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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柳成龍, 1542-1607〕
본관 : 풍산(豊山), 호 서애(西厓),
1542년 류중경과 안동김씨 사이에서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 출생하였다
〔안동김씨 도평의공파조(휘 구정)의 5세손 광수(光粹)에 5녀〕
유성룡은 17세 때 양명학을 접했으나 과거에도 매진한다. 24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인 명종 21년(1566) 대과에 급제하는데, 태학생이 된 지 1년의 급제는 드문 경우로 보통 4~5년 공부하는 것이 기본이다. 첫 관직은 승문원 권지부정자(종9품)로 말단 보직이지만 국가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은 엘리트 관료들이 가는 중요한 관서였다. 그 후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예문관과 역사서를 편찬하는 춘추관, 성균관 등을 돌며 하위 관료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성균관 전적(정9품)으로 일하던 유성룡은 선조 2년(1568) 한번에 6계품을 뛰어넘어 공조좌랑(정 6품)이 된다. 28세 때였다. 어떻게 이런 승진이 가능했을까? 인종의 신주를 모시는 문제에서 영의정(李浚慶)과 맞서 이겼기 때문이다.
세종은 종묘 밖에 따로 문소전을 짓고 태조와 사친(四親) (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의 신주를 모신 이후 역대 임금들의 신주도 이곳에 모셨다. 그런데 성종이 부친을 덕종으로 추존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예종의 신주를 이미 문소전에 모셨기 때문에 자리가 없자 덕종의 신주는 별전에 모시고 연은전이라 불렀다.
따지자면 연은전은 문소전보다 격이 낮은 전각인 셈이다. 덕종은 즉위하지 못한 추존왕이기 때문에 연은전에 모셔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인종은 달랐다. 재위(9개월) 기간은 짧았지만 왕위에 있던 인종은 문소전에 모셔야 했는데, 내심 인종을 부인하던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인종의 신주를 격이 낮은 연은전에 모신것이다. 인종은 사림(士林)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특히 많은 사람들이 분개했으나 명종 즉위 초 을사사화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명종이 승하하자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사림의 영수 이황이 나서 명종과 인종을 모두 문소전에 모시자고 주장했지만 영의정 이준경이 "조정에서 정한 좌향을 쉽게 변경할 수 없다" 면서 받아 들이지 않아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정9품 성균관 전적 유성룡이 상소를 올려 인종도 문소전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돌한 젊은 관료의 주장은 예상을 뒤엎고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받아 공론이 되어갔다. 그러자 영의정 이준경도 종전 주장을 버리고 유성룡의 견해를 따르면서 인종의 신주를 비로소 문소전으로 옮겨 모신것이다.
이 사건으로 유성룡은 일약 전국적 인물로 떠올랐다. 정9품이 정1품 영의정을 꺾은 것도 사건이지만 인종의 문소전 봉사는 사림의 숙원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유성룡은 핵심 코스를 밟아다가는 엘리트 관료가 된다.
31세 때인 선조 5년(1572) 홍문관 수찬(정 6품)으로 있을때는 이준경과 또 한번 인연을 맺는다. 첫 관계는 악연이였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유성룡의 반론 때문에 이준경은 겨우 관작 추탈을 면하게 된다.
선조 8년(1575)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데 이해가 을해년이어서 을해 당론(乙亥黨論)이라고 한다.
