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스겔 성전은 나의 신앙을, 에스겔 "거룩한 땅"은 나의 생활을 측량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의 토지분배는 마지막 때보다 지금 필요한 이야기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영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9:29)
필자가 성경에서 땅과 희년을 보고 관심을 가진 지는 40년이 넘었다. 희년법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경제학이 부정할 수 없는 토지의 물리적 성질, 영구 미실현가격)을 발견한 지 31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기간을 성경의 땅과 씨름하면서도 에스겔서가 보여주는 땅에 대해서는 측량 한번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 에스겔서 말씀을 따라서 측량을 해보고 있다. 그런데 측량을 해도 그 면적의 이해가 어렵고,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아직 측량하지 못한 곳도 있다.
필자는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하마스 간의 느닷없는 전쟁을 보면서 이스라엘 땅을 보게 되었다. 처음은 이스라엘 전쟁도 땅 문제로 발생하였기에 단편 글, 한 편만 써보려고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8번째의 글을 올리고 있다. 들여다 본 이스라엘 땅은 그 안에서도 천지창조부터 지금 전쟁 중인 가자지구는 물론, 세상 종말에 드러날 새 예루살렘까지 성경 66권의 내용이 다 들어있었다. 아니 성경이 말하는 땅은 이스라엘 영토 안에 가장 많이 들어있었다.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에스겔서 45장에서 하나님께 예물로 드릴, 거룩한 땅을 측량하여 본다. 거룩한 땅 전체 면적은 한 변이 길이가 25,000척인 정사각형 안에 들어있는 면적이다(가로 세로의 길이가 각각 13.3km). 이 정사각형 면적은 계산기를 두들기면 나오는 숫자인데 그 숫자를 믿지를 못하여 가까운 지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측량하는 땅의 면적은 길이만 보면 비교가 쉽다. 그러나 면적을 제곱으로 계산하여 면적을 비교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웠다(두 면적에서 길이가 2배이면, 면적은 2의 제곱인 4배로 커짐). 계산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계산된 수치의 비교에서 이해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우리가 은행 이자를 계산할 때 한 해의 이자는 계산이 쉽다. 그러나 5년 후, 10년 후의 이자 총계는 이것이 제곱수로 곱하는 복리법이라서 계산이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원리다. 계산된 이자의 크기가 연도가 길어지면 기하급수로 커진다. 그래서 그 크기의 연도별 비교나 인식에서 감을 잡을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계산한 예물로 드릴 거룩한 땅의 전체 면적은 약 5,350만 평이다. 미터법으로는 약 177(167.89)㎢다. 이 땅의 규모는 지금 전쟁 중인 가자지구 면적(365㎢)과 비교하여 약 48.5%의 면적이다. 이 전체의 땅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릴 거룩한 땅이다. 그런데 땅과 희년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 왜 이 거룩한 땅은 그동안 측량도 한번 해보지 않았을까? 자책감이 생긴다.
에스겔서 40장에서 48장까지는 재미도 없는 측량 이야기다. “성전은 길이가 **척, 너비가 **척, 땅은 길이가 얼마, 얼마, 너비가 얼마, 얼마” 지겹도록 반복한다. 하나님은 직업이 건축 설계사이신지, 아니면 전문 측량기사이신지? 읽기가 싫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읽지를 않았고 읽어도 근성으로 읽고, 관념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였다. 흔히 그러하듯이 성경의 족보를 보아도 로마서를 보듯이 보고, 계시록을 보아도 영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었다. 에스겔이 본 환상도 필자는 그렇게만 보아왔다.
왜 그랬을까? 굳이 변명하자면 에스겔이 본 거룩한 땅은 죽어서 가는 천국에서나 있을 이야기, 아니면 재림이나 종말의 때에나 필요한 말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희년법은 늘 현실에 필요한 것이라고 입이 닳도록 강조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에스겔이 말하는 토지분배와 희년은 마지막 때나 있을 사건으로 잘못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불러서 보여준 성전과 땅의 측량을 보면 그 세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은 측량기사처럼, 건물은 방마다 공간마다 여기저기, 땅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 이쪽저쪽의 길이(가로)와 너비(세로)를 재는데 빠짐이 없고, 빈틈이 없다. 그래서 필자가 측량한 성전을 따라가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땅도 여기저기의 길이를 재어본다. 그렇게 측량한 성전과 땅은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다.
