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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제
현존하는 최초의 헬라어 사본들과 이레내우스(Irenaeus, A.D. 130-202년 경)로부터 시작되는 여러 교부들의 저술들은 이 책을 단순히 “요한의 계시”라고 칭하고 있다. 후에 중세의 사본들은 이 표제에 수식어들을 덧붙여 “신학자 겸 전도자 요한의 계시” 또는 “신학자 성 요한의 계시”라고 하였다. 흠정역에서 볼 수 있는 “예언자 성 요한의 계시”라는 표제는 후자의 표제를 영어로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헬라어 단어 “아포칼립시스”(apokalupsis)는 “묵시”, “계시”라는 뜻으로서, 문자적으로는 “벗김”이란 의미이며, 특히 종교적인 문헌에서는 미래를 벗기는 것을 뜻한다. 묵시 문학은 중간사(中間史)시대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유대인들 가운데서 하나의 특징적인 문학 형태였으며 초기 교회의 어떤 저술가들 가운데서도 역시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문학 형태였다.
2. 저자
계시록의 저자는 자기가 “요한”이라는 것을 거듭 거듭 밝혀주고 있다(계 1:1, 4, 9; 21:2; 22:8).이 이름의 헬라어 형태는 “요안네스”(Ioannes)(눅 1:13)인데, 이것은 흔히 있는 히브리 이름 “요하난”(Yochanan, Johanan)의 음역이다. “요하난”이란 이름은 구약의 후기 책들과 외경과 요세푸스의 문헌에 허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름은 이 책의 저자가 유대인임을 밝혀준다.
여러가지 증거들은 요한이라는 이름이 많은 유대교의 묵시적 작품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묵시적 작품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가명이 아니라 이 책의 저자의 실제적인 이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첫번째 사실은 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고 밝힘에 있어서 자신이 교회 내의 어떤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돋보이게 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가지 유대교회의 묵시들과 그리스도교의 묵시들은 히브리인 부조들과 선지자들 또는 그리스도교 사도들의 저술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만약 계시록도 역시 그 저자의 이름이 가명이라면, 그 저자는 자신을 하나의 사도로 소개하기 위하여 특별한 시도를 했을 것이 기대된다. 그러나 그 저자가 자신의 이름이 “너의 형제 요한”(계 1:9, 바울에 대한 베드로의 호칭 벧후 3:15)이라고 한 단순한 진술은 그가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밝히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분명히 그 기자는 교회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를 밝힌 것과 그가 본 계시들의 기록을 신용하기에 충분하였다.
더우기, 예언의 은사가 활발하게 나타나던 때에는 가명을 쓰는 습관은 성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중간사 시대 동안에는 우리가 아는 대로는 유대인들 가운데 공인된 선지자가 없었으므로, 종교적인 저술가들은 그들의 저술이 전반적으로 용납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에다 고대의 어떤 명망높은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낀 사례가 빈번하였다. 구약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던 참된 선지자가 그 당시에 없었던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함께 예언의 은사가 다시한번 활약하였다. 1세기의 그리스도 교회에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바와같이 가명을 사용할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선지자의 직분이 좋지 않은 평판을 얻게 되고, 2세기에 와서는 마침내 사라져 버리게 되자, 여러 사도들의 이름을 도용한 가명의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은 사실들에 비춰볼 때, 계시록은 1세기에 기록된 것으로서 가명의 작품이 아니라, 그의 본명이 요한인 사람이 직접 저술한 책이라고 결론을 짓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다.
그러면 이 요한은 누구였을까? 신약은 여러 사람들을 이 이름으로 일컫고 있는데, 그들은 침례자 요한,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세베대의 아들 요한, 그의 성(姓) 마가였던 요한, 대제사장 안나스의 어떤 측근이었던 요한(행 4:6)등이다. 계시록의 저자가 침례자 요한일 수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안나스의 측근인 요한이 계시록의 저자였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 교인이 되었다는 암시가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흡사하게 마가 요한이 계시록의 저자였다는 증거도 거의 없다. 제 2복음서(마가복음)의 문체와 어투와 접근 방법은 계시록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며, 초기 교회의 어느 누구인가 계시록과 마가복음을 본격적으로 연결시켰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와같이 하나씩 제외하다보면, 남는 것은 세베대의 아들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이다.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내부 일원들 중에 하나이었다. 거의 만장일치로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은 그를 계시록의 저자로 인정하고 있다. 사실에 있어서, 그들의 저술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이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는 3세기 중엽까지의 모든 그리스도교 저술가는 계시록을 사도 요한의 기록으로 돌린다.이러한 저술가들이란 로마의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Justin Martyr, A.D. 100-165?), 리용(Lyons)의 이레내우스(Irenaeus, A.D. 130- 202?), 카르타고(Carthage)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A.D. 160-240?), 로마의 히폴뤼투스(Hippolytus, A.D. 235? 사망),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A.D. 220? 사망)등이다. 이러한 증언들은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믿던 초기 교회의 강하고도 널리 퍼져 있던 신념을 입증해 준다. 게다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여러가지 전통들은 요한의 말년을 에베소라는 도시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와같이 이레내우스는 그의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를 본 적이 있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서머나의 연로한 폴리갑을 만난 일이 있다고 선언하면서 그 사람들 가운데서 트라야누스(Trajan, A.D. 98-117)시대까지 에베소에서 영주한 요한도 만났다고 하였다. 에베소의 감독 폴뤼크라테스(polycrates, A.D. 130-200?)는 그의 가문에서 그리스도교의 감독이 된 여덟번째의 인물로서 증거하기를, “주의 품에 기대고 있던” 그 요한은 “에베소에서 휴양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진술들은 요한이 친히 그의 기록을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과 에베소로 보낸다고 말한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계 1:4, 11).
