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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태조 왕건>中
콜록~ 콜록~
김영철(궁예役)/배우: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짐이 지금 관심법을 하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 있느냐 이 미련한 것아!
최원정/KBS 아나운서: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드라마 속 명대사, 그런데 우리의 말과 글이 없었다면 과연 어땠을까요?
이윤석(궁예役/방송인: 나니? 잠까이 나까시노 고도고시 테루노니 도우시 세키가 데키 루오카
드라마 <태양의 후예>中
송중기(유진 대위役)/배우: 그렇군요. 그럼, 하나만 물어봅시다. 혹시 이게 마지막 일지 몰라서 그때 허락없이 키스한 거 말입니다.
송혜교(애인役)/배우: 그일 내가 꺼낼 때까지!
송중기(유진 대위役)/배우: 뭐랄까요, 내가,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이윤석(유진 대위役)/.방송인: 고꼬와 난시 타라 이인 데수까? 아이마리 마시오까? 고꼬아시 마시오까?
드라마 <쌈, 마이웨이>中
고동만/배우: 너 없이는 못살아, 너~너~ 너~ 너라고~ 죽어도 너야 나랑 결혼하자, 응?
이윤석(고동만役)/방송인: 오마이다요 오마이 오마이 오마이 신데모 오마이 다이요 오게또 개콘시요 나?
최원정: 자, 어떻게 보셨나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말과 글을 지키지 못했다면 드라마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도 일본어로 이루어졌을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우리말과 글을 거의 완벽하게 회복했는데요. 엄혹한 시절, 목숨을 걸고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조선어학회에 대한 이야기 나누어 보겠습니다. 조선말과 조선겨레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말과 글이 소중하다는 얘기, 진짜 많이 하는데, 그동안 막연했었잖아요. 그런데 그나마 보니까 우리 말이 얼마나 소중한지 팍 느껴지네요.
류근/시인: 제가 다시 태어나면 식민지 조선의 불우한 시인으로 살면서 일본어로 시를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지금 우리 말을 하고 우리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더 각별히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이윤석/방송인: 진짜, 있었어도 안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류근: 우리가 우리 말을 못썼으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조지훈<승무僧舞>---1939년 作
최원정: 그런걸 어떻게 표현해요~?
류근: 할 수가 없어요.
심용환/역사학자: 지금도 솔직히 말해서 알게 모르게 알고도 쓰고 모르고도 쓰는 말들 속에 저는 얼마전에 그냥 전혀 모르고 기라성(綺羅星) 같다 이런 말을 썼더니 어떤 분이 그건 일본식 표현이다. (기라성-빛나는 별), 아~ 그랬어, 그랬고, 또 무대뽀, 다마네기, 나가리, 땡깡, 쇼부, 야마 등등
최원정: 너무 많죠.
류근: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친구들이 학교에~밴또에 다꽝 반찬을 싸가지고 와가지고 와리바시로 먹고 그랬거든요.
심용환: 와리바시가 뭐예요?
류근: 나무젓가락!
최원정: 요즘 친구들은 몰라요
류근: 그러니까 내가 예를 들고 있는건 맞는 거예요.
최원정: 여기서 정말 시대가 확연히 갈리는 걸 또 한번 목격하실 수 있습니다.
이윤석: 요즘은 일본 말을 안할려고 제가 노력을 직접 하는데~예전에는 정말 많이 했지요. 나시입으니까 후카시 나는 것 같지? 간지 나는 것 같지? 이런 거 많이 했어요. 옛날에는~
최원정: 아마 오늘 이분과 함께 하면 각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한국인보다 한국말을 더 잘 하는 다니엘 린드만씨 나오셨습니다. 반가워요.
일동: 안녕하세요.
다니엘 린드만/방송인: 안녕하세요
최원정: 다니엘씨가 한국말을 너무 잘 해요. 제가 아는 외국인 중에 가장 발음이 정확하고 어휘가 풍부한 사람인데 도대체 어떻게 공부했어요?
다니엘: 제가 독일에서 동양학과 입학하기 전에 우리 동네에 한인 성당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거기가서 제가 미리 한글 공부하고 싶어서 한글을 알려달라고 했었는데요. 다행히도 어떤 어르신이 무료로 한글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해서 한 3일간 기본적인 글자 모음과 자음을 배웠어요.
이윤석: 3일 만에?
다니엘: 그렇죠. 거의 3일만에 기본적인 사항을 다~
최원정: 한글은 좀 쉬우니까~
다니엘: 그리고 좀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을 때까지는 한 3주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너무 잘 가르쳐 주셨어요.
심용환: 난 영어를 20년 해도 안늘던데~
최원정: 나 독일어 3년~ 고등학교 때 했는데 구텐탁 Guten Tag 밖에 몰라요~
류근: 진짜 방을 좀 빼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발음을 듣는 순간~,
이윤석: 다니엘씨 말할 때 눈 감고 들으면 어느 쪽이 외국인인지 몰라요
류근: 몹시 난감해지는 국면이에요.
최원정: 지금 저희가 많은 단어들, 일본식 표현들 들어봤어요?