유성룡은 김우옹 · 허엽 · 우성전 등과 함께 동인으로 분류되지만 사실 그는 사림이 동 · 서로 갈릴 때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조좌랑으로 있던 선조 6년(1573) 7월 부친상을 당해 선조8년(1575) 9월까지 형 유운룡과 시묘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상복을 벗자마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35세 때인 선조 9년(1576) 사간원 헌납(정5품)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선조 22년(1589)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사건에 말려든다. 기축옥사 라고도 부르는 정여립 사건이 그것이다. 유성룡은 38세 때인 선조12년(1579)때는 홍문관 직제학(정3품)에 제수되었다가 같은 해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홍문관 직제학과 동부승지는 같은 정3품이지만 직제학은 당하관인데 비해 동부승지는 당상관으로 격이 달랐다. 당상관이 되어야 비로소 주요국정에 참여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유성룡은 국왕의 경연관을 겸해서 매일같이 선조와 얼굴을 맞대고 정사를 논의하게된다. 상주 목사 재임한 기간이 채 1년도 안된다. 동인 정승 이산해 , 노수진, 정언신, 이발, 최영경, 서인 강경파 정철 정인홍이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드디어 성룡과 틈이 벌어져 남인 · 북인의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선조실록 22년 12월 1일) 서인 이항복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 남인 조정에는 아직 세자가 책립되지 않았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다 광해군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임금은 인빈의 소생인 신성군을 사랑하였다.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 선조 24년 (1591) 정월 일본에 간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귀국했다. 이들이 일본으로 향한 때가 전해 3월이니 무려 10개월이나 걸린 노정이였다. 이조 판서 유성룡은 이순신을 계속 정읍 현감으로 놔둘수 없었다. 선조 24년(1591) 2월 이순신은 진도 군수(종4품)로 승진했다가 곧바로 종3품 가리포( 전남 완도 ) 첨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다시 전라 좌수사로 승진했다. 전라 좌수사는 정3품 당상관이다. 이때가 선조 24년 (1591) 2월 16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전으로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서애의 공적에 대해서 흔히 논쟁하기를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반대한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나 충무공을 추천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 한다”고 말했다. 십만양병설의 근거를 제시한 김장생은 인조 9년(1631)에 사망했다. ‘선조실록’은 인조 21년(1643)부터 시작해 14년 만인 효종 8년(1657)에 완성되었다. 32세 때인 선조 6년(1573) 홍문관 수찬 유성룡은 조강에서 말했다. “지금 밭둑을 잇대어 많은 전지(田地)를 차지하고 있는 자는 대부분 세력이 강하여 공부를 내지 않는 무리이고, 소민이 소유하고 있으면서 공부(貢賦)를 바치는 전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공납을 쌀로 통일하고 부과 단위를 토지 소유로 바꾸는 것은 준역개혁과 함께 가장 중요한 세제개혁이었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 방안을 가장 먼저 제안한 인물은 중종때의 개혁정치가 조광조다. 그러나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사사당하고 말았기에 그런 구상을 실천에 옮길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이도 이를 주장했는데, 그것이 ‘공납 대신에 쌀로 받는 법’이란 뜻의 대공수미법이다. 그러나 이이의 주장도 주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양반 전주들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다. 사실 양반 사대부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조선에서 이법의 시행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 공납 : 각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 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조선 후기에는 국가수입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지닌 세원이다. 