이 기간 동안에,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임을 불신하는 것으로 말한 유일한 증언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 파피아스(Papias, A.D. 163? 사망)에게서 유래한다. 파피아스의 작품들은 상실되고 없으며, 그의 작품들 가운데 현존하는 모든 것은 후기의 저술가들에 의하여 보존된 인용구들 속에 극히 단편적인 형태로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 둘은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7세기 또는 8세기의 사본으로서 시데의 필립(Philip of Side, 5세기)이 저술한 ‘역대기’의 요약인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파피아스는 그의 두번째 책에서 신령자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살해당하였다고 말한다” 라고 하였다. 이와 흡사하게 게오르기우스 하마르톨루스의 역대기(Chronicle of Georgius Hamartolus, A.D. 860경)의 한 사본은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한 목격자인 히에라폴리스의 감독 파피아스는 주의 말씀을 기록한 그의 두번째 책에서 그(요한)가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의 형제와 더불어, 그들에 관한 그리스도의 예언을 분명하게 성취하였다고 말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이 인용구들은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에베소 근방에 살고 있던 한 그리스도교 임원인 사도 요한은 그의 형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 의하여 너무나 일찌기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학자들이 보통 매기는 연대인 네로나 도미티아누스의 시대에 계시록을 기록하지 못했다고 증언하는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역사적 배경’ 참조). 그러나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보면, 이 인용구들에 관한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가 없다. 옥스포드 사본으로부터 따온 구절에서 요한을 “신학자”라고 칭한 사실은 그 인용구가 중세의 필사자에 의하여 약간 수식되었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칭호는 8세기 이전의 것으로서 현존하는 어떤 성경 사본에서도 요한에게 적용된 적이 없으며, 따라서 파피아스가 그 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게오르기우스 하마르톨루스에게서 따온 두번째 인용구는 그 저자의 오직 한 사본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그의 저작은 다른 사본들은 단지 요한이 평화로운 가운데 죽었다고만 말할 뿐, 파피아스의 글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고 있음이 확실하다. 결과적으로 파피아스가 요한의 죽음에 관한여 말한 바가 꼭 무엇인지는 알기가 힘들다. 만약에 그가 요한이 야고보처럼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참으로 기록했다면, 그것이 곧 그들의 죽음이 동기에 있은 일이라거나 또는 비슷한 시기에 있은 일이었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계시록은 그것이 기록되던 당시에 유대인들이 아직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을 유발시키고 있었음을 이 책 자체에 나타내고 있으며, 만약 요한이 마침내 순교자의 죽음을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유대인의 음모의 결과였을 것이다.
파피아스의 글에서 따온 세번째 인용구는 교회 역사가(歷史家) 유세비우스(A.D. 340 사망)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해석에다 내가 장로들에게서 잘 배워왔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을 덧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리를 나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장로들을 추종하던 어떤 사람이라도 오기만 한다면, 나는 장로들이 한 말들을 물어서 안드레나 베드로나 빌립이나 도마나 야고보나 요한이나 마태나 또는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를 알아 보았고, 아리스톤(Aristion)과 장로 요한과 주의 제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를 알아 보았다. 왜냐하면 나는 서적에서 얻은 정보가 살아있는 생생한 육성으로 하는 말만큼 나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많은 억측의 주제가 되어 왔다. 유세비우스는 이것을 1세기의 말엽에 아시아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두 사람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즉 사도 요한과 장로였던 다른 요한이 같은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의견은 이 후자 요한이 파피아스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던 그 사람이며, 그가 곧 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이라는 것이며, 한편으로 사도 요한은 복음서의 저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파피아스의 말을 또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는 일도 가능하다. 독일의 신약학자 짠(Zah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2d ed, vol.2, PP.451-453)이 지적한 바와 같이 파피아스의 진술 가운데는 장로들과 사도들 사이의 실제적인 구분이다. 파피아스는 그가 “장로들이 한 말들을 물어서…”라고 말해 놓고는 곧 이어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그가 “장로 요한”을 언급하면서 즉시 그를 “주의 제자들”중의 하나로 밝히고 있다. 그가 언급하는 두 부류 사이의 실제적인 구분은 “에이펜”(eipen-말했다)이라는 말과 “레구신”(legousin-말하고 있었다)이라는 말에 있다. 이것은 여기에 언급된 첫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파피아스의 시대 이전에 살면서 그들의 증거를 남긴 예수님의 제자들인 반면에, 두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파피아스의 당대에 아직도 살아 있어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만약 상기한 이레내우스의 증거가 받아들여진다면 사도 요한은 두가지 부류에 다 포함되었기 때문에 두번 언급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파피아스의 진술에서 두 사람의 요한을 끌어내려고 애쓴 유세비우스의 노력은, 그의 결론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뉘시우스(Dionysius, A.D. 265 사망)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의하여 더욱 더 이해할 만하게 된다. 문자적인 천년기를 강조하던 약간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디오뉘시우스는 ‘언약론’이라는 논문을 저술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계시록이 사도 요한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이름의 다른 사람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을 학자적인 논증으로써 증명하려고 애썼다. 디오뉘시우스는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임을 의심한 첫 교부이며, 그의 논증들은 그와 견해를 같이 하는 학자들에게 고전적인 논증으로 남아 왔다.
