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미술의 메카를 자칭한 미국미술은 뿌리 깊은 샘은 아니었다. 20년도 버티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세계의 미술이 함께 헐떡거렸다. 70년대의 작가들은 전 시대의 지식과 정보에 짓눌리고 있었다. 이제는 어떠한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는 절망감이 팽배했다.
열심히 많은 작품을 제작한다고 해서 이름 있는 화가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화면으로 돌진해봤자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허탈감만 증폭되었다. 거기에 나타난 것이 사진이라는 매체이다.
사진은 20세기 미술운동의 부정적 영향원이었다. 미술가들은 줄곧 사진을 견제했다. 그래서 사진의 역할은 정보제공에 그치고 있었다. 사진 자체가 회화작품으로 취급된 일은 거의 없었다.
60년대 초기에 사진은 매우 강력한 매체이면서도 정보원으로 떠올랐다. 워홀은 주제를 보다 잘 떠올리기 위한 운반장치로서 사진을 썼다. 마릴린 몬로 등의 실크스크린은 사진이미지를 변조했다. 리히텐스타인은 슬라이드의 이미지를 환등기로 캔버스에 투사하였다.
팝아트의 시발이 해밀턴의 잡지광고와 사진 콜라주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의 팝아트 전체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사진은 회화의 흐름이 아니라 방증자료에 불과했다.
하이퍼 리얼리즘에 이르러 사진은 회화의 텍스트가 된 듯했다. 그러나 하이퍼리얼리즘은 중성적 기법이라 불린다. 사진의 주장력을 최대한 누그러뜨리기 위해 사진을 이용했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서 사진을 너무 사진처럼 그리면 사진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 사진에 그토록 말이 많을까. 그것은 결코 사진이 회화의 자리를 넘보지 못한다는 회화의 텃세를 반영한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1960년대 중반에 말콤 몰리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크릴 칼라에서 보다 명확하고 차가운 마무리를 위해 유화로 전향했다. 물감을 두껍게, 붓놀림은 빨리, 질감은 유연하게 그림이 그려졌다. 팝아트와 개념미술에서 추상표현주의로 돌아가려는 확실한 의지의 표상이다.
돈 에디는 <H를 위한 새 구두>를 발표했다. H가 누굴까. 여러분도 아는 사람이다. 앙리 마티스를 가리킨다. 그런데 왜 H냐고 묻고 싶겠지? 프랑스어로 Henri를 앙리라고 읽기 때문이다. 그냥 마티스를 위한 새 구두라고 쓰지 않고선... 하고 불평할 이유는 없다. 작가 마음이니깐.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미국인의 유럽에 대한 짝사랑이다. 특히 캘리포니아 영어는 억양이 프랑스어처럼 들린다. 다섯 개의 모음은 발음이 바뀌고 있다. 연필을 가로 물고 아에이오우라고 따라해 보라.
L과 H는 묵음화하는 경향이다. T는 아예 도태 중이다. 억지춘향으로 프랑스 어를 흉내 내는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Henri를 읽어보라. 미국어로 읽어도 앙리 혹은 앙라이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림은 마티스와 연관이 없다. 지극히 극사실적인 구두가게의 풍경을 마티스에 바친다는 것이다. 존경과 개성은 다를 수도 있는 법이다.
도판: 돈 에디 <H를 위한 새 구두> 네이버 이미지에서 캡쳐
2016 補遺
LJS라는 이니셜을 쓰던가? 젊은-언제나 젊은 작가로 기억한다. 뛰어난 설치미술 작업을 선보이면서 눈여겨 본 작가였다. 글을 쓸 일이 있어서 작품제작에 환등기를 쓴다고 너무나 당연히 소개를 했다. 의식이, 감각이 그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 설령 데생이 모자란들 흠이 되랴, 그런데 뛰어난 묘사력과 발군의 데생실력에 환등기를 쓴다면 다른 미학이 나올 것이라고 당연히, 아무 의심없이 썼다.
하이퍼리얼리즘을 떠올렸을 것이다.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스트는 손재주가 젬병이라도 정밀묘사를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환등기를 썼다...그런데 한국의 작가들은 사진의 도움없이 초상화를 그릴만큼 뛰어난 데생솜씨를 자랑한다...그 차이란 너무나 상식적으로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데생의 함정일 수 있었다. 그 족쇄를 과감히 끊을 수 있는, 너무나 당연히 손재주를 벗고 설치작품을 할 수도 있는 의식이란 이미 학교에서 배운 아카데미즘의 굴레를 벗었다는 이미일 수 있었다. 말하자면 칭찬이었다.
그 작가는 전화통이 깨질만큼 화를 냈다. 그리곤 다시 아마도 평생-전화가 없었다.
아마도 평론가의 '우정어린 설득'을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자신의 세계를 그림으로 펴 나갈 수 있는 작가이기 위해선 또 하나의 벗어야하는 껍질이 있을 수도 있나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