다니엘: 제가 와서 조금 일본어이구나 라고 배웠던 그런 단어들이 있었는데요~ 닭도리탕의 도리- 닭볶음탕, 오뎅도 사실 그렇잖아요~ 그 다음에 얼마전에 알았는데, 파이팅이라는 말, 사실 안쓰는게 좋데요. 우리 항상 파이팅! 파이팅!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거는 사실 영어에서 일본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화이또 라고 말을 썼는데 이거는 싸우자는 뜻이잖아요. 그것도 하필 일제 강점기 때 생긴 말인데, 그래서 사실 파이팅 싸우자 라는 것은 우리가 대신, 힘내자! 아니면 아자! 그런 말로 대치하는게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윤석: 정말 오자마자 외국인 한테 배우네~
류근: 정말 해방된지 7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우리 생활에 깊숙히 침투해 있고, 정말 집요하게 뽑히지 않는 뿌리가 아닌가 나쁜 뿌리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박용규/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사실은 해방이 되고나서 우리 학자들이나 관계관청에서 일본어 잔재를 청산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 조선말을 써야 된다 한글을 써야 된다 라는 운동을 하신 분들이 있었어요. 총과 칼을 들고서 일제와 맞서 싸우는 항일무장투쟁, 사실은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일동: 그럼요.
영화 <말모이>中
경성 역에서 순이 또래의 한 아이와 부딪쳤는데
아이1: 스미마생(죄송합니다)
어른: 조선 사람이면 “스미마생” 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해야지.
아이1: 조선말 몰라요.
아이2: 가자!
아버지(유해진役):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 하얀 쪽배엔
어린 딸: 그거 옛날에 오빠가 불러줬는데~
아들: 아버지, 순이 앞에서 자꾸 조선말 하지 마세요. 순이 내년에 학교 가는데, 괜히 조선말 하기라도 하면 매 맞습니다. 김순이, (일본어로) 늦었어, 얼른 자!
이윤석: 영화이긴 하지만 가슴이 덜컹했어요. 한국말 하면 매맞는다 라고 말할 때~일제 강점기에 얼마나 분위기가 삼엄했는지 느껴지네요~
박용규: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건 1910년 식민지 전에도 사실은 있었습니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6년에 통감부가 설치되거든요. 이 때도 일본의 언어정책은 조선말을 억제하고 일본어를 늘릴려고 했어요 (일본어 언어정책=조선어 억제+일본어 보급)
최원정: 1906년 6월 6일 대한매일신보에 이런 기사가 있더라구요-한국 유년에게 일문교과서를 익히게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뇌수를 뚫고, 소위 일본 혼이라 하는 것을 주사하고자 함이다. 그러니까 정말 고도의 식민지 정책을 이미 펼치고 있었던 거예요.
이윤석: 세뇌보다 심한 주입한다.
류근: 저의 어머니가 1932년생이신데 그때 소학교에서 내내 일본어만 배우신 거예요. 해방 이후에 그야말로 진짜 국어를 다시 배우셨다고 하더라구요. 믿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다니엘: 주입식 교육은 결국은 생각도 없애 버리는 거잖아요. 언어는 사실 생각 하면서 해야 되는 부분인데 그게 아니라 어떤 정답을 알려주고 사실 아예 생각을 차단시켜 버리는 거잖아요. 그런 부분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애요.
박용규: 그렇습니다. 일본의 일관된 지배정책은 동화주의였습니다. 우리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동화정책-식민지의 고유한 언어-문화-생활 양식 등을 말살하고, 지배국의 국민으로 동화시키는 것), 가장 지름길은 뭐냐 우리 조선인이 우리 조선말을 버리고 일본어를 썼을 때 입니다.
심용환: 그만큼 조선어 교육문제가 중요한 건데 1911년 제1차, 1922년에 제2차, 조선어 교육령이발표가 되었구요. (제1차 조선어 교육령(1911년)-일본어 보급목적-제2차 조선교육령(1922년)-조선역사-지리교육을 단계적 배제), 일본어 교육 강화시키고 조선지리나 역사교육은 단계적으로 배제하는 단계를 거치게 하고, 1938년에 제3차 조선교육령인데, 38년 중일전쟁 시기, 일본어 사용이 강제가 되는 겁니다. 대놓고 조선어를 막 탄압하는 상황이 되구요. 1943년에 제4차 조선 교육령이 통과가 되는데 이때는 조선어 교과가 없어지고 모든 교과서가 일본어로 편찬되는 상황까지 가버리니까 극단적인 상황인거죠.
이윤석: 그러니까 이게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서서히 숨통을 죄어오다가 때가 됐다하고 숨통을 끊어 놓을려구~~
류근: 그러고 보니까 우리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프랑스 소설 1871년 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게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 때 프랑스가 독일한테 지고나니까 프랑스어 교육을 금지시키고 독일어 교육을 시키잖아요. 그때 프랑스어 마지막 수업풍경을 담은 소설인데, 그 마지막 수업에서 프랑스어 선생님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한민족이 남의 식민지가 된다 하더라도 자기 말을 잘 지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中----
일동: 감탄!!
류근: 언어가 살아 남으면 결국 멸망하지 않는다.
이윤석: 맞습니다. 진리인데요, 진리~, 멋진 말이네 일본의 최종 목표는 조선이라는 나라 조선인을 없애는 것이 목표고, 그러기 위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같은 조선어 신문을 폐간하기도 하고, 또 1940년에 일본 이름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이행합니다. 그래서 창씨개명을 안하면 학교를 못가게 하고 또 취업도 못하게 하고 방해놓고~
최원정: 창씨개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 연세드신 분들은 영자 숙자 혜자 이렇게 子 자를 쓰는데 그게 하나코 게이코 할 때 그 코자가 子 자라서 그때 그 이름을 그대로 한자로 번역하다 보니까~~
다니엘: 아 그게 진짜~, 이렇게 바꾸는 것은 결국 사람의 정체성을 바꾸는 거잖아요. 이름은 우리에게 소중한 건데 그건 문화나 어떤 모든 정체성이 담겨져 있는데 되게 놀랍네요.