디오뉘시우스는 복음서의 언어와 계시록의 언어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들이 있다는 사실에다 그의 비평의 주안점을 두었다. 그 두가지의 책의 어휘들은 현저한 차이점들을 나타내고, 한 책에서 특별히 자주 사용된 많은 단어들이 다른 책에서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어 있다. 다음의 보기들은 특별히 두드러진 것들이다. “코스모스”(kosmos-세상, 세계)는 요한복음에서 79번 나타나지만, 계시록에서는 오직 3번 나타나고, “알레테이아”(aletheia-진리, 참)는 요한복음에서 25번, 계시록에서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포스”(phos- 빛)은 요한복음에서 22번, 계시록에서는 3번 나타난다. “아가파오”(agapao-사랑하다)는 요한복음에서 37번, 계시록에서는 4번 사용되었으며, “피스튜오”(pisteuo-믿다)는 요한복음에서 100번, 계시록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알라”(alla- 그러나)는 요한복음에서 100번 이상, 계시록에서는 13번 나타나며, “에노피온”(enopion-앞에, 면전에)은 요한복음에서 단 한번, 계시록에서는 36번 나타난다. “에모스”(emos-나의, 나의 것)는 요한복음에서 42번, 계시록에서는 단 한번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칭함에 있어서 복음서는 언제나 “암노스”(amno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계시록은 항상 “아르니온”(arnion)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두 단어 모두가 “어린 양”(lamb)을 뜻하는 단어이다.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은 언제나 “히에로솔루마”(Hierosoluma)로 되어 있으나, 계시록에서는 한결같이 “히에루살렘”(Hierousalem)으로 되어 있다.
디오뉘시우스는 요한복음의 헬라어는 정확하고 관용어법에 맞는 반면에 계시록의 그것은 정확한 헬라어 문법과 구문으로 설명될 수 없는 구절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내었다. 복음서와 계시록 사이의 이와같은 현저한 차이점들에 비추어서, 디오뉘시우스는 그 두 책이 동일한 저자의 기록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비평들은 계시록의 사도성과 그에 따라 정경성에 관한 동방 교회의 생각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유세비우스는 디오뉘시우스의 논증들의 세부 사항들을 다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위에 인용한 파피아스의 귀절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더욱 더 확고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흡사한 방법으로, 계시록의 정경성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 하였다. “복음서에 추가하여 요한이 기록한 글들 가운데 첫번째 편지서는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에 의하여 공히 아무런 논쟁없이 받아들여져 왔으나, 다른 두 편지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계시록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쌍방으로 각기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왔다.”
두 사람의 요한을 가려 내기 위하여 디오뉘시우스가 제시한 증거가 비록 유력하다 할찌라도, 마지막 판정이 내려지기 전에 여러가지 다른 사람들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디오뉘시우스와 유세비우스의 견해는 주로 두 가지 점- 파피아스의 글로부터 따온 모호한 인용 구절, 그리고 복음서와 계시록 사이에 있는 언어상의 차이점들에 입각한 디오뉘시우스의 논증에 의존하고 있다. 파피아스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은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가 그렇게 했다면, 그의 증언은 그것이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가 아님을 말해주는 증거로 사용되는 한에는 대여섯 명의 다른 교부들의 증언과는 모순을 이루고 있다(주(註):앞에서 언급한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 이레내우스, 테르툴리아누스, 히폴뤼투스, 클레멘트 등). 이 점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요한과 파피아스의 동시대인인 폴리갑과 개인적인 접촉을 친히 가진 바 있는 이레내우스의 진술이다. 그는 오직 한 사람의 요한, 즉 사도 요한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다고 명백히 진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볼 때, 파피아스의 애매한 진술이 두 사람의 요한이 존재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크게 강조되어서는 안된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와 계시록 사이의 언어적인 차이점들은 실로 큰 것이다. 두 책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주제와 문체상의 차이가 서로 다른 어휘들이 사용된 데 대한 어느 정도의 설명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동일한 저자가 “알라”(그러나), “에노피온”(…앞에), “에모스”(나의) 등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처럼 현격하게 다른 빈도를 보이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 아니다. 주제와 문학 형태에 상관없이 동일한 저자는 그와 같은 단어들을 전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하는 것이 상례이다. 두 개의 작품이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복음서와 계시록이 다른 것만큼 현격하게 그 빈도가 다를 때에는 우선은 그 단어들이 그 두 작품을 동일한 저자의 것으로 나타낸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자체가 바로 요한이 그 두 책의 저자가 아니라는 의미는 되지 못한다. 그 두 책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당시의 형편은 그 책들 안에 존재하는 바와 같은 차이점들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계시록에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계 1:9) 있는 동안에 그 계시를 받았다고 선언한다. 요한이 유배(流配)된 몸으로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계시록을 문장으로 형성함에 있어서 불가불 자기 자신의 언어 능력에만 의존하도록 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책의 언어가 항상 관용적(慣用的)이지는 못하고, 셈어적인 요소들(Semiticisms)이 종종 그 헬라어를 꿰뚫고 비쳐나오는 것과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문법에 대하여 언제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와 같은 상황은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그때의 형편과 온전히 조화를 이룬다. 나아가서 그 계시들이 기록된 것은 계시의 장면들이 그 선지자의 눈앞에 생생하게 지나가고 있을 때였음이 분명하다(계 10:4). 요한은 그가 기록한 계시의 극적인 감각이 상실되지 않도록 짐짓 수정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초기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은 전혀 다른 상황 하에서였다고 지적한다. A.D. 170년 경에 로마에서 요한의 제자 폴리갑이 그곳을 방문한 지 불과 수십년 후에 구성된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복음서들 가운데 네번째 것은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요한의 것이다. 그의 동료 제자들과 감독들의 격려를 받은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와 함께 오는 사흘동안 금식하고, 우리 각자에게 계시되는 바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서로 말해 주기로 하자’고 하였다. 그날 밤,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안드레에게 계시가 나타나기를 그들이 모두 수정을 하기는 하였으나, 요한이 그 모든 것을 그 자신의 이름으로 서술할 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이 이야기가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시기에 안드레와 다른 제자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과 같은 환상적인 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요한이 복음서를 저술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협조를 받았을 것임을 암시하는 핵심적인 진실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이것이 그러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10세기의 한 사본에 보존된, 파피아스의 기록으로 생각되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의하여서도 암시되고 있다.
