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호 산문집 바람개비는 즐겁다
소금의 꿈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
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 「골로새서」 4:6
1953년 6·25전쟁이 끝난 뒤부터 항구도시 인천에 정착하여 초·중·고교를 다닌 나는 소위 인천 “짠물” 출신이다. 내가 한때 살던 곳이 천연소금을 만드는 염전(鹽田) 근처라 어려서부터 소금에 익숙하다. 염전에서는 땅을 평평하게 고른 후 바닷물을 붓고 일정 기간 뜨거운 햇볕이 비추어 바닷물이 날아가고 습기가 빠지면 하얗고 뽀송뽀송한 예쁜 소금 결정체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금의 쓰임새는 매우 다양하여 음식 간을 맞추거나 맛을 내기 위한 조미료로 쓰이거나 배추, 생선 등에 소금을 뿌려 절이기도 하고 상큼한 젓갈류도 만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금은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한다. 어찌 보면 하얀 소금은 용도가 여럿인 기묘한 물질이다.
인천 자유공원 밑 웃터골에 있는 제물포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소금을 다시 만났다. 학교 교훈이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었기 때문이다. 항구도시에 어울리게 소금과 등대로 구성한 학교 모표는 소금 결정체 세 개를 삼각형으로 밑에 배치한 다음 그 위에 등대 모양을 얹었다. 소금과 빛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구체적 상징물인데, 이 디자인은 부패를 막는 소금 같은 양심을 가지고 등대처럼 험난한 세상을 인도하라는 뜻이리라. 제물포고등학교의 소금과 빛의 구체적 행동강령으로 “무감독시험(Honor system)” 제도가 있었다. 내 고등학교 시절에는 무감독시험 체제하에서 낙제로 진급하지 못하는 학생이 오히려 영웅이 되기도 했다. 감독교사가 없으니 낙제를 면할 정도로 부정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었겠지만, 학교 전통을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했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저 바보, 멍청이라고 불러야 할까?
성서에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바로 예수의 소금과 빛의 가르침이 나오는 부분이다. 30세에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했던 첫 설교가 그 유명한 산상설교다. 흔히 팔복이라 불리는 이 설교는 신구약 전체의 교리를 요약한 것으로, 예수는 이 팔복에 관한 부분에 이어 곧바로 “소금과 빛”에 관해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 : 13~16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부분 기독교인은 심지어 상당수 목회자까지 “빛과 소금”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분명 “소금과 빛”이라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시시한 소금보다 화려한 빛이 더 좋다는 뜻인가? 어떤 사람은 소금과 빛의 순서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할지 모르나 나에게는 소금이 빛보다 먼저 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예수님이 직접 그 순서를 정하셨다. 소금의 역할을 잘 해낸 다음에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열대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소금은 일상생활의 필수품이어서 우리보다 살아가 는 데 훨씬 더 중요한 생필품이었을 것이다. 소금의 부패 방지 효과는 물질적 차원에서 절대 필요하지만, 영적 생활에도 필수다. 물욕이나 탐욕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하고 부패하지 않으려면 소금은 없으면 안 된다. 우리는 빛이 되기 전 몸과 마음이 죄로 썩지 않도록 소금에 절여야 한다.
소금은 부패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방부제, 즉 죄에서 독을 빼주는 해독제다. 소금은 어떤 의미에서 유교적 용어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영역, 즉 극기복례(克己復禮)에 속하고, 사람됨에 있어서 기본 요소다. 반면 빛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영역이 아닐까. 우리는 소금 의 역할을 잘한 후에야 이웃을 사랑하고 인도하고 사회에서 빛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금의 역할은 신앙생활에서 토대 작업이고 빛의 기능은 상부구조의 과제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 화려한 “빛 되기”에 앞서 겸손한 “소금 되기”가 되어야 하리
라.
바다에서 나오는 소금은 생명의 근원이다. 38억 년 전 하늘에서 염산성 비가 내려 바다가 만들어졌으니 소금의 나이는 38억 살이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다. 류시화는 「소금」이란 시에서 소금을 상처, 아픔, 눈물과 연결시킨다. 소금이 “바다의 상처”이고, “바다의 아픔”이며 “바다의 눈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38억 년 전 소금이 바다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치열한 과정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소금은 짠맛으로 단맛을 더할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의 부패를 막느라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인 것은 남의 맛을 더해주느라 자신을 희생하여 아픔이 되는 것일까? 흰색 소금이 뿌려 질 때 바다는 최고 경지의 “눈물”이 된다. 순백색의 순결한 소금은 썩 고 부패한 곳에서 눈물을 흘린다. 소금에 대한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의 도약이다. 이 시인의 노래처럼 우리가 이 사회와 역사에서 자연과 타자를 위해 공감과 사랑을 실천하는 건강한 하얀 소금이 되려면 “상처” 입고 “아픔”느끼고 “눈물”을 흘려야만 하리라.
나 자신과 관련된 소금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나는 6~7세 되었을 때 언젠가 자다가 요에 오줌을 쌌다. 아침에 어머니는 나에게 키를 쓰게 하고 동네 몇 집을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하였다. 내가 키를 머리에 이고 옆집에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소금을 뿌렸다. 이것은 아동의 야간 방뇨증을 해결하려고 소금을 뿌려 일종의 잡귀를 물리치려는 민간 의식이다. 그 후에 나는 잠자리에서 야간 방뇨를 계속한 기억은 없다.
나는 2000년대 초, 이스라엘, 이집트, 요르단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 온 적이 있다. 소금호수로 유명한 사해(死海)를 갔다. 그곳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물에 들어갔는데 소문대로 내 몸이 가라앉지 않고 동동 떴다. 죄짓기 쉬운 인간은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바다에 몸을 내던져 깨끗해지면 죄의 무게에 가라앉지 않고 위로 솟아오르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예수께서 소금을 강조한 까닭일까?
최근 나는 어느 날 꿈속에서 하얀 소금을 한 움큼 쥐고 여러 번 하늘로 뿌렸다. 그 소금들은 창공에 박혀 별무리가 되었다.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가끔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어린 시절 인천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하얀 소금을 경이롭게 바라보던 때를 기억하며 별무리들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소금에 대한 나의 꿈은 소박하다. 나는 이웃에게 화려한 빛보다 겸손한 소금이 되고 싶다. 빛은 이해와 통찰을 주지만 자주 교만과 눈멂(맹목)을 주지 않는가? 나는 소금처럼 귀하고, 희고, 변하지 않고, 맛을 내고 싶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삶에서 나는 다시 “짠물”이 되 어 이러한 소금의 꿈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첫댓글 소금의 역할을 잘 해낸 다음에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열대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소금은 일상생활의 필수품이어서 우리보다 살아가 는 데 훨씬 더 중요한 생필품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