심용환: 얼마나 집요하냐. 수업시간에 일단 당연히 못쓰게 하겠죠. 그런데 일단 문제는 뭐냐 학생들이 공부를 수업시간에 하고 있지만, 쉬는 시간에 친구와 놀러도 가거든요. 이런 거죠. 형하고 우리 둘이서 형은 일본어를 쓰고 나는 한국말을 쓴 경우 거든요. 그걸 딱 듣고 이윤석 등교 8시 반에 심용환한테 한글말을 씀 써서 투서함에 탁 넣어요,
이윤석: 용환아, 뭐해
심용환: 윤석이 형 용환아 뭐해 라고 썼음-투서
류근: 우리 끼리 고자질해 가면서 불신을 조장하게 만드는 거, 이게 일본놈들이 만든 가장 나쁜 습성이에요.
심용환: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고 제가 두번 찔렀잖아요, 한 달이 지나고 나면,
이윤석: 말안할거야
심용환: 이윤석이 말 안할거야 투서 그 다음에 상벌장 써서 심용환 신고 이윤석 3회, 류근 2회, 최원정 5회 이렇게 했음. 이런 식으로 상벌제로 시행했습니다.
최원정: 그럼 난 어떻게 돼요 다섯번 걸리면~
심용환: 그러면 상대방은 벌칙이 내리고 난(신고자) 상을 받게 되는 거구~실제로 우리 말을 쓰면 벌금 1전씩 내는 경우도 있었고 체벌을 맞는 경우도 있었고, 가장 심각한 사례는 정학, 퇴학을 당한 사례도 있었데요.
박용규: 네,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이윤석: 우리말을 쓰는데 죄라니~ 너무 한다.
류근: 우리 학교 다닐 때는 서로 욕을 하면 투서했죠. 욕 잘하는 사람을 투서하고 혼내주고 그랬는데 그게~
심용환: 그런게 있었어요?
최원정: 류 시인님이 학교를 댕길 때 였어요~ 학교를 다닐 때가 아니라
박용규: 학교 뿐만 아니고요. 우리 조선인 민간인들이 구청이나 관청에 일을 보러가죠. 그럼 우리 조선인들이 우리 말을 많이 쓰는데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있다면 일을 빨리 처리해 줘요. 반대로 우리 조선인이 우리 말을 쓸 경우에는 일처리를 지연하고 해주지를 않습니다.
류근: 어떤 박해 보다도 더 심한 방법아닙니까 그냥 일본어 못하면 투명인간 취급하는 거잖아요.
이윤석: 그러면서 일본 말을 마치 무슨 일등 언어이자 선진 언어이자 편리한 공식언어인양~
최원정: 말과 글은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그러는데~그 그릇을 뺏으면서 나라의 정신까지 다 지배하겠다?
박용규: 사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말과 글을 지켜온 분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어학회의 전신, 조선연구회가 있습니다. 1921년에 만들어졌는데,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조선어 연구회 회원이 됐습니다.
이윤석: 여기서 잠깐 제가 어렵지 않은 퀴즈를 낼텐데, (다니엘을 향하여) 내일은 혹시 무슨 날인지 아세요?
최원정: 10월 9일?
다니엘: 녹화기준 아니고 방송기준으로~? 그러면 아~ 10월 9일이니까, 한글날이죠.
이윤석: 맞았어요.
최원정: (다니엘씨는) 웬만한 보통 수준이 아니시라구요~
심용환: 말만 잘 하시는게 아니라 의성어 잘 하세요.
이윤석: 그리고 녹화기준, 방송기준이요?
최원정: 역시 독일 출신 한국방송인이에요.
이윤석: 맞습니다. 한글날~ 이 한글날을 태동시킨 분들이 바로 조선어연구회~ 1926년 음력 9월 29일에 가갸날을 선포, (다니엘에게) 가갸 거겨 알죠? 그 가갸를 따와서, 가갸날~ 훈민정음이 반포된지 480년만에~
류근: 진짜 감동입니다. 조선어학회가 생긴 것도 그렇고 가갸날을 만든 것도 그렇고 그게 다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박용규: 이런 상황에서 대단히 중요한, 결정적인 조선어연구회의 한 분이 출현을 하게 됩니다. 이극로 라는 분이었습니다. 이극로~
최원정: 전혀 생각이 안나네요.
심용환: 보시면 이력이 독특해요. 경상남도 의령출신이신데요. 빈농출신으로 어렵게 시작하셨는데~ 1910년대가 되면 나이가 19살 정도 되셨는데 독립군이 되기 위해서 만주를 찾아가십니다.
이극로 이력서
1893년 경상남도 의령출생
1911년 독립군이 되기 위해 만주행
1915년 홍범도와 포수단 가담
1916년 상해 동제대학 입학
1922년 독일 베를린 대학 유학
1923년 독일 대학에 조선어 강좌개설
1929년 귀국, 조선어연구회 가입
그런데, 1915년이 되면 상하이에 가서 대학교육을 받게 되고요. 더 나아가서 독일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정치경제학, 철학, 인류학, 언어학 등등 등등을 쫙 체계적으로 공부한 다음에 돌아오셔서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면서 핵심인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최원정: 처음에 총칼을 들고 계시다가 이제는 펜을 들고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군요. 진짜 독특하시다~
이윤석: 문무를 겸비했네요.
다니엘: 진짜 놀라운 사실이에요. 독일에서 최초로 한국어 조선어 강좌를 하셨다는데~ 사실 그 당시에는 독일이 한국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었는데~, 1960년대 까지만 해도 독일 사람들이 콩고랑 코리아를 헷갈려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최원정: 아, 어떻게 해요.