“그러면, 이 복음서는 분명히 계시록 다음에 기록되었으며, 요한에 의하여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주어졌는데, 요한의 사랑받는 제자요, 요한과 함께 그가 부르는 것을 받아서 이 복음서를 기록한 파피아스라는 이름의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 그의 ‘엑소테리카’(Exoterica) 즉 마지막 다섯권의 책에다 자세히 기록할 때까지 요한은 아직도 생존해 있었다.”
이 이야기의 세부적인 내용들이 모두 입증된 사실로 간주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 두가지 진술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다른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서 저술했다는 생각이 2세기에 유포되어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와같은 매우 초기의 전통에 비춰볼 때의 복음서의 맨 끝부분에 기록된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 21:24)라는 진술은 요한의 이야기가 진실함을 보증하는 그의 조력자들의 선서구술서(宣誓口述書)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러한 증거의 재구성이 올바른 것이라면, 아마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혼자 있을 때에 기록된 계시록과 에베소에서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동료 신자들의 도움을 입어 기록된 복음서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적 및 문학적 차이점들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술한 증거에다 추가할 수 있는 것은, 계시록과 요한복음 사이에는 그 저자가 동일인임을 암시하는 현저한 문학적 귀절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계시록은 “생명수”(계 21:6; 22:17)에 대하여 말하고, 복음서는 “생수”(요 4:10; 7:38)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계시록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계 22:17)라고 초청하고, 복음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라고 선언한다. “옵시스”(Opsis-외모, 얼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오직 요한의 기록 가운데서만 사용되었다(요 7:24; 11:44; 계 1:16). “테레인 톤 로곤”(terein ton logon-내 말을 지키다)이란 표현(요 8:51, 52, 55; 14:23, 24; 15:20; 17:6; 요일 2:5; 계 3:8, 10; 22:7, 9)과 “오노마 아우토”(onoma auto-그의 이름, 그에게 이름)라는 표현(요 1:6; 3:1; 계 6:8)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의 상징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지칭한 곳을 제외하고는 오직 요한복음과 계시록에서만 그리스도가 어린양으로 특징지워져 있다(요 1:29, 36; 계 5:6 외 28번).
그러므로 비록 계시록의 저자가 요한임을 반대하는 증거가 제시된다 하더라도, 이 책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들이 합리적이고 건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3. 역사적 배경
현대의 학자들은 계시록의 기록 연대가 네로 통치(A.D. 54-68년경) 동안인 비교적 이른 시기인지, 베스파시아누스 통치(A.D. 69-79년경) 동안인지, 아니면 좀더 늦은 시기인 도미티아누스(A.D. 81-96년경) 통치의 말엽인지에 관하여 엇갈린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이르게 보는 학자들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언급된 박해를 네로 치하(A.D. 64)나 어쩌면 그에 뒤따른 베스파시아누스 치하에- 이 황제가 교회를 어느 정도로 박해하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박해와 동일시 한다. 그 학자들은 계시록에 묘사된 무질서한 세계는 네로의 말년으로부터 베스파시아누스의 초년까지의 로마 시를 어지럽히던 환난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가 나은 짐승(계 13:3)에게서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 부터 올라올”(계 17:8) 짐승에게서 네로의 재현을 보고 있다. 이 네로에 관하여 그가 죽은 다음에 항간에 퍼진 말에 따르면, 그가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었다. 이와 흡사한 방법으로 그들은 666이라는 신비한 숫자(계 13:18)를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했을 때의 “네로 캐자르”(Nero Caesar)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증거들은 많은 두드러진 학자들로 하여금 계시록의 연대를 제1세기의 60년대 또는 70년대로 정하게 하였다.
이 논증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들에 기초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그럴듯하게 보이는 까닭은 계시록에 기록된 몇개의 진술들에게 주어진 해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해석은 물론 주관적인 것이며, 따라서 과거의 많은 유능한 학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 교회 주석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그 까닭은 계시록의 예언들이 즉각적이고 지역적인 상황 그 너머의 것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계 1:11). 계시록의 기록 연대에 대한 어떤 증거든지 우선은 적어도 위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증거와 논증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의 증언은 계시록이 도미티아누스 통치 동안에 기록되었다는 의견에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있다. 요한으로부터 폴리갑까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레내우스는 계시록에 관하여, “그것은 과히 오래 전이 아니라, 거의 우리 시대에 곧 도미티아누스의 통치 끝 무렵에 나타났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빅토리누스(Victorinus, A.D. 303 년? 사망)는 말하기를 “요한이 이것들을 말할 때, 그는 캐자르 도티아누스에 의하여 광산 노동형을 선고받아 밧모섬에 와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그는 묵시를 보았다”(계 10:10; 1:9)라고 하였다. 유세비우스는 요한이 도미티아누스에 의하여 밧모로 보내졌으며, 도미티아누스에 의하여 부당하게 추방된 사람들이 그의 후계자인 네르바(Nerva, A.D. 96-98)에 의하여 석방되었을 때 사도 요한은 에베소로 돌아갔다고 기록하였다.
