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오는 리베라를 데리고 백화점에 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 생일이 내일이야. 그런데 나한테 선물 하나도 안 사줄 작정이야?"
"예? 내일이라고요!"
처음에는 한국으로 갈 때까지 아무데도 가지 않겠다며 별로 내키지 않아 하던 리베라가 깜짝 놀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었다.
아무리 구슬려도 리베라가 움직이지 않으려 해서 코레오는 할 수 없이 자신의 생일까지 들먹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달에는 "당신의 생일이 다음 달이네요."
그리고는 얼마 전에는 "어머, 열흘밖에 안 남았어요"라고 말했던 리베라가 세떼바니 집에 도둑이 들은 사건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막상 내일로 다가온 코레오의 생일마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야반도주 하듯이 구이도니아로 이사 온 지도 일주일이 가까워지지만 그동안 리베라는 찬거리를 사러 집 앞 구멍가게에 가는 일 외에는 일절 집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세떼바니에 도둑이 들었던 그 다음 날로 두 사람은 부랴부랴 구이도니아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꿈파니아의 집시들 짓이 틀림없어요. 까삐딴이 심복들을 보낸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을 죽이려고요. 리시를 잔인하게 죽인 것이 그 징표라고요. 놈들이 우리에게 그들의 뜻을 암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에요. 전에 시에나에서의 일도 당신은 돈을 노린 강도였을 거라고 하셨지만 놈들이 당신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해졌어요."
리베라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말 그대로 좌불안석이었다.
"그래도 리베라! 혹시 단순한 도둑이 아니었을까? 마땅히 훔쳐갈 값비싼 물건이 안 보이니까 화가 나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는지도 몰라."
안심시키려 말하던 코레오 역시도 마음속으로는 리베라와 똑같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에 자신 없이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그래서 코레오는 결혼식도 올릴 겸 일단 한국으로 피신하자며 말디니 교수가 휴가에서 돌아올 때까지만 가지오의 집에 가 있자고 말했다. 리베라는 집시들이 가지오의 집도 알고 있을 거라며 그곳도 안전하지 못하며, 괜히 화약고를 지고 들어가 두 사람까지 위험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교수님도 안 계신 사이에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시간이 필요한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말디니 교수는 프로젝트 때문에 여름방학에도 학교에 나오시고 계셨지만 지금은 하필 샤르데냐로 휴가를 떠나 있는 중이었다.
리베라의 말도 일리가 있고 또 말디니 교수가 돌아오려면 보름이나 남아 있는데 이제는 혼자도 아닌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 여러 날을 가지오의 집에서 신세를 질 수도 없는 일이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조반나로부터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었다.
한밤중에 몰래 이사를 시킬 테니 짐을 싸가지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갑작스럽게 하루 만에 집을 구해준 것은 이번에도 조반나였다. 코닐리오 비안코의 동료들에게 급히 집을 구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 중의 하나가 마침 자신의 친구 하나가 자취하려고 집을 계약하고 집주인으로부터 열쇠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직장을 잃는 바람에 고향으로 내려가야 돼서 선불로 지급한 집세를 떼이게 되어 고민하고 있는데 위치도 구석지고 안 좋은 허름한 아파트인데도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는 말을 듣고는 볼 필요도 없이 무조건 결정하겠다며 레스토랑으로 집 열쇠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조반나는 어차피 취소하려던 집이었으니 일단 들어가서 새 집을 구할 때까지만 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허겁지겁 짐을 싸고 기다렸다가 코레오와 조반나의 차 두 대로 그날 밤으로 몰래 이사를 왔다. 차에 들어가지 않은 몇 가지 가구와 세떼바니 집주인과의 정산 관계 등 뒤처리문제는 모두 가지오와 조반나가 맡아주기로 했다.
"제가 왈 때문에 못가더라도 당신 혼자라도 꼭 로마를 떠나셔야 해요. 저 때문에 당신의 공부를 못하시게 돼서 어쩌지요? 미안해요. 코레오! 일단 한국으로 가셨다가 다른 나라로 가실 수도 있을 거예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전에 한 번 말한 적이 있듯이 같이 영국으로 간다면 몰라도……. 우리가 헤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돼!"
"제가 떠나면 그들이 왈에게 무슨 위해를 가할지도 몰라요."
"리베라 말대로 까삐딴이 우리를 죽이려고 까지 생각했다면 리베라가 여기 있어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리베라를 보면 더욱 화가 뻗치고 말걸."
"그럴까요? 아! 코레오. 저는 어떡하면 좋아요!"
