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형님 김영진
형님은 서슬 퍼런 삼한세족 광산 김씨 퇴촌공파 가문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삼대조상과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 일곱 동생을 거느린 맏아들인데다가 형님 양주와 다섯 아들딸까지 챙겨야하는 거대가족의 가장이라 바람 잘 날 없는 평생을 살다 가셨다.
삶과 예술, 그리고 오랜 휴면기, 개간, 교직과 미술학원운영 등의 세월은 장남으로서, 가장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지상주의적 풍조와 신선풍류 속에서 예술을 이해하던 동양화 전공의 형님으로서 세상 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예술의 꽃은 피다 만 꽃이 되어 유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내 안의 형님
경남 함양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님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다니셨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에 장발의 학창시절 사진을 보면 웬만한 여자라면 한번쯤 팔짱이라도 끼고 싶을 것 같은, 참 멋진 남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형님의 책을 뒤져 루벤스의 화집에서 토실토실한 흑백의 반라 여인을 훔쳐보기도 하고, 신선산수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산천유람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다 방학 때 내려간 나는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시골에서 개간을 한다고 땀을 흘리는 형님을 찾았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바위를 캐내고 풀을 뽑다가 막걸리를 퍼 마시고 퍼진 후에야 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았다.
그렇게 개간한 땅에 형님은 고구마를 심었다. 따는 씨알이 굵고 맛있는 밤고구마라 기대가 컸지만 고구마 시세가 폭락하여 당시 가마당 오백원인가? 지금 아마 육칠천 원쯤 될 거다. 그 해 겨울은 고구마 풍년이었다. 하루 세끼, 간식과 후식, 도시락에까지 고구마가 따라 다녔고 나는 이삼십 년이 지나도록 고구마는 물론 김치국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형님의 개간은 당시로서는 자립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워낙 대가족이다 보니까 오히려 자발적인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었던 것이 우리 집안이었다. 밥상머리는 전쟁터였다. 가끔 감자볶음이라도 올라오면 교통순경이 호루라기라도 불어야할 정도로 젓가락전쟁이 난무했다. 그 속에서도 형님은 자립과 가족의 부양을 생각했을 것이다.
미싱 서랍은 큰 형님부터 대물림했던 서글픈 자립의지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1960-70년대 읍사무소 소재지에서 푼돈이라도 벌기가 쉬웠겠는가. 어느 겨울날 납작한 미싱 서랍이 없어지면 형제 중 누군가가 신문지를 깐 미싱 서랍에 멜빵을 달아 찹쌀떡 장사를 나간 것이었고, 며칠 후면 미싱 서랍이 기가 팍 죽어 제자리에 꽂혀 있곤 했다.
한의원을 하셨던 선친은 한학자답게 유교적인 관용과 이해 속에서 팔 남매를 키우셨다. 아들 딸의 진로 선택에 제동을 걸거나 강요하지 않으셨다. 다만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 하여 교사는 하지 말아라, ‘천하에 죄지은 놈보다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이 순사요, 경찰이니라’ 하여 경찰은 하지 말아라 하고 타이르는 정도였다.
그런데 팔 남매 중에서 셋이 교사요, 하나가 경찰이 되었으니 ‘아들을 키우면 도둑을 보고 웃지를 말라’던 옛 말처럼 참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농사였다.
휴면기를 딛고
선친은 함양에서 진주로 이사를 하셨다. 한의원도 따라 가고, 온 가족이 함께 따라 갔다. 형님에게는 장손과 가장으로서 화업도 밀쳐두고 매달리는 개간과 농사보다는 차라리 교사가 어떠냐고 타진을 하셨다. 선친으로서는 참 힘든 제안일 것이었다.
여하튼 형님은 진주여자고등학교의 인기 좋은 선생님이 되었고 다시 화업이 명맥을 잇게 되었다. 다만 장손과 가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에 장래성이 없는 직업이라 판단한 형님은 선친의 재산을 절반 떼어줄 것을 제안했다. 가족의 질시와 견제와 기대가 교차하는 상황에서 선친의 결단이 내려졌다.