그와같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증언에 따라 우리는 계시록의 기록 시기가 도미티아누스의 통치기간 동안, 즉 A.D. 96년 경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당시 제국 내에 존재하던 형편을, 특히 도미티아누스 시대 동안에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간략히 언급하는 것은 흥미를 끄는 일이다. 황제 숭배 문제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중대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 바로 이 황제 치하에서였다.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맨 처음으로 부쳐진 지역인 로마 제국의 아시아 도(道)보다 더 심각하게 이것이 문제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계 1:1, 11).
황제 숭배는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이전에도 근동 지방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대왕은 신격화 되었고, 그의 후계자들도 그러하였다. 로마인들이 동부 지방을 정복했을 때, 장군들과 총독들은 가끔 신이라는 환호로써 영접되었다. 이러한 일은 로마인들이 항상 많이 퍼져 살던 아시아에서 특별히 더하였다. 제국 정신의 화신(化身)인 로마라는 여신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으며, 그 여신을 숭배하는 일은 황제 숭배와 연관되어 있었다. B.C. 195년에 그 여신을 위한 신전 하나가 서머나에 세워졌다. B.C. 29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여신과 율리우스 캐자르를 합동으로 모실 신전을 에베소에 건축하도록 허락하였으며, 또한 로마 여신과 자기 자신을 위한 신전을 버가모에다 짓도록 허락하였다. 이것은 생존하는 황제를 숭배하는 일의 첫번째 경우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경배하는 제식(祭式)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지역 백성들의 소원에 비춰볼 때, 그가 그러한 경배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현명한 조치로 간주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점차적으로 이러한 제식에 있어서 로마 숭배는 점점 덜 중요해졌고, 황제 숭배가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황제 숭배는 지역 신들의 숭배를 결코 대신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추가된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제국을 통일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황제 숭배의 의식들은 애국 예식들과 때로는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였다. 로마 제국의 원로원이 비록 공식적으로 어떤 죽은 황제들을 신격화하기는 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살아있는 황제의 숭배는 로마에서 반대를 당하였다.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 A.D. 37-41)는 황제 자신을 경배하도록 주장하고 나선 첫번째 황제였다. 그는 자기를 경배하기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박해하였으며,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그 당시에 그의 주목을 끌만큼 큰 존재가 되어 있었다면, 그가 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의 진노를 퍼부었을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후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여 국교(황제 숭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박해는 가하지 아니하였다. 황제 자신을 숭배하게 하는 문제를 또 다시 제기한 다음 황제는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 81-96)였다. 그리스도교는 아직도 로마 정부로부터 법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와 같은 종교라 할찌라도 법률에 저촉되는 일을 하지 않는 한 로마인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교가 바로 그 법률에 저촉되는 일을 한 것이다. 도미티아누스는 민중들 가운데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는 일을 확립하고자 애쓰면서 그의 신하들을 강요하여 자신을 숭배하게 하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기록하기를 그가 그의 행정 장관들의 이름으로 회람장(回覽狀)을 발부하였는데, 그 회람장의 서두는 “우리의 주와 우리의 신께서 이 일을 행하라고 명하시노라”라는 말로써 시작했다고 한다.
로마의 역사가 디오(Dio)의 글에서 따온 흥미있는 한 구절은 이 박해에 대하여 약간의 빛을 던져 주는 듯하다.
“그리고 그 같은 해(A.D. 95)에 도미티아누스는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집정관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를 살해하였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그가 비록 황제의 종형제였고, 또한 황제의 친척이 되는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아내로 삼기까지 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 두 사람에게 부과한 죄목은 무신론이라는 죄목이었으며, 이것은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유대인의 관습에 젖게 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정죄를 당한 바로 그 죄목이었다. 이들 중에 더러는 죽음에 처해졌고, 나머지는 적어도 그들의 재산을 몰수당하였다. 도미틸라는 단지 판다테리아로 추방당하기만 하였다.”
얼핏 보기에 이 귀절은 유대인들의 박해를 기록한 것처럼 보이지만(그리고 유대인 역사가 그라에츠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의 종형제가 유대인 개종자였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암시하기를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그의 아내가 처벌을 받은 것은 사실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하는 이교의 역사가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인 관습”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논리적인 묘사일 것이고, “무신론”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숭배하기를 거절한 것을 잘 표현한 것일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분명히 도미틸라와 클레멘스의 관계에 대하여 혼란을 일으킨 나머지, 도미티아누스는 클레멘스의 질녀인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유배시켰는데 그 까닭은 그녀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 두 언급은 모두 동일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들이 암시하는 바는 당시의 박해에는 황제의 가족들까지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황제를 모시는 사당에서 경배하기를 거절하는 것에 대하여 가한 그와 같은 박해의 형편은 요한이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하여 계시록을 기록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요한을 제외한 열두 제자가 모두가 이미 타계했고, 홀로 잔존한 요한마저 밧모섬에 유배당한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그것의 제2세대로 접어들어 있었다. 주를 알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제는 무덤 속에 누워 있었다. 교회는 일찌기 보지 못했던 맹혹한 외적인 위협과 직면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계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함으로써 요한에게 주어진 계시들은 그들의 당대에 있어서 하나의 특정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 계시들을 통하여 하늘은 고난당하는 교회를 향하여 문이 열렸으며, 황제의 허장성세(虛張聲勢)에 경배하기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금은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곁에 서 계시는 그들의 주께서 위엄과 권세에 있어서 그들의 경배를 요구하는 지상의 어떤 군주라도 무한히 초월해 계신다는 재보증이 주어졌다.
