同日, 近聞承宣言, 祭文有新撰之命, 主家因此不得延謚云, 故俄以撰置之祭文, 使卽正書, 仍令從近賜祭矣。
정조대왕이 친히 지은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치제문
생각건대 교남(嶠南)은 / 維嶠以南
숙기가 가득 성대하니 / 淑氣磅礴
땅은 추로를 열었고 / 地闢鄒魯
풍속은 민락에 비기네 / 俗比閩洛
우뚝 대현을 낳아서 / 挺生大賢
우리 도를 크게 떨치게 하니 / 丕闡吾道
자품은 중정을 받았고 / 姿稟中正
뜻은 순백(純白)을 당겼다네 / 志挽淳皞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규범을 따르고 / 程規朱範
학식이 바다처럼 넓고 땅처럼 두터웠으니 / 海涵地負
왕정을 보필함이 / 羽儀王庭
구슬과 같은 훌륭한 기량이었네 / 玉珮瓊玖
도산에서 자신을 감추어 / 卷懷陶山
좌우로 도서를 갖추고 기거하면서 / 左右墳籍
사단 칠정(四端七情)의 깊은 이치를 밝히니 / 蘊發四七
그 공효가 천백 대에 베풀어졌네 / 功施千百
나의 몽매함을 깨우쳐 주니 / 牖我昧蒙
알맞은 비에 초목이 자라는 듯 / 時雨其化
사방에서는 덕을 우러렀고 / 四方仰德
일역(一域)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았네 / 一域親炙
집집마다 효제(孝弟)를 행하고 / 家孝戶弟
학교에선 현송(絃誦)을 일삼으니 / 塾誦黌絃
유풍이 사람을 흥기시킴에 / 遺風起人
높은 사당에 제기가 정연하네 / 巋祠秩籩
내가 전형을 생각하며 / 予懷典刑
자나 깨나 순유를 잊지 못하여 / 寤寐純儒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의 소차(疏箚)를 자세히 살피고 / 箚玩六條
성학십도(聖學十圖) 병풍을 걸었다네 / 屛揭十圖
도산도(陶山圖)를 그려 사모의 정성을 깃들이고 / 繪居寓慕
제사를 드리게 하여 감탄을 일으키니 / 致酹興吁
어디에서 얻었던가 / 於何得來
어두운 길에서 촛불을 잡아 밝혔도다 / 秉燭昏衢
백씨(伯氏)가 나란히 아름다웠음이여 / 伯兮聯芳
태상에서 시호를 내려 / 太常節惠
한 가문에 아울러 높으니 / 一門竝峙
대대로 또한 드러나지 않을쏜가 / 不顯亦世
일이 마치 오늘을 기다린 듯함에 / 事若徯今
실로 광세의 감회가 있나니 / 感實曠昔
경의 혼령이 통하지 않음이 없다면 / 卿靈如水
멀리 드리는 잔을 흠향하기 바라네 / 庶歆泂酌
현종 4년(1663 계묘 / 청 강희(康熙) 2년) 9월 13일(정축) 1번째기사
시호: 충민(忠敏) 危身奉上曰忠 應事有功曰敏
충익(忠翼) 危身奉上曰忠. 思慮深遠曰翼 현종 4년 改諡
유중이 아뢰기를,
“듣건대 서천 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에 대한 시호(諡號)를 장차 연회를 베풀고서 맞이하려 하는데 자손들이 빈천하여 어떻게 모양을 이룰 길이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지급하게 하는 한편 일등(一等)의 악(樂)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주) 일등악: 기로연(耆老宴)·영친연(榮親宴) 등에 임금이 정재(呈才)·여기(女妓)·악공(樂工) 등을 보내는 것을 사악(賜樂)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4등급이 있음. 그 중에서 악사(樂師) 1인, 여기 20인, 악공 10인을 내리는 것을 일등악이라 함.
숙종 7년(1681 신유 / 청 강희(康熙) 20년) 12월 12일(신묘)
고(故)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집안에서 장차 연시(延諡)하려 하니, 임금이 잔칫날 내외(內外)에 선온(宣醞)과 1등악(一等樂)을 내리도록 명하고, 그날에 삼공(三公)과 원임(原任) 이하는 모두 잔치에 나가도록 명하였다.
이조(吏曹)에서 그의 아들 김석달(金錫達)을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임명하였다.
영조 46년(1770 경인 / 청 건륭(乾隆) 35년) 4월 23일(경오)
예조 판서 한광회(韓光會)가 아뢰기를,
“단종조(端宗朝)의 6신(六臣)은 일찍이 무인년(1698 숙종 24)에 증직(贈職)·증시(贈諡)되었으나 박팽년(朴彭年) 집 외에는 모두 시호(諡號)를 내리지 못하고, 시호와 관교(官敎 교지)를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에 보내 안치(安置)시켰습니다. 하위지(河緯地)의 봉사손(奉祀孫)이 관직에 제수된 자가 있어 이제 연시(延諡)하고자 하나, 관교가 영월에 있어 거행하기 어렵습니다.”
순조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1월 22일(병신)
제말(諸沫) 미상∼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장. 고성(固城) 출신.
시호: 충의(忠毅) 臨亂不忘國曰忠。致果殺敵曰毅。정조 16년(1792) 증시
제경욱은 가난하여 힘이 없어 그 선조 제말(諸沫)의 연시(延諡)를 아직까지 하지 못해 한을 안은 채 죽었다고 하니, 이조로 하여금 즉시 시호를 내리게 하고, 호조에서는 연시의 비용을 도아주게 하여, 장사지내기 전에 그 눈을 채 감지 못한 한을 위로하게 하소서.”
같은 시호에 시주가 다른 예
문충(文忠) (68)
류성룡(柳成龍) 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공작(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관직: 한림. 옥당. 호당. 도승지. 감사. 대제학. 예조. 병조. 이조판서. 영의정
시호: 문충(文忠) 道德博聞曰文。危身奉上曰忠 1629(인조 7)
도와 덕이 높고 견문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
*김종직(金宗直) 1431년(세종 13)∼1492년(성종 2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밀양 출신.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
관직: 문과급제. 한림. 옥당. 선산부사. 승지. 이조참판· 양관제학. 병조. 형조판서
시호: 문충(文忠). 道德博文曰文. 廉方公正曰忠 1493(성종 24)
도와 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하고 공정(公正)한 것을 충(忠)이라 한다.
*서거정(徐居正)1420년(세종 2)∼1488년(성종 19).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호조전서(戶曹典書) 의(義)의 증손으로, 목사(牧使) 미성(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최항(崔恒)이 그의 자형(姉兄)이다.
관직: 문과에 네번급제. 옥당. 대제학. 한성판윤. 형조. 병조. 이조판서. 우. 좌찬성
시호: 시호: 문충(文忠) 博聞多見曰文, 事君盡節曰 忠 1488(성종 19)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임금을 섬기는 데에 절의를 다한 것을 충(忠)이라 한다
이원익(李元翼) 1547년(명종 2)∼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치(袳)의 4세손으로, 억재(億載)의 아들이다.
관직: 문과급제. 옥당. 도승지. 예조. 이조판서. 우의정 겸 4도체찰사. 영의정
시호: 문충(文忠) 忠信接禮曰文。危身奉上曰忠。1651(효종 2)
충신(忠信)하고 예로써 사람을 대접(待接)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
*김 류(金 瑬) 1571년(선조 4)∼1648년(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아버지는 증영의정 여물(汝岉)
관직: 문과급제. 대제학. 병조, 이조판서. 삼정승.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시호: 문충(文忠) 勤學好問曰文 危身奉上曰忠 1648(인조 26)
*김수항(金壽恒) 1629년(인조 7)∼1689년(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조부는 좌의정 상헌(尙憲),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광찬(光燦)이다.
관직: 문과장원급제. 옥당. 호당. 도승지. 6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시호: 문충(文忠) 勤學好問曰文。廉方公正曰忠 1725(영조 1)
*김재찬(金載瓚) 1746년(영조 22)∼1827년(순조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보(國寶), 호는 해석(海石). 아버지는 영의정 익(熤)이다.
관직: 문과급제. 한림. 강원감사. 대사헌. 이조. 예조. 병조. 형조판서. 우. 좌. 영의정
시호: 문충(文忠) 勤學好問曰文。事君盡節曰忠。순조 27년(1827) 증시
*김종수(金鍾秀) 1728년(영조 4)∼1799년(정조 23).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정부(定夫), 호는 진솔(眞率) 또는 몽오(夢梧). 서울 출신.
우의정 구(構)의 증손자이고, 시직(侍直) 치만(致萬)의 아들.
관직: 문과급제. 옥당. 승지. 경기. 평안감사. 이조판서·병조판서. 대제학. 우. 좌의정
시호: 문충(文忠) 敏而好學曰文。事君盡節曰忠
행동이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 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임금을 섬기는 데에 절의를 다한 것을 충(忠)이라 한다.
*민정중(閔鼎重) 1628년(인조 6)∼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강원도관찰사 광훈(光勳)의 아들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관직: 문과장원급제. 옥당. 승지. 함경감사. 이조·호조·공조판서. 한성판윤. 영의정
시호: 문충(文忠) 敏而好學曰文。廉方公正曰忠。숙종 20년(1694) 증시
*박순(朴淳) 1523년(중종 18)∼1589년(선조 22).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우윤(右尹) 우(祐)의 아들이며, 목사 상(祥)의 조카. 퇴계 문인
관직: 문과 장원급제.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영의정.
시호: 문충(文忠) 勤學好問曰文 推賢盡忠曰忠 1643(인조 21)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하고
어진사람을 추대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
*송병선(宋秉璿) 1836년(헌종 2)∼1905년. 조선 말기의 문인·순국지사.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연재(淵齋).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
관직: 태릉참봉. 시강원자의. 대사헌
시호: 문충(文忠) 道德博聞曰文。慮國忘家曰忠 1906(고종 43)
이재순(李載純) 1851년(철종 2)∼1904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일(德一). 증조부는 은언군(恩彦君) 인(䄄)이며 조부는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광(㼅)이고 외조부는 안동김씨인 김재협(金在協)이며, 왕족인 휘응(徽應)의 아들로 영평군(永平君) 경응(景應)에게 입양되었다
관직: 문과급제. 옥당. 대사헌. 예조판서. 형조판서. 궁내부대신
시호: 문충(文忠) 敏而好學曰文 危身奉上曰忠 1904년(고종 41) 증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년(인종 1)∼1598년(선조 31). 조선 중기의 명장.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수림(守琳)의 딸이다.
관직: 무과급제. 선전관.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수사. 삼도수군통제사
시호: 충무(忠武) 危身奉上曰忠。折衝禦侮曰武。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 것을 무(武)라고 한다.
정충신(鄭忠信) 1576년(선조 9)∼1636년(인조 14).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고려 명장 지(地)의 9대손으로 금천군(錦川君) 윤(綸)의 아들이다.
관직: 무과급제. 안주목사. 팔도부원수. 포도대장. 경상병사. 판의금부사
시호: 충무(忠武) 危身奉上曰忠 克定禍亂曰武
화란(禍亂)을 이기어 평정한 것을 무(武)라고 한다.
