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 성명서>
윤석열 정부는 대통령의 수능 난이도 조절 지시로 수험생과 학부모를 혼란에 빠뜨린 것에 사과하고 대입 제도 개선을 위한 근본적 대책을 강구하라.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는 지난 15일 윤석열 대통령의 ‘수능 발언’과 그에 대한 교육부 장관의 무책임한 발표, 그리고 대통령실의 설익은 수습 과정이 보여 준 정치적 난맥상과 경솔함에 우려를 감출 수 없다. 아울러 수능 시험을 불과 5개월 앞둔 시점에서 수험생과 학부모의 불안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수능 시험의 난도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대책을 내놓은 교육부의 행태에 문제 의식을 갖고 다음과 같은 논평을 통해 교육부의 책임 있는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바이다.
첫째, 대통령의 ‘수능 발언’은 일관된 아마추어리즘의 전형이다.
“변별력은 갖추되 학교 수업만 열심히 따라가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출제하고, 학교 수업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은 출제에서 배제하라”
위와 같은 대통령의 발언은 상식적이지만 거칠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보여 준 교육 정책에 대한 미숙한 이해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학교 교육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었지만 ‘학교 수업’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내놓은 수사적 표현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수능 출제의 방침을 제시하는 것은 불필요한 개입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대통령이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수능 출제의 난도나 내용도 바뀔 수 있다고 믿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 대통령의 뜬금없는 메시지는 대입 수능을 불과 150일 앞두고 문제 출제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수능 출제기관을 겨냥해 쏘아 올린 공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쇠구슬은 엉뚱하게도 수험생과 학부모를 향한 대포알이 되어 떨어져 버렸다.
대통령실은 교육부 장관이 대통령의 메시지를 잘못 전달했기 때문에 국민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서둘러 해명했다. 사실, 대입 정책과 수능 시험에 대해 일반 국민보다 못한 ‘상식’의 수준에서 발언한 대통령에게는 잘못이 없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지난 윤석열 정부의 1년은 아마추어리즘을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성장시키기에는 턱없이 짦은 기간이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학부모와 학생들이 다시금 깨닫게 하였다.
둘째, 대통령실과 교육부 장관은 대통령을 향한 충성 경쟁에 눈이 어두워 사태를 악화시키는 무능함을 보여주었다.
뜬금없고 경솔한 대통령의 발언이 미칠 사회적 파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를 복사하여 붙여 넣기를 하듯 성급하게 발표한 장관의 태도는 지난해 8월 ‘초등학교 입학 연령 만 5세 하향’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려 했던 대통령과 박순애 전 교육부 장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브리핑과 연이은 대통령실의 수습 과정은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이번 수능은 쉬운 수능, 즉 ‘물수능’이 될 것이라는 오해를 갖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입시 전문 기관과 사교육업체는 9월에 치르게 되는 대입 수능 모의평가부터 어려운 문제가 출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에 대한 교육의 사태 수습 방안은 대입 담당 국장에 대한 문책성 인사,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대한 감사 예고였다. 교육부의 이러한 조치는 사태 해결에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을 전망이다. 오히려 대입 수능 문제를 쉽게 출제하라는 압력을 공개적으로 행사하고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물수능 시그널’을 강력하게 보여 주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신중하고 체계적인 자세로 접근해도 모자랄 대입 수능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쉽거나 어렵게 출제될 수 있다는 국민들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게 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대입 수능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어도 모자랄 상황에 불안과 염려를 유발한 이는 다름 아닌 윤석열 대통령과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실과 교육부장관은 수능 출제 기관에 출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압력을 가하고 국민적 혼란을 가중시킨 것에 대해 사과하고 사태 수습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교육부는 공교육 정상화를 중심에 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입 제도 개선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지난 16일 교육부 대입 담당 국장이 대기발령 조치되었다. 대통령실은 이에 대해 ‘사교육 산업과 교육 당국 간의 강력한 이권 카르텔로 인해 교육 질서를 왜곡하고 이것이 학생들이 공정한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요지의 입장을 밝혔다. 대입 담당 국장이 6개월 만에 경질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것이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전날 사교육비 증가와 대입 수능시험 난도 문제를 지적한 다음 날 이루어진 인사 조치라는 점에서 ‘2024학년도 대입 수능 6월 모의평가’ 출제에 대한 문책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교육부는 대입 수능과 모의평가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대한 감사도 실시할 예정이다. 대입 수학능력시험 문항이 교육과정을 벗어나 출제되고 있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다음 날이다.
지난 몇 년 간 ‘킬러 문항’이라 불리는 어려운 수능 문제에 대하여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교육과정 내 출제 원칙을 강조해 온 것은 다름 아닌 교육부였다. 그런데 교육부가 모의고사의 난도를 명분으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대해 감사를 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모순이다.
수험생과 학부모를 비롯한 국민들은 교육부가 수능 시험의 난도에 대한 논쟁을 증폭시키는 미봉책을 내놓기보다 수능에 의존한 ‘줄세우기식 대입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려는 책임 있는 태도를 보고 싶어 한다. 교육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현행 대입 제도가 학교 교육과정의 성취 기준에 근거해 학생의 역량과 대학에서의 ‘수학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타당성과 공정성을 갖추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선발의 공정성만큼 중요한 가치가 학교 교육의 정상화라는 것을 기억하고 미래형 대입 제도 마련을 위해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교육부는 AI에 기반한 에듀테크와 디지털 교육 혁신이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의 역량을 모두 길러줄 것이라는 환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5지 선택형 문제를 누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푸는가를 통해 학생들의 암기력과 문제 풀이 능력을 변별하는 20세기형 시험이 에듀테크와 디지털 교육 혁신을 통해 미래 역량을 길러 온 학생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한다.
국민들은 피곤하다. 대통령의 뜬금없는 ‘수능 발언’이 증명해 준 정부와 교육 당국의 대책 없는 무능함을 하루 만에 복습했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그간 누적된 수험생과 학부모의 불만이 불안감을 거쳐 분노로 번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근본적인 사태 수습 방안과 함께 학교 교육과정의 정상화와 학생의 행복을 우선순위에 둔 대입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해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통령실은 교육부와 장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번 사태를 무마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수험생과 학부모가 안심하고 대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대책 마련에 힘써야 할 것이다.
2023년 6월 19일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