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중 하나는 틀렸다??
원효와 의상이 한 판 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원효와 혜능은 과연 왕따일까, 천재일까
원효의 해골 물 이야기는 유명하다. 하지만 이것은 후대의 첨가일 뿐이다, 중국 송대(宋代)의 승려인 찬녕(贊寧:919∼1002)의 저술인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원효와 의상이 어두운 밤 큰비를 피해 토굴에 숨어 잠을 청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곳은 해골이 굴러다니는 무덤 속이었다는 정도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좀 더 진행된다.
아무래도 무덤 속 잠자리가 찜찜했는지 둘은 다음 날 어두워지기 전 미리 헌 집을 한 채 물색해 잠을 청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도 원효는 종내 잠을 이루 수 없었다. 지난밤 토굴에서 자던 일이 자꾸만 떠오르고, 눈앞에 마음속 지어낸 귀신이 자꾸만 오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이 샌 다음에야 원효는 탄식하며 의상에게 말한다.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송고승전(宋高僧傳)>
해골 물 같은 드라마틱한 요소는 없지만, 원효의 깨달음을 설명하는데는 훨씬 더 명확한 이해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또한 이 이야기는 원효가 ‘일체유심조’를 어떻게 ‘확철’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 준다.
그에게 마음은 그저 환상이나 만들고 귀신이나 불러들이는 ‘요지경(瑤池鏡)’ 일 뿐이다.
곧 ‘일체유심조’란 마음이 모든 허상을 만들어 내는 ‘모든 악(惡)’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원효의 “마음의 밖에 법이 없다”는 말은 마음에서 법을 찾아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허상’을 깨닫는 것이 곧 ‘대오(大悟)’이라는 말이다.
화엄경의 유명한 오언절구를 보자.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만약 사람들이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삼세(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응당 법계의 성품을 관찰하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은 것 일뿐이라는....
그렇다면 원효에게는 법계조차도 그 자성은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해진다.
참 극단의 ‘공(空)’이자 부정이고 ‘무상(無常)’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이 여실해 진다.
원효가 만년에 주석한 <금강삼매경론>은 이와 같은 원효의 깨달음이 더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을 논하면서
중생은 본래 ‘마음’이 상(相:모습)을 떠났음을 몰라서,
衆生本來迷心離相.
모든 상에 치우쳐 취하고자 생각을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遍取諸相動念生心
따라서 먼저 모든 상을 깨트려 상을 취하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故先破諸相滅取相心
고 말한다.
또한 經 <무상법품>의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마음’과 ‘나’를 버리게 하니, 令彼衆生皆離心我
모든 ‘마음’과 ‘나’는 본디 비어 적막할 뿐이다. 一切心我本來空寂
라는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붙인다.
만약 ‘빈 마음(公心)’을 얻으면 마음이 허깨비를 만들어 내지 아니한다. 若得空心心不幻化
허깨비도 없고 변한 것도 없는 것이, 곧 생김 없음을 얻는 것이다, 無幻無化卽得無生
생김 없는 ‘마음’은 변하는 것이 없는 것에 있다. 無生之心在於無化
곧, 일체만유(一體萬有)의 헛깨비를 만드는 ‘일체유심조’의 마음을 버리고
진정한 ‘빈 마음’을 얻으라는 것이다.
이 ‘빈 마음’이란
‘여래는 이름만 여래일 뿐 여래가 아니다’
는 말처럼 이름만 ‘마음(心)’일뿐 결코 마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것은
그 생김 없는 ‘마음’(無生之心)은 변하는 것이 없는 것에 있다(在於無化)
에 있다는 것이다.
곧 마음 속에 제법(製法)의 무상(無常)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법의 무상함 속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원효의 사상은 주관적 관념론을 확실하게 벗어나
객관적 중도의 실상 속에 마음을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공(空)’의 입장에서 ‘일심(一心)’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원효사상의 ‘특징’이 드러난다.
‘마음’이란 ‘공(空)’이나 ‘무아(無我)’와 다름이 아닌 것이다.
이 경지에서 ‘참된 나’는 없다. 그저 ‘무아(無我)’가 ‘참된 나’일 뿐이다.
참된 ‘일심(一心)’ 또한 본래공적의 ‘무심(無心)’이다.
이름만 ‘참된 마음’일 뿐이다.
원효에게 ‘공(空)’ 의 체득, 즉 ‘중관(中觀)’은,
그의 사상에서 심(心) 곧 유식(唯識)보다 상위(上位)의 절대적 ‘확철’ 대상이다.
