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 논쟁
마가복음 18장 22절『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적인 경건 중의 하나가 금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에 온 백성으로 금식하도록 명하셨다. 그 날에는 제사장도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으며, 향을 피우고 피를 뿌리며 하나님께 나아갔다. 더불어 온 백성도 먹기를 그치고 함께 나아가야 했다. 또 어떤 일로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질 때면 그들은 온 종일 금식하며 울어야 했다. 자기 옷을 찢고 재를 뿌리며 먹기를 그치고 울어야 했다. 이것이 구약시대의 금식의 모습이다. 구약의 질서에 따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은 그들의 경건모습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라고 묻고 있다. 주님은 자신을 혼인집의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집의 손님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기쁨의 혼인잔치가 시작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시므로 금식의 문제에 대해 답하고 계시다.
지금도 구약적인 의미로 금식을 가르치고, 마치 그것이 의의 한 기준이나 되는 것처럼 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복음으로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맞지도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새로운 천을 잘라서 낡은 구멍난 옷에 붙여 짜집기 한 것과 같은 부조화스러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요한의 제자들의 틀에 매인 금식요구에 대하여 주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라고 하셨다. 만약에 그렇게 하면 새 옷의 천은 긴장도가 강하기 때문에 헌옷에 대고 짜깁기 해봤자 헌옷을 오히려 더 해어지게 하고 만다.
예수님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기준으로 하는 낡은 옷이 아니라, 성령의 법으로 하는 생베라는 것이다. 그래서 섞일 수 없는 것을 말해주신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낡은 베를 생베에 붙이는 일들이 계속이어지고 있다. 성령을 믿으면서도 율법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새 언약이 하나님이 택하신 새 사람에게 들어간다는 것이다. 새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말한다. 요한복음 3장 3-5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옛사람이 죽어야만 한다. 옛사람은 바로 자기라는 악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물은 율법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첫 갈릴리 지방의 가나라는 곳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런데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바닥이 났다는 것이다. 이 말은 불완전한 혼인잔치, 즉 구약의 상황을 말해주신다. 요한복음 2장 6-7절에서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돌 항아리 여섯은 율법을 나타낸다. 그 속에 있는 물은 손을 씻는 물로서 죄를 씻어 정결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약의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항아리에『물로 채워라』고 하셨다. 이는 율법의 완성이다.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다. 그래서 물은 죽음을 나타낸다. 세례의식에서 물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세례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사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포도주는 예수의 보혈을 상징한다. 죄를 씻는 문제가 구약에서는 물로 표현되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의 보혈로 나타난다. 보혈의 의미는 구속의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예수의 피값을 사탄에게 주고, 회개하는 죄인들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들은 예수와 함께 못박힌 자가 된다. 로마서 6장 2절에서『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로마서 6장6-7절에서는『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다. 그래서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법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율법의 기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으로 부터 주신 그 때로부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까지 해당된다. 예수님은 열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율법과 성령의 법을 비유하셨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등불을 켰으나 다른 기름통을 준비하지 못한 자라고 하고, 슬기로운 처녀는 등불을 켜고, 다른 기름통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등불은 킨 것은 교회에 초대되어 온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다른 기름통은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른 기름통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처녀는 여전히 율법 가운데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처럼 거듭남의 의미도 모르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율법에 얽매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말해준다. 율법에 묶여있는 사람과 거듭난 사람이다. 다시 신령한 몸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모두가 율법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옛사람은 죽어야만 한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은 예수와 함께 못박혀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6장 24-25절에서『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이 태어난다. 새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부활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다는 것이다. 육체가 죽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살아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로마서 6장 8-9절에서『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육적 마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받은 몸이 죽으셨다. 그와 함께 죽은 자는 마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몸이 죽은 것을 믿어야만 한다. 미래 육이 죽을 때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현재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