성전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땅이 측량되기 전에 먼저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본 성전과 땅은 '성전은 성전대로(겔 40~43장)', '땅은 땅대로(겔 45~48장)', 별도로 측량한 것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에스겔 성전은 땅에 짓지 않고, 땅 위에 지으진(지을)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철로 위에 떠있는 자기부상 열차처럼 에스겔 성전은 땅 위에 떠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땅은 그 성전을 밑에서 떠받쳐주고 있다.
측량된 성전은 에워싸고 둘러싸여 있다.
하나님이 보여주는 측량은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믿음과 생활에 필요한 필수 요소를 구석구석 찾아가며 재고 보여주고 있다. 성전은 장소마다, 시설마다, 이곳 저곳이 두꺼운 담과 시설물로 서로서로 에워싸고 둘러싸여(히브리어, 샤비브 샤비브) 있다. 그남큼 철저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성전의 외각 담의 하나만 보더라도 두께가 무려 3.19m, 높이도 3.19m가 되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의 몸도 이렇게 강보로 둘러싸여 있었다(눅 2:12). 아기에게 필요한 유대인의 강보는 상처난 곳을 붕대로 싸매듯이 갓난 아기를 천으로 감아두는 것이다. 이렇게 둘러싸인 성전은 그 구조마저 세밀하고, 다양하다. 그 당시(주전 573년경) 에스겔 같은 사람의 여건과 능력으로는 결코 이런 성전을 설계할 수가 없고, 그 넓은 땅을 모두 측량할 수도 없다. 이런 세밀한 측량과 땅의 분할(분배)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가 있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주) 성전 측량에서 성전의 위치와 담과 벽, 그리고 각종 방과 시설물은 서로 서로 에워싸이고 들러싸여 있다. 여기서 '에워싸다'는 말이 히브리어 "사비브"라는 부사다(동사는 사바브). 에스겔서 43:12의 "주위"라는 용어에서 "샤비브, 샤비브(Sabib, Sabib)"가 복수로 반복되는 것은 성전이 거룩한 곳이므로 죄악된 세상과는 철저하게 분리, 보호, 보존되는 것을 강조한 의미가 들어있다. 에스겔 성전에서 이런 "샤비브 샤비브"가 독특한 표현으로 총 25회 등장한다(박윤식, 야호와 삼마 에스겔 성전, 2020, 도서출판 휘선, 259쪽~299쪽 참조)
하나님이 죽어가는 천국을 위해서, 마지막 때에나 있을 천국을 위해서 이렇게 세밀하게 측량할 필요가 있었을까? 왜냐하면, 마지막 때는 땅을 자로 재는 실제의 측량이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때는 하나님이 믿음과 불신을 갈라서 심판을 내리고, 순종과 불순종을 판단하여 그에 합당한 상과 벌을 내리므로 그것으로 끝이다. 그래서 무엇을 세우고 재거나, 지키자, 지키지 말지를 논의할 여지가 없다. 그때는 이미 이런 행위를 따라 살아온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 심판을 받는 시기다(계 20:12).
성전 측량은 나의 신앙을, 토지 측량은 나의 생활을 측량하고 있다.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내 규례대로 재판할 것이며 내 모든 정한 절기에는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이며 또 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며(겔 44:23,24)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성전의 측량과 토지의 측량과 분배, 그리고 그에 따른 계명의 준수와 당부는 마지막 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성전을 재고 또 재는 것, 땅을 재어 분배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성전의 측량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완전하게 분별하기 위한 것이다(겔 42:15~20).
하나님이 보여주신 에스겔 성전의 측량은 살면서 가져야 할 나의 신앙문제를 재고(돌아보고), 해결하는 방법이다. 나의 심령 속에 있는 이 방(예배), 저 방(기도), 구석구석(성경 공부)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신앙을 돌아보고, 무딘 곳을 갈고, 혼탁한 곳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
아직 성전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3층 구조에 90개의 골방들은 측량을 해도(겔 41:6) 그 내용을 모르겠다. 3층 구조로 된 방이 올라갈수록 넓어지고(겔 41:5~7), 제사장의 방들은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있다(겔 42:1~6).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 문자적 이해도 하지 못한 상태다. 골방은 기도하는 방이고, 제사장 방은 제사를 드리는 수종자들의 방이다. 그런데 이런 방에 대해서는 아직 문자적 이해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만큼 기도가 부족하고, 예배가 부실했던 것 같다.
