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벼 쌀 / 김석수
성묘를 마치고 오후에 영산강변에서 자전거를 탔다. 하늘은 푸른 바다 같고 햇빛을 받은 강물은 은은한 비취색으로 반짝이며 공기는 싱싱하고 맑은 향기가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영향인지 모르지만 미세 먼지가 없어서 좋다. 들판에 벼들이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낱알이 무럭무럭 익어간다. 그야말로 황금빛 들판이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갈 무렵이라 잎이 더 노랗게 보인다. 아마 눈부신 햇살이 잎을 비스듬히 비추어서 그런 것 같다. 여름 장마가 길어서인지 추수한 곳은 눈에 많이 띄지 않는다. 산비탈 아래 있는 논은 아직도 퍼렇다.
자연이 주는 풍성함을 만끽하며 신나게 페달을 밟다가 논두렁 옆에 가지런히 널어놓은 볏단을 보니 어릴 적 추석 무렵에 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니며 한 움큼씩 우물거리던 올벼 쌀이 생각났다. 그 시절에 올벼 쌀은 추석이면 꼭 마련해야 했던 음식 중 하나다. 여름 동안 꽁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올벼 쌀을 씹는 맛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아침저녁으로 휘감는 바람이 제법 쌀쌀해져 올 무렵이면 아버지는 새벽에 일찍 논에 나가 이슬 맞은 나락을 한 지게 해 왔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마당에 홀태를 차려 놓고 부지런히 훑었다. 낱알을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을 지폈다. 멍석을 깔고 찐 나락을 바가지로 퍼내서 말렸다. 맑은 가을볕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과 구수하게 느껴지는 냄새가 어우러져 침을 흘리게 한다.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해가 서산 중턱으로 넘어가고 땅거미가 찾아오기 전에 어머니는 절구통에 넣고 방아를 찧었다. 찧기가 끝나면 키로 까불러 껍질을 분리해 낸다. 어머니는 옆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키질을 하다 말고 한 움큼 주기도 했다. 처음 한 줌 입에 넣고 씹는 올벼 쌀 맛은 꿀맛이다.
주머니에 두둑하게 넣는 것도 눈감아 주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동네 친구들에게 한 줌씩 나눠주며 으쓱대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 몰래 마루에 있는 쌀독에서 올 벼쌀을 퍼내어 양쪽 호주머니에 빵빵하게 넣고 학교 가면서 오물거리도 했다. 친구가 말을 걸어오면 벙어리처럼 우물우물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올 벼쌀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차례 상에 메밥으로 올리려고 만들었다. 우리 선조는 삼국시대부터 추석에 새로 수확한 양식으로 조상님에게 감사의 제를 올렸다. 그 중에서 햅쌀이 가장 중요한 음식이다. 농경시대에 접어들면서 쌀이 주식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내에게 메밥은 햅쌀로 해야 한다고 일러주곤 한다.
올 벼쌀을 한 줌 입에 넣고 오래 오물거리면 깊은 맛이 우러난다. 자연의 맛이다. 고소하면서 침을 흘리게 하는 맛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 맛을 알지 못할 것이다. 먹을 것이 많고 종류도 다양해서 올벼 쌀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배고픔을 모르고서야 그 깊은 맛을 어찌 알겠는가. 자연의 입맛을 알지 못하고 패스트푸드나 가공식품에 길들어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올벼 쌀을 못 먹어본지 오래되어서 간식용으로 만들어 파는 것을 구해서 한번 먹어보고 싶다. 절구로 찧어서 모양은 예쁘지 않아도 입안에서 감칠맛이 돌던 그 맛을 느껴보고 싶다. 추석을 추석답게 했던 올벼 쌀은 내게 아련하지만 잊히지 않는 가을 추억이다.
첫댓글 올벼 쌀로 밥을 지어서 차례상에 올렸어야 했는데 깜빡했네요. 한 입 가득 넣고 오물거리며 느끼던 단맛을 이제는 이가 시원찮아서 멀리하게 되었어요. 고운 글 고맙습니다.
저도 이번 추석에 장에서 올벼쌀을 샀어요. 어릴 적 먹던 추억이 떠올라서. 많이 먹고 싶은데 마음과는 다르게 턱이 아파서 조금밖에 못 먹었어요. 아껴서 먹으려고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답니다. 음식은 추억과 함께 먹는다더니 그 말도 틀리지 않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