남이(南怡) 1441년(세종 23)∼1468년(예종 즉위).
본관은 의령. 태종의 부마 휘(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 : 태종의 4녀)의 손자로,
아버지는 군수 빈(份)이며,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딸이다.
관직: 무과장원. 공조판서. 병조판서. 의산군(宜山君)
시호: 충무(忠武) 臨患不忘國曰忠 折衝禦侮曰武 순종 3년(1910)
환란을 맞이하여 나라를 잊지 않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시호의 종류 736종
()의 숫자는 시호를 받은 사람의 수 (미확정)
간숙(簡肅) (1) 간평(簡平) (1) 간헌(簡憲) (4) 강도(剛悼) (1) 강렬(剛烈) (2)
강무(剛武) (1) 강민(剛愍) (2) 강양(剛襄) (1) 강의(剛義) (1) 강장(剛莊) (1)
강정(剛靖) (1) 강경(康敬) (2) 강소(康昭) (1) 강순(康順) ( 1) 강안(康安) (1)
강양(康襄) (1) 강의(康懿) (1) 강이(康夷) (2) 강정(康靖) (1) 강정(康定) (1)
강평(康平) (2) 강호(康胡) (1) 강회(康懷) (2) 개숙(凱肅) (1) 개절(介節) (1) 25
경간(景簡) (1) 경렬(景烈) (3) 경목(景穆) (1) 경무(景武) (4) 경문(景文) (2)
경민(景愍) (1) 경민(景敏) (1) 경성(景成) (1) 경숙(景肅) (4) 경안(景安) (2)
경양(景襄) (1) 경의(景毅) (2) 경의(景懿) (1) 경절(景節) (2) 경정(景靖) (1)
경정(景貞) (1) 경질(景質) (2) 경평(景平) (1) 경헌(景憲) (7) 경헌(景獻) (4)
경혜(景惠) (3) 경희(景僖) (1) 경강(敬剛) (1) 경렬(敬烈) (4) 경숙(敬肅) (2)
경안(敬安) (2) 경원(敬元) (1) 경절(敬節) (2) 경정(敬靖) (1) 경평(敬平) (1)
경헌(敬獻) (1) 경헌(敬憲) (3) 경호(敬胡) (1) 경효(敬孝) (2) 34
공간(恭簡) (17)공경(恭頃) (1) 공대(恭戴) (1) 공도(恭度) (4) 공도(恭悼) (2)
공목(恭穆) (2) 공무(恭武) (5) 공민(恭敏) (1) 공소(恭昭) (6) 공숙(恭肅) (11)
공순(恭順) (1) 공안(恭安) (6) 공양(恭襄) (4) 공양(恭良) (1) 공의(恭懿) (1)
공장(恭莊) (1) 공장(恭長) (1) 공절(恭節) (2) 공정(恭靖) (2) 공편(恭編) (1)
공평(恭平) (3) 공헌(恭憲) (1) 공혜(恭惠) (2) 공호(恭胡) (2) 공화(恭華) (1)
공회(恭懷) (1) 공효(恭孝) (1) 공후(恭厚) (1) 공희(恭僖) (4) 과려(夸厲) (1)
관정(寬靖) (1) 공경(恭景) (1)
광절(光節) (1) 광정(光正) (1) 광빈(匡彬) (1) 광숙(匡肅) (1) 광위(匡衛) (1)
광익(匡益) (1) 광렬(匡烈) (1) 광정(匡定) (2) 광정(匡靖) (2) 광헌(匡獻) (1)
극익(克翼) (1) 근무(勤武) (1) 기열(祁烈) (1) 광정(光正) (1) 46
단민(端敏) (1) 대경(戴敬) (1) 대민(戴敏) (2) 대숙(戴肅) (1) 대장(戴莊) (1)
도열(度烈) (1) 도효(悼孝) (1) 돈희(敦僖) (1) 8
명숙(明肅) (1) 명헌(明憲) (1) 무강(武剛) (1) 무강(武康) (1) 무공(武恭) (1)
무민(武愍) (4) 무성(武成) (1) 무숙(武肅) (9) 무양(武襄) (1) 무열(武烈) (4)
무의(武懿) (1) 무의(武毅) (5) 무익(武翼) (1) 무장(武壯) (2) 무절(武節) (2)
무후(武厚) (1) 목성(穆成) (1) 무장(武莊) (1) 18
문각(文恪) (1) 문간(文簡) (83) 문강(文康) (16) 문강(文剛) (3) 문겸(文謙) (1)
문경(文敬) (55) 문경(文景) (25) 문공(文恭) (1) 문광(文匡) (5) 문극(文克) (2)
문단(文端) (5) 문대(文戴) (2) 문도(文度) (8) 문도(文悼) (1) 문량(文良) (11)
문렬(文烈) (10) 문명(文明) (1) 문목(文穆) (16) 문민(文愍)(5) 문민(文敏) (6)
문성(文成) (8) 문숙(文肅)(30) 문숙(文淑) (2) 문순(文純) (6) 문순(文順) (4)
문신(文信) (1) 문신(文愼) (1) 문안(文安) (14) 문양(文襄)(5) 문양(文良) (3)
문영(文英) (6) 문온(文溫) (5) 문원(文元) (5) 문의(文懿) (12) 문의(文毅) (2)
문익(文翼) (23)문인(文仁) (1) 문장(文莊) (10) 문장(文長) (3) 문절(文節)(18)
문정(文貞) (95)문정(文正) (21)문정(文靖) (56) 문정(文定) (9) 문제(文齊) (2)
문종(文宗) (1) 문진(文眞) (2) 문질(文質) (1) 문창(文昌) (1) 문청(文淸) (13)
문충(文忠) (68)문탄(文坦) (1) 문탄(聞灘) (1) 문평(文平) (9) 문헌(文憲) (45)
문헌(文獻) (36) 문현(文顯)(3) 문혜(文惠) (9) 문호(文胡) (1) 문화(文和) (1)
문효(文孝) (17) 문희(文僖)(13) 문양(文陽) (1) 문의(文義) (1) 64
목성(穆成) (1) 민간(敏簡) (1) 민익(敏翼) (1) 민절(敏節) (1) 민휴(敏休) (1)
민충(敏忠) (1) 민희(敏僖) (1) 민숙(愍肅) (1) 민양(愍襄) (1) 민절(愍節) (1)
민혜(敏惠) (1) 봉의(奉義) (1) 12
사간(思簡) (1) 사숙(思肅) (2) 사절(思節) (1) 사정(思靖) (1) 상절(尙節) (1)
상혜(尙惠) (1) 선숙(宣肅) (1) 성도(成悼) (1) 성렬(成烈) (1) 성안(成安) (2)
성정(成靖) (1) 성탁(成度) (1) 세양(世襄) (1) 13
소간(昭簡) (4) 소강(昭剛) (1) 소경(昭頃) (1) 소도(昭度) (1) 소도(昭悼) (3)
소민(昭愍) (2) 소민(昭敏) (1) 소사(昭思) (1) 소안(昭安) (1) 소양(昭襄) (1)
소양(昭養) (1) 소의(昭懿) (2) 소이(昭夷) (2) 소정(昭靖) (3) 소평(昭平) (3)
소회(昭懷) (1) 소효(昭孝) (1) 17
숙간(肅簡) (3) 숙렬(肅烈) (2) 숙민(肅愍) (2) 숙민(肅敏) (3) 숙위(肅魏) (1)
숙의(肅懿) (1) 숙정(肅靖) (1) 숙정(肅定) (1) 숙헌(肅憲) (11) 숙헌(肅獻) (8)
순간(純簡) (1) 순정(純靖) (1) 순공(順恭) (1) 순상(順殤) (1) 순절(順節) (2)
순충(順忠) (1) 순평(順平) (2) 순현(順顯) (1) 신도(信度) (1) 신빈(愼殯) (1) 20
안간(安簡) (3) 안경(安敬) (3) 안도(安悼) (4) 안량(安良) (1) 안무(安武) (2)
안민(安愍) (1) 안성(安成) (1) 안소(安昭) (2) 안숙(安肅) (2) 안양(安襄) (10)
안장(安長) (1) 안정(安靖) (9) 안정(安定) (1) 안정(安貞) (1) 안혜(安惠) (2)
안호(安胡) (1) 안황(安荒) (1) 안효(安孝) (1) 안공(安恭) (1) 19
양간(襄簡) (5) 양경(襄景) (2) 양경(襄頃) (1) 양도(襄度) (1) 양도(襄悼) (1)
양렬(襄烈) (4) 양무(襄武) (9) 양묵(襄墨) (1) 양민(襄敏) (2) 양소(襄昭) (2)
양숙(襄肅) (4) 양안(襄安) (2) 양의(襄毅) (2) 양장(襄莊) (2) 양절(襄節) (1)
양정(襄靖) (14) 양체(襄替) (1) 양평(襄平) (14) 양헌(襄憲) (2) 양혜(襄惠) (6)
양호(襄胡) (7) 양효(襄孝) (2) 양후(襄厚) (2) 양녕(襄寧) (1) 양신(襄愼) (1)
양양(襄良) (1) 양의(襄懿) (1) 양이(襄夷) (2) 양익(襄翼) (1) 양장(襄壯) (1)
양정(襄貞) (1) 양청(襄淸) (1) 양회(襄懷) (1) 양희(襄僖) (1) 34
양간(良簡) (7) 양경(良景) (5) 양경(良敬) (8) 양공(良恭) (1) 양도(良度) (4)
양도(良悼) (1) 양성(良成) (1) 양숙(良淑) (1) 양숙(良肅) (1) 양소(良昭) (1)
양신(良愼) (1) 양안(良安) (2) 양양(良襄) (1) 양의(良毅) (1) 양절(良節) (2)
양정(良靖) (12) 양정(良精) (1) 양평(良平) (6) 양헌(良獻) (1) 양혜(良惠) (2)
양화(良和) (1) 양효(良孝) (5) 양후(良厚) (1) 양혜(養惠) (1) 양희(良僖) (2) 25
여도(戾悼) (1) 열성(烈成) (1) 열직(烈直) (1) 염간(廉簡) (1) 영민(榮敏) (2)
영렬(英烈) (1) 영밀(英密) (1) 영숙(英肅) (1) 영신(榮信) (1) 영양(英良) (1)
영양(榮襄) (1) 영의(英毅) (2) 영익(榮益) (1) 영효(榮孝) (1) 영장(英章) (1)
영정(英靖) (1) 영헌(英憲) (1) 영정(靈靖) (1) 영평(靈平) (1) 영효(靈孝) (1)
영희(榮僖) (3) 예숙(譽肅) (1) 22
온간(溫簡) (1) 온결(溫潔) (1) 온정(溫靖) (1) 원경(元敬) (1) 원숙(元肅) (1)
원정(元靖) (3) 원정(元貞) (1) 원정(元正) (1) 원평(元平) (2) 위숙(魏肅) (1)
위려(威戾) (1) 위양(威襄) (3) 위열(威烈) (2) 위절(威節) (1) 위정(威靜) (1)
위정(威靖) (2) 위평(威平) (1) 은렬(殷烈) (2) 응청(凝淸) (1) 19
의간(毅簡) (1) 의경(毅敬) (1) 의열(毅烈) (1) 의민(毅愍) (6) 의장(毅壯) (1)
의정(毅靖) (1) 의헌(毅憲) (2) 의간(懿簡) (2) 의민(懿愍) (2) 의열(懿烈) (2)
의정(懿貞) (2) 의헌(懿獻) (1)의헌(懿憲) (2) 의회(懿懷) (1) 의민(義愍) (1)
의민(義敏) (1) 의숙(義肅) (1) 의열(義烈) (2) 의정(義貞) (1) 19
이간(夷簡) (2) 이경(夷敬) (1) 이도(夷悼) (1) 이안(夷安) (3) 이정(夷靖) (3)
이평(夷平) (1) 익경(翼景) (1) 익대(翊戴) (1) 익량(翼亮) (1) 익렬(翼烈) (1)
익성(翼成) (1) 익양(翼襄) (1) 익원(翼元) (1) 익위(翼魏) (1) 익정(翼靖) (5)
익정(翼正) (2) 익정(翼貞) (2) 익평(翼平) (5) 익헌(翼獻) (15) 익헌(翼憲) (8)
익혜(翼惠) (2) 익효(翼孝) (3)
인숙(仁肅) (1) 인헌(仁憲) (1) 인혜(仁惠) (1) 인효(仁孝) (1) 26
장민(長敏) (1) 장간(莊簡) (3) 장강(莊剛) (1) 장경(莊敬) (4) 장경(莊景) (2)
장렬(莊烈) (3) 장명(莊明) (1) 장무(莊武) (2) 장민(莊敏) (1) 장민(莊愍) (2)
장숙(莊肅) (4) 장숙(莊淑) (1) 장순(莊順) (1) 장양(莊襄) (9) 장의(莊毅) (2)
장의(莊懿) (1) 장익(莊翼) (1) 장절(莊節) (2) 장정(莊貞) (2) 장정(莊靖) (4)
장평(莊平) (2) 장헌(莊獻) (1) 장헌(莊憲) (1) 장혜(莊惠) (1) 장호(莊胡) (1)