이것이 성전 측량으로 보여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모습이다. 이렇게 자신을 되돌아 본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주시려는 새 영을 받아서(겔 36:26), 믿음의 성전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전 3:16, 엡 2:21).
그리고, 땅을 측량하는 것은 살면서 필요한 나의 생활문제를 돌아보고 해결하는 내용이다. 내가 세상 속에서 살아왔던 생활에서 이곳 저곳, 이 땅과 저 땅을 세밀하게 측량하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했다. 내 몸처럼 여기라는 이웃 사랑은 제대로 하고 살고 있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병든 자를 찾아보고, 소외된 자, 상처받은 자를 위로할 줄 알았는지? 성경이 말하는 빚을 탕감하고, 종을 속량하며, 토지 무르기를 하여서 이웃에게도 경제적 자유를 찾아주는 경제법은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는지? 이것이 안되면서 희년을 선포하여 모든 것을 회복하게 해놓은 하나님의 제도는 눈여겨 보았는지? 이것마저도 현실성이 없다면서 피하여 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나 자신을 살펴보아야 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을 따라서 땅을 실제로 측량하여 보면, 에스겔서가 더욱 새롭다. 에스겔서 40장에서 48장까지 말하는 미래에 대한 환상도, 1장에서 24장까지 말하는 내용, 곧 지금은 이스라엘에서 이미 성취된 역사와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예언은 성취된 과거와 아직 남아 있는 미래, 이렇게 시간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계시록도 마찬가지다. 계시록이 재림과 종말을 말하고 있으나 그 재림과 종말은, 그때보다 지금 나의 삶에서 필요한 이야기들이다. 재림과 종말의 때가 오면 이미 계시록이 보여주는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때를 대비하여 늘 깨어서 자기 삶을 지키라고 하신다. 때를 따라서(하루하루) 청지기 직분에 충성해야 하는 삶이다(마 24:42,45).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서나 효력이 생기고, 마지막 때에나 있을 사건이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정리를 하니 에스겔이 보여준 환상은 나에게도 분배 받을 땅을 측량해야 하는 실제적 현실로 다가온다. 에스겔이 보여준 성전은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다. 에스겔이 보여준 땅은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숨을 쉬는 나의 몸이 있는 장소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미래를 보여주며, 이스라엘을 살려내고, 세계 만민을 구원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열방의 모든 사람에게도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겔 37:27,28).
“여호와 삼마”,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겔 48:35)
에스겔서 48장 35절에서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가 거기 계시다’라는 뜻이다. “여호와 삼마”는 에스겔서 마지막 장(48장), 마지막 절(35절), 마지막으로 측량된 땅과 성읍에서 하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이다. 45장 1절부터 거룩한 땅으로 먼저 드릴 예물에 이 성읍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먼저 위치가 정해져야 하는 땅이다. 그러나 그 성읍의 측량은 제일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당시 백성들에게 땅을 먼저 분배하고, 자기 분깃은 나중에 분배받은 것과 같은 의미다(수 19:49~51).
성읍의 측량은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 있기에 에스겔 토지분배에 대한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글을 쓰는 중간에 먼저 끄집어낸 것은 이 구절이 너무 신비롭고, 오묘하여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측량한 성읍은 5,000척에 들판 250척, 공한지 250척의 합 500척을 제외한 한 변의 길이로 4,500척이다(1척 = 53.2cm= 0.532m). 이를 면적으로 계산하면 성읍은 1,733,691평이다{1,733,691 = (45,000척 * 0.532cm)^2/3.3058}. 성전의 전체 면적은 성전 외각 담 한 변의 길이가 500장대이므로 면적은 770,529평이다{770,529.3 = (500장대 * 6척 * 0.532)^2/3.3058}. 이 외각 담 안에 500척 정사각형으로 된 약 21,400(21,4303.6)평의 땅이 성전부지다. 지성소인 내전은 한 변의 길이가 20척으로 면적은 34.2평으로 국민주택 규모인 중형 아파트 한 채 면적이다. 지성소는 생각보다 넓지 않다.