리베라의 불안은 구이도니아에 와서도 가라앉지 않고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날마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두 사람이, 말디니 교수가 휴가에서 돌아오는 대로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아예 로마를 떠나서 한국에 들어갔다가 결혼식이 끝난 후 바로 영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은 겨우 엊그제의 일이었다.
마침내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자 리베라도 한결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리베라는 하루라도 빨리 떠났으면 하는 눈치이기도 하였으나 잠시 피신할 겸 한국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돌아올까 했었던 자신의 원래의 계획이 바뀐 이상 코레오로서는 더더군다나 말디니 교수를 꼭 만나고 가야만 했다.
도서관에서 몇 달 동안 해왔던 그 동안의 연구물을 말디니 교수님이 보고 싶다고 하셔서 드렸는데 깜빡 잊고 돌려주시지 않은 채 캐비닛 속에 넣고 휴가를 떠난 것이다.
로마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로 결정한 이상 자신의 연구물도 돌려받고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여 가능하면 새로운 학교에 갖고 갈 추천장도 받아가지고 떠나야만 했다.
"당신 선물 뭐 살까요? 혹시 전부터 갖고 싶었던 물건 없으세요? 하지만 제가 가진 돈은 조금밖에 없으니까 큰 선물은 못 사드려요. 후후훗."
돈은 생각 말고 골라보라는 코레오의 말에 그런 법이 어디 있냐며 자신이 올 때 지갑 속에 남아있던 돈으로, 그러니까 그녀가 공원에서 노래해서 벌었던 돈으로 사준다고 고집했다.
"아무거나 리베라가 하고 싶은 걸로 해줘, 무슨 선물인지 궁금하니까."
"그럼, 우리 조금 있다가 입구에서 만나요. 제가 뭘 고르는지 당신이 미리 보면 안 되잖아요."
"그래, 알았어!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쇼핑 따라다니며 멀뚱멀뚱 오래 기다리는 거니까."
"알았어요. 한 시간 내로 올게요."
"뭐? 한 시간이나!"
리베라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백화점의 다른 층으로 사라지고 나서 하릴없이 왔다 갔다 시간을 보내고 있던 코레오의 눈에 여성복 코너가 눈에 띄었다.
그래, 맞았어. 리베라는 옷이 거의 없지. 저 검정색 실크 원피스가 어떨까? 지난번 결혼식 때 입었던 옷을 같이 산 적이 있어 그녀의 사이즈도 알고 있으니 옷을 사는 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리베라가 마음에 들어 할지 몰라서 걱정이 좀 되긴 하지만 집시들은 검정색을 좋아한다지 않았던가?
코레오는 자신의 눈을 잡아 끌은 가늘게 흰색으로 처리된 깔끔한 라운드 넥크와 소매단을 가진 검정색 실크 원피스를 향해서 다가갔다.
물 실크라서 부담 없이 입기에도 좋다는 판매원 아가씨의 설명에 선뜻 사들고 입구에서 기다리면서 리베라의 즐거워할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설레였다.
리베라가 얼마나 좋아할까! 어차피 갈아입을 마땅한 옷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옷부터 사러 다닐 수도 없을 텐데…….
"어머, 코레오!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예요?"
저쪽에서 리베라가 다가오며 물었다.
"응, 기다리면서 왔다 갔다 하다가 리베라 옷을 한 벌 샀어."
"아니, 제 옷이라고요? 갑자기 왜요?"
리베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긴, 자 그럼 이젠 집에 가도 되나? 그런데 내 선물은 뭐지?"
"그건 비밀이에요. 미리 알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나저나 제 옷이라면서요? 집에 가서 잘 맞지 않으면 어쩌지요?"
"걱정하지마, 요전번에 옷 사러 갔을 때 사이즈를 기억해 놨으니까. 그리고 안 맞으면 바꾸러 오면 되는데 뭘."
"바꾸러 오기 귀찮잖아요. 그리고 시내에 자꾸 나오기도 싫고요. 지금 입어보면 안돼요? 혹시 옷의 색깔이나 디자인이 제 맘에 안 들거나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물리게요. 괜히 비싼 옷을 자꾸 사면 돈이 아깝잖아요."
리베라의 고집에 코레오는 할 수 없이 리베라와 다시 옷을 샀던 코너로 되돌아갔다.
"어머, 너무 예쁘고 잘 어울려요. 아가씨를 위해서 일부러 만든 옷 같아요."
판매원 아가씨의 수다가 아니더라도 검은 실크 원피스 속의 그녀는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코레오, 고마워요. 옷이 마음에 꼭 들어요. 그런데 어쩌지요? 사실은 당신 생일 선물을 사러 나왔던 건데 제가 준비한 것은 너무 보잘 것이 없어요. 제가 산 것은 당신의 우노 45를 위한 자동차 열쇠고리였어요."
