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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大全
【임영(林泳) 「독서차록(讀書箚錄)-주역(周易)」】[주 466] |
九三曰. ‘九三에서 말하였다. ’ 傳, 三居下之上 [止] 修業而已. 『程傳』에서 말하였다. ‘九三은 下卦의 위에 있어 … 學業을 닦을 뿐이다. ’ |
466) 경학자료집성DB에서는 乾卦 九三에 該當하는 것으로 分類했으나, 內容에 따라 이 자리로 옮겼다. |
難曰, 九三重剛而不中, 故有乾乾惕厲之象. 進德修業, 乃乾惕之實事也, 若曰君德已著, 將何爲哉. 惟進德修業而已, 則恐不然矣. 曰, 君子之進德修業, 豈待君德已著, 無他所爲, 而後爲之耶. 非但不得經旨義理, 亦未安也. |
論辨논변하였다. ‘九三은 굳셈을 重疊중첩하고 알맞음을 얻지 못했으므로 힘쓰고 힘써 두려워하는 象이 있다. 德을 기르고 學業을 닦는 것은 힘쓰고 두려워하는 實質的실질적인 일이다. ’임금의 德이 이미 드러났으니 무엇을 할 것인가? 오직 德을 기르고 學業을 닦는 것뿐이다. '라 말한다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君子가 德을 기르고 學業을 닦는다. '라 말한다면, 어찌 임금의 德이 드러나 달리 할 일이 없게 되기를 기다린 다음에 하겠는가? 經경의 뜻과 義理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亦是 穩當온당하지 않다. ’ |
不懈而知懼. 게을리 하지 않고 두려워할 줄 안다. 難曰, 此言乾乾時惕之義. 乾乾時惕, 盡包一節進修之義. 傳於此無歸重總要之辭, 亦太歇後矣. 論辨하였다. 여기에서는 ’힘쓰고 힘써 때에 맞추어 두려워한다. '는 뜻을 말하였다. ‘힘쓰고 힘써 때에 맞추어 두려워한다. '는 句節은 德을 기르고 學業을 닦는다는 한 句節의 뜻을 모두 包含하였다. 『程傳』은 이것에 대해 重要한 것을 돌이켜 꿰는 말이 없으니, 또한 끝의 말을 크게 歇헐=隱蔽은폐시켜버렸다. |
本義, 小註, 朱子說. 『本義』 小註소주에서의 朱子의 說明. 第二條, 忠信進德, 便是見得修辭立誠底許多道理. 둘째 條項, ‘充實함과 믿음’, ‘德을 기름’이 곧 ‘말을 가려서 하고 精誠을 세우는’ 許多한 道理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今按, 見後固忠信, 以忠信爲見得, 未知如何. 竊詳其意, 亦非謂忠信, 故能見得也. 蓋謂忠信, 則便見修辭以下道理也, 不必可疑耳. 지금 내가 살펴보았다. 안 뒤에 充實함과 믿음을 確固하게 하니, 充實함과 믿음으로 깨달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생각하건대 그 뜻을 詳細하게 하는 것도 充實함과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달아 알 수 있다. 充實함과 믿음이라 하는 것은 말을 가려하는 것 以下의 道理를 나타내니 굳이 疑心할 必要가 없다. |
第三條, 條件功程. 셋째 條項조항, 工夫의 條件조건과 功程공정. 今按, 忠信進德修辭立誠, 爲一時事, 而無次第, 故以條件言. 知至至之, 知終終之 爲始終事, 而有次第, 故以功程言. 厚齋馮氏說, 自君德著於二以下, 迂囬而失正意, 無可取者. 내가 살펴보았다. 充實함‧믿음‧德을 기름‧말을 가려함‧精誠을 세움은 한 때의 일이고 順序가 없으므로 條件으로 말했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는 것’과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것’은 일의 始作과 끝이고 順序가 있으므로 功程으로 말했다. 厚齋馮氏후재풍씨의 說明은 임금의 德이 二爻에서 드러난다는 以下는 迂回우회하는 것으로 올바른 뜻을 잃어서 取할 것이 없다. |
【이현익(李顯益) 「주역설(周易說)」】 |
曰, 忠信所以進德, 這忠信, 如反身而誠, 如惡惡臭, 如好好色底地位, 是主學者而言. 在聖人則爲至誠, 忠信不足以言也. 『朱子語類주자어류』에 말하였다. ‘充實함과 믿음이 德을 기르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 充實함과 믿음은 ’自身에게 돌이켜서 眞實하게 된다. '[주 467]는 것과 같으며, ‘惡臭악취를 싫어하듯 하고 善을 좋아하기를 好色을 좋아하듯 하는’[주 468] 境地와 같으니, 이것은 배우는 者를 爲主로 말한 것이다. 聖人에 있어서는 至誠지성이 되니, 充實함과 믿음은 말할 것이 못된다. |
467) 『孟子‧盡心』. 孟子曰, 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强恕而行, 求仁莫近焉. 468) 『大學』.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 |
又曰, 頃見某人言, 乾卦是聖人事, 坤卦是賢人事, 某不見得如此, 如初九子曰云云. 也可以做聖人事, 及至九三, 便說得勞攘, 只做得學者事. 또 말하였다. “近來 어떤 사람이 말한 것을 보니, 乾卦는 聖人에 대한 일이며, 坤卦는 賢人에 대한 일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이와 같은 說明을 보지 못한 것이다. 例를 들어 初九에서 ‘子曰자왈’ 云云한 것은 또한 聖人에 대한 일로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九三에 이르러서는 곧 努力하고 除去하는 것들에 대한 說明은 다만 배우는 者에 대한 일인 것과 같다. ” |
又曰, 乾皆聖人事, 坤皆賢人事, 恁地斷殺說不得, 如乾初九, 似說聖人矣. 九三學聚問辨則不然, 上九又說賢人在下位, 則又指五爲賢矣. 看來聖人不恁地死殺說, 只逐義隨事說道理而已. 此則不以乾卦皆作聖人事也. 未知當從何說, 然程傳之以舜事釋爻, 朱子嘗非之, 而其以乾卦作聖人事, 與程傳無異, 則上項諸說, 皆非定論, 然若語類則或是初年說, 或是記録之差, 而本義之說亦如此, 未可知也. |