500장대 길이의 정사각형 땅 정중앙에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짓는(세우는) 지가 분명하지 않다. 개역개정 성경은 에스겔서 45:13을 제단으로 번역하였고, 45:15는 번제단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킹제임스성경이나 영어성경은 구분 없이 제단으로 되어있다. 솔로몬 제단은 놋제단이므로 놋(구리, 청동)을 재료로 사용한 번제단이 맞다. 그러나 에스겔 제단은 놋제단이라는 말이 없다. 에스겔 성전의 제단이 번제단이 맞을지라도 그 단이 구약시대에 지었거나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이 제단은 거룩한 땅 전체 면적의 정중앙, 그리고 성전부지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찾아보아야 한다.
이 제단에서 번제를 드린다면 제단에서 성소로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고, 그러려면 물두멍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은 물두멍이 없다. 그래서 그 제단은 제물이 올려지기는 하나 제물을 태워드리는 번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태워드린 번제이면 손을 씻어야 할텐데 손을 씻는 물두멍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에스겔 성전은 물두멍이 없고, 지성소에는 말씀의 실체를 상징하는 법궤가 없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리거나 갈라놓고 하나님의 거룩과 존엄을 나타내는 휘장도 없다. 지성소는 높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본 제단(또는 번제단)은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로 받쳐질 그 십자가 제단을 예표하는 상징성을 가진 것이다.
에스겔 성전 제단에 올리는 제물은 짐승이 피를 흘려 드리는 제물이다(겔 43:18~27). 그러나 이 제사를 내용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어린 양이 제단에서 희생될 제물과 온전한 제사를 예표하는 것이다(요 1:29. 히 10:10). 필자는 그런 의미에서 에스겔이 본 제단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여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될 성스러운 장소로 보이게 된다. 에스겔 성전의 제단은 그런 의미가 있어서 거룩한 땅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전에서 흘러내린 생수는 제단을 지나서 밖으로 나오면 강물이 되고, 온 땅을 적셔서 생명을 살려낸다. 그리고 바다까지 흘러내려 바다를 채우고 살려낸다. 이 생수는 신약시대에 오면 성도들이 받을 성령을 의미한다(요 7:37,38).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로 퍼져나가서 인류를 구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지극히 거룩한 성소에 계시지 않고, “속된 땅”에 계신다(겔 48:35). 속된 땅은 거룩한 땅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예물로 드릴 가장 거룩한 땅과는 별개로 남쪽 위치하여 있다. 그곳은 성전을 관리하는 일반 백성들이 생업으로 경작하게 되는 농경지(기지, 기업)를 말한다(겔 48:18,19). 이 농경지는 개인별 경작지가 아니고 공동 경작지다. 공유지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경작지 정중앙에 성읍을 두고, 거기에 계신다. 이 성읍이 ‘여호와가 거기 계시므로’ “여호와 삼마” 성읍이다(겔 48:35).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에 계시지 않고, 생활 현장, 곧 12지파의 공동 경작지, 그 중앙에 계신다는 말이다. 출애굽 당시에도 하나님은 진의 정중앙인 성막에 있었고, 행진에서는 백성들을 앞장서서 인도하셨다.
이처럼 에스겔 성전이 있는 거룩한 땅을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을 함께 볼 수가 있다. 성전의 정중앙에 있는 제단을 보면, 희생 제물로 받쳐진(질)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에스겔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땅을 적셔서 생명을 살리는 것을 보면, 초대교회에 임재한(할) 성령을 이 성전에서 체험할 수가 있다.
그다음은 성전에서 거룩한 땅을 두고, 백성들이 생업을 꾸리며 살아가는 기업의 정중앙에 터를 잡고 계신, “여호와 삼마”,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런 신앙고백이 나온다. “거룩한 땅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생활 현장이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거룩한 땅"이 가진, 세 가지의 거룩함
그런즉 예물로 드리는 땅의 합계는 길이도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도 이만 오천 척이라 너희가 거룩히 구별하여 드릴 땅은 성읍의 기지와 합하여 네모반듯할 것이니라(겔 48:20)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배받을 12지파의 기업 사이, 그리고 동서국경 정중앙, 여기가 하나님께 예물로 드릴 "거룩한 땅"이다(겔 48:20). 그 거룩한 땅은 다시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가장 거룩한 땅이다(겔 45:1). 이 장소는 성전이 있고, 제단이 있으며 지성소(내전)가 있는 땅이다.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땅이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수종을 들면서 살고 있다. 이 장소가 거룩한 땅 중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다. 그래서 제일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구약시대는 제사, 신약시대는 예배가 생활의 우선이며, 중심 역할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성전에 수종드는 레위인들이 기업으로 살아가는 땅이다(겔 45:5,6). 레위인들이 경작하고 거주하는 기업은 20개의 마을(방)이 있다. 방이라고 하지만, 면적이 넓고, 레위인 모두가 살아야 하는 곳이므로 마을로 보아야 한다. 레위인은 제사 외에 성전의 관리와 성전 운영에 필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직분이다. 이 장소도 거룩한 땅이다. 제사나 예배 다음으로 중요시하는 역할이며, 그래서 레위인의 기업과 거주지가 제사장이 있는 성전부지 다음으로 거룩하다.