공납의 가장 큰 문제는 형평에 맞지 않는 점이다. 공납은 먼저 군현과 마을 단위로 부과되고, 마을에서는 이를 가호 단위로 다시 분배하는데, 각 군현의 마을의 크기가 다른데도 공납부과대장인 ‘공안(貢案)’ 액수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인구가 적은 군현은 마을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가호 단위 부과 기준도 문제다.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전호(佃戶)나 드넓은 토지를 지닌 지주(地主)나 비슷한 액수를 부담했다. 때로는 가난한 전호가 더 많은 공납을 부과 받았다. 관아와 통하기 마련인 양반가의 농간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 문제를 바로 잡지않으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없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선조 27년(1594) 영의정 유성룡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 했다. 선조도 국망의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임란 와중에 최초로 대동법이 시행 당시에는 작미법이라고 불렀다. 대동법 · 작미법 · 대공수미법은 모두 같은 것으로 잡다한 공납을 폐하고 쌀로 통일해 내는 법을 뜻한다. 백성들은 이제 수많은 가짓수의 공납 대신 쌀로 납부하면 되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토지 보유의 다과(多寡)가 부과 기준이 되었다는 점이다. 땅이 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공납의 부담에서 해방된 것이다.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방납(防納)의 폐단도 없어졌으니 농민들의 부담은 대폭 경감되었다. 위화도회군 후 단행한 과전법(科田法) 이래 최대의 개혁입법이었다. “상신 유성룡이 건의하여 요동에 자문을 보내 압록강 중강진에 저자를 열어서 교역하게 하니, 이것이 중강개시의 시초다” 라고 전하고 있고 국제무역으로 굶주림을 해결하고 국부로 키우자는 발상의 전환이 가져온 변화는 거대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면포 1필 값이 피곡 한 말도 되지 않았으나 중강진에서 팔면 쌀 20여 말이 넘었다. 은, 구리, 무쇠를 교역하는 자도 10배의 이익을 얻게되었다. 중강개시에서 요동의 곡식이 유입되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기근(飢饉)에서 벗아난 것이다. 유성룡은 국가에서 돈 한푼 안들이고 수많은 백성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이 소금사업이라도 생각했다. 황해도 섬에 소금 굽는 사람들을 모을 때 생산물의 반을 준다고 하면 서로 모일 것이며, 나머지 반을 풍년이 든 곡창지대로 가져가 곡식과 바꾸어 서울과 충청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머지는 소금을 생산한 개성부의 종자로 주자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돈 한푼 안들리고 수많은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과거 소금 생산의 이익은 모두 소수의 궁가(宮家)나 권세가들이 독차지했다. 유성룡은 사염(私鹽)을 억제하고 공염(公鹽)을 확대하면 백성들과 나라 모두 이익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성룡은 선조와 조강할 때도 소금 판매를 거듭 주장했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쟁이 격화도로 조짐이 보인 것이다. 풍신수길은 조선 남부를 달라는 요구조건이 거부되자 재침 결심을 굳혔다. <정유재란> 나덕윤은 정개청 외에도 최영경 · 유몽정 · 이황종 등 기축옥사 때죽은 사대부들의 신원을 요구하면서 그 당시의 위관인 서인 정철(鄭澈)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철은 사납고 강퍅한 성미로 이에 환란을 얽어 만들 꾀를 내어 불평자들을 모아 그 세력을 확장하고, 몰래 함정을 파서 죄 없는 사람을 빠뜨리고, 공법을 침탁(稱託)하여 사적인 원수를 갚아 평생에 눈을 홀긴 조그만 혐의 까지도 모두 보복하려 한 것입니다. 이 무렵 정철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는 세자 건저 문제로 귀양갔다가 임진왜란 때 백성들의 요구로 복관 되었으나 삼사의 논박을 받고 강화도 송정촌으로 물러나 은거하다가 선조 26년(1593) 12월 사망했다. 정유년(1597) 1월 21일, 권율 원수가 한산도 진영에 이르러 이순신에게 “적장 가등청정이 다시 나온다고 하니, 수군은 요시라니 말대로 하라.” ‘원균’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과 대립했다. 정유재란 때 적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칠천도에서 전사했다. ‘이원익’ 남인의 영수로 유성룡 사후 대동법을 되살리는 데 힘썼다. 김응남과 윤두수 서인, 북인 영수 이산해, 남인 이원익은 이순신을 옹호한 반면 서인 윤두수는 원균을 옹호했다. 요시라 대마도 좌하촌 출신 유창한 조선어 솜씨 덕분에 소서행장의 통역이 되었다. 