또 말하였다. “乾卦는 모두 聖人에 대한 일이고 坤卦는 모두 賢人에 대한 일이라고 했는데, 이처럼 斷定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 例를 들어 乾卦 初九와 같은 것은 聖人에 대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九三의 배우고, 모으며, 묻고 辨別함은 그렇지 않으며, 上九에서는 또 賢人이 아랫자리에 있다고 했으니, 또 五爻가 賢人이 됨을 가리킨다. 살펴보면, 聖人이 融通性융통성 없게 말하지 않았고, 이것은 但只 그 意味의미와 事案사안에 따라서 道理를 說明한 것일 뿐이라고 했으니, 이곳에서는 乾卦를 모두 聖人에 대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마땅히 어떤 說明에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程傳』에서는 舜순임금에 대한 일로 爻를 풀이했는데, 朱子는 그 內容을 批判비판하였고 乾卦를 聖人에 대한 일로 看做간주한 것은 『程傳』과 差異차이가 없으니, 앞 項目항목의 여러 說明들은 모두 定論이 아니다. 그러나 『朱子語類』의 說明과 같은 것들은 間或간혹 初年의 說설도 있고, 記録기록을 할 때 錯誤착오도 있는데, 『本義』의 說明이 또한 이와 같으니, 알지 못하겠다. |
更詳之, 又有一條曰, 大抵易卦文辭, 本只是各着本卦本爻之象, 明吉凶之占, 當如此耳, 非是就聖賢地位說道理也. 故乾六爻, 自天子以至於庶人, 自聖人以至於愚不肖, 筮或得之, 義皆有取, 但純陽之德, 剛健之至, 若以義推類之, 則爲聖人之象, 而其六位之高下, 又有似聖人之進退, 故文言因潛見躍飛自然之文, 而以聖人之跡, 各明其義, 位有高下而德無淺深也. |
다시금 詳細상세히 살펴보니, 또 한 條目조목에서 말하였다. ‘大體的대체적으로 『周易』에 있는 卦의 글들은 本來 各各 本卦와 本爻의 象에 따라 吉凶길흉의 点을 밝힌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을 뿐이며, 聖賢의 地位에 나아가 道理를 說明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乾卦의 여섯 爻는 天子로부터 庶人서인에 이르기까지, 聖人으로부터 어리석거나 不肖불초한 者에 이르기까지, 点을 쳐서 或 얻게 되면 그 意味를 모두 取할 수 있다. 다만 純全순전한 陽의 德이나 剛健강건의 至極지극함 등을 意味로 類推유추해보면, 聖人의 象이 되고, 六位의 높고 낮음은 또한 聖人의 進退진퇴와 恰似흡사한 面이 있다. 그러므로 「文言傳」에서는 잠겨있다[潛]‧나타나다[見]‧뛰어 오르다[躍]‧날다[飛] 등의 自然的자연적인 글들을 依據의거하였고, 聖人의 자취로써 各各 그 意味를 밝혀서 地位에는 높고 낮음의 差異가 있지만, 德에는 얕고 깊은 差異가 없다고 하였다.’ |
以此觀之, 朱子之意, 欲以乾象與六爻爲通上下聖凡言, 以文言爲專主聖人言. 此正所謂孔子之易, 非文王之易者. 然則文言初九本義之說, 蓋依本文之意釋之, 故如此耳, 不必疑也. 〈更詳上項朱子諸說, 亦以文言言, 則如此說亦不得, 未知果如何. 〉 |
이로써 살펴보면, 朱子의 뜻은 乾卦의 象과 여섯 爻는 上下 및 聖人과 普通보통 사람을 統括통괄하여 말한 것으로 보고, 「文言傳」은 오로지 聖人을 爲主로 말한 것으로 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孔子의 『周易』이며, 文王의 『周易』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文言傳」의 初九에 대한 『本義』의 說明은 아마도 本文의 뜻에 따라서 풀이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解說되었던 것일 뿐이니, 疑心할 必要는 없다. 〈다시 仔細히 살펴보니, 앞 項目에 대한 朱子의 여러 說들이 또한 「文言傳」의 記錄을 가지고 말한 것이라면, 이와 같이 主張주장할 수 없을 듯한데, 果然과연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 〉 |
【이익(李瀷) 『역경질서(易經疾書)』】 |
忠信進德, 莫如倫常, 故夫子又推說, 君臣父子兄弟朋友之道結之云,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不敢不勉, 有餘不敢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慥慥者, 乾乾也, 此爲進德節度, 日乾夕惕, 當於中庸求之. |
充實함과 믿음으로 德에 나아가는 것은 倫常윤상[주 469]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孔子는 또한 그 說明을 미루어서, 君臣‧父子‧兄弟‧朋友에 대한 道理로써 結論을 맺고, ‘平常의 德을 實踐실천하고, 平常의 말을 삼가며, 不足한 것이 있다면 敢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고, 남겨두어 敢히 다하지 않으며, 말이 行動을 돌아보고, 行動이 말을 돌아보니, 君子가 어찌 篤實독실하지 않겠는가?”[주 470]라고 했던 것이다. 慥慥조조는 ’힘쓰고 힘쓴다. '는 뜻이니, 이것은 곧 德으로 나아가는 節度가 되며, ‘終日토록 힘써서 저녁까지도 操心조심한다. '는 뜻이므로 마땅히 『中庸중용』에서 그것을 求해야 한다. |
469) 倫常윤상: 人間의 道德倫理도덕윤리와 綱常秩序강상질서를 가리킨다. 470) 『中庸』.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
知至至之, 幾之事, 知終終之, 存義之事, 始於幾而終於存義. 義者, 進退久速當其可, 故雖進修及時必使天下利見, 雖懷寶捨藏必樂而旡憫, 莫非日乾夕惕條目功程也. 九三在進與止之間, 故以幾爲言, 而戒之以危厲也. |
‘닿을 곳을 알아 닿음’은 幾微에 대한 일이고, ‘끝마침을 알고 마침’은 義理를 保存하는 일이니, 幾微에서 始作하여 義理를 保存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다. 義는 나아가고 물러나며 오래되고 迅速신속함이 그 옳음에 合當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德을 기르고 學業을 鍊磨연마하더라도 때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大人을 만나봄을 利롭게 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비록 寶貨보화를 품고 버리고 감추더라도, 반드시 즐거워하며 근심함이 없어야 하니, ‘終日토록 힘써서 저녁까지도 操心한다. '는 條目의 일이 아닌 것이 없다. 九三은 나아가고 멈추는 사이에 있기 때문에 幾微로써 말하고, 危殆로움으로써 警戒하였다. |
【유정원(柳正源) 『역해참고(易解參攷)』】 |
脩辭立誠. 말을 바르게 하고 精誠을 세움이. |
案, 忠信積於中, 則符采驗於外, 當有自然而脩, 自然而立者矣. 今曰修辭立誠者, 猶若內歉於忠信之實, 而外加財處之功, 用意於修之立之, 何也. 用意脩辭, 則辭不幾巧, 用意立誠, 則誠不近僞耶. |