셋째, 거룩한 땅에서도 속된 땅이 있다(겔 48:15). 이 땅은 성읍에서 일하는 자의 양식으로 삼는다. 일종의 봉토(封土)라고도 할 수 있으나 일하는 자의 양식은 오늘날 공무 수행자에게 지급하는 보수에 해당한다. 여기서 “속된 땅”은 부정한 땅이라는 뜻이 아니다. 속된 땅이라는 말은 일반 경작지이기 때문에 제사나 성전 업무를 수행하는 땅과는 구별하여 그렇게 부른다. 이 땅도 거룩히 구별된 땅이므로 넓은 의미로 거룩한 땅에 속한다(겔 48:20).
이 넓은 의미의 거룩한 땅, 177㎢ 면적의 땅이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분배될 토지의 사이에 있다. 북으로는 7지파의 사이, 남으로는 5지파의 사이다. 동서로는 동서국경 정중앙이다. 거룩한 땅과 연접하여 동서국경까지는 왕의 토지다. 그러므로 거룩한 땅은 동서국경까지 배치된 왕의 토지 정중앙에 자리를 잡는다.
거룩한 땅도 정중앙, 성전도 정중앙, 제단도 정중앙이다.
이스라엘 영토의 남북 사이, 국경의 정중앙이다.
유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너비는 이만 오천 척이요 길이는 다른 몫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지니(겔 48:8)
에스겔 토지분배에서 하나님께 예물로 드릴 거룩한 땅은 중앙에 있다. 여기서 “중앙”이란 히브리어, “타베크”로 ‘정중앙’, ‘한가운데’라는 뜻이다. 이쪽저쪽 양쪽 끝에서 한가운데 지점을 말하며, 사방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이것은 한국의 한가위가 시간으로 그 시간의 정중앙(성경달력으로 해, 달, 24절기의 정중앙)을 말하는 것과 같이 '한복판'이라는 뜻이다.
이 거룩한 땅이 이스라엘 동서국경 정중앙에 있다(겔 48:8). 여기서 정중앙은 동쪽으로 요단강 또는 사해, 서쪽으로는 지중해 사이에서 정중앙이다. 면적은 177㎢ 다. 이 거룩한 땅의 정중앙에 사면 각 길이가 266m인 성전부지가 있다(겔 42:15,20). 출애굽에서 광야교회를 인도하는 성막이 진영의 정중앙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의미다.
성전 정중앙에 약 10~11m 높이의 제단이 있다. 에스겔서에서 성전 다른 곳은 설명이 없으나 제단은 길게 설명하고 있다. 성소는 높이를 측량하지 않았지만, 제단은 높이를 상세하게 측량하고 있다. 높이는 바닥층을 제외한 층수가 3층 구조로 1층 16척, 2층 14척, 맨 윗층은 12척으로 모두 네모반듯하며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제단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된 희생 제물이 되어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영적, 상징적인 중심지다(히 9:12~14,26). 성전의 정중앙에 제단이 있듯이, 교회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로 죽어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이 몸이 중심에 있다. 그리고 사람과 세상을 구원하는 시간 흐름에서 구속사의 중심지다.