이중간첩 “당시 서인은 원균 편을 들고, 동인은 이순신 편을 들어 서로 공격하느라 다른 국사는 치외도지했으니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라고 한탄 할 정도였다. 문제는 서인만이 아니라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까지 공격에 가담한 데 있다. 이순신 제거에 선조와 서인 영수 윤두수, 북인 영수 이산해가 동조하는 형국이었다. 결국 유성룡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의정부 영의정 유성룡이 아뢰었다.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경성 사람인가?” “ 그렇습니다. 성종 때 사람 이거의 자손인데, 직사(職司)를 감당할만 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로 천거했습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 이라고 극언했다. 여기에 서인과 북인들이 동조하고 있었다. 유성룡은 분노했다. 그 분노는 이순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선조 30년(1597) 2월 28일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성룡의 사직차자는 이순신 공격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순신 처벌에 반대하는 유성룡을 순찰 명목으로 경기로 내보낸 다음 처벌을 결정한 것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의금부 옥에 갇힌 이순신이 혹독한 고문을 받았음은 당연하다. 한번만 더 심문하면 그대로 고문사할 상황이었다. 이때 이순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차자(箚子)가 올라왔다. 정탁의 차자였다. 정탁은 남인이자 퇴계의 문인이다. 차자가 올라온 상황에서 선조가 계속 죽이라고 명할 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에 처해져 옥문을 나섰다. 선조 30년(1597) 4월 1일, 체포된 후 27일 동안 이승과 저승을 오간 셈이다. 그 사이 원균은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그 자체가 조선 수군의 위기였다. 원균은 거제도의 영등포로 퇴각하려 했으나 영등포는 일본군이 선점하고 있었다. 영등포에 상륙하려던 조선 수군은 4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원균은 겨우 거제도 칠천량에 상륙했다. 그러나 패전 소실에 격분한 권율이 그를 소환했다. 고성에 있던 권율은 원균이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고 격서를 보내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독촉했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와 더욱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웠으나, 여러 장수들이 군사일을 의논하고자 해도 만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수군이 습격했다. 조선 수군은 전열도 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원균은 탈출하다가 도진의홍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했고, 전라 우수사 이억기도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한산도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도원수 권율의 군관 이덕렬 등이 백의종군하고 있는 이순신의 숙소를 찾아온 것은 조선 수군 궤멸(潰滅) 사흘 뒤인 7월 18일 새벽이었다. 7월 22일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 통제사로 재임명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 부산 본영의 선박만 600여 척이었다. 12척의 배로는 어차피 이길수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유재란 발발 직전 조선 남부에는 약 2만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 본토에서 12만여 명이 더 증원되어 일본군은 모두 14만여명이나 되었다. 이순신을 제거하고 원균을 패퇴시킨 일본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조선 수군이 궤멸함에 따라 일본군은 숙원인 호남 지역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1597년 8월 3일, 일본군 총대장 소조청융경은 일본군을 좌 · 우 2개군으로 나누어 우희다수가를 좌군대장, 모리수원을 우군대장으로 삼고 전주를 목표로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좌군은 남해안을 따라 고성 ⟶ 사천 ⟶ 하동 ⟶ 구례 ⟶ 남원을 거쳐 전주에 도착 하도록 했으며, 우군은 낙동강을 건너 거창 ⟶ 안의 ⟶ 진안을 거쳐 전주로 진군 하도록 했다. 수군 역시 하동에 상륙해 섬진강을 거쳐 구례로 진군하도록 했다. 수군이 없어진 호남은 무인지경이라 여기는 듯했다. 