내가 살펴보았다. 充實함과 믿음이 안에 쌓이면 文彩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自然스럽게 바르게 되고 自然스럽게 세워지는 것이 있다. 只今 ‘말을 바르게 하고 精誠을 세운다. '고 한 것은 안으로 充實함과 믿음의 實質실질이 不足하여 밖으로 헤아려서 處理처리하는 功力을 더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바르게 하고 세우는데 마음을 쓰는 것은 어째서인가? 말을 바르게 하는데 마음을 쓰면 말이 巧妙교묘함에 가까워지지 않고, 精誠을 세움에 마음을 쓰면 精誠이 거짓에 가까워지지 않게 된다. |
曰, 內之忠信愈積, 則外之修爲愈篤, 此其表裏旡間, 自不得不然也. 除非聖人之不待思勉, 吐辭爲經外, 雖其誠心好善, 進進不已之君子一有言辭, 不經於心, 不折於理, 而擅出於口者, 則鄙悖躁妄, 禮壞樂崩, 旡以著腳安身立其忠信之實事. 故顏氏之克己爲仁, 不過曰非禮勿言, 曾子將死之言, 亦不越乎辭氣上工夫, 則於此可見. |
答하였다. "안으로 充實함과 믿음이 쌓일수록 밖으로 바르게 함도 더욱 篤實하게 되니, 이것은 그 겉과 속이 틈이 없어서 저절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聖人처럼 힘쓸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내뱉는 말이 모두 經의 말이 된다면 몰라도, 비록 그 마음을 精誠스럽게 하고 善을 좋아하여 나아가고 나아가 그치지 않는 君子일지라도 말이 마음을 經由경유하지 않고 理致이치에 符合부합하지 않고서 입에서 제멋대로[擅천] 나오는 것이 하나라도 있게 되면, 醜추저분하고 躁急조급하여 節度절도가 없어서 禮樂예악이 崩壞붕괴되어 두 발로 서서 몸을 便편히 하며 그 充實함과 믿음의 實事실사를 드러낼 方法이 없다. 그러므로 顏淵안연은 自身을 이기는 것으로 仁을 삼았으니, ‘禮가 아니라면 말하지 말라.’[주 471]고 한 것에 不過불과할 뿐이며, 曾子증자는 將次장차 죽음을 맞이하여 한 말이 또한 말과 낯빛에 대한 工夫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알 수 있다. |
471) 『論語‧顔淵』.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
哭死而哀, 非爲生者也, 經德不囘, 非以干祿也, 豈可謂騖外爲人之學哉. 苟能十分慥慥, 發之言語之間者, 旡非片片赤心所自來者, 則此是修辭立誠之道, 而符采之著外者也. 於乎, 小人之厭然自揜, 用意非不深也, 措辭非不美也, 而若使忠信之君子觀之, 則其爲詖淫邪遁之實, 如見肺肝, 此與脩其忠信之辭, 立其忠信之道者, 何啻千里之遠也? 然則其所謂脩者, 豈用意可修, 其所謂立者, 豈用意可立? 君子之於此, 亦非全旡所用其心, 而唯其所用者異也. 今以修之立之, 乃疑其用意, 則不亦過乎. |
‘죽음을 哭곡하며 슬퍼함은 산 사람에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떳떳한 德을 行하고 邪惡사악하지 않음은 祿녹을 求하고자 해서가 아니다. '[주 472]라고 했으니, 어찌 外的인 것에 힘쓰는 것이 남을 위한 學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萬一 實로 精誠스럽게 言語로 表出표출한 것이 眞實한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이것이 말을 바르게 하고 精誠을 세우는 道이어서 文彩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아! 小人이 自身의 잘못을 느껴 自身의 좋지 않은 点을 숨기니, 생각을 씀이 깊지 않는 것이 아니고 말을 함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充實함과 믿음이 있는 君子로 하여금 살펴보게 한다면, 그 偏頗的편파적이고 淫亂음란하며 不正하고 꾸밈[주 473]이 되는 實相이 肺폐와 肝간을 보는 것과 같으니, 이는 그 充實하고 미더운 말을 바르게 하고 그 充實하고 미더운 道를 세우는 것과 어찌 다만 千里의 差異만 있는 것일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이른바 바르게 한다는 것이 어찌 생각을 써서 바르게 할 수 있으며 그 이른바 세운다는 것이 어찌 생각을 써서 세울 수 있는 것이겠는가? 君子가 여기에 또한 전혀 그 마음을 쓰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쓰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제 바르게 하고 세우는 것으로 그 생각을 쓰는 것으로 疑心한다면 또한 지나치지 않겠는가? |
472) 『孟子‧盡心』. 孟子曰, 堯舜, 性者也, 湯武, 反之也. 動容周旋中禮者, 盛德之至也. 哭死而哀, 非爲生者也. 經德不回, 非以干祿也. 言語必信, 非以正行也. 君子行法, 以俟命而已矣. |
473) 『孟子‧公孫丑』. 何謂知言. 曰, 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 生於其心, 害於其政, 發於其政, 害於其事. 聖人復起, 必從吾言矣. |
傳, 小註, 朱子說明道 [至] 其誠. 『程傳』의 小註에서 朱子의 ‘明道가 … 그 精誠’을 하는 說明. |
〈案, 卽上程子說第二段也. 朱子又曰, 明道所謂脩辭, 但是非禮勿言. 〉 〈내가 살펴보았다. 곧 위의 程子가 說明한 第二段제이단이다. 朱子가 또 말하기를 “明道의 이른바 ‘말을 가려서 하고’는 다만 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 |
本義, 小註, 朱子說持擇 [至] 確二. 『本義』의 小註에서 ‘朱子의 가려서 써서 … 明白하고 確實하다. '라는 說明. |
〈案, 一作揀擇言語的一確, 二言一箇二箇逐處亭當堅確. 내가 살펴보았다. 一說에는 言語를 가려 쓰는 明白하고 確實함이라고 하였으니, 한 개 두 개 處한 곳에 따라 妥當타당하여 堅固하고 確實함을 말한다. 〉 |
【김상악(金相岳) 『산천역설(山天易說)』】 |
進德修業, 釋乾乾之義. 忠信, 心也, 修業, 事也. 蘊於心, 所以見於外, 修於事, 所以養其心也. 至在於先, 故可與幾, 終在於後, 故可與存義也. 居上而不驕, 所以不至於有悔, 在下而不憂, 所以雖危无咎矣. |