4. 주제
이 책은 서두에서(계 1:1)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개선으로 절정을 이루는 미래의 신비들을 벗기는 이른바 묵시 또는 계시임을 천명한다. 묵시 문학은 두 세기 이상 동안 유대인의 종교 문학의 한 탁월한 형태였었다. 실제에 있어서 처음으로 알려진 묵시 문학인 다니엘서는 B.C. 6세기의 바벨론 포로시대에 나타났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뒤에 마카베오 전쟁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다시한번 정치적인 독립을 얻게 되었을 때 새로운 유대인 왕국을 갈망하는 메시야적 기대가 고조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다니엘서의 문학적 형태 및 상징들과 다소나마 근사한 묵시 문학 체제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 다음 세기에 로마인의 정복으로 인하여, 하스몬 가(Hasmonaeans)를 통한 메시야적 왕국의 실현을 염원하던 유대인들의 희망이 깨어지자, 그 유대인들이 이제는 로마인들을 타도할 하나의 메시야를 기대하게 되었으므로 메시야적 기대는 더욱 강렬하게 되었다. B.C. 1세기로부터 A.D. 1세기까지는 그와 같은 희망이 자극제가 되어 더욱 많은 묵시적인 작품들이 계속 나타났다.
종교적인 배경에 있어서 주로 유대적인 교회를 위하여 대부분 모두가 아니라면 유대인들에 의하여 기록된 신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메시야적 왕국으로 인도하여 들이는 사건들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전망을 제시하는 하나의 묵시를 포함시키신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별 가운데서 그분은 인간의 언어로써, 그리고 그의 기별이 맨 처음 주어졌던 사람들에게 친숙한 문학 형태로써 그의 뜻을 표현시키는 것이다.
묵시가 실제로 예언이기는 하지만, 다른 성서적 예언(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소 선지서들에 나타난 것과 같은 것)과는 여러가지 중요한 국면에서 차이점이 있으며, 이러한 구별적인 특색들은 묵시 문학의 표징을 이룬다. 이러한 구별적인 특징들 가운데 특별히 중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묵시의 우주의 범위: 대부분의 예언이 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들이 차지할 영광스러운 미래를 중심으로 한 국가적 국제적 문제들과 관계되어 있다. 묵시는 보다 더 장엄한 우주의 무대 위에서 전개되고 한 편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다른 한 편에는 사단이 진을 치고 있는 대쟁투를 그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2) 묵시의 기초는 이상과 꿈에 기초함: 묵시의 기자는 그가 “성령에 감동하여”(계 1:10) 있는 동안에 그에게 주어진 꿈과 이상을 기록한다. 그는 가끔 떨어진 곳으로 데려감을 당하거나 들리움을 당하여, 그곳에서 인간의 언어로는 가히 묘사할 수 없는 위엄있고 장려한 광경들을 보기도 하고, 또 그곳에서 천사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와같은 경험들은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지만, 특별히 묵시적인 기록들의 특징을 이루고 있으며 사실에 있어서 그러한 경험들은 다니엘서와 계시록의 묵시적 부분의 내용 전부를 형성한다고 할 정도이다.
(3) 묵시에 있어서 상징의 사용: 일반적으로 말해서 예언에서는 상징들이 일상 생활에서 유도한 구체적인 실물 교훈들 예컨대, 토기장이와 진흙(렘 18:1-10), 멍에(렘 27:2), 박석(겔 4:1, 2)등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묵시적인 예언에서 사용된 상징들은 거의 언제나 실제적인 생활에서는 전혀보지 못한 생물들 예컨대, 머리가 여럿인 짐승들, 하늘로 날아가는 천사, 지력을 가지고 말하며 행동하는 동물들 등이다. 이와 비슷하게, 때의 기간들도 보통 있는 예언에서는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실제적인 햇수로 예언 가운데 나타나는 반면에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때의 기간들은 반복해서 사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년을 하루로 나타내는 연일 원칙(年日 原則)을 기초로 하여 이해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4) 묵시의 문학 형태: 많은 예언들은 시적(詩的)인 형태로 되어 있는 반면에, 묵시적인 예언 및 비정경(非正經)문헌은 이따금씩 시가 삽입되는 경우- 특히 찬미일 경우- 가 있기는 하지만(계 4:11; 5:9, 10; 11:17, 18; 15:3, 4; 18:2-24; 19:1, 2, 6-8), 거의 전부가 산문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은 고려 사항들은 하나의 원칙을 가리켜 주고 있는데, 그것은 묵시적인 기록을 올바로 해석하려면, 그것이 갖고 있는 특징적인 문학 구조와 신학적 강조점에 입각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원칙이다. 그것이 주는 기별의 중심적인 주제는 이 세상의 격변적인 종말과 새 세상의 건립에다 특별히 촛점을 맞춘 대쟁투이다. 이 모든 것들은 극히 상징적인 언어로 묘사되어 있어서, 언제나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늘의 사물들에 관하여 말함에 있어서 문자적인 언어는 때때로 하늘의 보다 미묘한 실재들을 전달하기에 전혀 부적당한 때도 있다. 어떤 점에 있어서 묵시에 사용된 표상적인 언어는 비유에 사용된 언어와도 흡사한데, 이 두가지를 해석함에는 동일한 조심성이 요구되고 있다.