"거룩한 땅"은 한 나라에서 경제생활의 정중앙이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그 성읍에서 일하는 자는 그 땅을 경작할지니라
이스라엘 영토, 사이와 정중앙에 있는 거룩한 땅에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성전에 봉사하며, 공동으로 생업에 종사는 기업(기지, 농경지)이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영토를 지파별로 분배받은 12지파의 대표성을 가진 자들이 여기에 모여서 함께 살며 성전에 필요한 일을 하는 곳이다. 좁게 보면 성전 사역이고, 넓게 보면 나라에 필요한 공무를 수행하는 곳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기지는 12지파별 분배된 토지에서 생업을 꾸리는 백성들 전체를 대표하며,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의 생활은 성전 사역을 제외하면, 생업을 위한 기업 경작과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생활이다. 이 기업의 생활은 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협동농장(또는 협업농장)의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룩한 땅, 중심지에 있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12지파가 공동으로 생업을 꾸리는 장소르 성읍으로 정하여 거기에 계신다. 그러면서 그 성읍을 “여호와 삼마(여호와가 거기 계신다”라고 하신다. 그리고 성읍에는 12개의 문이 있는데, 이 문의 이름은 야곱의 아들, 12형제 이름이 들어간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그것도 모계 혈통을 따라서 가까운 혈통을 따라 자리가 배치되고 있다(겔 48:31~33).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은 그 혈통 하나까지 철저하고, 빈틈이 없이 기억을 하신다. 그리고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한다.
지금 이스라엘의 농촌은 생산체제가 “키부츠(집단농장)”와 “모샤브(협업농장)”의 형태다. 이 키부츠와 모샤브가 이스라엘의 독립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의 경제를 받쳐주는 근간이 되어왔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키부츠와 모샤브의 장단점을 살리면, 성경 희년법이 지향하는 완전한(이론상 100%) 사유재산제, 그리고 온전한 자유시장경제를 실제로 실현할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포도원 경작자(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가르쳐 주신 “포도원 천국 경제법”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3,500년간 지키지 않았던 희년법을 이제 더 나은 경제법으로 대체시켜서 완성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경제 훈련을 시키는 중이다. 이것이 율법시대보다 훨씬 더 나은 경제법이며, 복음시대에 걸맞는 제도이다.
“거룩한 땅”은 지구촌의 정중앙이다.
... 지금 사람이 거주하는 땅과 여러 나라에서 모여서 짐승과 재물을 얻고 세상 중앙에 거주하는 백성을 치고자 할 때에(겔 38: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의 중앙”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앙은 히브리어, “타부르”이며, 가장 높은 곳, 중앙, 중심이라는 뜻이다. 에스겔서 5:5에서도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 두어 나라들(열방)이 둘러있게 하였다”라고 한다. 문자적으로 이곳은 이스라엘 전체 또는 예루살렘 전체를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세계 또는 각 나라의 중앙이라고 하신다.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 거룩한 땅의 정중앙과 에스겔서 38:12가 말하는 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의 중앙(가운데)은 지리상으로 반드시 한 지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적 의미으로 하나님이 거기를 중심지로 보는 것이므로, 내용상으로는 중앙과 일치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지리상으로 세계의 중심에 있다. 이스라엘 땅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을 오고 가는 길목이고, 교차지의 기능을 하는 곳이다. 대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이 각자 3대륙으로 흩어져서 사는 그 중심지에 있다. 지금은 노아의 아들 삼형제 후손들이 서로 다투고 대립하고 있지만, 때가 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로 서로가 화해하고 만나야 한다. 이 3대륙을 더 확대하면 한국도 있고, 미국도 있다. 남미와 호주도 있고, 극점으로 가면 남극과 북극이 있다.
예수님이 승천할 때,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행 1:8). 그 복음의 출발지와 도착지가 이곳이므로 여기가 세계의 중앙이다. 이런 이스라엘 땅 정중앙에 에스겔이 본 거룩한 땅이 있고, 성전이 거기에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땅, 그곳으로 오시어 우리 가운데 초막을 치고 계신다(요 1:14). 우리는 자꾸 이 세상을 떠나서 마지막 세상이 공짜로 가져다줄 천상천국을 동경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천상천국의 하늘 보좌를 두고, 이 속된 세상으로 오시었다. 그리고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섬기며, 우리를 살려내고 구원을 베푸신다.