좌군대장 우회다가수라와 그 선봉 소서행장은 고성 ⟶ 사천 ⟶ 하동을 경유해 전주로 향했으며, 우군대장 모리수원과 그 선봉 가등청정은 서생포 ⟶ 밀양 ⟶초계를 거쳐 전주로 향했다. 조선의 도체찰사 이원익이 선산의 금오산성에, 도원수 권율이 성주나 김천사이를 지키고 있었고, 경상 우병사 김응서가 합천에 방어막을 쳤으나 길목을 지키는 정도에 불과해다. 명군들도 충주 · 전주 · 성주를 지키고 있었으나 제해권까지 장악한 일본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군은 영남을 휩쓸고 호남으로 진격했다. 선조와 유성룡의 반대파들이 아군으로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던 소서행장은 일본 좌군을 이끌고 고성 ⟶ 사천 ⟶ 하동을 거쳐 8월 7일에는 구례를 점령했다. 소성행장의 빠른 북상에 조선 조정은 경악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8월 12일, 소서행장은 남원성을 포위공격했다. 선조 30년(1597) 8월 29일, 소서행장이 이끄는 일본 우군은 전주를 출발해 충청도로 진격했다. 9월 3일에 공주를 무혈점령한 일본군은 연기와 청주를 거쳐 천안으로 북상했다. 명나라도 선조 30년(1597) 3월 6만 대군의 동정군을 파견했다. 재파견된 명군은 병부좌시랑 형개가 경략, 산동 우창점, 양호가 경리, 마귀가 제독, 양원이 부충병이다. 충청 방어사 박명현은 일본군을 여산, 은진에서 요격하고 충청 병사 이시인도 화덕, 한산 방면으로 진출하는 적군을 요격했다. 9월 7일에는 명군과 일본군이 직산에서 전투를 벌였다. 제독마귀 휘하의 명군도 6차례의 대접전 끝에 일본군을 격퇴했다. 직산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사기를 단번에 저하시킨 반면 명군과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었다.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임진년 이듬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임란 초기 기세를 올리던 일본군은 평양성 패전과 수군의 패전을 계기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정유재란도 직산 패전과 명량패전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조선 남부에 웅지한 일본군은 북상할 수 없었고, 조선도 일본군을 축출할 수 없었다. 다급한 것은 조선만이 아니었다. 명도 결판을 내야 했다. 소강상태에서도 일본 수군은 가끔 산동반도를 공격했고,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홍기(興起)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명 영토 내에서 일본군과 여진군 둘을 상대해야 할 판국이였다. 명 조정은 양호를 경질하고 천진순무 만세덕을 신임 경리로 임명하고 군사를 증원했다. 조명연합군은 다시 총공세에 나섰다. 명군의 동로군 제독 파권은 2만 4천여 명, 서로군 제독 유정은 1만 3,600여 명, 중로군 제독 동일권은 1만 4,500여 명, 수로군 제독 진린은 1만 3,200여 명을 이끌었다. 도합 6만 5,300여명의 대군이었다. 조선도 전력을 기울었다. 동로군의 경상 좌병사 김응서는 5,500여 명, 서로군의 전라 병사 이관악은 1만여 명, 중로군의 경상우병사 정기룡은 2,300여명, 수로군의 이순신은 7,300여명을 이끌었다. 도합 2만 5,100여 명인데, 가장 적어야 할 수군의 숫자가 두 번째로 많은 것은 이순신이 그간 수군을 상당한 수준으로 복원시켰음을 말해준다. 선조31년(1578) 8월까지 공세 준비를 완료한 조명연합군은 남하를 시작했다. 도산성, 사천성, 왜교성을 한꺼번에 함락시켜 승전하려는 기세였다. 선조 31년(1598) 9월 11일 동로군 선봉장인 해생이 4,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산성을 공격하면서 대공세의 막이 올랐다. 해생은 저항하는 일본군 1천여명을 격파하고 도산성에서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학성산을 점령했다. 김응서는 19일 동래지역의 일본군을 몰아내고 울산과 부산을 연결하는 통로를 장악했다. 일본의 정세도 큰 변화가 있었다. 1598년 8월 18일 풍신수길이 병사한 것이다. 사대로(四大老)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수립되었다. 사대로는 풍신수길 사망 사실을 비밀에 붙인 채 8월 28일과 9월 5일 두차례에 걸쳐 조선 출병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제 종전이 가까워진 것이다. 임란 이듬해인 1593년부터 유성룡은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 행정과 군무를 총괄했다. 유성룡과 탄핵기사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일본의 사대로가 조선출병군의 철병을 명령한 지 한달 후쯤인 선조 31년(1598) 9월 27일조에서다. 탄핵을 받았다는 이유로 유성룡이 사직 차자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무술년(1598)의 종계변무(宗契辨誣) 유성룡이 어머니가 늙어서 가지 못한다고 말하였더니, 임금은 속으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이원익은 이미 북경으로 떠났고, 우의정 이덕형도 제독 유정을 따라 순천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조정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정승이었다. 