장희(莊僖) (2) 26
장렬(壯烈) (1) 장무(壯武) (1) 장민(壯愍) (1) 장숙(壯肅) (1) 장양(壯襄) (1)
장의(壯毅) (4) 장절(壯節) (2) 장정(壯靖) (1)
장간(章簡) (7) 장경(章敬) (3) 장도(章悼) (1) 장성(章成) (2)장소(章昭) (2)
장순(章順) (3) 장영(章榮) (1) 장위(章威) (1) 장절(章節) (2) 장의(章懿) (2)
장익(章翼) (2) 장평(章平) (1) 장헌(章憲) (3) 장혜(章惠) (2) 장화(章和) (1)
장효(章孝) (1) 적덕(積德) (1) 절민(節愍) (1) 절의(節義) (1) 절효(節孝) (3) 28
정간(靖簡) (13) 정강(靖康) (2) 정목(靖穆) (2) 정무(靖武) (1) 정문(靖文) (1)
정민(靖敏) (3) 정선(靖宣) (2) 정성(靖成) (1) 정숙(靖肅) (3) 정순(靖順) (3)
정안(靖安) (2) 정양(靖襄) (2) 정온(靖溫) (1) 정원(靖元) (1) 정의(靖毅) (3)
정의(靖懿) (2) 정이(靖夷) (1) 정익(靖翼) (6) 정절(靖節) (3) 정정(靖貞) (1)
정청(靖淸) (1) 정평(靖平) (14) 정헌(靖獻) (5) 정헌(靖憲) (13) 정혜(靖惠) (8)
정호(靖胡) (1) 정효(靖孝) (6) 정후(靖厚) (3) 정희(靖僖) (8) 29
정간(貞簡) (57) 정견(貞堅) (1) 정경(貞敬) (4) 정경(貞景) (4) 정도(貞度) (2)
정도(貞悼) (1) 정렬(貞烈) (8) 정목(貞穆) (2) 정무(貞武) (7) 정문(貞文) (2)
정민(貞愍) (11) 정민(貞敏) (18) 정숙(貞肅) (10) 정순(貞順) (1) 정신(貞信) (2)
정신(貞愼) (3) 정양(貞襄) (2) 정의(貞義) (2) 정의(貞毅) (2) 정의(貞懿) (2)
정익(貞翼) (8) 정장(貞莊) (2) 정절(貞節) (7) 정정(貞靖) (7) 정평(貞平) (2)
정헌(貞憲) (12) 정헌(貞獻) (2) 정혜(貞惠) (6) 정효(貞孝) (8) 정희(貞僖) (5) 30
정간(定簡) (2) 정숙(定肅) (1) 정안(定安) (1) 정의(定懿) (2) 정익(定翼) (1)
정평(定平) (1) 정헌(定憲) (3) 정헌(定獻) (4)
정가(正嘉) (1) 정간(正簡) (3) 정문(正文) (1) 정숙(正肅) (1) 정순(正順) (1)
정민(正愍) (1) 정의(正懿) (1) 정장(正莊) (1) 정헌(正憲) (3) 정헌(正獻) (8)
정혜(正惠) (1) 정평(靜平) (1)
정도(丁悼) (1) 정정(丁靖) (1) 정도(玎悼) (1) 28
제간(齊簡) (3) 제대(齊戴) (2) 제도(齊度) (1) 제순(齊順) (1) 제안(齊安) (1)
제정(齊貞) (1) 제정(齊靖) (1) 제의(齊懿) (1) 제평(齊平) (3) 제효(齊孝) (1)
직헌(直憲) (1) 진락(眞樂) (1) 진정(眞靜) (1) 질경(質景) (1) 질량(質良) (1) 15
창화(昌和) (1)
청간(淸簡) (1) 청문(淸文) (1) 청숙(淸肅) (1) 청헌(淸獻) (8) 청헌(淸憲) (3) 6
충간(忠簡) (41) 충강(忠剛) (8) 충강(忠康) (3) 충개(忠介) (1) 충결(忠潔) (1)
충겸(忠謙) (1) 충경(忠敬) (7) 충경(忠景) (21) 충달(忠達) (2) 충도(忠度) (1)
충렬(忠烈) (22) 충목(忠穆) (12) 충무(忠武) (11) 충문(忠文) (15) 충민(忠敏) (4)
충민(忠愍) (32) 충선(忠宣) (4) 충성(忠成) (4) 충소(忠昭) (l) 충숙(忠肅) (36)
충순(忠順) (1) 충순(忠純) (1) 충신(忠愼) (1) 충양(忠襄) (7) 충위(忠魏) (1)
충의(忠懿) (2) 충의(忠毅) (20) 충의(忠義) (1) 충익(忠翼) (25) 충익(忠翊) (1)
충장(忠莊) (11) 충장(忠壯) (32) 충장(忠章) (2) 충절(忠節) (5) 충정(忠正) (17)
충정(忠貞) (47) 충정(忠靖) (25) 충정(忠定) (15) 충질(忠質) (2)충평(忠平) (2)
충헌(忠獻) (17) 충헌(忠憲) (26) 충혜(忠惠) (2) 충현(忠顯) (5) 충효(忠孝) (7) 46
충희(忠僖)(6)
편정(褊玎) (1) 평간(平簡) (8) 평도(平悼) (1) 평도(平度) (2) 평숙(平肅) (1)
평안(平安) (2) 평양(平壤) (1) 평양(平煬) (1) 평익(平翼) (1) 평절(平節) (1)
평정(平靖) (4) 평호(平胡) (2) 평후(平厚) (3) 13
헌간(獻簡) (3) 헌민(獻愍) (2) 헌민(獻敏) (1) 헌의(獻懿) (2) 헌익(獻翼) (1)
헌간(憲簡) (1) 헌무(憲武) (1) 헌민(憲敏) (2) 헌숙(憲肅) (1) 헌정(憲靖) (1)
헌충(憲忠) (1) 헌평(憲平) (2) 12
혜강(惠康) (1) 혜목(惠穆) (1) 혜숙(惠肅) (1) 혜안(惠安) (1) 혜의(惠懿) (1)
혜정(惠靖) (2) 혜정(惠貞) (1) 혜정(惠定) (1) 혜평(惠平) (1) 호간(胡簡) (3)
호강(胡剛) (1) 호려(胡戾) (1) 호목(胡穆) (1) 호무(胡武) (1) 호문(胡文) (1)
호민(胡敏) (1) 호안(胡安) (5) 호양(胡襄) (5) 호위(胡威) (1) 호이(胡夷) (1)
호희(胡僖) (1) 홍문(弘文) (1) 홍유(弘儒) (1) 화신(和信) (1) 화숙(和淑) (1)
화순(和順) (1) 황목(荒繆)(1) 황호(荒胡) (1) 회간(懷簡) (1) 회경(懷敬) (1) 40
효간(孝簡)(18) 효강(孝康) (1) 효강(孝剛) (1) 효경(孝敬) (2) 효경(孝景) (1)
효단(孝端) (1) 효문(孝文) (17) 효민(孝敏) (5) 효민(孝愍) (6) 효성(孝成) (1)
효소(孝昭) (2) 효숙(孝肅) (6) 효안(孝安) (2) 효열(孝烈) (1) 효의(孝毅) (3)
효의(孝懿) (2) 효의(孝義) (2) 효익(孝翼) (2) 효장(孝莊) (1) 효절(孝節) (1)
효정(孝貞) (41) 효정(孝靖) (28) 효정(孝定) (2) 효정(孝正) (1) 효청(孝淸) (1)
효헌(孝憲) (42) 효헌(孝獻) (13) 효희(孝僖) (6) 효희(孝禧) (1) 29
희경(僖景) (1) 희경(僖敬) (1) 희도(僖悼) (1) 희민(僖敏) (2) 희순(僖順) (1)
희안(僖安) (1) 희양(僖襄) (2) 희의(僖懿) (1) 희절(僖節) (1) 희정(僖靖) (8)
희헌(僖憲) (1) 희질(禧質) (1) 희개(熙愷) (1) 13
성씨 관향별 증시 자 수 (미확정)
357개 성관. 2.887명
가평 간씨 (加平 簡氏) 증시자: 1명
금천 강씨 (衿川 姜氏) 증시자: 9명 시주: 1명
진주 강씨 (晋州 姜氏) 증시자: 28명(고려 4). 시주: 15명
곡산 강씨 (谷山 康氏) 신천 강씨(信川 康氏) 증시자: 5명 시주: 2명
영강 강씨 (永康 康氏) 증시자: 1명(고려 1)
청주 경씨 (淸州 慶氏) 증시자: 3명(고려 1)
개성 고씨 (開城 高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장흥 고씨 (長興 高氏) 증시자: 3명 시주: 3명
제주 고씨 (濟州 高氏) 증시자: 4명(고려 2) 시주: 1명
횡성 고씨 (橫城 高氏) 증시자: 1명
창원 공씨 (昌原 孔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연산 공씨 (燕山 龔氏) 증시자: 1명(고려 1)
청주 곽씨 (淸州 郭氏) 증시자: 6명(고려 4) 시주: 1명
현풍 곽씨 (玄風 郭氏) 증시자: 6명(고려 4) 시주: 2명
능성 구씨 (綾城 具氏) 증시자: 17명(고려 1) 시주: 11명
평해 구씨 (平海 丘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안동 권씨 (安東 權氏) 증시자: 60명(고려 11) 시주: 43명
예천 권씨 (醴泉 權氏) 증시자: 2명
본관 미상 증시자; 2명
봉화 금씨 (奉化 琴氏) 증시자: 1명(고려 1)
행주 기씨 (幸州 奇氏) 증시자: 9명(고려 3) 시주: 6명
해평 길씨 (海平 吉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강릉 김씨 (江陵 金氏) 증시자: 16명(고려 6) 시주: 10명
개성 김씨 (開城 金氏) 증시자: 1명(고려 1)
경주 김씨 (慶州 金氏) 증시자: 46명(고려 11) 시주: 31명
광산 김씨 (光山 金氏) 증시자: 62명(고려 16). 시주: 39명
광양 김씨 (光陽 金氏) 증시자: 1명(고려 1)
김녕 김씨 (金寧 金氏) 증시자: 4명 시주: 1명
김해 김씨 (金海 金氏) 증시자: 9명(고려 1) 시주: 7명
낙안 김씨 (樂安 金氏) 증시자: 4명
당악 김씨 (唐岳 金氏) 증시자: 1명
도강 김씨 (道康 金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밀양 김씨 (密陽 金氏) 증시자: 1명
부안 김씨 (扶安 金氏) 증시자: 3명(고려 1) 시주: 1명
상산 김씨 (商山 金氏) 증시자: 8명(고려 3) 시주: 3명
서흥 김씨 (瑞興 金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선산 김씨 (善山 金氏) 증시자: 14명(고려 1) 시주: 11명
순천 김씨 (順天 金氏) 증시자: 4명 시주: 4명
아산 김씨 (牙山 金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안산 김씨 (安山 金氏) 증시자: 7명(고려 4) 시주 3명
안성 김씨 (安城 金氏) 증시자: 1명(고려 1)
양근 김씨 (楊根 金氏) 증시자: 1명(고려 1)
양산 김씨 (梁山 金氏) 증시자: 1명(고려 1)
언양 김씨 (彦陽 金氏) 증시자: 7명(고려 5) 시주: 2명
연안 김씨 (延安 金氏) 증시자: 23명 시주: 16명
예안 김씨 (禮安 金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울산 김씨 (蔚山 金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원주 김씨 (原州 金氏) 증시자: 5명(고려 2) 시주: 3명
의성 김씨 (義城 金氏) 증시자: 13명(고려 6) 시주: 8명
임진 김씨 (臨津 金氏) 증시자; 1명(고려 1)
장연 김씨 (長淵 金氏) 증시자: 1명(고려 1)
전주 김씨 (全州 金氏) 증시자: 2명 (고려 2)
청도 김씨 (淸道 金氏) 증시자: 3명(고려 2) 시주: 1명
청풍 김씨 (淸風 金氏) 증시자: 31명 시장: 31명
본관 미상 고려1명
안동 김씨 (安東 金氏) 증시자: 21명(고려 7)
신안동 김씨 증시자: 54명
나주 나씨 (羅州 羅氏) 증시자: 3명 (고려 1) 시주: 2명
나씨 본관 미상 증시자: 1명(고려 1)
영양 남씨 (英陽 南氏) 증시자: 1명 (신라 1)
의령 남씨 (宜寧 南氏) 증시자: 31명 (고려 2) 시주: 26명
곡산 노씨 (谷山 盧氏) 증시자: 1명 고려(1)