우리는 에스겔이 보여준 “거룩한 땅”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거룩한 땅을 이스라엘, 곧 자국의 특정 지역만을 지목하여 볼 수도 있다. 또 세계의 기독인은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다른 곳을 지목하고 이스라엘 땅은 제외하여 버릴 수도 있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미 거룩한 땅이 될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받아야 할 구원은 세계 기독교인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신약시대에 영적인 이스라엘로 바뀌었고, 그것이 지금 우리 기독인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나 사조를 “대체신학”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구약시대의 율법이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으로 대체되고, 성취되었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구원 받을 자의 신분이 이스라엘 민족에서 세계 기독교인으로 대체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스라엘 민족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 재림에 대한 시간과 장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주로 이단들이 그러하지만, 그 집단의 교주가 지목하는 특정 장소와 시간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로 예수 재림이 있다고 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지탄을 받는다. 예수 재림의 때와 장소를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심하면, 설사 재림의 때와 장소를 맞추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점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르므로 항상 깨어있어서 청지기로 살라고 하는데(막 13:28~37), 이들은 날짜만 알아맞추는데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세상을 섬기고 가꾸는 청지기직은 소홀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구는 둥글다. 둥근 지구는 내가 선 자리가 지구의 정중앙이다. 내가 사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래서 내가 사는 그곳이 “여호와 삼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곳이 교회다. 나의 삶의 터전, 나의 집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내가 있는 그곳에 계신다.
그러나 에스겔이 말하는 그 거룩한 땅, 곧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에스겔 성전을 중심으로 12지파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희년이 이루어지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을 측량하고는 율례를 지키라고 했으며(겔 43:11), 토지를 분배하는 왕에게도 희년을 지키라고 했다(겔 46:17). 이런 내용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에스겔 성전을 지으라는 말은 없지만, 그 성전을 보여주며, 제사법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키고, 절기도 지키라고 했다.
지금은 복음시대이므로 이런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제사는 예배로, 안식일은 주일로, 절기는 부활절도 지키고, 성령강림절도 지키고 있다. 그렇게 지키라고 한 것은 복음적으로 바꾸어 지키면 되는 것이다. 복음시대에도 이보다 더 어려운 세상법을 지키는데 지키지 못할 것이 없다.
에스겔이 본 희년과 백성들에게 행하는 토지분배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12지파별 토지를 분배하면 이것이 희년의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복음시대에도 세계는 만민들이 서로 땅을 나누어 분배하면 되는 것이다. 외국인에게도 토지를 분배하라고 한다. 에스겔은 왕에게도 땅을 주고, 희년을 지키라고 한다. 그러므로 세계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이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하면 된다. 이스라엘의 영토문제는 종교가 다른 외국인에게도 땅을 주어야 궁극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런 희년을 예수님이 재림하는 때 또는 마지막 때에나 가능하다고 보는가 말이다. 에스겔이 말하는 이스라엘 토지분배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희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희년은 사람들이 너무 강한 강도의 무시와 거부로 일관하기 때문에 아마도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 가능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희년은 다시 오신 예수님 앞에서도 거부하려고 할 것(눅 4:18,19,29)"이라고 혼자 중얼거려 보기도 한다.
여호와 삼마 성읍은 야곱의 열두 아들 문이 있다.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겔 37:25)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창 35:15)
그 성읍의 이름은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는 ...(겔 48:31)
이스라엘은 원래 야곱에게 하나님이 믿음의 징표로 붙여준 이름이다(창 32:28). 그 후 이스라엘은 민족을 나타내는 '이스라엘 민족'이 되고, 이 민족이 이룬 나라의 국가명을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야곱의 개인을 나타내는 사적인 이름이기도 하고,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을 뜻하는 공적인 이름이기도 하다.
거룩한 땅에서 이스라엘 12지파의 공유지로 분배되는 기업, 정중앙은 여호와 삼마 성읍이 있다. 그 삼마 성읍에는 사면으로 각각 세 개의 문이 있다. 성문은 성문 지역에서 필요한 생활 법률을 집행하는 장소다. 지방의 장로들을 불러서 토지를 팔고 살 때 증인을 세우거나(룻 4:1,2), 분쟁이 있을 경우 판결과 자문을 받는 곳이다(슥 8:16). 가족과 부부의 문제도 해결하는 곳이다(신 21:19,20, 22:15). 오늘날 사적인 생활 법규에 속하는 민법이나 상법의 영역을 다루는 곳이다.
그런데 삼마 성읍은 세 개의 문이 있고,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먼저 북으로는 르우벤, 유다, 레위의 이름으로 세 개의 문이다. 남쪽은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문이다. 동쪽은 요셉, 베냐민, 단의 문이다. 서쪽은 갓, 아셀, 납달리 문이다.
