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온사(穩穩舍)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조선후기 과천현의 관청. 객사다.정조가 묵어가면서 이름을 붙여주고 편액을 써줘서 유명한 객사이기도 하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다. 건강가정지원센터와 같이 있어 입구가 복잡하고 주차도 마땅치 않으나, 안으로 들어가면 뒤를 두른 담장이 제대로 위용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1. 방문지대강
명칭 : 온온사(穩穩舍)
위치 : 경기 과천시 관악산길 58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3.3.14.
2. 둘러보기
1) 소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이 건물은 가운데에 정면 3칸의 본채(정청)를 두고 좌우에 동헌과 서헌을 각각 3칸을 연결하여 세웠으며, 본채는 좌우의 건물보다 약간 높게 지어 전형적인 객사 건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원래 객사는 바닥에 전돌을 깔고 이곳에서는 제례를 올리는 정청과, 마루와 온돌을 두어 숙소로 이용되는 동·서헌으로 구분되는데 이 건물에서는 정청에서도 앞면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이 건물은 1649년(인조 27)에 창건되어 그 뒤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러 가는 도중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주위의 경관이 아름답고 몸이 편안하다 하여 친필로 쓴 ‘穩穩舍’란 사호(舍號)를 내렸다고 한다.
그 뒤 1895년(고종 32)의 행정개편이 있은 후 이 객사는 기능을 상실하고 과천군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1914년부터는 과천면사무소 건물로 이용되다가 1932년 면사무소 건물이 신축되면서 이 건물은 부속 건물로 남아 있다가, 1986년에 원위치였던 중앙동사무소 뒤편에 이전 복원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옛 관리들의 편안한 쉼터, 온온사
온온사는 조선시대 과천현 관아에 부속된 객사의 정당 건물이다. 객사는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로 이용하던 곳이다.
과천의 객사는 인조 27년(1649) 현감 여이홍이 객사 동헌을 건립하여 창건되고, 이후 현종 7년(1666) 남창조에 의해 서헌이 건립되어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규모가 크다. 이는 조선시대 왕이 남행할 때 과천을 경유하며 묵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온온사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조가 현륭원 참배를 위해 능행할 때 과천의 객사에 머물며, ‘주위 경관이 좋고 쉬어가기 편하다’하여 ‘온온사(穩穩舍)’란 현판을 내림으로써 이름을 갖게 되었다. 동헌에는 옛 별호인 부림을 따서 ‘부림헌(富林軒)’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인들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과천면의 청사로 사용되다가, 1932년 기존 건물이 헐리고 원형이 변경되었다. 이후 1986년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객사의 형태를 참고로 해체 복원하였다.
현재 온온사 건물은 석축 위에 정당 3칸, 좌우 익실 3칸을 둔 정면 9칸, 측면 2칸의 구조이며, 팔작지붕집에 정당 부분에 맞배지붕을 얹어 놓은 형태이다.(과천시청 소개문)
앞으로 보이는 것은 건강센터이다.
온온사 안 대청에 걸린 부림헌 편액. 부림은 과천의 옛이름으로 역시 정조가 명명 하사한 친필이다.
부림헌. 정조가 써준 편액. 오른쪽 위에 '어필'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온온사 아래편에 현감 비석군이 있다.
은행나무 노거수.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고
역대현감 비석군
구장변공성환자선비?
3. 돌아본 후
1)
과천시청의 소개문을 보면 낙안객사를 참고하여 복원하였다는데, 이전 건물들의 자료사진을 보면 현재 이 객사와 많이 다르다. 해체 복원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해체하였다는 것인지, 해체해서 그대로 지을 수 있었다면 낙안객사를 굳이 참조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의아하다.
거기다 과천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어서 여느 객사와는 규모가 달랐을 것이고 게다가 정조조에는 수원에 가려는 행차가 묵어 행궁 수준이어야 할 거 같은데, 이런 단촐한 객사가 왕의 행차를 감당해냈을지 참 많은 의문이 인다.
온온사와 부림헌의 정조 친필은 그 난국에 어떻게 보존이 되어 왔는지, 일제 때 사진을 보면 물론 현판이 없다.
그럼에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구체적인 해명 자료를 보고 싶다.
그래도 긍정적인 건 어쨌든 이만한 규모로 복원해 놓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과천이 당시에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는 적어도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
강릉 객사의 경우는 객사 전체 건물에 진입하는 문이 별도로 있어 임영관 삼문이라 하였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삼문을 통과하면 중대청이 있고, 그 뒤에 과천의 온온사와 같은 형식의 객사 주건물이 있다. 거기에 공민왕이 썼다고 하는(모사품이라는 설도 있음) '임영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과천 객사는 온온사 편액이 있는 건물 안에 대청에 따로 '부림헌' 편액이 걸려 있다. 온온사 편액도 원래 객사 진입문의 편액이 아니었을까. 같은 건물에 두 개라니 조금 이상하다.
객사의 이름은 지역에 따라 다른 거 같다. 전주객사는 '풍패지관'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편액은 명나라 주지번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풍패는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어서 풍패가 되었다.
객사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계신 쪽을 향해 망궐행례를 올리며 왕에게는 충성을 백성에게는 선정을 다짐하는 곳이어서 수령의 공무 처리 장소인 동헌보다 우위에 있는 건물이었다.
객사는 또 지방에 공무로 이동하는 관리의 숙소로 쓰였다. 과천 객사는 왕의 숙소로도 쓰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와서 지방으로 이동할 경우에도 숙소로 쓰였다. 관리, 국왕, 사신 등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국내외 관리의 숙소로 쓰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형태가 표준화되면서 360여개의 객사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칭의 표준화는 없었나 보다. 객사마다 명명 방식과 내용이 다른니 말이다. 명칭이 이루어진 배경이 건축물의 형태보다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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