광주 노씨 (光州 盧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교하 노씨 (交河 盧氏) 증시자: 9명 (고려 5) 시주: 3명
의주 노씨 (義州 盧氏) 증시자: 1명 (고려 1)
장연 노씨 (長淵 盧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풍천 노씨 (豊川 盧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목천 마씨 (木川 馬氏) 증시자: 2명 (고려 1)
장흥 마씨 (長興 馬氏) 증시자: 5명 (고려 3) 시주: 2명
신창 맹씨 (新昌 孟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사천 목씨 (泗川 睦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남평 문씨 (南平 文氏) 증시자: 12명(고려 6) 시주: 1명
장연 문씨 (長淵 文氏) 증시자: 1명(고려 1)
정선 문씨 (旌善 文氏) 증시자; 1명(고려 1)
문씨 본관 미상 증시자: 1명
여흥 민씨 (驪興 閔氏) 증시자: 54명 (고려 8) 시주: 40명
고령 박씨 (高靈 朴氏) 증시자: 6명 시장: 6명
고성 박씨 (固城 朴氏) 증시자 1명(고려 1)
면천 박씨 (沔川 朴氏) 증시자: 2명(고려 1) 시주: 1명
무안 박씨 (務安 朴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밀양 박씨 (密陽 朴氏) 증시자: 30명 시주: 20명
반남 박씨 (潘南 朴氏) 증시자: 48명 시주: 46명
상주 박씨 (尙州 朴氏) 증시자: 3명 시주: 3명
순천 박씨 (順天 朴氏) 증시자: 12명 시주: 7명
영해 박씨 (寧海 朴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운봉 박씨 (雲峰 朴氏) 증시자: 3명 시주: 3명
음성 박씨 (陰城 朴氏) 증시자: 2명
의흥 박씨 (義興 朴氏) 증시자 1명
죽산 박씨 (竹山 朴氏) 증시자: 9명(고려 4) 시주: 3명
진원 박씨 (珍原 朴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춘천박씨 (春川 朴氏) 증시자 1명(고려 1)
충주 박씨 (忠州 朴氏) 증시자: 3명 시주: 2명
태인 박씨 (泰仁 朴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평산 박씨 (平山 朴氏) 증시자: 2명(고려 2)
함안 박씨( 咸安 朴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함양 박씨 (咸陽 朴氏) 증시자: 5명(고려 1) 시주: 2명
광주 반씨 (光州 潘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남양 방씨( 南陽 房氏) 증시자: 1명(고려 1)
경주 배씨 (慶州 裵氏) 증시자: 1명(고려 1)
곤양 배씨 (昆山.昆陽裵氏) 증시자: 1명
성 산배씨 (星山 裵氏) 증시자: 3명(고려 1) 시주: 2명
남포 백씨 (藍浦 白氏) 증시자: 3명(고려 3)
수원 백씨 (水原 白氏) 증시자: 8명(고려 4) 시주: 4명
직산 백씨 (稷山 白氏) 증시자: 1명(고려 1)
금성 범씨 (錦城 范氏) 증시자: 1명(고려 1)
밀양 변씨 (密陽 卞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원주 변씨 (原州 邊氏) 증시자: 6명 시주: 5명
황주 변씨 (黃州 邊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면천 복씨 (沔川 卜氏) 증시자: 1명(고려 1)
하음 봉씨 (河陰 奉氏) 증시자: 2명(고려 1) 시주: 1명
하음 봉씨 (河陰 奉氏) 증시자: 2명(고려 1) 시주: 1명
목천 상씨 (木川 尙氏) 증시자: 1명
당성 서씨 (唐城 徐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대구 서씨 (大丘 徐氏) 증시자: 42명(고려 1) 시주: 40명
부여 서씨 (扶餘 徐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연산 서씨 (連山 徐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이천 서씨 (利川 徐氏) 증시자: 6명(고려 3) 시주: 2명
장성 서씨 (長城 徐氏) 증시자; 1명(고려 1)
서씨 본관 미상 증시자: 1명
보성 선씨 (寶城 宣氏) 증시자: 1명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경주 설씨 (慶州 偰氏) 증시자: 3명 시주: 1명
순창 설씨 (淳昌 薛氏) 증시자: 4명(고려 3) 시주 1명
창녕 성씨 (昌寧 成氏) 증시자: 39명(고려 2) 시주: 29명
진주 소씨 (晋州 蘇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평산 소씨 (平山 邵氏) 증시자: 1명(고려 1)
경주 손씨 (慶州 孫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안협 손씨 (安峽 孫氏) 증시자: 1명(고려 1)
일직 손씨 (一直 孫氏) 증시자: 1명(고려 1)
평해 손씨 (平海 孫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김해 송씨 (金海 宋氏) 증시자: 1명(고려)
신평 송씨 (新平 宋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야성 송씨 (冶城 宋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여산 송씨 (礪山 宋氏) 증시자: 18명(고려 5) 시주: 10명
연안 송씨 (延安 宋氏) 증시자: 2명(고려 1) 시주: 1명
은진 송씨 (恩津 宋氏) 증시자: 18명 시주: 17명
진천 송씨 (鎭川 宋氏) 증시자: 3명 시주: 3명
청주 송씨 (淸州 宋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고령 신씨 (高靈 申氏) 증시자: 7명 시주: 4명
은풍 신씨 (殷豊: 풍기) 증시자: 1명 시주: 1명
천안 신씨 (天安 申氏) 증시자: 1명(고려 1)
평산 신씨 (平山 申氏) 증시자: 38명(고려 1) 시주: 37명
영산 신씨 (靈山 辛氏) 증시자: 11명(고려 2) 시주: 7명
신씨(辛氏) 본관미상 증시자: 1명
거창 신씨 (居昌 愼氏) 증시자: 7명(고려 2) 시주: 3명
삼척 심씨 (三陟 沈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청송 심씨 (靑松 沈氏) 증시자: 32명(고려 1) 시주: 25명
공산 안씨 (公山 安氏) 증시자: 1명
광주 안씨 (廣州 安氏) 증시자: 4명 시주: 3명
동주 안씨 (洞州 安氏) 증시자: 1명(고려)
순흥 안씨 (順興 安氏) 증시자: 21명(고려 7) 시주: 10명
안산 안씨 (安山 安氏) 증시자: 1명 증시자: 1명
죽산 안씨 (竹山 安氏) 증시자: 10명(고려 3) 시주: 6명
탐진 안씨 (耽津 安氏: 康津) 증시자: 1명 시주: 1명
남원 양씨 (南原 梁氏) 증시자: 8명(고려 4) 시주: 4명
제주 양씨 (濟州 梁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청주 양씨 (淸州 楊氏) 증시자: 4명(고려 3)
충주 양씨 (忠州 梁氏) 증시자: 1명(고려 1)
충주 어씨 (忠州 魚氏) 증시자: 1명(고려 1)
함종 어씨 (咸從 魚氏) 증시자: 8명 시주: 8명
魚씨본관미상 증시자: 1명(고려1)
영월 엄씨 (寧越 嚴氏) 증시자: 5명(고려 1) 시주: 4명
함양 여씨 (咸陽 呂氏) 증시자: 5명 시주: 4명
곡산 연씨 (谷山 延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파주 염씨 (坡州 廉氏) 증시자: 3명(고려 3)
나주 오씨 (羅州 吳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동복 오씨 (同福 吳氏) 증시자: 8명(고려 5) 시주: 3명
보성 오씨 (寶城 吳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연일 오씨 (延日 吳氏) 증시자: 1명
영원 오씨 (寧遠 吳氏) 증시자: 1명
해주 오씨 (海州 吳氏) 증시자: 19 명(고려 2) 시주: 17명
흥양 오씨 (興陽 吳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오씨 본관 미상 증시자: 1명(고려)
강릉 왕씨 (江陵 王氏) 증시자: 1명(고려 1)
개성 왕씨 (開城 王氏) 증시자: 32명(고려 32)
청주 왕씨 (淸州 王氏) 증시자: 1명(고려)
해주 왕씨 (海州 王氏) 증시자: 2명(고려 2)
단양 우씨 (丹陽 禹氏) 증시자: 7명(고려 1) 시주: 4명
원주 원씨 (原州 元氏) 증시자: 17명(고려 3) 시주: 12명
강화 위씨 (江華 韋氏) 증시자; 1명(고려 1)
장흥 위씨 (長興 魏氏) 증시자: 1명(고려 1)
고흥 유씨 (高興 柳氏) 증시자: 6명(고려 2명) 시주: 3명
문화 유씨 (文化 柳氏) 증시자: 28명(고려6) 시주: 16명
선산 유씨 (善山 柳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영광 유씨 (靈光 柳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전주 류씨 (全州 柳氏) 증시자: 8명(고려 4) 시주: 4명
진주 류씨 (晋州 柳氏) 증시자: 27명(고려 5) 사주: 18명
정주 류씨( 貞州 柳氏) 증시자: 4명(고려 4)
풍산 류씨 (豊山 柳氏) 증시자: 4명 시주: 4명
유씨 본관 미상 1명
기계 유씨(기계 兪氏) 증시자: 20명 시주: 17명
무안 유씨 (務安兪氏) 증시자: 1명 고려(1)
인동 유씨(仁同 兪氏) 증시자: 1명(고려 1)
兪氏 본관 미상 증시자: 1명
강릉 유씨 (江陵 劉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배천 유씨 (白川 劉氏) 증시자: 1명(고려 1)
劉氏본관 미상 증시자: 2명(고려)
무송 유씨 (茂松 庾氏) 증시자: 3명(고려 3)
기계 윤씨 (杞溪 尹氏) 증시자: 1명(고려 1)
남원 윤씨 (南原 尹氏) 증시자: 13명(고려 1) 시주: 12명
무송 윤씨 (茂松 尹氏) 증시자: 4명(고려 1) 시주: 2명
예천 윤씨 (醴泉 尹氏) 증시자: 1명
칠원 윤씨 (漆原 尹氏) 증시자: 12명(고려 6) 시주: 4명
통진 윤씨 (通津 尹氏) 증시자: 1명 고려(1)
파평 윤씨 (坡平 尹氏) 증시자: 60명(고려 11) 시주: 40명
