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서 내륙 지역에 위치한 라마동 유적의 위치 (A표시
■ 요서 라마동 거주민이 부여족이라는 폭탄 발언
지난 2010년 4월30일 길림대의 주홍 교수가 경남 김해에서 열린 제16회 가야사 세미나에서 이상한 발언을 했다.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의 족속문제에 대한 생물고고학적인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이 부여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삼연은 전연(前燕 337~370)과 후연 (後燕 384~409), 북연 (北燕 409~438)을 지칭한다. 삼연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비족이 주체가 되어서 생긴 국가다. 사실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 고고학자들이 간헐적으로 라마동 삼연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부여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계속 언급해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는데, 중국 형질인류학의 대가인 주홍 교수가 직접 우리나라에 와서 아예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이 부여족이라고 폭탄성 발언을 한 것이다.
물론 주홍은 삼연이 부여족이라거나, 선비족=부여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선비족계 전연이 여러차례 부여를 공격해 대량으로 포로를 잡아왔고, 이들 부여 포로들이 선비족 정권 내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고분을 조성한 지역이 라마동이란 이야기를 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지배층 중 일부가 당나라에서 고위 장수를 지냈듯이 선비족에게 포로로 잡혀간 부여족들도 모두 노예처럼 거주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밀집 고분을 조성할 정도로 삼연(특히 전연) 지배층 외곽에 자리잡은 집단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삼연에 부여계 관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연 산기시랑 여울 등의 사례가 이미 문헌에서도 확인된 사례가 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주홍 교수의 발언을 "폭탄성 발언"이라고 표현했을까. 사실 라마동 유적 자체가 선비족이 주체가 된 유적이 아니라 종족적으로 부여계 집단의 유적이라는 것 그 자체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라마동 유적이 동아시아 한/중/일 고대 갑옷, 마구 역사와 계보에서 차지하는 압도적이고 선도적인 위상을 이해한다면 라마동 유적이 부여계 유적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충격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주홍 교수의 발언을 "폭탄성 발언"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특정한 지역에서 출토된 대량의 인골을 두고 중국 학계, 특히 형질인류학 전공자들이 부여족이란 구체적 표현을 사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폭탄성 발언"이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사실 형질인류학적으로 부여족 혹은 고구려족, 혹은 부여인, 고구려인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한 영역이었다. 부여-고구려계 고분에서 형질인류학적인 연구기법을 적용할 정도로 양호한 상태의 인골이 대량 출토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동안 모호했던 부여-고구려계 집단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다만 현대 만주족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을 토대로 볼 때 그 중간지역에서 거주하던 집단인 부여-고구려계 집단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닌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의 유전적 관계 2008.1.29" http://lyuen.egloos.com/4117885")는 점은 이미 예전부터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이같은 나의 정황론을 뒷받침할만한 형질인류학적 증거는 지금까지 없었다. 특히 고구려나 부여하기 존재하기 이전 단계인 기원전 10~기원전 4세기 중국 길림성 서단산 유적의 인골이나 기원전 16~11세기의 요령성 본계 유적의 인골은 현대 한국인과 비교하기 애매한 특성이 많아 논란이 되었다. 북한 사회과학원 "조선사람의 기원" 150쪽의 표를 보면 서단산 유적의 인골은 머리뼈 높이가 평균 132.0mm에 불과했다. 이는 북한 학계에서 산출해낸 이른바 "조선 옛 유형 사람"의 머리뼈 높이 평균 140.3mm보다 두드러지게 낮아서, 과연 서단산 인골을 "조선 옛 유형 사람의 한 지방유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인지 망설이게 만들었다.
북한 학계가 분석한 서단산 인골의 정체. 도표 원출처 "조선 사람의 기원, 1989".
북한 학계는 서단산 인골이 "조선 옛 유형 사람의 한 지방유형"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처절하게 사투를 벌였으나 위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단산 인골이 퉁구스족과 현대 한국인의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음을 숨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서단산 유적 인골을 퉁구스계 집단으로 보기에는 두장경이 175.mm, 두폭경이 138.1mm로 너무 작았다. 다시 말해 서단산 유적은 한국인과 관련시키기에도, 반대로 퉁구스계(역사상의 숙신-말갈)와 관련시키기에도 다소 애매한 특이한 유형의 인골이었다. 이 때문에 북한 학계에서는 "조선사람의 기원" 155쪽에서 매우 복잡한 계산을 거쳐 서단산 유적 인골과 현대 한국인 사이의 집단적 쌍거리가 5.1인데 퉁구스와는 6.2라는 수치를 제시하면서 상대적으로 서단산 유적이 현대 한국인에 끌리는 경향이 존재함을 강조해 왔다.