이 책은 지상의 한 백성이 당신의 흠없는 성품을 반영할 수 있도록 그들을 완전케 하고, 또 당신의 교회로 하여금 역사의 파란곡절을 지나 당신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도록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분리하는 장막이 여기에서 보다도 더 완전하게 걷혀진 곳은 성경 말씀 중에 아무 데도 없는 바, 이는 무대의 상부와 배후를 보며 또한 인간의 이해 관계와 권력과 욕망의 일체의 승부를 통하여 자비하심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대리자들이 묵묵히 또, 인내성 있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계시록은 네가지 주요 부분 또는 예언의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일곱 교회, 1-3장
(2) 일곱 인, 4장-8:1
(3) 일곱 나팔, 8:2-11장
(4) 대쟁투의 마지막 사건들, 12-22장.
특별히 이 책의 언어가 이따끔씩 극히 상징적이라는 사실에 비춰 볼 때, 그 영감을 받은 기자의 의도와 목적, 그리고 그것이 맨처음 보내졌을 때의 독자들에게 전달해 준 의미등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요긴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의 상징들과 그것이 주는 기별에 대한 해석은 한낱 개인적 의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맨 처음에 이 책의 독자로 생각된 사람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그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구약 성경의 기록들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간주하였으며(요 5:39; 행 24:14; 딤후 3:16, 17), 또한 그들은 새로운 계시를 해석함에 있어서 옛 계시를 통하여 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관찰과 원칙들은 이 책을 해석함에 매우 유용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계시록에는 성경의 모든 책들이 만나고 종결된다.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그것은 다니엘서를 보충하는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인봉된 것(단 12:4)의 다수가 계시록에서 개봉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 두 책은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 계시록은 구약의 39책 중에서 28책으로부터 인용하였거나 암시를 받고 있다. 한 권위있는 조사에 의하면, 그와같이 인용 또는 암시된 귀절이 505개나 있으며, 그중에 약 325개는 구약의 예언서- 특히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에서 온 것이다. 소 선지서 가운데서는 스가랴, 요엘, 아모스, 호세아에서 온 것들이 가장 흔하다. 오경의 책들 가운데서는 출애굽기가 가장 많이 사용되어 있고, 시적인 부분 즉 시편(눅 24:44)도 많이 이용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신약으로부터 마태복음, 누가복음, 고린도전서와 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등의 내용이 반영된 것도 발견해 내었다. 인용 및 암시 구절들을 잘 음미해 보면, 요한이 이따금씩은 70인 역이나 후기 헬라어 역본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가 히브리어 구약으로부터 직접 번역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계 18; 사 47:1; 렘 25:12; 50:1; 겔 26:13).
이와같은 인용 및 암시 귀절들을 구약의 역사적 배경 가운데서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계시록에서 그것들이 나타나는 구절들을 이해하는 첫째 단계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적응된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요한이 그것들을 사용한 전후 문맥에 대해서도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이것은 인명과 지명에 적용되는 말이며, 또한 사물과 여러가지 사건들에게도 적용시켜야 할 말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상징들의 다수는 현존하는 유대인 묵시 문학에서 이미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 문학은 이러한 상징들을 해명함에 있어서 때때로 유용한 것이다. 그 당시의 로마의 역사를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또한 요한의 언어가 로마 제국에 관하여, 그리고 그 제국의 지배하에서 교회가 겪은 체험에 관하여 묘사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의 로마 역사를 연구하면, 몇개의 수수께끼 같은 귀절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국, 당대의 문학적 배경에 비춰서 동시대의 사상 및 표현의 유형들에 대하여 주의와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이상 가운데서 요한의 면전에 지나가는 연속적인 장면들의 의미를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계시록은 요한의 시대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시대 전체를 통하여, 마침내는 시간의 맨 마지막까지 교회를 인도하고 위로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주어졌다는 것이다. 바로 이 책 안에 사도 시대의 신자들과 장차 올 여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세상 역사의 마지막 날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유익을 위한 교회의 역사가 예언되었고, 요긴한 권면이 주어졌다. 이것은 그 모든 사람들이 그들 앞에 닥칠 위험과 환난들에 대한 이지적인 이해를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컨대, 일곱 교회의 이름들은 역사의 서로 다른 시기에 있는 교회에 대한 상징이다. 따라서 에베소에 있는 지역 교회는 사도 시대의 전체 그리스도인 집단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주어진 기별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성격 묘사와 그것에게 주는 교훈은 그 기별이 기록되던 당시의 그 교회의 필요에 특별히 부응했다고 결론짓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또한 사도 시대의 전체 그리스도 교회의 필요에 부응하였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역사의 그 시기가 체험한 바를 간략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그것이 기록된 것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격려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이는 유사한 형편하에서는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에 유추(類推)하여, 다른 교회들에게 보낸 기별들도 그것과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네가지 주요 계통들은 각각 세상 역사의 마지막 장면들에게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계시록의 기별은 오늘날의 교회를 위하여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단순한 예언적 구절이라 하더라도 하나 이상의 많은 성취를 가지게 되는 것은 확실하다(신 18:15). 그와같은 예언들 중에 더러는 즉각적인 성취와 함께 비교적 먼훗날의 성취를 함께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모든 시대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원칙들을 포함하고 있다. 더우기 “하나님의 허락들과 경고들은 공히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서신 4, 1883)
이리하여 세상 역사의 초기에 이미 완전한 성취를 볼 수도 있었던 어떤 예언들이 교회가 그의 특권과 기회들을 충분히 활용하는 일에 실패함으로 인하여, 후대로 미루어져 왔던 것이다.