1923.9.3. 독일 과학예술교육부 장관서신-이극로의 한국어 수업허가-1923.12.19.베를린대학 동양학부-이극로의 한국어 강좌에 10명이 수강하고 있음
1928.5.프랑스 소르본대학 녹음 자료-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이극로 육성자료-이 글씨는 홀소리 11자와 닿소리 17자로 모두 28자 올시다.
ㅏ, 간다, 살자
ㅓ, 너, 저것
ㅗ, 돈도, 좋고
박용규: 이 분이 독일에서 유학할 시절에 유럽의 현실을 봤어요. 영국이 아일랜드를 지배하면서 (12세기 초부터 영국, 약 800년간 아일랜드 지배), 영어를 강요하고 켈트어가 결국은 없어졌어요. (영국의 영어 강요로 세력을 잃은 아일랜드 고유어-켈트어), 지금도 아일랜드는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어요.
다니엘: 네, 네.
박용규: 또 하나 독일의 경우, 폴란드를 점령하고 나서 독일어를 강요하고 폴란드 말을 금지시켰어요. 자, 그런데 일본이 모델로 삼은 나라가 바로 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하고 독일 이었어요. 그래서 자기는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한글운동, 언어 독립운동을 해야 되겠다. 그런 결의를 가지고 귀국을 했다는 거죠.
류근: 유태인의 경우만 봐도 국가가 없고 국토도 없이 세계 각처로 흩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멸망하지는 않았잖아요. 히브리어가 있고 성경이라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점에서도 언어와 역사는 공동운명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최원정: 우리 말을 지키면 주권수호의 첨병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극로 선생님은 이걸 이미 깨우치신 거예요.
박용규: 그래서 이극로 선생이 1929년에 부산에 들어왔어요. 4월에 조선어연구회에 들어갔으니까요. 자, 그러면서 명칭을 조선어연구회를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때부터 조선어학회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는데 핵심적인 활동이 뭐냐 우리말과 한글의 통일이었습니다.
심용환: 선생님께서 말씀하신게 언어통일을 정확하게 하라! 그런데 실제로 훈민정음 예제가 만들어지긴했는데 500년 동안 쉽게 말하면 제대로 관리가 안된거예요. 지금 우리는 뜻 위주로 글을 쓰는데 띄어쓰기도 없다든지 용례도 다르고, 어휘도 다르고 하니까 결국 이래서는 안된다 라고 해서 1933년에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게 됩니다.
류근: 아니 난 지금 상당히 당황스러운게~ 통일이 안됐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미 이전에 김소월의 진달래 꽃 시집도 나오고 이광수의 무정도 나오고 그런데 아직까지도 통일이 안됐다는 게 상당히 당황스러워요.
박용규: 류 시인님이 얘기했던 김소월의 시를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할 수 밖에 와 밖에는, 박게 와 박게는 으로 되어 있어요. 말없이 고이-말업시 고히, 걸음걸음-거름거름, 놓인-노힌, 사뿐히-삽분히 (1920년대 김소월 시집 초판본), 어떻게-엇더케, 벗어-버서, 험을-허믈, 듣기 싫지는-듯기실치는, 기쁘게-깃브게 (1931년 이광수 소설<무정> 초판본),
박용규: 표기법을 정리한 겁니다 (표기법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
이윤석: 아까 뭘 통일했는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애서~제가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이윤석 박사의 우리말 나들이
이윤석: 뭐를 통일했을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자, 바로 이거예요. 읽어 보겠습니다.
일해라 절해라 하지 마세요-이래라 저래라
어의 없네요 공항장애니-어이 없다(어구니없다) 공황장애
바람물질 이라고 하시는 분들-발암물질
지금 임신공격하세요?-인신공격
이윤석: 어원, 즉 말뜻과 형편을 살려가지고 표결을 하자 표기법을 통일을 한 겁니다. 그리고, 한가지만 더, 낮 낯 낫-발음상 낫 낫 낫 이예요. 하지만 명확하게 받침대로 표기를 하니까 낮-환하구나(대낮), 낯-얼굴이구나, 낫-휘둘리구나(벼베기) 이렇게 표기법의 통일이 중요하다.
류근: 정말 눈에 쏙 쏙 들어옵니다. 명강의예요.
심용환: 국문과
이윤석: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이거는 띄어쓰기를 상상을 해서 읽어보세요.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 엄마가회사줬어-엄마가 회 사줬어 or 엄마가 회사 줬어.
최원정: 두번째가 좋네요-엄마가 회사 줬어-회보다는 회사를 줬으면~~
이윤석: 상황에 따라서 띄어쓰기가 달라질 겁니다.
류근: 부도난 회사 예요.
이윤석: 지금까지 무엇을 통일했느냐? 표기법과 뛰어쓰기를 통일하라고 주장했고 이 모든 것들을 누가 했다?
일동: 조선어학회
이윤석: 오늘 수업 끝.
류근: 그런데 저게 지금 우리한테 너무나 당연한 얘긴데, 1930년대까지도 통일이 안되어 있었다니까 정말 혼란스러웠을 것 같애요.
심용환: 얼마안된 얘기예요.
최원정: 정말 통일이란게 한 순간에 되는게 아닌데~?
박용규: 무려 3년이 걸렸어요. 시간으로는 총433시간에다 회의를 125차례나,
다니엘: 생각해 보니까 외래어도 이를 테면 런던이란 단어를 가지고 란든 이라고 할 수도 있고 론돈, 룬둔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런 것도 좀 헷갈리지 않겠끔 규정도 필요할 것 같아요.
최원정: KBS 아나운서실에 맞춤법과 관련해서 문의전화가 굉장히 많이 오는데 외래어 표기가 가장 어려운가 봐요.
심용환: 중학생 때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을 쓰라고 하는데~ 컬럼버스 이거든요. 그런데 사람 이름에 버스가 들어 갈 수 있나?