함안 윤씨 (咸安 尹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해남 윤씨 (海南 尹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해주 윤씨 (海州 尹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해평 윤씨 (海平 尹氏) 증시자: 30명(고려 5) 시주: 24명
행주 은씨 (幸州 殷氏) 증시자: 1명(고려 1)
가평 이씨 (加平 李氏) 증시자: 1명
개성 이씨 (開城 李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경주 이씨 (慶州 李氏) 증시자: 41명 (고려 8) 시주: 24명
고부 이씨 (古阜 李氏) 증시자: 2명(고려 1)
고성 이씨 (固城 李氏) 증시자: 10명(고려 3) 시주: 4명
공주 이씨 (公州 李氏) 증시자: 4명 시주: 3명
광산 이씨 (光山 李氏) 증시자: 2명(고려 1) 시주; 1명
광양 이씨 (光陽 李氏) 증시자: 1명(고려 1)
광주 이씨 (廣州 李氏) 증시자: 20명 시주: 14명
단양 이씨 (丹陽 李氏) 증시자: 3명 시주: 2명
덕산 이씨 (德山 李氏) 증시자 1명
덕수 이씨 (德水 李氏) 증시자: 27명(고려 1) 시주:23명
벽진 이씨 ((碧珍 李氏) 증시자: 10명(고려2) 시주: 8명
봉산 이씨 (鳳山 李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부평 이씨 (富平 李氏) 증시자: 6명(고려 3) 시주: 3명
상주 이씨 (尙州 李氏) 증시자: 1명
서림. 서천 이씨(西林 舒川 李氏) 증시자 1명
성주 이씨 (星州 李氏) 증시자: 17명(고려 4) 시주: 8명
수안 이씨 (遂安 李氏) 증시자: 1명(고려 1)
신평 이씨 (新平 李氏) 증시자: 1명
안성 이씨 (安城 李氏) 증시자: 2명
양산 이씨 (梁山 李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양산 이씨 (陽山 李氏) 증시자: 1명
양성 이씨 (陽城 李氏) 증시자: 5명 시주: 4명
여주 이씨 (驪州 李氏) 증시자: 10명(고려 1) 시주: 8명
예안 이씨 (禮安 李氏) 증시자: 3명 시주: 2명
연안 이씨 (延安 李氏) 증시자: 55명 시주: 53명
영천 이씨 (永川 李氏) 증시자: 8명 시주: 6명
용인 이씨 (龍仁 李氏) 증시자: 22명(고려 13) 시주 9명
우계 이씨 (羽溪 李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우봉 이씨 (牛峰 李氏) 증시자: 13명(고려 2) 시주: 10명
익산 이씨 (益山 李氏) 증시자: 1명(고려 1)
견주 이씨 (見州: 양주(楊州)) 증시자: 1명(고려 1)
인천 이씨 (慶源.仁州) 증시자: 15명(고려 13) 시주: 1명
장수 이씨 (長水 李氏) 증시자: 3명 시주 2명
재령 이씨 (載寧 李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전의 이씨 (全義 李氏) 증시자: 31명(고려 2) 시주 27명
전주 이씨 종실 증시자: 180명 시주 152명
전주 이씨 (全州 李氏) 증시자: 117명 (고려 1) 시주 107명
진보 이씨 (眞寶 李氏) 증시자: 3명 시주 3명
청주 이씨 (淸州 李氏) 증시자: 8명(고려 4) 시주 1명
청해 이씨 (靑海 李氏) 증시자: 5명 시주 4명
평창 이씨 (平昌 李氏) 증시자: 2명
한산 이씨 (韓山 李氏) 증시자: 43명(고려 1) 시주 38명
학성 이씨 (鶴城 李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함안 이씨 (咸安 李氏) 증시자: 3명(고려 2)
함평 이씨 (咸平 李氏) 증시자: 4명 시주 2명
합천 이씨 (陜川 李氏) 증시자: 2명(고려 1) 시주 1명
홍주 이씨 (洪州 李氏) 증시자: 3명 시주 2명
흥양 이씨 (興陽 李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본관 미상 이씨 증시자: 9명(고려 7)
교동 인씨 (喬桐 印氏) 증시자: 1명(고려)
연안 인씨 (延安 印氏) 증시자: 1명(고려 1)
林氏 증시자: 3명
나주 임씨 (羅州 林氏) 증시자: 7명 시주 7명
선산 임씨 (善山 林氏) 증시자: 1명
예천 임씨 (醴泉 林氏) 증시자: 3명(고려 2)
옥구 임씨 (沃溝 林氏) 증시자: 1명(고려 1)
은진 임씨 (恩津 林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진주 임씨( 鎭州 林氏. 鎭川) 증시자: 1명(고려 1
평택 임씨 (平澤 林氏) 증시자: 6명(고려 2) 시주 2명
장흥 임씨 (長興 任氏) 증시자: 5명(고려 5)
풍천 임씨 (豊川 任氏) 증시자: 25명(고려 1) 시주 18명
구례 장씨 (求禮 張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덕수 장씨 (德水 張氏) 증시자 :3명 시주 3명
목천 장씨 (木川 張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안동 장씨 (安東 張氏) 증시자: 3명 시주 1명
인동 장씨 (仁同 張氏) 증시자: 9명 시장 9명
흥덕 장씨 (興德 張氏) 증시자: 1명(고려 1)
흥해 장씨 (興海 張氏) 증시자: 1명(고려 1)
장씨 본관 미상 증시자: 3명
칠원 제씨 (漆原 諸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전씨(全氏) 증시자: 5명(고려 5)
옥천 전씨 (沃川 全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천안 전씨 (天安 全氏) 증시자: 6명(고려 6)
평강 전씨 (平康 全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남양 전씨 (南陽 田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담양 전씨 (潭陽 田氏) 증시자: 1명
경주 정씨 (慶州 鄭氏) 증시자: 4명(고려 1) 시주 2명
곤양 정씨 (昆陽 鄭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광주 정씨 (光州 鄭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금성 정씨 (錦城 鄭氏) 증시자: 2명(고려 1) 시주 1명
나주 정씨 (羅州 鄭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동래 정씨 (東萊 鄭氏) 증시자: 27명 (고려 3) 시주 20명
봉화 정씨 (奉化 鄭氏) 증시자: 3명 시주 2명
삼가 정씨 (三嘉 鄭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서산 정씨 (瑞山 鄭氏) 증시자: 1명(고려 1)
영일 정씨 (迎日 鄭氏) 증시자: 26명(고려 3) 시장:22명
영덕 정씨 (盈德 鄭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온양 정씨 (溫陽 鄭氏) 증시자: 8명(고려 1) 시주 7명
전주 정씨 (全州 鄭氏) 증시자: 1명(고려 1)
진주 정씨 (晋州 鄭氏) 증시자: 10명(고려 3) 시주 6명
청주 정씨 (淸州 鄭氏) 증시자: 10명(고려 3) 시주 6명
초계 정씨 (草溪 鄭氏) 증시자: 9명(고려 3) 시주 4명
하동 정씨 (河東 鄭氏) 증시자: 13명(고려1) 시주 11명
해주 정씨 (海州 鄭氏) 증시자: 7명 시주 5명
鄭氏 본관 미상 증시자: 1명
나주 정씨 (羅州 丁氏) 증시자: 4명 시주 3명
창원 정씨 (昌原 丁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김제 조씨 (金堤 趙氏) 증시자: 1명(고려 1)
배천 조씨 (白川 趙氏) 증시자: 18명(고려10) 시주 5명
순창 조씨 (淳昌 趙氏) 증시자: 4명(고려 3) 시주 1명
양주 조씨 (楊州 趙氏) 증시자: 27명 시주 24명
옥천 조씨 (沃川 趙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임천 조씨 (林川 趙氏) 증시자: 6명 시주 6명
직산 조씨 (稷山 趙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진보 조씨 (眞寶 趙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평양 조씨 (平壤 趙氏) 증시자: 11명(고려 5) 시주 5명
풍양 조씨 (豊壤 趙氏) 증시자: 36명 시주 35명
한양 조씨 (漢陽 趙氏) 증시자: 15명 시주 10명
함안 조씨 (咸安 趙氏) 증시자: 4명 시주 3명
횡성 조씨 (橫城 趙氏) 증시자: 3명(고려 3)
창녕 조씨 (昌寧 曺氏) 증시자: 15명(고려 1) 시주 12명
신안 /능성 주씨 (新安 /綾城 朱氏) 증시: 2명(고려 1)
상주 주씨 (尙州 周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충주 지씨 (忠州 地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복주 진씨 (福州 陳氏) 증시자: 1명(고려 1)
여양 진씨 (驪陽 陳氏) 증시자: 1명
연안 차씨 (延安 車氏) 증시자: 4명(고려 2) 시주 1명
인천 채씨 (仁川 蔡氏) 증시자: 3명 시주 2명
평강 채씨 (平康 蔡氏) 증시자: 8명(고려 4) 시주 4명
강릉 최씨 (江陵 崔氏) 증시자: 5명(고려 2) 시주 2명
강화 최씨 (江華 崔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경주 최씨 (慶州 崔氏) 증시자: 15명(고려 10) 시주 4명
랑주 최씨 (朗州 崔氏) 증시자: 1명
동주 최씨( 東州 崔氏) 증시자: 8명(고려 8)
삭녕 최씨 (朔寧 崔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수성 최씨 (隋城 崔氏) 증시자: 3명(고려 1)
수주(水州: 水原) 최씨(崔氏) 증시자: 4명(고려 4)
수원(水原) 최씨(崔氏) 증시자 1명(고려)
양주 최씨 (楊州 崔氏) 증시자: 1명
영흥 최씨 (永興 崔氏) 증시자: 1명
우봉 최씨 (牛峰 崔氏) 증시자: 4명(고려 4)
의주 최씨 (義州 崔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전주 최씨 (全州 崔氏) 증시자: 22명(고려 8) 시주 11명
직산 최씨 (稷山 崔氏) 증시자: 1명(고려 1)
창원 최씨 (昌原 崔氏) 증시자: 1명(고려 1)
충주 최씨 (忠州 崔氏) 증시자: 2명(고려 1)
