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과 좌파 독립운동가(2)
지난주 ‘코민테른과 좌파 독립운동가’를 작성하면서 “1920년 레닌 자금이 일부나마 상해 임시정부에 유입되며”를 읽고 독립 자금 유입 과정이 궁금해졌다. 이에 반병률(2010)의 「러시아(소련)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식」을 통해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러시아의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정부가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했던 것은 한인사회당의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참여하였던 1919년부터 1921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이었다(489). 1919년 4월 한인사회당과 신민단의 연합대회 형식으로 개최된 2차 당대회에서 코민테른에 박진순 등을 파견하기로 한다. 1919년 11월 말경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진순은 한인사회당 당원명부와 한인사회당의 조직 배경과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운동」를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제출하고 이 보고서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날』 1919년 11~12월호에 게재되었다. 박진순은 『이즈베스치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날』, 『지즌 나쵸날노스체이(민족들의 생활)』등에 한국의 혁명운동과 관련된 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이들 기고 활동을 통해 박진순은 “모스크바에서 알아주는 한국 문제의 대변인”으로 통했으며, 1920년 7월~8월에 개최된 제2차 국제공산당집행위 원동 책임자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사에서 한인 공산주의자로서 최고 직책을 맡았다(496).
박진순이 떠나고 한인사회당은 통합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19년 11월 3일에 위원장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당 총서기 김립이 국무원 비서장으로 취임하였다(497). 소비에트정부는 임시정부에 공식서한을 보낸다. 내용은 상해임시정부에 대하여 ‘대일공투’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며 모스크바 정부의 공식 문서를 접수한 이는 이동휘와 김립이었을 것이다(498).
답신에서 이동휘는 “귀하께서 한국 인민에게 동감을 표현하여 주신 것에 대해 진실로 존경의 뜻을 표명하옵니다. 저희들은 귀하께서 언제나 우리와 동감하고 계시며 또한 한국의 운명에 동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한 “귀하께서 관심 표명을 통하여 한국의 인민에게 경의를 표명하고 계시며, 거절하지 않고 저희들에게 강력한 지지와 지원을 제공하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며 지원을 요청했다(499).
1920년 4월 말경 한형권은 상해임시정부의 특사임명장과 밀서, 그리고 이동휘가 원동 공화국 대통령인 크라스토쉬코프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5월 말경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한형권이 휴대한 보고서 「동아시아의 상황」를 소비에트 정부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제출하였고, 이 보고서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날』 1920년 7~8월호에 게재되었다(500). 이 글은 한국, 중국, 일본의 정치적 상황과 혁명운동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바탕으로 한국의 민족운동 문제 특히 민족주의 세력들과 한인사회당의 차별적 노선을 강조하면서 전체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살피고 있다.
우리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의 친절을 보장할 수 없다. 또한 한국 인민 역시 이제는 자기의 고난 속에서 ’두 번째 일본’을 키워내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임시혁명정부가 쁘띠부르주아와의 연합에도 불구하고...적군이 한국 국경으로 진군하기를 지치도록 기다리고 있는 이유이며, 또한 바로 그런 점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 자유주의자들이 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인 저를 전권대표에 임명하여 소비에트 러시아로 파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이유이다. 자유주의자들은 한인사회당의 당원만이 러시아혁명 노동자-농민 계급 대표들과 공통된 의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상황에 대한 한형권의 평가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정부와 코민테른 책임자들이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소비에트 정부가 박진순과 한형권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막대한 자금원조를 약속하게 되었다(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