그렇게 형님은 진주 시장 안에서 그릇 장사를 벌였고, 양도재산에 대한 의무로 제사를 모시기로 했지만 형님이 돌아간 후에 그 몫은 소롯이 장남 완수에게 떠 맡겨졌다.
목 좋은 진주시장에서 그릇 점을 운영하던 그 시절이 형님으로서는 가장 여유 있던 세월이었다. 날마다 매상이 쏠쏠하니까 술타령도 신명이 났다. 참 일장춘몽이었다. 그릇 장사는 일년 만에 먼지만 쌓이고 재고상품은 길거리 난전으로 밀려났다.
형님의 말씀인즉슨, 그 매상이 수입으로 보이더라는 것이니, 생산을 위한 재투자나 남매간의 소득재분배라는 개념은 아예 형님의 사전에는 없었던 모양이다. 형님 아래 칠 남매는 굳이 그 일을 들추지 않았지만 불신과 불만의 응어리가 맺히기도 했을 것이다.
이 무렵 나는 서강대학교 이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반년도 못 다녀 진로를 재검토하게 되었고, 많은 가능성을 놓고 저울질을 하게 되었다. 어학, 철학, 예술 중에서도 미술이 선택되었다.
이후 나는 서울대학교 대학원과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롱비치 대학원에서 미술실기 및 미술이론과 평론의 전방위적인 토대를 닦았다. 다시 “고려불화의 화엄사상성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에서의 문화충격의 여파로 한국문화예술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방안으로 저서의 출판에 매달리다가 현재는 시각예술의 시각적인 기록을 위해 미술비디오의 제작에 집념하고 있다.
그리고 실기와 이론, 표현과 기록이라는 큰 틀 안에서, 전시라는 건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는 전시와 출판, 방송을 연계시킨 대형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그렇게 모든 활동과 실적은 미술 안에서 이루어졌다. 역시 형님이 어릴 적부터 내게 심어준 분위기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술타령과 성취욕
술 이야기니까 망정이지, 우리 집은 술과 원수가 진 집안이었다. 선친은 마천 등구라는 천하의 벽촌, 선친의 말씀대로라면 ‘토까이-토끼 발 맞추는 곳’에서 내 위의 형 셋과 누이 둘, 모두 다섯 남매를 키웠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남자를 밀쳤는데 ‘재수 없는 년은 봉놋방에 가도 고자 옆에 눕는다’던가, 며칠 후에 덜컥 죽어버렸다고 했다. ‘문둥이 때려죽이고 살인난다’ 하여 정상참작으로 형사처벌은 면했지만, 그 유족들이 못살게 구는 바람에 누이 둘은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그리고 선친은 술을 끊으셨고, 읍 소재지 함양으로 이사 한 후에 내가 태어났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들 넷에게 각서를 쓰게 하셨다. 이르되, 우리 사형제는 앞으로 절대 술을 마시지 않기로 천지신명에 맹서하노라...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술을 유인하는 혈통이 사라지랴. 큰 형님은 평생 마실 술을 먼저 땅겨 마시고 친구들이 문상와서 먹을 술까지 다 드신 후에 돌아가셨다.
둘째, 셋째 형님들도 술 고생은 모두 다 겪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술에 졌다. 넷째 아들인 나는 떡이 되도록 술 먹고 나면 누가 나를 보고 씩 웃기만 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게 술 속이 좋지 않았고 술병이 뿌리 깊었다.
나는 마흔이 넘어 술을 끊었다. 아마도 여러 번 단식을 하면서 피 속의 아세트알데히드 기基라는 연결고리가 끊어지니까 술이 손을 들고 물러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찬란한 술의 위력은 형님의 장남이자 광산 김씨 장손, 그리고 내 조카인 완수에게 전승되었다. 완수는 마산에서 미술대학을 다녔다. 그림과의 인연, 미술적인 분위기, 그리고 선배로서의 아버지와 삼촌의 영향력 안에서 완수의 진로가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 예술이 모두 술 돌림이 아니냐는 듯이 퍼마시는 술은 분명 유전적인 내력이었을 것이다.