탐진 최씨 (耽津 崔氏) 증시자: 1명(고려 1)
통천 최씨 (通川 崔氏) 증시자: 2명 시주 1명
해주 최씨 (海州 崔氏) 증시자: 15명(고려 10) 시주 3명
화순 최씨 (和順 崔氏) 증시자: 2명
황주 최씨 (黃州 崔氏) 증시자: 1명
崔氏 본관 미상 증시자: 1명(고려 1)
광주 탁씨 (光州 卓氏) 증시자: 3명 시주 1명
진주 하씨 (晋州 河氏) 증시자: 7명(고려 1) 시주 6명
가주 한씨 (嘉州 韓氏) 증시자: 1명(고려 1)
곡산 한씨 (谷山 韓氏) 증시자: 2명 시주: 2명
청주 한씨 (淸州 韓氏) 증시자: 56명(고려 7) 시주 36명
강릉 함씨 (江陵 咸氏) 증시자: 1명
김해 허씨 (金海 許氏) 증시자: 3명(고려 1) 시주: 1명
양천 허씨 (陽川 許氏) 증시자: 25명(고려 7) 시주 12명
하양 허씨 (河陽 許氏) 증시자: 4명 시주 4명
창원 현씨 (昌原 玄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진주 형씨(晋州 邢氏) 증시자: 1명(고려 1)
洪氏 증시자: 1명(고려)
개령 홍씨 (開寧 洪氏) 증시자: 1명(고려 1)
남양 홍씨 (南陽 洪氏) 증시자: 65명 고려( 9) 시주 50명
풍산 홍씨 (豊山 洪氏) 증시자; 31명 시주 30명
상주 황씨 (尙州 黃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장수 황씨 (長水 黃氏) 증시자: 10명 시주 9명
우주 황씨 (紆州 黃氏) 증시자: 1명
창원 황씨 (昌原 黃氏) 증시자: 8명(고려 1) 시주 6명
평해 황씨 (平海 黃氏) 증시자: 2명(고려 1)
황주 황씨 (黃州 黃氏) 증시자: 1명(고려 1)
회덕 황씨 (懷德 黃氏) 증시자: 2명 시주2명
본관 미상 황씨 증시자: 1명(고려 1)
영천 황보씨 (永川 皇甫氏) 증시자: 1명 시주 1명
우리나라에서 쓰여 진 시법(시주)
文
道德博聞曰文 도와 덕이 높고 견문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道德博文曰文 도와 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문(文)
博學好文曰文 널리 배운 것이 많고 글 읽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
博學好問曰文 널리 배운 것이 많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
博學多聞曰文 학문을 널리 닦아 견문이 많은 것을 문(文)
勤學好文曰文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
博聞多識曰文 널리 배운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은 것을 문(文)
博問多見曰文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
博聞多見曰文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
博文多見曰文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하고,
勤學好問曰文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하고.
多見博聞曰文 많이 보고 널리 들은 것을 문이라 하고
學勤好問曰文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
敏而好學曰文 행동이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 하는 것을 문(文)
敬直慈惠曰文 공경하고 정직하며 인자하고 은혜로운 것을 문(文)이라
慈惠愛民曰文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문(文)
忠信接禮曰文 충신(忠信)하고 예로써 사람을 대접(待接)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忠信據禮曰文 충성(忠誠)하고 신의(信義)가 있으며 예문(禮文)에 의거한 것이 문(文)
忠信據禮曰文 충성스럽고 믿을 수 있으며 예로써 손님을 대한다
忠信愛人曰文 충성스럽고 믿을 수 있으며 남을 사랑하는 것을 문(文)
剛柔相濟曰文 강직하고 부드러우며 서로도와 주는 것을 문(文)
愍民惠禮曰文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은혜에 경의를 표하다.
修德來遠曰文 덕을 닦고 멀리서 찾아오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忠
危身奉上曰忠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
事君盡節曰忠 임금을 섬기는 데에 절의를 다한 것을 충(忠)이라 하고
盛衰純固曰忠 번성하거나 쇠퇴함에 상관없이 충절을 지키는 것을 충(忠)
慮國忘家曰忠 나라만 걱정하고 집안을 잊는 것을 충(忠)
推賢盡忠曰忠 어진사람을 추대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을 충(忠)
推能盡忠曰忠 능력 있는 사람을 추대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을 충(忠)
廉方公正曰忠 청렴하고 공정(公正)한 것을 충(忠)이라
廉方公平曰忠 청렴하고 방정하며 공정하고 공평한 것을 충(忠)이라
有悔無隱曰忠 스스로 경계하여 근심함이 없는 것을 충(忠)이라
臨亂不忘國曰忠 난세를 맞이하여 나라를 잊지 않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臨難不忘國曰忠 환란을 맞이하여 나라를 잊지 않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臨患不忘國曰忠 환란을 맞이하여 나라를 잊지 않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不事二君曰忠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한 것을 충(忠)이라 하고
慤(각)
表裏如一曰慤 겉과 속이 한 가지로 같은 것을 각(慤)
行見中外曰慤 밖과 가운데로 가서 보는 것을 각(慤)
恪(각)
敬恭官次曰恪
溫恭朝夕曰恪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공손한 것을 각(恪)이라 하고,
威容端嚴曰恪 위용(威容)이 단정하고 엄숙한 것을 각(恪)이라 한다
簡
一德不懈曰簡 덕을 오로지 하여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간(簡)
正直無邪曰簡 바르고 곧으며 사사로움이 없는 것을 간(簡)
正直無私曰簡 바르고 곧으며 사사로움이 없는 것을 간(簡)
正氣無邪曰簡 기운이 곧으며 사악함이 없는 것을 간(簡)
居敬行簡曰簡 공경스럽게 기거하며 행동이 간결한 것을 간(簡)
平易不訾曰簡 화평하고 온순하여 시비가 없는 것을 간(簡)이라한다
平易不懈曰簡 평이(平易)하고, 해이하지 않음을 간(簡)
居敬行簡曰簡 거처를 공경히 하고 행함을 간략하게 한 것을 간(簡)
恭敬行善曰簡 공경(恭敬)하여 선(善)을 행함을 간(簡)
康
淵源流通曰康 근원이 깊어 흐름이 이어지는 것을 강(康)
溫良好樂曰康 따뜻하고 어질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강(康)
溫柔好樂曰康 온공(溫恭) 유화(柔和)하여 화락(和樂)함을 즐기는 것을 강(康)
溫柔和樂曰康 온유(溫柔)하고 화락(和樂)한 것을 강(康)
安樂撫民曰康 평안하고 즐거워하며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을 강(康)
安樂治民曰康 평안하고 즐거워하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을 강(康)
令民安樂曰康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하고 즐겁게 하는 것을 강(康)
信柔好樂曰康 진실로 유순하여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이 강(康)
剛
守義不屈曰剛 옳은 것을 지키고 굴복하지 않는 것을 강(剛)
强毅果敢曰剛 굳세고 과감(果敢)한 것을 강(剛)
致果殺敵曰剛 용감하게 행동하여 적을 죽이는 것을 강(剛)
强而能斷曰剛 강직하게 잘 결단하는 것을 강(剛)이라하고
追補前過曰剛 전의 허물을 추후(追後)하여 고치는 것을 강(剛)
執心決斷曰剛 마음을 굳게 가져 결단성 있는 것을 강(剛)
敬
夙夜警戒曰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경계(警戒)한 것을 경(敬)
夙夜儆戒曰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경계(警戒)한 것을 경(敬)
夙夜恭事曰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봉사(奉事)함을 경(敬)
夙興恭事曰敬 일찍 일어나서 일을 공경하게 하는 것이 경(敬)
令善典法曰敬 훌륭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을 경(敬)
善合法度曰敬 훌륭하고 법도에 맞게 하는 것을 경(敬)
善合法典曰敬 훌륭하고 법전에 맞게 하는 것을 경(敬)
儆戒不怠曰敬 경계(警戒)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경(敬)
景
由義而濟曰景 의(義)로 말미암아 일을 이룬 것을 경(景)
由義以齊曰景
由義而制曰景 의(義)에 의하여 절제(節制)함이 경(景)
守義不屈曰景 의를 지켜 굴복하지 않는 것을 경(景)
布德行剛曰景 덕을 널리 행하고 강직하게 행동하는 것을 경(景)
布義行剛曰景 의(義)를 펴고 곧은 일을 행하는 것을 경(景)
耆意大圖曰景 생각이 깊고 뜻이 큰 것을 경(景)
耆意大慮曰景 생각이 깊고 걱정이 많은 것을 경(景)
恭
敬事供上曰恭 공경히 섬기고 위에 이바지하는 것이 공(恭)
敬事奉上曰恭 일을 공경스럽게 하고 임금을 받든다
敬順事上曰恭경순(敬順)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이 공(恭)
尊贒貴義曰恭 어진 사람을 존경하고 의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공(恭)
執心堅固曰恭 마음가짐이 굳고 단단한 것을 공(恭)
執事堅固曰恭 일을 맡아 보는 것이 견고(堅固)한 것을 공(恭)
執禮御賓曰恭 예를 행하되 손님을 모시는 것같이 함을 공(恭)
旣過能改曰恭 이미 지나간 잘못을 능히 고치는 것을 공(恭)
不懈于位曰恭 게을리하지 않고 지위를 구한 것을 공(恭)
尊賢敬上曰恭 어진 이를 공경하고 받드는 것을 공(恭)
執禮御賓曰恭 예를 지켜 손님을 대하다.