전쟁 종결이 확실시 되면서 선조는 유성룡을 제거하기로 결심했고 이를 간파한 이이첨을 비롯한 북인들이 적극 가세하면서 현인이 된 것이다. 유선거는 ‘혼정편록’에서 ”지평 이이첨이 맨 먼저 유성룡을 탄핵하자 윤홍, 유숙, 홍봉선, 최희남 등이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렸다“ 라고 북인들의 공세로 사건이 본격화되었음을 전했다. 뜻밖에도 종계변무가 현안(懸案)이 되자 유성룡은 늙는 노모를 핑계로 명나라에 가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유성룡이 파직된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은 공교롭게도 이순신이 노량해전을 치른 날이다. ”통제사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선생이 논핵되었다는 말을 듣고 실성(失性)해서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유성룡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도 죽을 지경의 고문까지 당한 이순신이다. 유성룡의 실각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마한다. 그래서 이순신은 전선에서 죽기로 결심했다. 노량해협과 그 아래 관음포에서 적선 5백여 척과 조선 함선 85척이 뒤섞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행록’ 은 이렇게 전한다. 18일 저녁부터 시작된 싸움은 유성룡이 파직되는 19일까지 계속된다. 이순신이 최후를 맞은 것은 19일 새벽이다. 날아온 탄환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나갔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기자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고 하고 말을 마치자 곧 숨을 거두었다. ‘난중잡록’은 이순신이 마치 죽음을 자초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융복을 입어 적의 눈에 잘 띄는데도 이순신이 직접 북채를 들고 싸움을 독려했다는 것은 적에게 자신을 쏘아달라고 자청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라고 보고하자 선조의 반응은 냉담했다. 12월 5일 유성룡은 태백산 아래 도심촌으로 가서 母親(안동김씨)을 만났다. 만감이 교차했다. 다음 날 삭탈관직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란 극복에 힘쓴 인물들은 유성룡의 삭탈관직에 분개했다. 선조 32년(1599)초 명나라에서 돌아온 좌의정 이원익은 차자를 올려 항의했다. “유성룡은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 자신을 지키고 혈성으로 나라를 걱정하였는데, 이제 전하께서 홍여순 등의 참소를 쫒아 어진 이를 끝까지 쓰지 못하고, 일시의 착한 무리를 유성룡의 당이라고하여 멀리하고 배척하니, 신은 사람의 화가 이를 쫒아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는 또 경연에서도 유성룡을 재등용하도록 주장했다. 이항복은 유성룡을 처벌하려면 자신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선조 36년(1603)에 부원군 복귀, 선조 37년 호성공신 유성룡을 2등공신으로 책봉, 선조 38년(1605)정월에 공신들이 모여서 회맹(會盟)했는데, 유성룡은 물론 불참했다. 3월에 선조가 봉조하의 녹을 내렸으나 이 역시 사양했다. 선조는 이를 되돌려 보내면서 몇 차례 더 소명(召命) 했으나 유성룡은 모두 거부했다. 선조도 유성룡이 자신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벼슬을 거부한다고 죄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유성룡은 선조의 양심에 돌을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유성룡은 더 이상 세상에 나갈 마음이 없었다. 선조 40년(1607) 유성룡은 병이 중해졌고 4월부터는 병문안도 모두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편안하고 조용하게 조화(造化)로 돌아가련다.” 1607년(선조40년) 5월 6일 향년 66세, 조선조 500년 최고의 재상이라 평가받은 유성룡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3일 동안 정사를 정지하게 했는데 선조를 당혹하게 하는 일이 또 발생했다. ‘연보’는 ‘사대부들이 성남 옛집 터에 신위를 마련하고 친척상처럼 통곡을 했다’고 전한다. 성남은 남산 남쪽을 뜻한다. 허목의 ‘서애유사’는 시민들이 4일간이나 시장 문을 닫고 “선생이 없었던들 우리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 남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1542년(중종37)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558년(명종13) 17세 광령대군 5세손 이경의 딸과 결혼하다.
