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匠人 불명의 출토유물은 이 나라 장인이 만든 이 나라 문화유산으로 간주된다. 쇼비니즘Chauvinism적 국수주의國粹主義와 영탄적 수필조 작품소개는 한국고미술의 진부한 전형적 수법이었다. 외관과 유사성 및 완성도 등의 노변방담爐邊放談 역시 고질적 병폐였다/
종교도상이란 소의경전을 해석하는 초종교적 방식과 범 교단적 공감대와 범사회적 관용이 맞물려 성립할 수 있다. 그 상위개념으로서의 공인양식은 초월적 강제력을 가진다. 종적 횡적 통사적 양식사적 고찰이 빠진 작품소개...그 객담客談 객설客說은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단독] ‘백제의 걸작’ 90년만에 빛…진품 공인되면 수백억 가치
[한겨레] 금동관음입상 90여년만에 일본서 소재 확인
기사입력 2018-06-04
이미지 및 해설: 한겨레 기사에서- 전사 앞+뒤 사진 합성
소장자 “한국 귀환 바란다…환수 나서야”
옷주름 음영·굴곡진 몸매 완벽 세공
“백제 7세기 가장 아름다운 보살상”
‘국보 293호’와 함께 1907년 부여서 출토
1920년대 일본인 매입, 반출 뒤 ‘베일’
소장자 고심 끝 공개…환수 절호의 기회
특별예산 편성 등 범정부 계획 세워야
가장 아름다운 ‘백제의 미소’를 찾았다. 한국 미술사 최고의 걸작으로 꼽혔으나 1907년 충남 부여에서 출토된 뒤 일본에 반출돼 90여년간 공개되지 않았던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소재가 최근 일본에서 확인됐다.
문화유산회복재단(이사장 이상근)은 이 관음상을 소장해온 일본의 한 기업인이 지난해 12월 도쿄를 방문한 한국미술사학회의 최응천(동국대), 정은우(동아대) 교수에게 불상을 공개했으며 두 교수는 이 관음상이 진품임을 공식 확인했다고 3일 <한겨레>에 밝혔다.
7세기 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높이 28cm로, 머리에 보관을 쓰고 왼손에 보병을 든 관음보살이 당당하게 서있는 자태를 형상화하고 있다. 인자한 미소를 띤 표정, 어깨·허리 등을 살짝 비튼 자세, 천의를 두르고 구슬장식(영락)을 걸친 모습 등이 완벽한 조화와 미감을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국보 78호·83호 반가사유상,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와 맞먹는 명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 농부가 발견한 이 불상은 1922년 일본인 이치다 지로에게 팔려 해방 직후 그가 일본에 갖고 간 것으로 전해진다. 재단 쪽은 “70년대 이치다한테서 불상을 사들인 현 소장자를 3년 전 찾아내 협의한 끝에 지난 연말 동의를 얻어 공개하게 됐다”며 “소장자는 불상이 귀환했으면 좋겠다는 뜻도 내비쳤다”고 전했다. 불교미술사가인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는 “반드시 돌아와야 할 한국 미술의 대표작이다. 정부와 학계가 환수를 위해 모든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잊을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미소였어요. 우리나라에서 장인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빼어난 얼굴과 몸매가 아닐까요. 지금도 눈앞에 자태가 어른거립니다.”
지난해말 일본 도쿄에서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을 실견한 정은우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불상을 실측조사한 최응천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도 “백제 조각 최전성기의 부드럽고 날렵한 조형 감각이 여실히 드러난 명작”이라며 미술사 연구에 새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했다.
최근 국내 학계가 일본에서 소재를 확인한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전신상. 보관을 쓰고 자비롭고 인자한 표정을 지은 머리 부분과 천의를 두르고 영락 등의 장식을 걸친 상하반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한국 불교미술의 최고 걸작이다. 문화유산회복재단 제공
■ 최고의 완성도와 조형미
정은우 교수는 불상을 실견한 뒤 쓴 의견서에서 “백제 7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보살상”이라고 단언했다. 이른바 ‘백제의 미소’가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라는 말이다. 보관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위로 틀어 올렸고, 부드럽게 늘어진 천의, 다리에 힘을 빼고 목과 허리 등을 살짝 뒤튼 삼곡 자세가 돋보이며, 미소를 머금은 자비로운 얼굴 표정과 우아함은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의 정수를 보여준다는게 그의 분석이다.
학계에선 오랫동안 이 관음상의 소재를 찾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 불상은 1907년 충남 부여 규암리 들판에서 한 농부가 발견한 두 점의 금동관음보살입상들 가운데 하나다. 모두 일본 헌병대에 압수됐다가 경매를 통해 일본인 수집가들 손으로 넘어갔다. 이중 하나는 해방 뒤 압수절차를 거쳐 국보 293호로 지정됐고, 세간에 ‘미스 백제’란 별명으로 불리며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된 또다른 불상은 1922년 일본인 의사 이치다 지로가 사들여 소장하다 해방 뒤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얘기만 전해져왔다. 1930년대 이후로는 전시 등에 나오지 않아 흑백사진 몇장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뒷모습. 다른 삼국시대 불상들은 뒤태가 대개 평면적이거나 거칠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불상은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옷주름 음영이나 몸체의 굴곡까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특히 하반신 옷주름은 국보 83호 금동반가상의 옷주름과 빼어닮아 학계의 오랜 논란거리인 국보 83호의 국적 문제를 푸는데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백제 불상은 7세기에 이르러 북제·수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아 다소 덩어리감이 크고 투박한 느낌을 보여주던 6세기 양식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자세, 우아한 장식 등을 표현하는 단계로 도약하게 된다. 이번에 공개된 관음상은 그 시기의 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한반도 불상은 약 150여구 정도로, 이들 가운데 국적 및 출토지, 이전 경위, 소장내력이 정확하게 알려진 불상은 이 금동관음보살입상이 유일하다.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는 “옛 흑백사진과 일치하는 완벽한 진품으로, 도금된 상태나 불상의 표면 등이 잘 남아있어 다행이다. 누구나 매혹될 수밖에 없는 이 불상의 지금 모습을 생전 볼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기뻐했다.
■ 백제대향로와 반가사유상과도 깊은 관계
최근 학자들이 확인한 이 금동관음상의 세부들을 보면, 기존 백제 불상과는 다른 독특한 요소들이 많다. 최응천 교수는 불상 앞 가슴 부분의 옷에 두른 띠장식에서 구름(운문) 혹은 당초무늬가 연속해서 나타난 부분들이 보이는데, 이런 무늬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과 받침대 사이에 있는 장식무늬와 똑같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도상이 너무 똑같아 놀랐다. 백제 왕실의 최고 장인이나 이 장인이 꾸린 공방이 백제대향로와 금동관음보살입상을 같이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 불상 뒷면의 경우 다른 삼국시대 불상들은 대개 평면적이거나 거칠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불상은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뒤태의 옷주름 음영이나 몸체의 굴곡까지 세공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하반신의 옷주름은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의 옷주름과 빼어닮은 특징을 보여, 학계에서 논란거리로 남아있는 국보 83호의 국적 문제를 푸는데도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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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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