尊賢讓善曰恭 어진이의 겸손함을 훌륭하게 닮다.
愛民弟長曰恭 백성을 사랑하고 겸손함이 오래다.
正德美容曰恭 바른 덕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다.
戴
典禮不愆曰戴 전례(典禮)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대(戴)
愛民好治曰戴 백성들을 사랑하여 다스리기를 좋아하는 것을 대(戴)
悼
中身早夭曰悼
未中早夭曰悼
中年早夭曰悼 중년(中年)에 일찍 죽은 것을 도(悼)
恐懼徙處曰悼
度
心能制義曰度 마음이 능히 의리에 맞게 함이 도(度)
制事合義曰度 일을 행(行)함에 의(義)에 합치되는 것을 도(度)
制事得義曰度
端
守禮執義曰端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지키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好禮執義曰端 예의를 좋아하고 옳을 것을 추구하는 것을 단(端)
烈
安民有功曰烈 백성들을 평안하게 한 공이 있는 것을 열(烈)
有功安民曰烈 공(功)이 있어서 백성들을 평안하게 한 것을 열(烈)
剛克爲伐曰烈 강직(剛直)한 덕(德)으로 능히 일을 해나가는 것을 열(烈)이라 한다.
秉德遵業曰烈 덕을 지키고 업(業)을 높인 것을 열(烈)
執德秉業曰烈 덕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는 것을 열(烈)
强以能斷曰烈 강력하게 일을 결단하는 것을 열(烈)
武
折衝禦侮曰武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 것을 무(武)
克定禍亂曰武 화란(禍亂)을 이기어 평정한 것을 무(武)
剛强直理曰武 굳고 세차고 사리에 곧은 것을 무(武)
剛强以順曰武 성질이 강직하면서도 순한 것을 무(武)
保大定功曰武 강대한 힘을 갖춰 공적을 공고히 하는 것을 무(武)
性剛理直曰武 성품이 강직하고 사리(事理)가 바른 것을 무(武)
刑民克服曰武 백성에게 모범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
闢土斥境曰武 국경의 적을 물리쳐 땅을 개척하는 것을 무(武)
威强敵德曰武 강하게 위엄을 세워 적을 덕으로 누르는 것을
穆
布德執義曰穆 덕을 널리 펴고 올바른 것을 지키는 것을 목(穆)
中情見貌曰穆 마음의 정이 볼만 한 것을 목(穆)
中心見貌曰穆 중심(中心)이 용모에 나타나는 것을 목(穆)
敏
應事有功曰敏 큰일을 당하여 공을 세우는 것을 민(敏)
好古不怠曰敏 옛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는 것이 민(敏)
愍
使民悲傷曰愍 백성으로 하여금 슬프게 하는 것을 민(愍)이라한다
在國逢難曰愍 국사에 큰 책임을 지고 있을 때 의로움으로 어려운 상황을 만나는 것을 민(愍)이라 한다
成
安民立政曰成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정사를 세운 것을 성(成)이라 하며
禮樂明具曰成 예와 악이 분명히 갖추어진 것을 성(成)
佐相克終曰成 임금을 도와 끝맺음이 있음[佐相克終]이 성(成)
爲相克終曰成 재상(宰相)이 되어 종말까지 잘 마친 것이 성(成)이다.
昭
容貌恭美曰昭 생김새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
容儀修美曰昭 차림새가 수신하여 아름다운 것을 소(昭)
容儀恭美曰昭 차림새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
聲聞周達曰昭 두루 통달하여 명성을 얻는 것을 소(昭)
聲聞宣遠曰昭 멀리까지 베풀어 명성을 얻는 것을 소(昭)
純
中正精粹曰純 마음이 바르고 정신이 순수한 것을 순(純)
中正和粹曰純 마음이 바르고 온화하며 순수한 것을 순(純)
睟面盎背曰純 화락한 모습이 온 몸에 나타나는 것을 순(純)이라 한다
肅
剛德克就曰肅 강직한 덕(德)으로 능히 이룬 것을 숙(肅)
剛而能莊曰肅 강직하여 능히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을 숙(肅)
正己攝下曰肅 자기를 바로잡아 아랫사람을 이끄는 것을 숙(肅)
執心決斷曰肅 마음을 굳게 가져 결단성 있는 것을 숙(肅)
執人決斷曰肅 마음을 집중(集中)시켜 결단하는 것이 숙(肅)
剛克爲伐曰肅 강직(剛直)한 덕(德)으로 능히 일을 해나가는 것을 숙(肅)
順
慈仁和民曰順 자비롭고 어질며 백성들에게 온화한 것을 순(順)
慈和遍服曰順 자비롭고 온화하며 두루 복종시키는 것을 순(順)
和比於理曰順 온화한 것이 이치에 비길 만한 것을 순(順)
柔賢慈惠曰順 현인(賢人)에게 유순하고 남을 사랑함을 순(順)
慈徧服順曰順두루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순(順)
安
好和不爭曰安 화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
好貨不爭曰安 재물(財物)을 좋아하여 다투지 아니한 것을 안(安)
寬柔和平曰安 너그럽고 화평(和平)한 것을 안(安)
寬容和平曰安 너그럽게 용납하고 화평스런 것을 안(安)
與人無競曰安 다투지 않고 남과 더불어 사는 것을 안(安)
襄
因事有功曰襄 일을 통하여 공(功)이 있음을 양(襄)
有功征伐曰襄 정벌을 하는데 공이 있는 것을 양(襄)
甲胄有勞曰襄 군사(軍事)에 공로가 있는 것을 양(襄)이라하고
僻地有德曰襄 낙후된 지역을 덕으로써 다스림을 양(襄)
良
溫良好樂曰良 온화하고 선량(善良)하여 화락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양(良)
中心敬事曰良 중심이 있고 일을 공경스럽게 함을 양(良)
小心敬事曰良 조심하며 일을 공경스럽게 함을 양(良)
慈仁愛人曰良 자비로운 인을 지녀 남을 사랑함을 양(良)
英.
德正應和曰英. 바른 덕으로 화합하는 것을 영(英)이라 하고
元
主義行德曰元 의(義)를 주로 하고 덕을 행한 것을 원(元)
能思辯衆曰元 생각하는데 능하여 무리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을 원(元)
行義悅民曰元 의(義)를 행하여 백성을 기쁘게 함이 원
懿
溫柔贒善曰懿 온유(溫柔)하고 현선(賢善)함을 의(懿)
溫柔賢善曰懿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
溫柔性善曰懿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천성이 착한 것을 의(懿)
德性純淑曰懿 덕스러운 성격이 순수하고 맑은 것을 의(懿)
行見中外曰懿 행실이 안과 밖으로 돋보이는 것을 의(懿)
性行純淑曰懿 성질과 행동이 순수하고 맑은 것을 의(懿)
柔克有光曰懿 부드럽고 자기 성질을 이겨 빛남이 있는 것을 의(懿)
毅
果而能斷曰毅 과감하여 능히 일을 결단하는 것을 의(毅)
剛而能斷曰毅 강직하여 능히 일을 결단하는 것을 의(毅)
强而能斷曰毅 강직하게 잘 결단하는 것을 의(毅)
致果殺賊曰毅 용감하게 행동하여 도적을 죽이는 것을 의(毅)
致果殺敵曰毅 용감하게 행동하여 적을 죽이는 것을 의(毅)
善行不怠曰毅 착하게 행동하되 게으르지 않는 것을 의(毅)
果敢殺賊曰毅 과감하게 적을 죽이는 것을 의(毅)
能記國善曰毅 지혜롭게 능히 국가를 바로잡는 것을 의(毅)
溫仁忠厚曰毅 온화하고 인자하며 충성심이 두터운 것을 의(毅)
義
先君後己曰義 임금을 먼저생각하고 스스로를 뒤로하는 것을 의(義)
先公後己曰義 공사를 먼저하고 스스로를 뒤로하는 것을 의(義)
見義能忠曰毅 의로움의로 충성을 다하는 것을 의(義)
見義能終曰義 의로움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의(義)
行義能終曰義 의로움을 행하고 끝까지 지키는 것을 의(義)
夷
安心好靜曰夷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것이 이(夷)이다.
安心好靖曰夷 마음이 편안하며 편안함을 좋아하는 것을 이(夷)
克殺秉政曰夷
柔而好靜曰夷 유순하며 고요함을 좋아하는 것이 이(夷)이다
翼
思慮深遠曰翼 사려가 깊고도 원대한 것을 익(翼)이라 한다.
愛民好治曰翼 백성들을 사랑하여 다스리기를 좋아하는 것을 익(翼)
愛心民治曰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익(翼)
小心翼翼曰翼 조심하고 공경하는 것을 익(翼)이라
仁
施仁服義曰仁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大慮慈仁曰仁 나라를 크게 걱정하여 자비롭게 인을 베푸는 것을 인(仁)
莊
履正志和曰莊 행적이 바르고 뜻이 온건한 것을 장(莊)
履正克和曰莊 행적이 바르고 마음이 온화한 것을 장(莊)
嚴敬臨民曰莊 백성을 대함에 엄하고 정중한 것을 장(莊)
武能持重曰莊 무예에 능하고 행동을 가벼이 하지 않는 것을 장(莊)
威而不猛曰莊 위엄과 용맹을 지닌 것을 장(莊)
屢征殺伐曰莊 여러 차례 전쟁에 나가 적을 물리친 것을 장(莊)
勝敵至强曰莊 적(敵)을 제압해 이기고 지극히 강(强)한 것을 장(莊)
勝敵志强曰莊 적을 이기어 뜻이 장한 것을 장(莊)
致果殺賊曰莊 과감하게 행동하여 적을 물리 친 것을 장(莊)
武而不遂曰莊 무예가 있으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장(莊)
以嚴釐之曰莊 통치를 함에 위엄이 있는 것을 장(莊)
好勇致力曰莊 날쌘 힘으로 적을 물리쳐 나라를 좋게 하는 것을 장(莊)
勝敵克亂曰莊 적을 이겨 전란을 평정한 것을 장(莊)
壯
勝敵克亂曰壯 적에게 승리하여 난을 극복하는 것을 장(壯)
勝敵志强曰壯 적에게 승리하려는 뜻이 강한 것을 장(壯)
死于原野曰壯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을 장(壯)이라 한다
死於原野曰壯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을 장(壯)이라 한다
武而不遂曰壯 무예가 있으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장(壯)
武能持重曰壯 무예에 능하고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을 장(壯)
章
出言有文曰章 말을 하는데 문장력이 있는 것을 장(章)
溫克令儀曰章 온순하고 겸손하며 위엄이 있는 것을 장(章)이라 한다.