류근: 진짜~우리 초등학교 때 위인전에 콜럼부스 였어요.
심용환: 저는 그때 콜럼부스였어요.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사람 이름에 버스가 안들어갈 거 같아서 콜럼부스 라고 썼다 그랬더니 냉혹하게 선생님이 틀리게 처리한 거예요.
류근: 말도 안돼,
이윤석: 부스는 괜찮았어요. 전화 부슨데, 사람이 부스에?
심용환: 그래서 선생님에게 막 따졌는데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서 틀리게 쓰면 안된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틀려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류근: 저는 지금도 헷갈리는게 초코렛~
최원정: 초코릿이 맞지요
류근: 초코렛? 쪼꼬렛? 별거 다 사용하잖아요 맨날 헷갈린다니까요.
다니엘: 저는 이를테면 독일 도시 Munchen에 있어서, 뮌헨 인지, 뮌혠 인지, 그것도 자꾸 헷갈려요.
이윤석: 헨인지, 헨인지?
심용환: 조선어학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1931~1940년 약 10년간 세계언어학자 대회, 국제실험음성과학자 대회, 세계음운학 대회 등 이런 것들과 관련된 연구단체와 교류도 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연구심의 과정을 거쳐서 1940년에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도 제정합니다. 이게 더 오래 걸렸어요, 선생님.
박용규: 10년 걸렸습니다.
이윤석: 아이고~
최원정: 그런 혼동들을 이렇게 표기법으로 정리해 주셨어요.
심용환: 기준을 세운거지요.
류근: 진짜 그런데 한가지 더 걱정되는 게 있네요. 통일이 되고 나면 제일 먼저 뭘해야돼요? 통일됐으니까 가르치고 테스트해야죠
이윤석: 받아쓰기?
심용환: 새로운 굴레?
이윤석: 학생들이 조금 조선어 학회~
심용환: 근데 지금까지 말씀을 나눈 것도 대단한데 끝이 아닙니다. 조선어학회가 꿈에 그리던 숙원사업이 있었습니다. 사전편찬~정말 연구의 집결체죠. 찾아보면 쫙 나오는 것,
류근: 저는 정말 사전과 가까운 사람이잖아요. 늘 사전을 옆에 놓고 공부를 했다는 말이죠. 진짜국어사전을 펴보면 정말 신기했어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걸 다 수집해서 만들었을까. 막막한 일이거든요.
박용규: 사전을 만드는 일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이극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왜 사전을 만들어야 되느냐.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 조선어사전을 편찬하자. 모국어를 유지해서 민족을 보존하자. 모국어가 유지되면 식민지로 가더라도 사전을 만들어두면 조국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동: 그렇지요.
다니엘: 너무나 소중한 것인 것 같애요. 사전이라는 것, 독일의 경우는 마틴 루터가 처음으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독일어를 통일시키는데 정말 큰 도움을 주었는데 (마틴 루터(1483~1546)-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당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독일어 통일에 공헌), 저도 독일 사전이 언제 처음으로 생겼는지 몰랐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 형제 있잖아요. (그림형제-독일의 언어학자-문헌학자 동화집필로 잘 알려짐), 동화책을 썼던 그림 형제는 처음으로 독일어 사전을 완성할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시작하다가 1838년에 시작했는데 아쉽게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어요. 그래서 학자들이 모여서 123년 동안 계속 활동하다가 결국 20세기 중반쯤에 거의 한 17권의 독일어 사전이 완성되었어요. 그래서 그건 우리한테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옛날, 1992~2001 독일 1,000 마르크 지폐 뒷면에 그림형제의 사진이 있어요(Tausend Deutsche Mark).
최원정: 사전이라는게 한 나라의 문화유산이니까요.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에 대해서도 우리가 자세히 알아봐야 하겠어요.
박용규: 이극로 선생님이 1929년에 귀국을 했죠. 그래서 1929년 한글날 기념식 때 무려 108명의 발기인을 모았어요. 그래서 조선어사전 편찬회를 조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전을 만들려면 무슨 일을 가장 먼저 해야 될까요?
류근: 진짜 막막 하네요.
이윤석: 사람을 모우고~
최원정: 발견 안될 수 있는 아지트를 마련한다. 그게 제일 중요한 게 아니에요?
박용규: 뭐가 있을까요?
이윤석: 사전을 위한…사전 작업?
박용규: 맞습니다. 사전편찬을 위한 사전작업을 해야죠.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거는 우리 민족이 쓰고 있는 어휘, 말을 모우는 것입니다.
일동: 아, 말모이~~
박용규: 말 모우기(어휘) 작업을 1929년부터 시작한 거예요.
류근: 그런데 정말 말만 들어도 정말 막연하지 않아요?
이윤석: 막연하죠.
류근: 특히 또 우리나라 어휘라는 게, 노랗다만 해도 누렇다, 누리끼리하다, 누르스름하다 막 나가잖아요.
최원정: 진짜, 전 제일 궁금해요. 파랗다도 퍼렇다, 새파랗다, 시퍼렇다.
다니엘: 전 그냥 포기해요. 파랗다만 하나 알고 있으면 돼요.
류근: 짜다도 짭조름하다, 짭짤하다, 건건짭짤하다 까지 있어요.
다니엘: 같은 뜻의 단어 모우는 것도 그렇지만 받침이 비슷한 단어도 있잖아요 (외국인에게 고난이도), 뜻이 완전히 다르지만, 이를테면 사냥하다 와 상냥하다 이런 건 진짜 어렵거든요. 그건 받침을 잘 알아야 되는데~
심용환: 우리는 이렇게 비슷하게 막 나뉘어지는데 독일어도 그래요?