‘德을 기르고 學業을 닦음’은 ‘힘쓰고 힘쓴다. '는 뜻을 풀이한 것이다. 充實함과 믿음은 마음이고, 學業을 닦음은 일이다. 마음에 蘊蓄온축하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일을 닦기 때문에 그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닿을 곳이 앞에 있기 때문에 더불어서 幾微를 알 수 있고, 끝마침이 뒤에 있기 때문에 더불어서 義로움을 保存할 수 있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驕慢하지 않음은 뉘우칠 地境에 이르지 않는 方法이고,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謹審근심하지 않음은 비록 危殆롭지만 허물이 없게 되는 方法이다. |
○至者, 外乾之至也. 終者, 內乾之終也. 居上位者, 三居下卦之上也. 在下位者, 三居上卦之下也. 닿을 곳은 外卦외괘인 乾(☰)이 닿는 것이다. 끝마침은 內卦인 乾(☰)이 마친다는 것이다. 윗자리에 있다는 것은 三爻가 下卦의 위에 있다는 뜻이다. 아랫자리에 있다는 것은 三爻가 上卦의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
【조유선(趙有善) 『경의(經義)-주역본의(周易本義)』】 |
文言. 문언. 知至至之, 知終終之. 닿을 곳을 알아서 닿고, 끝마침을 알아 마친다. |
本義, 知至, 屬之進德, 知終, 屬之居業. 程子說亦如此. 然忠信非知之事, 語意不甚襯貼, 窃意忠信修辭, 以內外言, 知至知終, 以知行言, 恐不必分屬. 忠信, 進德也, 有知行, 修辭居業, 亦有知行. 但分屬之說, 已有程朱定論, 不敢妄意, 姑爲記疑, 以備思辨. |
『本義』에서는 ‘닿을 곳을 안다. '는 것은 德을 기름에 包含시켰고, ’끝마침을 안다. '는 것을 本業을 修行함에 包含시켰다. 程子의 說明 또한 이와 같다. 그런데 充實함과 믿음이라는 것은 知에 該當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語意어의에 매우 符合하지 못하니, 내가 생각하기에 充實함・믿음과 말을 바르게 함은 內外로써 말한 것이고, 닿을 곳 아는 것과 끝마침을 안다는 것은 知行으로써 말한 것이니, 아마도 分別하여 歸屬귀속시킬 必要필요는 없을 것 같다. 充實함과 믿음은 德을 기르는 것이니, 知行을 包含한다. 말을 바르게 하고, 本業을 修行하는 것도 知行을 包含한다. 다만 나누어서 歸屬귀속시키는 說明이 이미 程子와 朱子의 定論에 있으니, 敢히 내 뜻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暫時잠시 이곳에 疑問点의문점을 記錄기록하여 思辨사변을 갖춰둔다. |
【김귀주(金龜柱) 『周易차록(周易箚錄)』】 |
本義, 忠信主於心, 云云. 『本義』에서 말하였다. ‘充實함과 믿음’은 마음에서 主張하고, 운운. |
○按, 知至至之, 進德之事, 貼忠信而言, 知終終之, 居業之事, 貼修辭立誠而言. 忠信與知至至之, 疑若不倫. 然蓋知至是知得那到處, 至之是行去那到處, 而忠信乃眞實知得, 眞實行去者也. 小註朱子說, 釋忠信處, 或以眞實知得而言, 或以眞實行去而言, 要當兼兩意看. |
내가 살펴보았다. 닿을 곳을 알고 닿는 것은 德을 기르는 일은 充實함과 믿음을 關聯관련하여 말한 것이고, 끝마침을 알고 마치는 것은 本業을 修行하는 일은 말을 가려서 하고 精誠을 세움을 關聯하여 말한 것이다. ‘充實함과 믿음’과 ‘닿을 곳을 알고 닿는 것’은 서로 같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大體대체로 ‘닿을 곳을 아는 것’은 到達도달할 곳을 아는 것이고, ‘닿는다’는 것은 到達할 곳에 가는 것이며, 充實함과 믿음은 眞實로 아는 것이고 眞實로 行하는 것이다. 小註에서 充實함과 믿음을 풀이한 朱子의 主張은 眞實로 아는 것으로 말하기도 하고, 眞實로 行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하였으니, 要요컨대 두 가지 意味를 兼해서 보아야 한다. |
小註, 忠信是始, 云云. 小註에서 말하였다. ‘充實함과 믿음[忠信]’은 始作이고, 운운. |
○按, 程子曰, 知至至之主知, 知終終之主終. 而朱子爲釋其意曰, 上句以知至爲重, 而至之二字爲輕, 下句以知終爲輕, 而終之二字爲重. 此註則曰, 知至至之主在至上, 知終終之主在終上. 其釋下句, 則前後說無異, 而其釋上句, 則前後說不同, 何也. 蓋程傳以知至至之爲致知之事, 朱子從其意而解之, 故曰知至爲重. 本義以知至至之爲進德之事. 故此註亦曰, 主在至上. 兩說各有攸當, 而意實相通, 不可執此而疑彼也. |
내가 살펴보았다. 程子는 “ ‘닿을 곳을 알고 닿는 것’[知至至之]은 ‘앎’을 爲主로 하고, ‘끝마침을 알고 마치는 것’[知終終之]은 ‘마침’을 爲主로 한다. ” [주 474]라 하였는데, 朱子는 그 뜻을 解釋하여 “앞 句節은 ‘닿을 곳을 아는 것[知至]’을 重하게 여기고 ‘닿는다[至之]’는 두 글자는 가볍게 여기며, 뒤의 句節은 ‘끝마침을 아는 것[知終]’을 가볍게 여기고 ‘마친다[終之]’는 두 글자는 重하게 여긴다. '라 하였다. 또 이 註釋주역에서 ” ‘닿을 곳을 알고 닿는 것은 主眼点이 ‘닿음[至]’에 있고, ‘끝마침을 알고 마치는 것’은 主眼点이 ‘마침[終]’에 있다. “라 하였다. 뒤 句節의 解釋은 朱子의 앞뒤 말과 같지만 앞 句節의 解釋이 앞뒤 말과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大槪 『程傳』은 ‘닿을 곳을 알고 닿는 것’을 앎을 이루는 일로 여기고, 朱子는 그 뜻을 따라 解釋하기 때문에 ‘닿을 곳을 아는 것[知至]’을 重하게 여겼다. 『本義』는 ‘닿을 곳을 알고 닿는 것[知至至之]’을 ‘德을 기르는 일’로 여기기 때문에 여기의 註釋에서도 ”主眼点이 ‘닿음[至]’에 있다. “고 말한 것이다. 두 說은 各各 마땅한 바가 있어 뜻이 實際실제로 서로 通하니, 이것만을 固執고집하여 저것을 疑心의심해서는 안 된다. |
474) 『河南程氏遺書』. 知至至之, 主知,知終終之, 主終. |
乾卦分明是, 云云. 乾卦는 分明히, 운운. |
○按, 上註言修辭立誠, 大叚着氣力, 此則以忠信立誠, 謂更着力不得, 何也. 蓋以修辭立誠對閑邪存誠, 則閑邪而誠自存, 便是不大叚用力, 修辭要立誠, 便是大叚着氣力. 以乾之忠信立誠對坤之直內方外, 則忠信立誠, 皆是聖德日新, 自然不已之事, 更不須言着力. 直內方外, 是賢人固執持守之功, 未免有着力底意, 所以兩說有不同也. 大抵無論閑邪存誠, 忠信立誠, 卻都是工夫上事, 在學者則無非着力, 在聖人則別無着力. 朱子或就學者分上泛說, 或就聖人分上極至說, 如是看, 則所言雖或有不同觸處, 皆通無不洒然矣. |