"그래? 마침 잘됐군. 그러지 않아도 키홀더가 하나 필요했는데. 그런데 왜 말했지? 내일까진 비밀로 하기로 해 놓고선."
"생각이 바뀌었어요. 당신이 내일까지 기다렸다가는 실망하실까 봐서요."
"리베라,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마음의 정성이 담긴 선물은 다 귀한 거야."
집시들에게 있어서 말발굽은 행운을 상징한다면서 리베라가 백화점 입구에서 상자를 풀어 보여준 것은 말발굽 모양으로 큰 알의 서브 다이아가 박힌 금도금의 열쇠고리였다.
백화점을 나온 후 리베라의 손에 이끌려 파스티체리아에서 코레오의 생일 케이크를 사 가지고 나와서 조그만 광장으로 통하는 입구 쪽으로 막 들어서려는 순간 두 사람은 "악"하고 놀랄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한 떼의 무리들에게 둘러싸였다.
사방에서 갑작스럽게 검은 그림자들이 몰려드는 순간 코레오는 처음에는 개떼들이 달려드는 줄만 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씻지도 않아 얼굴이 땟국물로 반질반질한 아이들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아유또 미! 아유또 미!"하며 저마다 더러운 손을 마구 뻗어왔다.
"비켜. 저리들 가란 말야!"
"와아"하고 달려드는 아이들통에 코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리베라의 옷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번쩍 위로 치켜 올리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이들에 뒤를 따라서 이번에는 헐렁거리는 블라우스와 긴 치마를 두른 여인들이 "아유토 미! 아유또 미!"를 외치면서 악다구니를 부리며 달라붙었다.
"어머나, 이를 어떻게 해!"
여인들의 어깨 너머로 울상이 된 리베라가 케이크 상자와 함께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이런 거지같은 집시들이! 어서 꺼지지 못해! 냉큼 물러서지 않으면……."
코레오는 위로 치켜든 쇼핑백이 찢겨져 나가는 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큰소리로 외치면서 달려드는 아이들을 팔꿈치로 사납게 떼다 밀었다.
코레오의 서슬 퍼런 기세에 놀랐는지 덤벼들었던 집시들이 움찔움찔 물러섰다.
"밀레리레, 밀레리레 페르 파보레!"
작전을 바꾸었는지 이번에는 한 여인이 깨알 같은 글씨로 뭐라고 쓴지도 모를 더러운 골판지를 코레오의 가슴에다 들이밀며 우는 소리로 애걸하며 달려들었다.
여인의 손이 골판지 아래로 숨어들어와 자신의 상의 안주머니로 들어오는 것을 깨닫고 코레오는 본능적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 홱 뿌리쳤다.
그 바람에 여인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코레오! 뒤에도 있어요!"
리베라의 외침에 돌아다보니 어느 틈에 숨어 들어왔는지 뒤쪽에서 허리아래에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두 꼬마 녀석들이 각각 코레오의 양옆의 바지 호주머니를 노리고 있었다.
한 녀석의 손은 이미 주머니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코레오는 녀석의 손을 거머리라도 잡아떼듯이 빼어 던졌다. 조그맣지만 끈적끈적하고 아주 느낌이 안 좋은 손이었다.
"이 더러운 도둑놈들!"
코레오는 마침내 분격하여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불끈 쥔 두 주먹을 허공에 휘둘러댔다.
아이들이나 여자들만 아니었다면 당장 몇 놈을 때려 눕혀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코레오의 강한 주먹이 당장 자신들의 머리위로 쏟아져 내려올 것으로 겁을 집어 먹었는지, 아이들과 여자들이 "와"하고 썰물 빠지듯이 뒤로 빠지자, 그 때까지도 바닥에 주저앉은 채 악귀 같은 표정으로 코레오를 노려보고 있던 여인도 얼른 몸을 일으키더니 흰자위를 하얗게 뒤집고 코레오에게 버럭버럭 저주의 욕을 퍼부으며 일행을 뒤쫓아 갔다.
줄잡아 열명도 넘어 보이는 집시 여자들과 아이들이었다.
한 차례 세차게 휘몰아치던 폭풍우가 가라앉고도 한참을 광장에 우두커니 맥 놓고 서 있는 두 사람을 지나가던 이태리 사람들 몇몇이 힐끗힐끗 바라보며 웃고 지나갔다.
조금 떨어진 구석에 놓여 있는 벤치에서 한 노파가 커다란 쇼핑백을 옆에 끼고 손에 들고 있는 피자 조각을 갉아먹으면서 우두커니 마주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의 얼굴과 광장 바닥에 떨어져 있는 구겨진 케이크상자를 두리번거리며 쳐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