敬愼高明曰章 공경하고 삼가고 높고 밝음이 장(章)
法度大明曰章 제도를 정하여 크게 밝히는 것을 장(章)
長
誨人不倦曰長 남을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는 것은 장(長)
敎誨不倦曰長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을 장(長)이라 한다
節
好廉自克曰節 청렴함을 좋아하여 사욕(私慾)을 버리는 것이 절(節)
謹身制度曰節 몸을 삼가고 법도를 따르는 것을 절(節)
謹行制度曰節 행동을 삼가고 법도를 따르는 것을 절(節)
靖
寬樂令終曰靖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제 명(命)대로 편안히 살다 죽은 것을 정(靖)
恭己安民曰靖 몸을 공손히 하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정(靖)
恭己鮮言曰靖. 몸을 삼가서 말이 적은 것을 정(靖)
恭己解言曰靖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을 정(靖)
小心恭愼曰靖 조심하며 공손하고 삼가는 것을 정(靖)
柔德安衆曰靖 너그럽고 덕이 있으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정(靖)
溫柔安衆曰靖 따뜻하고 너그러우며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 것을 정(靖)
仕不躁進曰靖 일 처리를 조급히 하지 아니함을 정(靖)
柔直考終曰靖 온유(溫柔) 강직(剛直)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은 ‘정(靖)
性寬樂義曰靖
貞
淸白守節曰貞 청백하게 절조(節操)를 지킨 것을 정(貞)이라 하고,
淸白自守曰貞 청렴결백하게 자신의 지조를 지킨 것을 정(貞)이라하고,
直道不撓曰貞 정도(正道)로써 굽히지 않는 것이 정(貞)
不隱無屈曰貞 숨기지 않고 굽힘이 없는 것을 정(貞)
固節幹事曰貞 절조(節操)를 굳게 하여 간사(幹事)하는 것을 정(貞)
外內用情曰貞 안팎으로 정(情)을 쏟는 것이 정(貞)
大慮克就曰貞 큰 생각을 능히 성취함을 정(貞)이라 하고
廉約自守曰貞 청렴하고 아끼며 자신의 지조를 지킨 것을 정(貞)
恬約自持曰貞
恬約自守曰貞 청렴하고 아끼며 자신의 지조를 지킨 것을 정(貞)
忠直無邪曰貞 충성스럽고 곧으며 사사로움이 없는 것을 정(貞)
定
德行不爽曰定 덕으로 행동하여 어긋남이 없는 것을 정(定)
純行不爽曰定 순수하게 행동하여 어긋남이 없는 것을 정(定)
安民法古曰定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옛 것을 본받는 것을 정(定)
安民大慮曰定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고 나라를 크게 걱정하는 것을 정(定)
大慮靜民曰定 나라를 크게 걱정하여 백성들을 조용하게 하는 것을 정(定)
大慮安民曰定 나라를 크게 걱정하여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 것을 정(定)
大慮慈仁曰定 나라를 크게 걱정하여 자비롭게 인을 베푸는 것을 정(定)
正
以正服之曰正 바른 도리(道理)로써 복행(服行)함을 정(正)이라고 하였다
以正服人曰正 올바른 일로 남을 감복시키는 것이 정(正)이다.
靜
柔德敎衆曰靜
齊
執心克莊曰齊 집심(執心)하여 씩씩함을 자제하는 것을 제(齊)
資輔就共曰齊 도와서 함께 완성시킴이 제(齊)
淸
避遠不義曰淸 의롭지 못한 것을 피하고 멀리하는 것을 청(淸)
平
執事有制曰平 일하는 데 제도(制度)가 있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布綱治紀曰平 강직(剛直)함을 펴고 기강(紀綱)을 다스림을 ‘평(平)’
治而無眚曰平 다스리는 데 과오가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克定禍亂曰平 능히 화란(禍亂)을 평정함이 평(平)
惠無內德曰平 은혜로우나 내덕(內德)이 없음이 평(平)
獻
聰明睿哲曰獻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밝은 것을 헌(獻)
聰明睿智曰獻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슬기로운 것을 헌(獻)
嚮忠內德曰獻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덕이 있는 것을 헌(獻)이라 한다.
智慮自操曰獻 지혜롭고 나라를 걱정하며 스스로 조심하는 것을 헌(獻)
智質有理曰獻 지혜롭고 질박하며 이치가 있는 것을 헌(獻)
事理皆通曰獻 모든 사리에 모두 통하는 것을 헌(獻)
智質自操曰獻 바탕 슬기롭고 스스로 조심하는 것을 헌(獻)
憲
行善可紀曰憲 행동이 착하여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을 헌(憲)
博聞多能曰憲 널리 글을 배워 능력이 많은 것을 헌(憲)
賞善罰惡曰憲 착한 것에 상을 주고 악한 것에 벌을 주는 것을 헌(憲)
博聞多見曰憲 널리 남에게 들고 본 것이 많은 것을 헌(憲)
薦可替否曰憲 인재를 천거(薦擧)하는 것이 마땅하여 체대(替代)함이 없음을 헌(憲)
顯
行見中外曰顯 행동이 안팎으로 돋보이는 것을 현(顯).
惠
柔質慈仁曰惠 부드럽고 천성이 순박하며 자비롭고 어진 것을 혜(惠)
柔質慈民曰惠 부드럽고 천성이 순박하며 백성들에게 자비로운 것을 혜(惠)
柔質安民曰惠 부드럽고 천성이 순박하며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 것을 혜(惠)
寬柔慈仁曰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자비롭고 어진 것을 혜(惠)
心性慈祥曰惠 심성이 자비롭고 착한 것을 혜(惠)
愛民好與曰惠 백성을 사랑하여 주기를 좋아하는 것을 혜(惠)
勤施無私曰惠 부지런히 은혜를 베풀고 사심이 없는 것을 혜(惠)
胡
彌年壽耇曰胡 나이가 많도록 수(壽)하는 것은 호(胡)이었다.
保民耆艾曰胡
懷
慈仁短折曰懷 자혜롭고 어질면서 일찍 죽은 것이 회(懷)이다
失位而死曰懷
孝
慈惠愛親曰孝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김이 효(孝)이다
慈惠順親曰孝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어버이에게 순종하는 것을 효(孝)
繼志成事曰孝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일을 성사하는 것을 효(孝)
能養能恭曰孝 봉양을 잘하고 공손한 것을 효(孝)
慈仁愛人曰孝 자비롭고 어질어 남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을 효(孝)
五宗安之曰孝 오종(五宗)을 편안하게 한것을 효(孝)
秉德不回曰孝 도덕(道德)을 지키고 어기지 아니하는 것을 효(孝)
大慮行節曰孝 큰 생각으로 절의(節義)를 행한 것을 효
僖
小心恭愼曰僖 마음이 조심스럽고 정중하며 신중한 것을 희(僖)
小心畏忌曰僖 조심하여 두려워하는 것을 희(僖)
小心畏愼曰僖 마음이 조심스럽고 두려워하여 신중한 것을 희(僖)
小心謹愼曰僖 마음이 조심스럽고 삼가고 삼가 하는 것을 희(僖)
溫
德性寬和曰溫 덕성이 너그럽고 온화한 것을 온(溫)이라 하고
榮
寵祿光大曰榮 총록(寵祿)이 광대(光大)한 것을 영(榮)이라 하고
宣
聖善周聞曰宣 잘 아뢰어 두루 상달(上達)한 것을 선(宣)
施而不私曰宣 남에게 베풀면서 사사로움 마음이 없는 것을 선(宣)
善聞周達曰宣 잘 아뢰어 두루 상달(上達)한 것을 선(宣)
質
正直無邪曰質 정직하여 사특함이 없는(正直無邪) 것이 간(簡)이다,
忠正無邪曰質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어서[忠正無邪] 질(質)
名實不爽曰質 성실하여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것을 질(質)
威
猛以剛果曰威 용맹하여 강인한 결단력이 있음이 위(威)
威而順理曰威
强義執正曰威
魏
克威捿行曰魏 능히 위엄있고 행동이 민첩한 것을 위(魏) 라 한다.
克威惠禮曰魏
介
執一不遷曰介 하나에 집착되어 고치지 않는 것을 개(介)
慰
在國遭艱曰慰
在國逢亂曰慰
在國逢難曰慰
使民悲傷曰慰
使人悲傷曰慰
在國逢艱曰慰
頃
敏以敬愼曰頃 민첩하여 경신(敬愼)하는 것이 경(頃)이다.
甄心勤愼曰頃
厚
思慮不爽曰厚 사려가 틀림없는 것을 후(厚)라고한다
丁
述義不克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정(丁)
玎
述義不勉 의를 하는데 힘쓰지 않은 것이 ‘정(玎)
替
言行相違 언행(言行)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 체(替)
繆
名與實爽 이름이 실속과 다른 것을 목(繆)
墨
貪以敗官 탐함으로써 관직에서 파면된 것이 묵(墨)
戾
不悔前過 지난 허물을 뉘우치지 않은 것을 여[戾]
煬
去禮遠衆 예(禮)를 떠나고 무리[衆]에서 먼 것을 양(煬)
失禮遠衆
好內遠禮
荒
好樂怠政 음악을 좋아하고 정치를 게을리 한 것을 황(荒)
凶年無穀
世
承命不遷曰世 명을 받들어 옮기지 않는 것을 세(世)
思
道德統一曰思
思而能改曰思
追悔前過曰思, 전의 허물을 뉘우치는 것을 사(思)라 하고
靈
不勤成名曰靈 부지런하지 않고도 이름을 낸 것이 영(靈)
死而志成曰靈
欽
威儀悉備
敦
溫仁忠厚
善行不怠
德
綵柔士民
執義揚善
惑
滿志多窮
戾
不悔前過 지난 허물을 뉘우치지 않은 것을 여[戾]라 하고
厲
殺戮無辜
暴虐無親
臨
亂不忘國.
患不忘國
懷
執義拘善曰懷
慈仁短折曰懷
明
獨見先識
臨照四方
匡
貞心大度 . 마음을 곧게 하고 크게 헤아림〔貞心大度〕을 ‘광(匡)’이라 한다
正心量弘
潔
不汚不義曰潔 더럽고 의롭지 못한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을 결(潔)이라 한다
果
好力致勇
好力致勇
和
柔遠能通
號令悅民
直 筆敏行善
紹 疎遠繼位 非次得之
達 疏中通理
質直好善
裕 强學好問
懋 以功受賞 以德受官
桓 辟土服遠 以威正人 克敬勤民
信
孝篤有義曰信
出言可復曰信
守命共恃曰信
白 外內貞復
隱 違拂不成 見美堅長
修 勤其世業 好學近智
釐 質淵受諫 有代而還
賢 行義合道 明德有誠
圉 威德剛武 能御禍亂
通 物至能應 事起而辯
勤 能修其官
知 官人應實 以實求賢
勇 臨亂不懼 勝敵壯志
容 寬裕溫柔
禮 奉義順則 恭儉莊敬
幕 德正應和
慧 柔質受諫
堅 彰義掩遇
友 睦友兄弟
勝 容儀恭美, 얼굴과 거동이 공손하고 아름다움을 ,
共 旣過能改
素 達禮蔽樂
使 治民克盡 嚴督無私
聲 不生其國 生于外家
密 追補前過
哀 早孤短折 恭仁短折
殤 未家短折 短折不成
剋 愛民任刑
易 好更改舊 變故改常
躁 好變動民 不能安靜
愿 敗亂百度 忘德敗禮
虛 凉德博禮
刺 不思妄愛
抗 逆天虐民
糠 凶年無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