내가 살펴보았다. 위의 註釋주석에서 ‘말을 바르게 하고 精誠을 세움’에 큰 힘을 써야 된다고 말하고, 여기서는 ‘充實함과 믿음 및 精誠을 세움’에 다시 힘 쓸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말을 바르게 하고 精誠을 세움’과 ‘邪惡사악함을 막고 精誠을 保存함’을 對備대비해 보면, 邪惡함을 막으면 精誠은 저절로 保存되니 큰 힘을 쓰지 않지만, 말을 바르게 하려면 精誠을 세워야만 하니 큰 힘을 써야 한다. 乾卦의 ‘充實함과 믿음’‧‘精誠을 세움’을 坤의 ‘恭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움으로써 밖을 方正하게 하는 것’과 對備해 보면, ‘充實함과 믿음’‧‘精誠을 세움’은 모두 聖人의 德이 每日 每日 새로워져 저절로 그칠 수 없는 일이니 다시 힘써야 된다고 말할 必要가 없다. 그러나 ‘恭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움으로써 밖을 方正하게 하는 것’은 어진 이가 굳게 잡아 지키는 功爻공효로 꼭 힘을 써야 하는 뜻을 免면할 수 없기 때문에 두 主張에 다른 点이 있는 것이다. 大槪 ‘邪惡함을 막고 精誠을 保存하고’, ‘充實함과 믿음’ 및 ‘精誠을 세움’은 모두 工夫의 일이니, 배우는 者들에 있어서는 힘쓰지 않을 수 없지만, 聖人에 있어서는 別途별도로 힘 쓸 必要가 없다. 朱子는 或 배우는 사람의 立場에서 平凡하게 말하거나 或 聖人의 立場에서 높은 境地로 말하였으니, 이와 같이 보면 말한 것이 비록 닿은 곳이 다르지만, 모두 通하여 후련[洒然쇄연]하지 않음이 없다. |
厚齋馮氏曰, 此言, 云云. 厚齋馮氏후재풍씨가 말하였다. "여기서 … 말하여, 운운. “ |
○按, 求無過, 以合於道, 恐非文義. 聖人當九三地位, 進德修業而已, 則自然旡咎, 非求無過, 以合於道也. |
내가 살펴보았다. ‘허물없기를 求하여 道에 合致된다. '는 것은 글의 뜻이 아닌듯하다. 聖人이 九三의 地位에 當하였으나 德을 기르고 學業을 닦을 뿐이라면 저절로 허물이 없게 될 것이니, 허물없기를 求하지 않아도 道에 合致될 것이다. |
【서유신(徐有臣) 『역의의언(易義擬言)』】 |
脩辭者, 言必忠信也. 立誠者, 行必忠信也. 始以忠信而進德, 終以忠信而居業也. 知至至之者, 精也. 知終終之者, 一也. 至謂至於九三也. 終謂終於上九也. 與, 以也. 幾者, 義之始也. 義者, 幾之終也. 上位者, 下卦之上也. 不驕者, 不以已至自足也. 下位者, 上卦之下也. 不憂者, 不以不終爲懼也. 進德知至, 終日乾乾之象也. 居業知終, 夕惕若之象也. 因其時者, 日夕相因, 無少間斷也. |
말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말을 함에 반드시 充實함과 믿음에 따른다는 것이다. 誠實함을 세운다는 것은 行動을 함에 반드시 充實함과 믿음에 따른다는 것이다. 始作에는 充實함과 믿음으로 德을 기르고, 마침에는 充實함과 믿음으로 本業을 修行한다. 닿을 곳을 알아서 닿는다는 말은 精微함에 該當한다. 끝마침을 알아서 마친다는 것은 한결같음에 該當한다. 닿음은 九三에 닿는다는 뜻이다. 마침은 上九에서 마친다는 뜻이다. ‘與여’는 ‘以이’이다. 幾微는 義로움의 始作을 뜻한다. 義로움은 幾微의 마침을 뜻한다. 윗자리는 下卦의 위를 뜻한다. 驕慢하지 않음은 이미 이르렀음에도 自足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래 자리라는 것은 上卦의 아래를 뜻한다. 근심하지 않음은 끝맺지 못하는 것을 걱정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德으로 나아가며 닿을 곳을 아는 것은 終日종일토록 힘쓰고 힘쓰는 象이다. 本業을 修行하고 끝마침을 안다는 것은 저녁에 걱정하는 象이다. 그 때에 따른다는 것은 終日토록 하고 저녁까지 함이 서로 따르게 되어 조금도 끊어짐이 없는 것이다. |
【강엄(康儼) 『周易(周易)』】 |
九三曰 [止] 雖危旡咎矣. 九三에서 말하였다. ‘… 비록 危殆롭지만 허물이 없다. ’ 本義, 脩辭 [止] 不實也. 『本義』에서 말하였다. ‘말을 바르게 하다 … 채우지 않는다. ’ |
按, 本義釋脩辭, 而便說見於事, 且不別釋立誠何也. 蓋言與事, 自是相須底, 有言必有事, 有事必有言, 此所以釋脩辭而兼言事者也. 至於立誠, 亦旡別般工夫, 只是脩辭處, 便是立誠, 故孔子曰言忠信. 溫公論誠, 謂行之自不妄語. 始明道, 亦曰脩省言辭, 便長要立誠, 而朱子稱其說得來洞洞, 流轉若伊川以篤志解立誠, 則朱子以爲便緩丁, 觀此則脩辭立誠不可作兩件事明矣. |
내가 살펴보았다. 『本義』에서는 말을 바르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 풀이했는데, 다시금 일에 나타난다고 說明하였다. 그런데 또한 別途로 誠實함을 세운다는 것에 대해서 풀이하지 않은 것은 무슨 理由인가? 말과 일은 그 自體로 서로 聯關된 것이니, 말이 있게 되면 반드시 일도 있게 되고,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말도 있게 되니, 이것이 바로 말을 닦는다는 것을 풀이하며 함께 일에 대해서도 言及언급한 理由이다. 誠實을 세우는 것도 또한 別途별도의 工夫가 있는 것이 아니고, 但只 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곧 誠實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孔子는 “말은 充實하고 믿음 있게 하라”[주 475]고 말하였다. 溫公온공은 誠實을 論議하면서, “實踐하는 것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始作한다. ”고 했다. 애초에 明道명도 또한 “말을 바르게 하고 省察하려면 곧 誠實을 세워야만 한다. ”고 했는데, 朱子는 “그 主張이 널리 퍼질 것이다. ”고 했다. 伊川이천에 이르러서는 뜻을 敦篤히 한다는 것으로써 誠實을 세운다는 것을 풀이했는데, 朱子는 完全하다고 여겼다. 이를 通해 살펴본다면, 말을 바르게 하고 誠實을 세우는 것은 別個의 두 가지 일이 아니라는 事實이 分明하다. |
475) 『論語‧衛靈公』. 子張問行. 子曰,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夫然後行. 子張書諸紳. |
【박문건(朴文健) 『周易연의(周易衍義)』】 |
居, 處也. 知德之所至而至之, 則可與知幾, 知業之所終而終之, 則可與存義, 知幾則旡危, 存義則旡過. ‘居거’는 處처한다는 뜻이다. 德이 닿을 곳을 알아서 닿는다면 더불어서 幾微를 알 수 있고, 일이 마칠 곳을 알아서 마친다면 더불어서 義로움을 保存할 수 있는 것이니, 幾微를 알면 危殆로움이 없게 되고, 義로움을 保存하면 過失이 없다. |
〈問, 修居之不同. 曰, 脩辭立誠, 則知其可脩之業而居之. 물었다. “바르게 하는 것과 修行수행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까? ” 答하였다. "말을 바르게 하고 誠實함을 세운다면, 바르게 할 만한 일을 알아서 修行하게 됩니다. “ 〉 |