여호와 삼마 성읍의 문과 야곱의 열두 아들 | ||||
르우벤 | 유다 | 레위 | ||
갓 | 성읍 (여호와 삼마) | 요셉 | ||
아셀 | 베냐민 | |||
납달리 | 단 | |||
시므온 | 잇사갈 | 스불론 |
야곱의 열두 아들은 먼저 레아에게 출생한 장남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이다(창 29:31~33, 30:16~19). 그리고 라헬에게 늦게 낳은 아들이 요셉과 베냐민이다(창 30:24, 35:18).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 난 아들이 단과 납달리이고(창 30:4~8), 레아의 여종 실바에게 난 아들이 갓과 아셀이다(창 30:9`13) .
그런데 삼마 성읍의 문은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붙인다. 그 이름의 배열을 살펴보면, 각자 타고난 모계 혈족을 따라 문의 이름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르우벤은 레아가 낳은 장남이므로 북쪽 제일 왼쪽에 먼저 이름이 올랐고,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장자권 계승자이므로 두 번째로 이름이 올랐다. 그리고 레위는 제사와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분자이므로 형 시므온보다 먼저 이름이 오른다. 나머지 레아의 세 아들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은 남문에 나란히 배치되어 이름이 붙는다.
그리고 동문은 라헬이 낳은 요셉과 베냐민이 이름이 오른다. 라헬의 여종 빌하에서 난 단이 그 옆에 자리한다. 단은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잃었고, 우상을 섬긴 것 등이 감안된 자리 배치로 보인다. 서문은 레아의 여종 실바에게 난 아들 갓, 아셀이 나란히 자리하고, 그 빈 자리를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 납달리의 이름을 붙였다.
이처럼 성읍의 문은 모두 야곱의 열두 아들의 모계 혈통을 따라서 배치하였다. 성읍의 출입문 이름을 12 형제의 혈통과 친밀도를 따라서 배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읍의 문에 붙여진 이름은 야곱의 가계 혈통을 중심으로 그 가족의 분포도를 따라서 배치하였다. 그러므로 야호와 삼마 성읍의 12개의 문들은 야곱의 사가(私家)를 대표하거나 상징하는 문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영토 전체를 지파별로 분배하는 12지파의 이름은 다르다. 요셉은 야곱이 열두 아들 중 경제적 장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몫의 분깃을 가진다(겔 47:12).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 중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각각 독립된 단독 지파를 형성하여 두 몫의 토지를 분배받는다(겔 4:5). 그 대신 토지분배에서 제사장직을 부여받은 레위지파는 12지파에서 빠지게 된다. 그 대신 성전이 있는 거룩한 땅의 일부를 기업으로 분배 받았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토지분배와 내용과 양상이 비슷하다.
그리고 분배받은 토지의 배열을 보면 거룩한 땅에 연접한 북쪽 경계는 유다지파가 차지하고, 남쪽 경계는 베냐민지파가 차지한다. 주전 931년 이스라엘이 분열하여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나누어질 때,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는 남왕국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전통성을 이어온 지파다. 그래서 토지분배에서 거룩한 땅과 왕의 토지에 연접하여 배치되었다. 종교(성전)와 정치(왕)를 안정되게 운영하려는 지리적 배려다. 그러므로 이러한 12지파의 토지분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공적인 요소를 감안하여 배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에스겔의 토지분배는 그 지파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공적인 요소와 사적인 요소를 모두 감안한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약속한 사적인 언약까지 모두 성취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토지분배도를 경제생활에 적용하여 확대시켜 세계로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거룩한 땅 중에 속된(일반) 땅으로 불리는 여호와 삼마 성읍은 야곱의 혈통을 따른 열두 아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 영토를 야곱의 사적인 계보 안에 축소시켜 놓은 땅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면 그 다음 거룩한 땅과 왕의 토지, 그리고 12지파에게 분배된 전체의 땅은 세계 전체, 지구촌 모두의 땅으로 확대시켜 적용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본 12지파에 대한 토지분배도는 세계의 지구촌 모든 토지를 모든 인류에게 분배하는 실무적 집행을 위한 모형도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희년을 성취시키는 영토의 분배도는 지구촌의 희년을 성취시키는 희년법의 상징적, 세계적 모델이 될 수가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에스겔의 토지분배는 사람의 생활을 인도하는 경제사로 보아도, 세상을 구원하는 구속사적으로 보아도 치밀하고, 빈틈이 없을 정도로 정확하며, 그 의미는 신비롭고, 오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