이에 비해 의상은 일체유심의 화엄철학에 보다 중점을 둔다.
원효와 반대로 마음(心)이 일체(一切)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一切)는 마음에 귀속된 허망의 존재이다.
따라서 그 ‘마음’으로 일체의 ‘무아(無我)’를 꿰뚫어 그 공성(空性)을 깨우치라고 말한다.
그에게 깨우침의 주체는 유식(唯識)의 ‘마음’이고 그 목표는 ‘공성(空性)’에 대한 깨달음이다.
원효와 같은 듯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의상 법성게를 살펴보자.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그 하나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고 모든 것 안에 하나가 들어있다.
일즉일체다즉일 (一卽一切多卽一)
한 마음이 바로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바로 그 하나이다.
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먼지에 우주가 다 들어있고
일체진중역여시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먼지 또한 다 그러하다.
이것은 분명 원효의 깨달음과 분명 다른 무엇이 있다.
원효와 달리 객관세계를 모두 마음 안으로 포섭하는
객관적 세계의 ‘주관화’가 역력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의상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일체를 만들어 내는 마음을 떠나
본래공적(本來空寂)의 ‘진심(眞心)’ ‘진아(眞我)’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진심’ ‘진아’는
원효가 말하는 이름뿐인 ‘공아(空我)’ ‘무아(無我)’하고는
분명 다른 ‘참된 나’이다.
이 참된 나는 실재(實在)하는 청정 무구의 ‘있음(有)’의 나이다.
화엄사상 본연의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이 된다.
이와 같이 의상의 인간 본연의 참된 마음, 또는 참된 나를 긍정하는 화엄해석은
여래장이나 불성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능가경의 시각에서
화엄경을 보는 불교사 보편적 시각이다.
이에 비해 원효는 공(空)을 의 무자성(無自性)으로 해석하는,
즉 불성(佛性)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도드라지는 <금강경>이나
<대품반야경>의 시각에서 화엄경의 내용들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내용과 수행의 방법은 확연히 달라진다.
혹자들은 이 차이가 경전에 구절에 의거하는 교종(敎宗)의 한계라고
값싸게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원효와 의상의 차이는
선종(禪宗)의 역사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혜능과 신수의 게송을 비교해보라.
신수는 능가경의 시각에서 마음을 해석한 듯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늘 깨끗하게 털고 닦아서
라고 의상과 같은 깨달음을 선 보이는데
혜능은 금강경의 시각에서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밝은 거울(마음)은 받침대가 없고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본래 아무것도 없다
고 원효처럼 되받아친다.
우리는 신화화 된 혜능과 신수의 게송논쟁으로 인하여
신수의 깨달음이 혜능만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신수의 게송은 달마 이후 5조 홍인대사까지
이어오는 <능가경> 중심인 선가(禪家) 정맥의 ‘깨달음’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신수의 게송은 혜능의 탁월한 제자인 남악회양의 법통을 이어 받은
마조 도일의 말에서도 다시 명확히 드러난다.
만약 곧바로 도를 알고자 하는가. 若欲直會其道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 平常心是道
무엇을 평상시의 마음이라 하는가? 何謂平常心
일부러 만들지 않고, 시비를 따지지 않으며, 취하고 버리지도 않고,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단절된다거나 영원하지 않고,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것이 평상심이다.無斷常 無凡無聖
아, 혜능의 깨달음은 법맥(法脈)으로 3대를 가지 못하고 소실되는 것이다.
사실 원효나 혜능적인 깨달음은
중국과 한국 불교사 전체에서 혜성처럼 번쩍 나타났다가
사그러진 한 단면(單面)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붓다의 무아론과 연기법을
각각 교학과 선가에 명확히 일치시켜 반영시키고 있는
찰라의 ‘작렬’인 것은 분명하다.
불교가 종교이다 보니 모든 것을 ‘원융회통’시키려는
의지가 너무 강하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원효와 의상,
혜능과 혜능 이외의 다수 선사들이
보여주는 ‘한 소식’의 차이를 비교하고 따져볼 만 하다.
특히 요즘 같은 연말이면
챔피언급 선수들을 불러 와
신년맞이 타이틀 매치를 한번 붙여보는 것도
사변(思辨)과 깨달음의 공부에 많은
활력이 될 것이다.
나는 원효와 혜능이 보여 준
이런 천재성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