〈問, 知至至之, 知終終之. 曰, 知其至而至之, 知其終而終之, 是可謂之德業也. 若不當至而至之, 不當終而終之, 不可謂之德業也. 是故, 知至而至者, 乃知幾也, 知終而終者, 乃存義也. 曰, 於德言至, 於業言終, 何. 曰, 德在先, 故言至, 業在後, 故言終. |
물었다. “ ‘닿을 곳을 알아서 닿음’과 ‘마칠 곳을 알아 마침’은 무슨 뜻입니까? ” 答하였다. "닿을 곳을 알아서 닿고 마칠 데를 알아서 마친다는 뜻이니, 이것을 이른바 德과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萬若 마땅히 닿지 말아야 하는데, 닿고 마땅히 마치지 말아야 하는데 마친다면, 이것을 德과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닿을 곳을 알아서 닿는 것은 곧 幾微를 아는 것이고, 마칠 데를 알아서 마치는 것은 곧 義로움을 保存하는 것입니다. 물었다. 德에 대해서는 닿는다고 말하고, 일에 대해서는 마친다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 答하였다. "德은 앞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닿는다고 말하였고, 일은 뒤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친다고 말하였습니다. ” 〉 |
〈問, 居上位而不驕, 在下位而不憂. 曰, 知幾存義, 則進居上位而不驕, 退在下位而不憂也. 〉 |
〈물었다. “윗자리에 居하지만 驕慢하지 않고, 아랫자리에 居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 答하였다. "幾微를 알고 義의를 保存하면, 나아가서 윗자리에 居하더라도 驕慢하지 않고, 물러나서 아랫자리에 居하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 |
〈問, 因其時而惕. 曰, 雖終日乾乾, 每因日夕惕懼之時而惕懼焉, 則不患其不爲君子矣. |
물었다. “때에 따라 걱정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答하였다. "비록 終日토록 힘쓰고 힘쓰더라도, 每番매번 저녁이 되어서 걱정하고 操心조심해야 할 때에 따라 걱정하고 操心한다면, 君子가 되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 〉 |
【이지연(李止淵) 『周易차의(周易箚疑)』】 |
進德居業, 則言行可知, 況有見幾之明, 其於保身何有. 雖在下卦之上, 而屈於上卦之下, 故不驕, 雖在上卦之下, 而隣於中德之君子, 故不憂. |
德에 나아가고 本業을 修行한다면 言行을 알 수 있으니, 하물며 幾微의 밝음을 볼 수 있다면, 自身을 保存하는데 있어서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비록 下卦의 위에 있지만 上卦의 아래에서 굽히고 있기 때문에 驕慢하지 않고, 비록 上卦의 아래에 있지만 알맞은 德을 가진 君子를 이웃으로 삼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 |
【박종영(朴宗永) 「경지몽해(經旨蒙解)‧주역(周易)」】[주 476] |
乾之九三曰, 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無咎, 何謂也. 子曰, 君子進德脩業, 忠信, 所以進德也, 脩辭立其誠, 所以居業也. 知至至之, 可與幾也. 知終終之, 可與存義也. |
乾卦의 九三에서 “ ‘子가 終日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危殆로우나 허물이 없다. '라 한 것은 무슨 말인가? “ 孔子가 말하였다. “君子가 德을 기르고 學業을 닦으니 充實함과 믿음이 德을 기르는 것이고, 말을 바르게 하고 그 精誠을 세움이 本業을 修行하는 것이다. 닿을 곳을 알고 닿으므로 더불어 幾微를 알 수 있고, 끝마침을 알고 마치므로 더불어 義를 保存할 수 있다. ” |
476) 경학자료집성DB에서는 乾卦 九三에 該當하는 것으로 分類했으나, 內容에 따라 이 자리로 옮겼다. |
程傳曰, 內積忠信所以進德也, 擇言篤志所以居業也. 知至至之, 致知也. 求知所至而後至之. 知之在先, 故可與幾, 所謂始條理者知之事也. 知終終之, 力行也, 旣知所終, 則力進而終之, 守之在後, 故可與存義, 所謂終條理者聖之事也. 此學之始終也. |
『程傳』에서 말하였다. 안으로 充實함과 믿음을 쌓는 것이 德을 기르는 것이요, 말을 가려서 하고 뜻을 敦篤히 하는 것이 本業을 닦는 것이다. ‘닿을 곳을 알고 닿는다.’는 것은 앎을 이루는 것으로, 닿을 곳을 알기를 求한 뒤에 닿는 것이다. 아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에 ‘더불어 幾微를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니, 이른바 ‘條理를 始作한다는 것은 智慧의 일[주 477]’이라고 한 것이다.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것은 힘써 行하는 것으로, 이미 마칠 곳을 알면 힘써 나아가 끝마쳐야 하는 것이다. 지키는 것은 아는 것보다 뒤에 있기 때문에 ‘더불어 義로움을 保存 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른바 ‘條理를 끝마침은 聖人의 일[주 478]’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學文의 始作과 끝이다. |
477) 『孟子‧萬章』. 始條理者, 智之事也, 終條理者, 聖之事也. |
478) 『孟子‧萬章』. 始條理者, 智之事也, 終條理者, 聖之事也. |
朱子本義曰, 忠信, 主於心者, 旡一念之不誠也. 脩辭, 見於事者, 無一言之不實也. 雖有忠信之心, 然非脩辭立誠, 則无以居之, 知至至之, 進德之事, 知終終之, 居業之事, 所以終日乾乾而夕猶惕若者, 以此故也. |
朱子가 『本義』에서 말하였다. ‘充實함과 믿음’은 마음으로 主張하는 것이니 한 생각도 精誠이 없을 수 없고, ‘말을 바르게 함’은 일에서 나타나는 것이니 한 마디 말도 眞實 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充實함과 믿음의 마음이 있더라도 말을 바르게 하고 精誠을 세우지 않으면, 머물 곳이 없다. ‘닿을 곳을 알아 닿는 것’은 德을 기르는 일이고,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것’은 本業을 修行하는 일이므로 ‘終日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심대윤(沈大允) 『周易상의点법(周易象義占法)』】 |
