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진 스포츠 칼럼]
No need for speed
금년 12월 25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부터 전화연락이 왔다. 그것은 갑작스런 전화였다. 조금은 실망스런 전갈이다.
“지니(Jin)! 올해는 정말 미안하네. 내 충성스러운 순록이 며칠 째 감기 몸살에 꼼짝을 못하고 있어. 오미크론으로 한국 비자도 받기 어렵고. 사실 우리 하늘 나라에서는 그런 백신 따위는 필요도 없다네. 내년 1월 2일 정도 한국 보건당국에서 규제를 푼다고는 들었네. 그 때나 갈까.......”
하루 전날까지도 그로부터 약속된 마라톤 용품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셀린(vaseline)이다.
바셀린은 어떤 선물인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바셀린은 일명 석유젤리(petroleum jelly)로 일컬어지며 원유에서 휘발유, 등유를 증류하고 남은 잔여물을 정제한 탄화수소의 혼합물이다. 중성이며 자극성이 없고 공기의 산화작용이나 화학 작용을 잘 받지 않는다.
이 바셀린은 여러 용도에서 사용되지만 마라톤 대회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약방의 감초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풀코스 혹은 하프코스 대회를 완주하다보면 양쪽 가슴에 붙어 있는 어린 딱정벌레가 매우 괴로워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땀에 젖은 옷감이 무수히 딱정벌레를 괴롭히다보면 때로는 서로 상처가 나서 피까지 묻어내는 불상사를 흔히 일으킨다. 뿐만아니라 옷감의 쉴 새 없는 동력에 의해 조용했던 배꼽, 젊잖은 사타구니, 고운 발가락 사이가 물집으로 시달리게 된다. 그 방지용으로 바셀린을 바르면 못된 물집과 찰과상 쯤은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을 알고 있다.
올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심야에 싼타 할아버지 때문에 골난 날씨는 체감 온도 무려 마이너스(-) 16도까지 내려가 버렸다. 게다가 북서풍의 삭풍까지 동반하면서.
나는 병원 이브닝 근무를 마친 간호사 아내를 존중한 나머지 늦은 시간 친절하게 차량 퇴근을 도운 후 그 복장 상태에서 곧바로 심야 달리기에 뛰어들었다. 따뜻한 차량 안에서 나는 비교적 가볍게 입는다. 겨울철 땀이라도 체질상 일단 기분이 썩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겨울에 달릴 때는 약간의 주의가 더 필요하다. 풍향에 따른 주행의 문제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엘리트 선수들처럼 정밀하게 풍속(風速)의 단위(sec)까지 계산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마라톤 클럽에서 훈련 받을 때의 기본 상식은 스타트 지점에서는 바람을 가슴에 안고 가야 한다. 그래야 반환점을 돌아서 올 때 바람을 등에 업고 올 수 있다. 즉 매도 먼저 맞아야 편하다.
그런데 나는 그만 실수를 했다. 기온의 급강하에 따른 태만과 잔꾀로 당장의 안락을 먼저 취했다. 청담대교에서 잠실대교 방향으로 북서풍을 등에 업은 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달렸다.
올림픽대교 북단를 반환점으로 다시 회귀 런너스 라인을 탔다.
회귀선에서 이내 콧등을 때리는 찬바람이 체감 온도 –16 × 2배수의 가속력과 인체 냉동 효과가 있음을 알았다. 곧 나의 얼굴은 감각을 잃었고, 무릎은 둔기에 한방 얻어맞은 양 뻣뻣하게 굳어졌다. 허벅지는 불에 덴 듯 따가웠다.
산타 할아버지 말이 떠올랐다.
“지니(Jin), 겨울철 칼바람을 장시간 맞으면 타는 듯한 작열감, 발적과 가려움을 느낄 때가 있지. 이것을 윈드번(wind burn)이라고 해. 즉 화상(火傷)과 비슷한 현상이지.”
겨울 방한복과 함께 바셀린은 이런 현상을 예방하거나 최소화 시킨다. 물론 이마나 콧등에 발라도 효과적이다. 나는 몇 번이고 주행을 멈추고 무릎을 주무르거나 허벅지 마사지를 하기도 하고 뒷걸음을 치기도 했다. 두 번 이런 실수를 하느니 차라리 우리 집 김치냉장고에 자리을 까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한편 마음은 맑고 가벼웠다. 밤하늘의 별빛은 더욱 빛났으며 한강 물은 잔잔하게 건너편 빌딩 숲에서 쏟아내는 은하수 불빛들을 집요하게 받아내고 있다. 이어폰을 타고 감미로운 선율이 귓가에 들려왔다. 돈 맥클린(Don McLean)이 나의 등을 두드리며 ‘헤이 지니, 힘내.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하고 속삭이는 것이다.
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에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ey 당신의 팔레트에 파란색과 회색을 그리세요
그의 목소리는 어둠을 타고 차분하고도 진지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들려왔다.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내 영혼의 어둠을 이해하는 눈으로 봐요.
Catch the breez and the winter chills 미풍과 겨울의 한기를 그려봐요.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맑은 영혼을 가지려 얼마나 당신이 고통스러웠는지
And how you tried for set them free 그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 지
그가 들려주는 빈센트(Vincent)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가지고 별이 총총한 한강의 밤하늘을 수 놓았다. 맑고 투명한 영혼의 목소리.
자기의 속 깊은 어둠을 이해하고, 겨울의 한기를 그려보며 그리고 맑은 영혼을 가지기 위해 때로는 극심한 고통마저도 한번 쯤은 지녀야 한다고 다독거리는 것이다.
한밤 중 나 처럼 잠깐의 실수로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추운 겨울을 달리는 런너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이다. 이내 나의 마음은 봄눈 녹 듯 포근해졌고, 꾸준히 천천히 주로를 달렸다.
아마도 내면의 자유를 갈구했던 느림보 런너스 그룹의 존 빙햄(Jhon Bingham)도 이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다.
Slow & Steady
느린 마라톤맨 김이진
수필가🐧동화작가
계간 자유문학 추천
첫댓글 추운 날씨에 운동하실 때는 몸조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