5. 개요
Ⅰ.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1:1-3:22
1. 머리말 1:1-8
2. 첫째 계시의 서론: 그리스도에 관한 이상 1:9-20
3. 에베소: 너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2:1-7
4. 서머나: 생명의 면류관을 위하여 분투하라 2:8-11
5. 버가모: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 2:12-17
6. 두아디라: 이미 가진 것을 굳게 붙잡으라 2:18-29
7. 사데: 너의 죽게 된 남은 것을 살리라 3:1-6
8. 빌라델비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3:7-13
9. 라오디게아: 네 자신을 발견하라 3:14-22
Ⅱ. 일곱 인의 계시 4:1-8:1
1. 둘째 계시의 서론: 하늘 보좌에 관한 이상
(1) 하나님의 보좌 4:1-7
(2) 네 생물과 24장로의 경배 4:8-11
(3) 일곱 인의 책을 받으신 어린 양 5:1-7
(4) 어린 양에게 드리는 새 노래의 찬송 5:8-12
(5)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드리는 찬송 5:13, 14
2. 첫째 인: 흰 말 6:1, 2
3. 둘째 인: 붉은 말 6:3, 4
4. 셋째 인: 검은 말 6:5, 6
5. 넷째 인: 청황색 말 6:7, 8
6. 다섯째 인: 순교자들의 탄원 6:9-11
7. 여섯째 인: 하나님의 진노의 날 6:12-17
8. 종말시대의 사건: 144,000인의 인침
(1)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 7:1-3
(2) 인맞은 144,000 7:4-8
(3) 셀 수 없는 큰 무리 7:9-17
9. 일곱째 인: 대쟁투가 끝남 8:1
Ⅲ. 일곱 나팔의 계시 8:2-11:18
1. 셋째 계시의 서론: 향단 봉사에 관한 이상 8:2-6
2. 첫째 나팔: 피섞인 우박과 불 8:7
3. 둘째 나팔: 불붙는 큰 산 8:8, 9
4. 셋째 나팔: 떨어지는 별 8:10, 11
5. 넷째 나팔: 해와 달과 별들이 침을 당함 8:12, 13
6. 다섯째 나팔: 황충 9:1-12
7. 여섯째 나팔: 유브라데 강의 네 천사 9:13-21
8. 종말 시대의 사건: 힘센 천사의 큰 외침
(1) 작은 책을 가진 천사의 큰 외침 10:1-11
(2) 세계적인 예언 사명 10:8-11
(3) 성전의 척량 11:1, 2
(4) 두 증인 11:3-14
9. 일곱째 나팔: 하나님의 승리 11:15-18
Ⅳ. 대쟁투의 계시 11:19-14:20
1. 넷째 계시의 서론: 하나님의 언약궤 11:10
2. 용의 여자에 대한 공격 12:1-6
3. 용의 하늘에서의 전쟁 12:7-12
4. 용의 세때 반 동안의 핍박 12:13-16
5. 용의 여자의 남은 자손과의 쟁투 12:17
6.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13:1-10
7.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13:11-14
8. 짐승의 표의 강제 13:15-18
9. 종말 시대의 사건: 세천사의 기별
(1) 144,000인의 승리 14:1-5
(2) 첫째 천사의 기별 14:6, 7
(3) 둘째 천사의 기별 14:8
(4) 셋째 천사의 기별 14:9-13
10. 곡식과 포도송이의 추수 14:14-20
Ⅴ. 일곱 재앙의 계시 15:1-16:21
1.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 15:1-4
2. 다섯째 계시의 서론: 닫혀진 하늘성전 15:5-8
3. 첫째 재앙: 땅 16:1-2
4. 둘째 재앙: 바다 16:3
5. 셋째 재앙: 강과 물 16:4-7
6. 넷째 재앙: 해 16:8-9
7. 다섯째 재앙: 어둠 16:10-11
8. 여섯째 재앙: 큰 강 유브라데 16:12
9. 아마겟돈 대전 16:13-16
10. 일곱째 재앙: 큰 성 바벨론의 무너짐 16:17-21
Ⅵ. 그리스도께서 승리로 오심 17:1-20:15
1. 큰 음녀 바벨론 17:1-6
2. 큰 음녀와 짐승의 비밀 17:7-14
3. 큰 음녀의 살해 17:15-18
4. 큰 권세 가진 천사의 영광 18:1-8
5. 바벨론의 무너짐에 대한 통곡 18:9-20
6. 바벨론의 함몰 18:21-24
7. 할렐루야 찬송 19:1-10
8.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심 19:11-16
9. 땅의 완전한 정복 19:17-21
10. 사단의 1,000년간의 감금 20:1-6
11. 죄악의 영멸 20:7-15
Ⅶ. 새 하늘과 새 땅 21:1-22:21
1. 새 예루살렘 21:1-27
2. 새 예루살렘의 진술 21:9-27
3. 새 예루살렘의 축복 22:1-5
4. 끝 맺는 말 22: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