三四離於下, 而未至於上, 且進德且修業也. 忠信, 篤於內也. 修辭立其誠, 信於外也. 知至至之, 見幾而知其所至而至之也, 知之事也. 知終終之, 守義而知其所終而終之也, 仁之事也. 知者權, 仁者正, 權以行事, 正而立道, 權故可與幾而成務, 正故可與存義而得中也. 是以德業竝崇也. 中庸曰, 道竝行而不相悖. |
九三과 九四는 아래에서는 떨어졌지만 아직은 위에 到達한 것이 아니며, 또한 德에 나아가고 또한 學業을 닦는다. 充實함과 믿음은 內的으로 敦篤돈독히 하는 것이다. 말을 바르게 하고 精誠을 세우는 것은 外的으로 믿게끔 하는 것이다. 닿을 곳을 알아서 닿는 것은 幾微를 보고서 닿을 곳을 알아서 닿는 것이니, 智慧지혜에 대한 일이다. 마칠 데를 알아서 마치는 것은 義로움을 지켜서 마칠 데를 알아서 마치는 것이니, 어짊의 일이다. 智慧는 權道권도를 뜻하고, 어짊은 바름을 뜻하니, 權道를 發揮발휘하여 일을 施行시행하고, 올바르게 하여 道를 세운다. 權道를 發揮하기 때문에 幾微를 알아서 그 努力을 이룰 수 있고, 바르기 때문에 義로움을 保存하는데 參與참여하여 中을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德과 學業을 모두 높일 수 있다. 『中庸』에서는 ‘道를 함께 施行하여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다. '[주 479]라고 했다. |
479) 『中庸』. 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小德川流, 大德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 |
【박문호(朴文鎬) 「경설(經說)‧주역(周易)」】 |
乾乾以不懈釋之者, 乾道每日一周無一息之停, 不懈者莫乾若也. 今又重言, 則其不懈又何如哉. |
‘乾乾건건’을 懶怠나태하지 않다는 뜻으로 풀이한 것은 乾의 道는 每日 한 차례 循環순환을 하여 한 番번이라도 멈춰서 쉬는 法이 없으니, 懶怠하지 않은 것을 하늘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乾乾’이라고 거듭해서 말했으니, 懶怠하지 않음이 또한 어떻겠는가? |
【오치기(吳致箕) 「주역경전증해(周易經傳增解)」】[주 480] |
此一節申言九三之象也. 盡己之謂忠, 以實之謂信, 而爲進德之基. 擇言之謂修辭, 篤行之謂立誠, 而爲居業之事. 知其所當至, 而必欲至之, 則可與明此進德之幾. 知其所當終, 而必欲終之, 則可與存此居業之義. 以之居上高而不驕, 以之在下卑而不憂, 故雖危, 而旡咎矣. |
이 一節일절은 九三의 象을 거듭 말한 것이다. 自己의 마음을 다 하는 것을 ‘充實함’이라 하고, 誠實한 것을 ‘믿음[信]’이라 하니 德을 기르는 基盤기반이다. 選擇선택해서 말하는 것을 ‘말을 바르게 함[修辭수사]’이라 하고, 行實을 敦篤돈독하게 하는 것을 ‘精誠을 세움[立誠]’이라 하니, 本業을 修行하는 일이다. 마땅히 닿을 곳을 알아 반드시 닿고자 하니, 이 德을 기르는 幾微를 더불어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마칠 곳을 알아서 반드시 마치고자 하니, 이 本業을 修行하는 義를 더불어 保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위로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驕慢하지 않고, 아래로 낮은 곳에 있더라도 근심하지 않기 때문에 危殆하나 허물이 없다. |
480) 경학자료집성DB에서는 乾卦 九三에 該當하는 것으로 分類했으나, 內容에 따라 이 자리로 옮겼다. |
【이병헌(李炳憲) 『역경금문고통론(易經今文考通論)』】 |
程傳曰, 知至至之, 致知也, 始條理之事也. 知終終之, 力行也. 終條理之事也. 『程傳』에서 말하였다. 닿을 곳을 알아서 닿는 것은 앎을 完成하는 것이니, 條理를 始作하는 일에 該當한다. 마칠 데를 알아서 마치는 것은 힘써 行하는 것이니, 條理를 마치는 일에 該當한다. |
按, 知至知終屬知, 至之終之屬行. 내가 살펴보았다. 닿을 곳을 알고 마칠 데를 아는 것을 앎에 所屬시키고, 닿고 마치는 것을 實踐에 包含시켰다. |
王曰, 居下體之上, 在上體之下, 知夫終始, 故不驕不憂也. 王氏가 말하였다. "下體하체의 위에 居하고 上體의 아래에 있으니, 마침과 始作을 알기 때문에 驕慢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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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出處: daum, Google, 周易大全(주역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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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梅信: 매화꽃이 전하여 주는 봄소식 * 去歲: 지난해. 昨年 * 何時: 언제 * 立春: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들며, 이때부터 봄이 시작된다고 한다. 양력으로는 2월 4일경이다. * 空庭: 텅 빈 뜰 * 屈指: 무엇을 셀 때 손가락을 꼽음. 매우 뛰어나 수많은 가운데서 손꼽힘 * 高賓: 귀한 손님. 귀빈(貴賓). | |||||||||||||||
1월의 시, 희망에게/시인 이해인, Good poem/Dear hope, 좋은글 좋은시 | |||||||||||||||
20th-century American painter and illustrator.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Norman Perceval Rockwell (노먼 퍼시벨 록웰 1,894-1,978) 作品名: Babysitter with Screaming Infant(소리내어 우는 乳兒를 안은 保姆.) 2 |
素玄堂 姜貞淑(소현당 강정숙) 作: ‘쉬었다갈까? ’ |
卦名 | 1. 重天乾 卦 [☰☰] |
卦辭 (文王) | 乾은 元코 亨코 利코 貞하니라 |