다니엘: 저희도 그렇죠, 저도 옛날 18~19세기에 낭만주의가 있었으니까 시나 글을 쓸 때 엄청 자세히 감정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애요. 독일어휘도 엄청 다양하고 사투리도 정말 다양해요.
이윤석: 그러면 색깔 말고 오히려 이렇게 따뜻하다 뜨듯하다 따끈하다 뜨끈하다
다니엘: 난 포기해요
류근: 저 같이 문학을 하는데는 다행일 수 있는데. 사전을 만들려고 하면 이게 숙제잖아요. 이걸 어떻게 다 수집을 하나요?
심용환: 문학가의 상상력이 언어학자에게 고통이 될 수 있어요.
최원정: 실제로 알래스카 같은 경우에도 워낙 눈이 많이 오는 나라라서 눈과 관련된 단어가 60개가 넘는데요. 어휘라는게 그 나라의 다양한 경험과 문화와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이윤석: 참고로 빨갛다 라는 어휘도 60개가 넘는데요.
최원정: 뭐요 우리도요?
심용환: 그런데, 다 힘들지만 진짜 모으기 힘들었던 것이 하나 있었어요. 너무너무 힘든 게 있었어요. 화면을 한번 보시죠.
영화<봉오동 전투>중
군인!: 음…갱개이 먹어본 게 얼마만 지 사르르 녹는 게 혓바닥까지 넘어감매
군인2: 갱개?
군인3: 뭐라꼬? 갱개? 우리 경상도에서는 군감자라코 하는데 군감자라는 말이 참말로 더 괘안타카이
군인4: 야이 무시거옌 막 고작고작 햄시니 무시거 뭐 군감자? 너 무시거 뭐 갱개? 아이구 이 서른애기덜은
군인3: 야 네네 지실이랜 들어반나? 지실! 지실! 아맹 무시거옌 고라봐짜이~제주도말이 젤로 곱뜰락하매에
류근: 사투리! 사투리! 우리 아내랑 섬진강변에 가가지고 술을 마신 다음에, 다슬기 해장국이 먹고 싶은 거예요. 근데 갔더니 다슬기 해장국이 아니고 대사리 해장국집에 간거예요.
심용환: 대사리?
류근: 그래가지고 엄청 싸웠어요. 분명 다슬기 해장국집에 가자고 했는데 웬 대사리 해장국집이냐? 그런데 똑 같은 거예요. 다슬기=대사리, 다슬기 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충주만 해도 이게 올갱이예요.
심용환: 맞어, 올갱이
류근: 올갱이, 동네마다 다 달라 고의 심지어 고등까지 있고
최원정: 제일 대표적인게 부추아닌가? 부추=정구지, 그 다음에 솔, 가위도 가수=가새,
류근: 이걸 그런데 지금은 우리 남쪽 밖에 없지만 저쪽 북쪽 사투리까지 다 해야되니까~ 아, 난 사전 못만들 것 같은데~
이윤석: 심지어 이게 같은 말인지도 모를 수도 있어요.
최원정: 누가 지수를 감자로 알겠어요? 완전 다른 말인데~
심용환: 실제로 아까 얘기 나왔던 거, 이극로도 사투리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어요. 아까 우리 나왔지만, 1911년에 독립군이 될려고 만주로 가다가 평안북도 지방을 지난 거예요.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있는데, 저기 주인장 고추장 좀 주세요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고추장을 생각하는데, 주인장이 고추장이 뭐예요? 막 의사소통을 하다가 주인장이, 아 댕가지장 이러면서 고추장을 갔다 주는 거예요.
이윤석: 댕가지장?
심용환: 완전히 다른 말이죠. 얼마나 충격적 이겠어요.
이윤석: 극노 하셨겠다. 아니 이건 전혀 다른~
박용규: 그래서 먼저 하는 작업이 사투리를 전부 모우는 겁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세번의 큰 회의를 통해서 그중에서 우리 민족이 제일 잘 쓰는 말, 표준어를 정하는 작업을 한 겁니다.
류근: 그런데 사투리인 거 어떻게 알아요? 자기 동네 말이면 그게 다 표준어인데~
심용환: 댕가지장이요.
다니엘: 그건 정말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독일도 어쩌면 사전이 하나 생길 때까지 123년이 걸렸던 이유가 우리도 사투리가 정말 다양하거든요. 제가 얘기 하는 건 20개 이상이에요. 그래서 정말 우리도 우리 지역 사투리도 못알아들어요. 쾰른이란 도시에 쾰수라는 사투리가 있는데 굉장히 세구요. 그 다음에 저희가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에 가면 거기서 쓰는 독일어 있잖아요. 완전 달라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예를들면 오스트리아에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쓰레기통(오스트리아)을 똥통(독일)이라고 불러요. 미스키브르 라는 단어를 쓰는데 저는 난생 처음 들어봤어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는데 콘 있잖아요. 아이스크림콘(독일)을 달라고 했는데 독일말로 현친이라고 부르는데 오스트리아에서는 봉투라고 불러요. 뒤테, 뒤테 라는 단어를 써요. 봉투에다 아이스크림을 주신다고요? 말이 안되는 거에요. 맨 처음에 소통이 진짜 안되었어요.
이윤석: 댕가지장이 고추장 수준이었어요.
최원정: 지금 같으면 티브이 모집광고를 한다든지 SNS에 올렸어야 돼는데~ 당시에는 정말 어떻게 했을까요.