-1566년(명종21) 25세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권지부정자로 임명되다. 28세 사헌부감찰, 29세 병조좌랑, 39세 상주목사, 40세 홍문관 부제학, 41세 사간원 대사간, 우부승지에서 도승지로 특진되다.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으며, 왕명으로 ‘황화집’ 서문을 지어 올리다. 42세 경상도 관찰사.
-1588년(선조21) 47세 형조판사겸 홍문관 대제학.
-1589년(선조22) 사헌부 대사헌에 병조판서를 겸무하다, 이조판서가 되다.
-1590년(선조23) 49세 황윤길, 김성일 등을 통신사로 보내 왜국의 정세를 살펴오게하다. 우의정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겸하다. 풍원 부원군으로 서훈(敍勳)되다.
-1591년(선조24) 좌의정에 오르고 여전히 이조판서를 겸무하다. 정읍 현감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로,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임명하도록 하다.
-1592년(선조25) 51세 좌의정으로서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다. 도체찰사로 임명되다.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도록 계청(啓請)하다.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사면하도록 주청하여 윤허 받다. 왜병의 도성 침입이 임박하여, 왕을 모시고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일부 모함으로 그날로 파직되다.
-1593년(선조26) 52세 명군과 협력하여 평양성을 탈환, 수복하다. 충청, 전라, 경상 삼도 도체찰사로 임명되다. 압록강 연안의 중강에서 우리나라의 소금, 철, 은, 면포 등과 중국의 양곡을 교역하도록 해서 식량을 확보하도록 하다.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훈련도감 제조를 겸무하다.
-1594년(선조27) 53세 공물을 미곡으로 대신하여 바치도록 하고, 소금을 증산해서 이를 전매제로 하여 군량미를 확보하도록 하다.
-1598년(선조31) 57세 북인들의 탄핵으로 영의정을 파직당하다. 모든 관직을 삭탈당하다.
-1599년(선조32) 58세 향리 하회(河回)로 돌아오다.
-1600년(선조33) 59세 직첩을 되돌려 받다.
-1602년(선조35) 61세 청백리로 뽑혀 ‘염근청백록’에 이름이 오르다.
-1604년(선조37) 63세 ‘징비록’ 저술을 마치다. 다시 풍원 부원군으로 서용(敍用)되고 호성공신으로 서훈되다. 충훈부에서 공신인 선생의 초상화를 그릴 화사를 보냈으나 나라에 공이 없다고 사양하여 그대로 돌려보내다.
-1605년(선조38) 64세 봉조하의 녹봉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다.
-1607년(선조40) 66세 선생의 병보를 접현 선조가 내의를 보내 병환을 살피게 하다, 향리 농환재 초당에서 운명하다 (5월 6일) 풍산현 수동의 남향 땅에 예장하다. 선조가 예조좌랑 구혜에게 치제(致祭)토록하다.
-1614년(광해군6) 병산서원에 생선의 위판을 봉안했으며, 그뒤에 남계서원, 여강서원, 삼강서원, 도남서원 등에도 위판이 봉안되다.
-1627년(인조5) 문충이라는 시호가 하사되다.
※ 김성일(호 학봉) 서애 선생과 이황에게 동문수학
첫댓글 잘 읽었읍니다. 선생의 외가인 우리 안동김문에도 많은 분들을 벼슬에 천거하여 발탁 호의를 베푼것으로 아는데 위 글을 읽으니 당시 당쟁에 정치 하기가 매우 힘들었음을 짐작하게 하네요 훌륭한 선비 유성룡 선생을 다시한번 기리며 귀중한 자료 올려주신 운철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