서단산 유적 외에도 요령성 본계 유적에서 나온 인골이라도 현대 한국인 내지 한국인과 유사한 만주족과 비슷한 유형의 인골이 나왔으면 논란이 종식되었을 텐데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요령성 본계 유적의 인골도 북한 학계가 주장하는 이른바 "조선 옛 유형'이나 현대 한국인, 현대 만주족과 관련이 있다기 보다는 일본 고대 죠몽, 일본 고대 야요이 인골 중 일부, 일본 현대 아이누 등 세 집단을 삼각점에 두고 야요이와 조몽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정체불명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본계 유적 인골의 상대적 위치에 대해서는 주홍, 东北亚地区古今居民种族类型的比较研究, 길림대 사회과학학보 1998-5기 4쪽 참조)
이들 유적은 기본적으로 부여-고구려 건국보다 훨씬 이전 단계의 것이고, 부여나 고구려의 유적이 분명한 곳에서는 막상 형질인류학적인 연구를 안정적으로 진행할 정도로 많은 수량의 인골이 출토된 사례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은나라 지배집단, 동호족, 선비족, 탁발선비족, 거란족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면서 형질인류학적 특징을 나열하던 중국 고고학계나 형질인류학계에서도 부여나 고구려의 형질인류학적 정체에 대해서는 뭐라고 구체적인 언급을 자제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던 중국 학계에서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왔길래 느닷없이 북표 라마동 삼연문화를 조성한 주민 집단이 부여족이라는 발언을 한 것일까. 어떤 형질을 가진 집단이 부여족이란 이야기도 하지 않던 중국 학계에서 왜 부여 본거지도 아닌 엉뚱한 요서 북표 라마동 유적을 놓고 부여족을 거론하는 모험을 한 것일까. 부여의 영토가 아님이 분명한 요서 내륙지역에서 출토된 인골을 놓고 부여계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2010년에 주홍 교수가 국내에서 발표했던 논문 전문은 열람할 수 없었지만 발표 요지에 적힌 "고화북유형과 고동북유형의 혼혈" 운운하는 설명은 부여족이라고 결론을 내린 근거로는 다소 약하다고 느꼈다. 사실 길림대 형질인류학 연구자들이 말하는 고화북유형과 고동북유형 두 집단의 혼혈로 형성되었음직한 역사상의 집단은 그 외에도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 라마동 유적을 놓고 중국학계가 부여족이란 이야기를 한 이유
사실 중국 학계에서 라마동 유적을 순수한 선비계 유적이 아니라 부여계 유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었던 출발점은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유물 양상이 전형적인 선비족 무덤의 그것과는 달랐다는 점 때문이다. 동시에 라마동의 유물이 송화강 유역의 부여권 유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에서 먼저 부여계라고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고고학자도 아니고 형질인류학 전공자들까지 굳이 "부여족"이란 표현을 직접적으로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차에 중국 길림대에서 2010년에 공개한 박사 논문(라마동 삼연문화 거주민의 인골연구 2009)을 보고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왜 부여 본거지도 아닌 요서 지역 내 부여 포로 집단의 무덤을 놓고 중국 형질인류학계가 굳이 부여계로 못박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말이다.
아래 표를 보자.
위 표는 동북아시아 제 집단과 라마동 유적 인골의 주요 측정치와 지표 총 19개를 Morant 기법을 이용해 비교한 것이다. 표에서 화북조는 1920~30년대 측정 자료에 기반한 중국 북방 한족, 조선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 형질인류학계가 측정한 식민치하의 한국인을 지칭한다. 기타 몽고조는 몽골족, 애사기마조는 에스키모족, 통고사조는 퉁구스족, 나내조는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을 의미한다. 보는 바와 같이 비교 집단 중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한국인이다. 그 다음 가까운 것이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이고, 그 다음이 북방 한족, 몽골족이고, 퉁구스족은 가장 멀다.
1920~30년대 화북조 다시 말해 북방 한족의 측정치는 현대 이후 중국 학계의 측정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장경이 짧은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비교 데이터를 다른 것으로 사용했다면 부여족과 북방 한족의 거리는 더 멀어질 가능성도 있다. 남부 퉁구스계 만주족이 형질인류학적으로 한국인과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위 표에서 한국인 다음으로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이 라마동 부여족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위 표는 같은 형질인류학적 측정치와 지표를 유클리드 거리로 계산한 것이다. 역시 라마동 부여족과 현대 한국인이 가장 가까운 집단으로 나온다.
위의 계산결과 수지형 표로 그리면 당연하게도 라마동 부여족과 현대 한국인이 한 그룹으로 묶인다. 에스키모와 나나이족이 한 그룹으로 묶이고 한 단계를 건너 뛰어 북방 한족과 연결된다. 퉁구스족과 몽골족이 그와 구별되는 그룹으로 묶인다.
다시 말해 중국 길림대 형질인류학 연구팀은 자신들의 분석 기법상 요서 북표 라마동에서 나온 인골이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 유적의 종족적 주체를 부여족이라고 간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논문은 부여족(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단인 고구려족 내지 고구려인)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점을 사실상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막연하게 부여-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생각하는 역사 인식론 내지 역사 계승의식 차원을 넘어서서 형질인류학적으로도 부여-고구려와 현대 한국인의 연관관계를 한 차원 더 진전된 상태(최종 결론은 아니다)에서 논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는 것에 이 논문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