박용규: 자, 보십시오.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회는, 각 지방의 언어를 수집하기 위해서 중등학생 이상을, 총동원입니다. 우리 5천명을 동원했습니다. 여름 방학 때 자기 고향에 가서 사투리를 적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등학교 선생님들이 많았죠. 학생들이 방학이 끝나면 갔다주는 겁니다. 그래서 무려 5년 동안 만여점을 모았습니다. 근데 여기에 덧부쳐 가지고 조선어학회에 기관지가 있었습니다. 한글지, 방언조사란을 만들었으니 사투리를 조선어학회에 보내주시오. 그래서 수집을 합니다.
이윤석: IMF나 국채보상운동 때 금모우기 처럼 말 모우기~
심용환: 멋있다.
최원정: 그런데 먹고 살기 바쁜데 사람들이 여기에 호응했을까 싶기도 하구요.
이윤석: 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답장이 날아들었다. 답장 중에 하나를 받았는데~ 제 품에 있어요~ 아래와 같이 이곳 방언을 규칙없이 두어 말 적어 드립니다. 조선어사전편집자에게 백분지 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 뒤에도 힘있는 데까지 적어드리려 합니다. 보면 이제 서울말, 가슴 사투리 기시미 가스므, 가을 가슬, 가위 가새, 강아지 개지 꼬도개지, 이런 식으로 쭉 서울말 하고 사투리를 가득 담아서 이렇게 적었데,
류근: 어디서 보낸 거예요?
이윤석: 함경북도 길주,
심용환: 열심히 해서 갔다 주신거네요.
이윤석: 반딧불도 있고 여기 찾아 보면 많아요. 호남지방, 익산에서 온 편지,
최원정: 저런거 보내다가 발각되면 처벌될텐데~ 굉장한 용기를 갖고 보냈겠어요.
다니엘: 다같이 노력 했잖아요. 다같이 노력 했는데 약간 3.1운동이 생각나네요. 그때도 남녀노소가 상관없이 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다같이 참여했는데 이것도 그렇잖아요. 되게 뭉쿨하네요.
류근: 그런데 말이죠. 아까 그 사전을 편찬할 때 제일 먼저 필요한게 뭐냐고 하셨잖아요. 솔직히 제가 시인이 풍물처럼 보일까봐 대답을 잘 안했는데 사실 아무리 좋은 어휘가 수집이 되도 사전편찬에 들어가는 비용이 없으면 다 소용없어지는거 아닙니까.
심용환: 정말 중요한 포인트구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자금지원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유식 이라고 무역상을 하시던 분인데 1만7천원을 보냈습니다. (현재가치로 대강 17억원 정도). 정말 엄청난 돈이잖아요.
박용규: 덧부쳐서 하나만 더 얘기하자면 우리 사전편찬 하는 분들이 사전을 만들려면 집이 있어야 되겠죠. 근데 조선어학회의 회관 2층 양옥집을 지어서 조선어학회 이극로에게 기증해 준 분이계세요.
심용환: 연구공간을 준 거네요.
박용규: 우리 서울 북촌에 한옥을 개발한 건축왕 누구죠?
최원정: 전세권? 역세권, 강전세~누구더라?
박용규: 정세권,
일동(웃으면서): 박수, 분명 기억은 나는데~
박용규: 정세권 선생님이 조선어사전편찬을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2층 양옥집을 지었어요. 전부 합치면 16억 8천만원의 가치를 들여서 기증을 해 준 겁니다.
최원정: 정세권 선생님, 다시는 잊지 않겠습니다.
다니엘: 이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거 같애요. 노틀담 성당이 화재났을 때도 어떤 프랑스 부자가 바로 자기는 100억 기부하겠다고 얘기했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나마 그런 일도 운영이 되는 것 같애요.
이윤석: 노블레스…그거 맞아요.
박용규: 이런 분도 있었습니다. 집은 가난했는데 조선어학회가 우리말을 연구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여기에 직원이 되어야 되겠다. 이석린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분은 조선어 학회에서 가장 힘든일,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어요. 편지를 발송한다든지 교정을 한다든지, 이런거 오전에는 조선어학회 일을 하고 오후에는 세상에 경성거리에 나가서 구두를 닦는 일을 했데요. 그러면서도 이분이 일관되게 바로 우리말과 글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그런 일을 했다는 거지요.
최원정:
이분이 혹시 말모이 영화에서 유해진씨가 맡았던 그분인가요?
박용규: 그분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류근: 제가 이분을 어디서 기억하냐면 제가 고등학교 때 양정고등학교가 서울역 뒤에 있을 무렵에 그 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이분이 많이 배우지 못하신 분인데 조선어학회 일을 바탕으로 해서 계속 공부를 해서 결국은 훌륭한 선생님이 되셨어요.
다니엘: 고마운 분이네요.
최원정: 역사를 움직이는 게 대단한 분들이 아니라 이런 民草들에서 시작되는 거잖아요.
류근: 민초도 일본말이에요.
일동: 당황
심용환: 그럼 뭐라고 그래요?
류근: 민초라는 말 쓰면 안돼요 (民草-어원은 불분명하지만 일본에서 백성을 ‘나약한 풀’에 비유하여 민초로 일컬었음),
박용규: 백성
이윤석: 나는 좋은 의도로 쓰는 말이었는데도 잘못된 표현이네요.
심용환: 함께 비전을 공유하고 꿈을 꾸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16만 어휘, 삽화 3천여 매, 그렇게 설명해야 되니까 그렇게 되어 드디어 <조선어 대사전>의 원고가 다 완성 되었습니다. 그날 얼마나 뿌듯하고 함께 기뻐하고, 그래서 1940년 3월 7일 조선총독부에 조선어사전 출판허가원을 제출하게 됩니다.
류근: 근데 이 국면에 찬물을 확 끼얹는 건데 아까 삽화 3천여 매라고 하셨잖아요? 매도 일본말이에요.
