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발 손수레의 꿈 / 정선례
문화유적 답사 1번지 명성에 걸맞게 강진은 볼거리가 풍부하고 산과 바다 들에서 나온 먹거리가 다양하고 읍, 면 전역이 문화유산의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자랑한다. 내가 모란을 처음 접한 것은 30년 전 따스한 봄 5월에 영랑생가에서다. 뜨락에 활짝 피어난 모란꽃은 고혹적인 매력으로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울림을 주었다. 봄에 피는 모란의 꽃말은 ‘부귀영화’이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모란은 꽃 중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붉은 자줏빛의 크고 화려한 겹겹의 꽃잎이 크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는 진중함이 말과 행동에서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그와 만나는 동안 알 수 없는 연민이 생겨서일까 결혼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마음의 빗장이 풀린 나는 그를 선택해 이미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내가 택한 결정이 올바르지 않았을지라도 정해진 운명으로 여기고 이 순간에 최선이 뭘까 늘 고민한다. 아마도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덕목 중에 제일은 믿음이라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른 건 다 맞지 않아도 서로에게 그러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봄이다. 겨우내 창고에 넣어 두었던 밭농사에 꼭 필요한 외발 손수레를 꺼내 마당 한쪽에 두었다. 외발 손수레는 짐을 실을 때 몸쪽에 실어야 무게 중심이 뒤에 있도록 하고 손잡이 끝을 잡고 팔을 쭉 펴서 양팔에 힘을 줘야 넘어지지 않는다. 사용 방법을 익히면 좁은 길이나 울퉁불퉁한 돌길에서도 두 발 수레보다 자유롭게 사용하게 된다. 생활이나 물건 그 어느 것이든 익숙해지면 험난한 조건이 오히려 장점이 되어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 같다. 농촌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일해야 겨우 살 수 있는데 어릴 때부터 게으르기로 소문난 나는 야행성으로 새벽 서너 시를 훌쩍 넘겨도 눈이 말똥말똥하다. 아침에 빨리 일어나지 않는 습관 때문에 다툼의 원인이 되어 마주보기보다는 평행선에 달릴 때도 수없이 많았다. 시골 마을에서는 누구네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정도로 흉허물없이 지내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여 주위에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이야기도 들어야 했다. 농촌에서 맏며느리로 살아간다는 것은 균형이 잘 잡히지 않는 외발 손수레와 같아서 여차하면 이곳을 떠날 궁리만 했다.
우연히 가보고 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은 나는 이곳을 수시로 찾아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백운동 계곡의 산책길에서 만난 운당원은 출장와 울창한 왕대나무 숲이 주는 위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디마다 비운 댓잎의 수런거림을 들으며 내 삶이 마치 흔들리는 대나무 숲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백운동원림에 가서 정원의 12경을 둘러보고 백운계곡 탐방로의 우거진 동백나무와 왕대나무 숲길을 걸었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늘 푸른 대나무를 좋아해서 이곳을 자주 찾았던 것 같다. 이곳 외에도 섬의 모양이 소의 멍에처럼 생겼다 하여 가우도라 불리는 이곳에 사는 일이 고단해 바람 부는 날이면 잰걸음으로 와서 선물 같은 파도 소리를 듣고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곤 한다. 그동안 수없이 찾은 이곳은 어느새 걷기 운동코스가 되었다.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막막한 현실에서 힘들 때 찾아갈 수 있는 그 어디가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늘 바쁜 나날을 지나와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만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다. 지금까지는 내 주변을 두루두루 살피며 쉼 없이 살아왔다.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며 느린 속도로 나답게 살고 싶다. 처음에는 빈 수레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더니 이제는 퇴비를 한가득 싣고도 밭고랑을 능숙하게 끌 수 있게 되었다. 흙바람 자욱하던 내 결혼 생활 이제는 사랑과 믿음으로 모범적인 노후를 만들어야겠다.
첫댓글 삶을 믿음이라는 주제로 풀어 내셨네요. 지금의 발자취가 좋은 글을 쓰는 토대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선생님 글 편안하게 잘 읽었습니다. 부부간의 사랑과 믿음처럼 소중한 게 없는 듯합니다. 걷기와 글쓰기를 하시면서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행복이 느껴집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