완수는 아버지의 미술지상주의적 추구, 삼촌의 폭넓은 포부와 추진력을 모델 삼아 화업을 꾸려왔다고 입버릇처럼 술타령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나이 오십이 넘어 그림의 완성을 선언했다.
그 어려웠던 세월을 지탱해준 것이 술이었다니 참 광산 김씨의 술 내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루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성취욕은 질기고도 질긴 모양이다.
그리고 그림
형님은 이후 마산여자고등학교로 옮기면서 마산에서 미술학원을 경영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이 경남에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인기도 좋았다. 그러나 미술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해안도시에서 화업 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오랜 휴면기 동안 서울화단과 단절되었던 세월과 소외감도 형님을 괴롭혔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력은 물론이고 수입과도 별로 상관이 없었던 펜던트 도안, 신문연재삽화, 잡지 표지화 등을 청탁 받아도 형님은 신명이 나서 그 일에 매달리곤 했다.
그러다가 순환근무제에 해당되어 시골 고등학교로 전출되는 참으로 큰 사건이 터졌다. 도시 교사를 북어 패듯이 길들이려는 교장 교감과 사사건건 부딪치다가 술 귀신 몰골로 형님은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형님은 대학 강사로 출강하는 외에는 미술학원을 지키셨다. 아마도 지금 유작전에서 선보이는 작품들 대부분이 당시 제작되었을 것이다.
형님은 전통 동양화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개성적인 스타일을 창조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셨다. 그러나 인생의 황금기를 개간이랴, 장사랴, 교사랴 시간을 뺏기고, 서울화단과 단절된 채 거대가족의 실권 없는 대장으로서 전방위적인 공격에 시달리면서 미술에서의 성취가 뾰쪽한 스타일로 형성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강한 수묵 선염을 중심으로 윤곽선 없이 선묘로만 그려지는 몰골에, 안개처럼 뿌연 설채가 토닥토닥 자리다툼을 하는 화면구성으로 굳어졌던 것 같다.
술에 곰삭도록 누그러뜨려야 세상과 어울릴 수 있었던 가문의 드센 뼈대가 수묵 몰골이었다면 곰실 곰실 파고드는 설채는 닭갈비처럼 형님을 괴롭혔던 세속과 타협의 표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등장했던 것이 이를테면 관용과 아량의 기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국전을 앞두고 형님은 쉬쉬하면서 내게 새 기법 자랑을 하셨다. 말하자면 동인과 행위는 형님이 제공하되 나머지는 안료와 물과 시간이 결정한다는 그런 자동기술법 비슷한 발상이라 할까.
풀어서 이야기하면 잔디밭 위에 화선지를 깔고 물에 푼 안료를 붓고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의기양양한 형님은 고구마 먹을 사람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 들이밀기로 내게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내 기법 훔쳐가지 마라”
그것이 형님의 애정 어린 표현방식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그 기법을 훔쳐 가면 아마 형님은 그랬을 것이다. “허허, 그 놈이 말야. 내가 개발한 기법으로 이번에 큰 상을 받았더구만... 그럼, 그럼, 그야 내가 상 받은 거나 진배없지... ”
어쩌면 당신이 힘을 실어 주어 가족 중 누구에게든 성취에 도움을 준다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 가문의 장손, 거대가족의 장남, 대가족의 아버지였던 형님이었을 것이다.
전시와 화단
그렇게 형님은 살다 가셨다. 잘생긴 외모, 술타령, 자립을 위한 희생과 헌신, 소설 ‘오발탄’의 주인공처럼 장손과 장남과 가장으로서의 무한책임에 시달리면서도 예술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 예술가로서, 언제나 따스하게 동생을 감싸주었던 손위 어른으로서 큰 형님은 동생인 내게, 그 아들 완수에게, 그리고 마산화단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