爻辭 (周公) | - 주역 중천건괘 효사 총정리, 소통의 인문학 김재홍 박사 STB 상생방송 문화 https://youtu.be/vif6CFeIpb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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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九는 潛龍이니 勿用이니라 九二는 見龍在田이니 利見大人이니라 九三은 君子 終日乾乾하야 夕惕若하면 厲하나 无咎리라 九四는 或躍在淵하면 无咎리라 九五는 飛龍在天이니 利見大人이니라 上九는 亢龍이니 有悔리라 用九는 見群龍호대 无首하면 吉하리라 | |
彖傳 (孔子) | p.281 彖曰 大哉라 乾元이여 萬物이 資始하나니 乃通天이로다 雲行雨施하야 品物이 流形하나니라 大明終始하면 六位時成하나니 時乘六龍하야 以御天하나니라 乾道 變化에 各正性命하나니 保合大和하야 乃利貞하니라 首出庶物애 萬國이 咸寧하나니라 |
- 주역(周易)2. 중천건괘-단왈. 통원서당 경전 읽기 강독 독송 성독(通圓書堂통원서당 https://youtu.be/9XJg4FBoYu8 | |
象傳 (孔子) | 주역(周易)3. 중천건괘-상왈. 통원서당 경전 읽기 강독 독송 성독 |
2 주역 상경_건위천 (상전포함) .박대표 | |
p.298 象曰 天行이 健하니 君子以하야 自强不息하나니라 潛龍勿用은 陽在下也오 見龍在田은 德施普也오 終日乾乾은 反復道也오 或躍在淵은 進이 无咎也오 飛龍在天은 大人造也오 亢龍有悔는 盈不可久也오 用九는 天德은 不可爲首也라 | |
文言傳 (孔子)
제1절
(제1~11) | - [손기원박사-77강] Code 주역64괘(3) - 중천건괘 문언전 |
[시공간학 건괘 문언전 033] 주역 乾卦 부연설명이 乾卦文言傳. (오상조) | |
p.306 제1) 文言曰 元者는 善之長也오 亨者는 嘉之會也오 利者는 義之和也오 貞者는 事之幹也니 제2) 君子 體仁이 足以長人이며 제3) 嘉會 足以合禮며 제4) 利物이 足以和義며 제5) 貞固 足以幹事니 제6) 君子 行此四德者라 故로 曰乾元亨利貞이라 제7) 初九曰 潛龍勿用은 何謂也오 子曰 龍德而隱者也니 不易乎世하며 不成乎名하야 遯世无悶하며 不見是而无悶하야 樂則行之하고 憂則違之하야 確乎其不可拔이 潛龍也라 제8) 九二曰 見龍在田利見大人은 何謂也오 子曰 龍德而正中者也니 庸言之信하며 庸行之謹하야 閑邪存其誠하며 善世而不伐하며 德博而化니 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하니 君德也라 제9) 九三曰 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无咎는 何謂也오 子曰 君子 進德修業하나니 忠信이 所以進德也오 修辭立其誠이 所以居業也라 知至至之라 可與幾也며 知終終之라 可與存義也니 是故로 居上位而不驕하며 在下位而不憂하나니 故로 乾乾하야 因其時而惕하면 雖危나 无咎矣리라 제10) 九四曰 或躍在淵无咎는 何謂也오 子曰 上下无常이 非爲邪也며 進退无恒이 非離群也라 君子進德修業은 欲及時也니 故로 无咎니라 제11) 九五曰 飛龍在天利見大人은 何謂也오 子曰 同聲相應하며 同氣相求하야 水流濕하며 火就燥하며 雲從龍하며 風從虎라 聖人이 作而萬物이 覩하나니 本乎天者는 親上하고 本乎地者는 親下하나니 則各從其類也니 | |
- 易經01乾卦 文言傳 - 1節 (郭明義的雲端講堂) https://youtu.be/LmOkuPcsuH0?list=PLbY_s_rcYW91kwLzoce0ExAUsICnpKep9 |
文言傳
(제2절) | p.342 上九曰 亢龍有悔는 何謂也오 子曰 貴而无位하며 高而无民하며 賢人이 在下位而无輔라 是以動而有悔也니라 |
- 易經01乾卦 文言傳 - 2節 (郭明義的雲端講堂) https://youtu.be/ANFyxeYPfJo?list=PLbY_s_rcYW91kwLzoce0ExAUsICnpKep9 | |
文言傳
제3절
(제1~7) | p.343 제1) 潛龍勿用은 下也오 제2) 見龍在田은 時舍也오 제3) 終日乾乾은 行事也오 제4) 或躍在淵은 自試也오 제5) 飛龍在天은 上治也오 제6) 亢龍有悔는 窮之災也오 제7) 乾元用九는 天下 治也라 |
- 易經01乾卦 文言傳 - 3節 (郭明義的雲端講堂) https://youtu.be/c62I1w13YGs?list=PLbY_s_rcYW91kwLzoce0ExAUsICnpKep9 | |
文言傳
제4절
(제1~7) | p.346 제1) 潛龍勿用은 陽在潛藏이오 제2) 見龍在田은 天下 文明이오 제3) 終日乾乾은 與時偕行이오 제4) 或躍在淵은 乾道 乃革이오 제5) 飛龍在天은 乃位乎天德이오 제6) 亢龍有悔는 與時偕極이오 제7) 乾元用九는 乃見天則이라 |
- 易經01乾卦 文言傳 - 4節 (郭明義的雲端講堂) https://youtu.be/Val_ngTMJLI?list=PLbY_s_rcYW91kwLzoce0ExAUsICnpKep9 | |
文言傳
제5절
(제1~6) | p.350 제1) 乾元者는 是以亨者也오 제2) 利貞者는 性情也라 제3) 乾始 能以美利로 利天下라 不言所利하니 大矣哉라 제4) 大哉라 乾乎여 剛健中正純粹 精也오 제5) 六爻發揮는 旁通情也오 제6) 時乘六龍하야 以御天也니 雲行雨施라 天下平也라 |
- 易經01乾卦 文言傳 - 5節 (郭明義的雲端講堂) https://youtu.be/Vuw6lBu0RXE?list=PLbY_s_rcYW91kwLzoce0ExAUsICnpKep9 | |
文言傳
제6절
(제1~7) | p.358 제1) 君子 以成德爲行하나니 日可見之 行也라 潛之爲言也는 隱而未見하며 行而未成이라 是以君子 不用也하나니라 제2) 君子 學以聚之하고 問以辨之하며 寬以居之하고 仁以行之하나니 易曰 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하니 君德也라 제3) 九三은 重剛而不中하야 上不在天하며 下不在田이라 故로 乾乾하야 因其時而惕하면 雖危나 无咎矣리라 제4) 九四는 重剛而不中하야 上不在天하며 下不在田하며 中不在人이라 故로 或之하니 或之者는 疑之也니 故로 无咎라 제5) 夫大人者는 與天地合其德하며 與日月合其明하며 與四時合其序하며 與鬼神合其吉凶하야 先天而天弗違하며 後天而奉天時하나니 天且不違온 而況於人乎며 況於鬼神乎여 제6) 亢之爲言也는 知進而不知退하며 知存而不知亡하며 知得而不知喪이니 제7) 其唯聖人乎아 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인저 |
- 易經01乾卦 文言傳 - 6節 (郭明義的雲端講堂) https://youtu.be/VYjkXnpodQE?list=PLbY_s_rcYW91kwLzoce0ExAUsICnpKep9 | |
*****(‘2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