최원정: 알았어요. 장이라고 하면 되겠군요.
류근: 원고지 매수 이런 거 다 일본말입니다. 원고지 200매, 300매 이거 다 일본말입니다. 매를 장으로 바꾸어야 됩니다.
최원정: 열심히 바꿉시다. 지적하면서,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1940년대 하면 조선어 말살정책이 굉장히 극심해지는 때인데,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사전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이게 가능했을까요?
영화 <말모이>中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제에 검거된다. 죄목은 치안 유지법 위반,
경찰: 니들이 만드는 사전 원고 어딨냐고!
조선말 큰 사전 원고는 일제에 압수됐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잔혹한 옥고를 치른다.
일동: 아이구, 여기저기서 한탄이 나오고~
최원정: 그런데 꿈에 그리던 사전출판인데, 직전에 잡혀가는 거잖아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심용환: 그 사건이 우연이 일어났어요. 함흥에서 한 남자가 거리를 걷는데 일제시대, 옛날에 검문을 많이 했잖아요. 이 사람이 퉁명스럽게 대했나봐요. 그러니까 경찰의 입장에서 화가 나서 가택수색을 당해요. 가택수색 당한 날 거기서 일기장 두권이 나와요. 조카였던 박영희의 일기장인데,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들었다 라고 적혀있어요.
이윤석: 잠깐만요 또 헷갈리네요. 국어를 썼다가 꾸지람을 들었다. 국어는 우리말인지, 일본어인지?
박용규: 당연히 일제시기는 일본어가 국어입니다. 일본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들었다. 그 혼내킨 선생님을 찾아봐야 되겠다. 학생들을 닥달하는 거예요. 너희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선생님이 누구냐? 얘기를 해라 닥달을 합니다.
이윤석: 아유 아유 궁금해, 다음 단계는?
심용환: 학생들이 지목했던 사람이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정태진입니다. 그래서 일제형사가 9월 5일에 정태진을 출두하라고 시키고 검거를 해버립니다. 약 한달이 지난 10월 1일(1942년)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검거하기를 시작합니다.
류근: 이거야 말로 그런데 사전편찬을 막기 위한 꼼수 아닙니까? 그러니까 일종의 표적수사, 기획수사 아닌가요?
박용규: 충분히 의심할 수 있습니다. 1942년 9월 5일날 정태진이 함흥경찰서에 출두하는데 출두 할 때 사건제목이 뭐였느냐 치안 유지법 위반자로 이미 소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같은 날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급습했어요.
류근: 수사도 하기전에 이미 단정하고 있는 거잖아요.
이윤석: 일제가 보기에는 조선어학회가 눈에 가시였겠죠.
최원정: 많은 분들이 검거되고 그랬다고 알고 있는데요.
박용규: 무려 33명이 검거됐어요. 저기 나오지요.
----------이윤재, 한징,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이중화, 이우식, 김법린, 이인, 김양수, 김도연, 장현식, 장지영, 정열모, 김윤경, 이석린, 권승욱,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이병기, 서승효, 윤병호, 이은상, 정인섭, 서민호, 안재홍, 신현모, 김종철, 권덕규, 안호상—이상 33명--------
최원정: 그 유명하신 최현배, 이희승 선생님도 계시네요.
박용규: 조선어학회 학자들입니다.
다니엘: 정태진 여기 나오네요.
류근: 안호상 선생도 계시네요.
최원정: 정말 공교롭게도 33인이라는 숫자가 주는 메시지가 있어요.
박용규: 민족대표 몇명이죠?
일동: 33명입니다.
박용규: 똑같이 봤습니다. 일제경찰들은~ 33명을 그래서 검거한 겁니다. 언어독립투쟁을 하신 33인입니다.
이윤석: 조선어학회 33인, 일본이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기소를 한 사유가 굉장히 인상이 깊었어요. 본건 조선어학회는 소화6년 1931년 이래로 피고인 이극로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운동 중 기초적 중심이 되는 어문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중략) 여러 해를 거듭하여 내려오며 편협한 민족관념을 북돋아서 민족문화 향상, 민족의식의 앙양 등 조선독립을 위한 실력신장의 수단을 다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곧 우리나라를 지키는 것이고 조선어학회가 그것을 하려고 했다는 것을 일본이 스스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먼저 해준 셈이에요. 이게 정확한 평가입니다.
심용환: 너무 정확한데~~
류근: 윤동주 시인 같은 분들은 진짜 기억하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언어로 항일정신을 표현했던 저분들 역시 우리 언어를 통해서 독립정신을 고취했던 아주 소중한 분들입니다.
최원정: 지금 보니까 핵심인물이 다 잡혀갔는데 그렇게 되면 온 국민이 힘을 모아서 만들었던 사전원고는?
일동: 그게 사실 제일 걱정이에요.
심용환: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다 가져갔는데 재판도중에 해방이 된 거예요. 그러면 뭐냐 해방이 되면서 우리를 재판하던 그 사람들도 다 사라져 버린 거잖아요. 도대체 이 원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잖아요.
류근: 그러면 식민지 때 증거를 없애려고 소각하잖아요? 불을 질러 버리는 거죠.
다니엘: 저도 그걸 걱정했어요. 진짜 독일에서도 많이 있었거든요. 자기를 반대했던 지식인들의 모든 작품을 모아서 큰 광장에서 다 태워버렸거든요 (나치분서(焚書)사건(1933년)-나치에 반대하는 예술작품 수만여 점을 불에 태움), 그래서 유명한 작가들이 자기작품이 불타는 것을 멀리서도 지켜보고 그랬었어요.
박용규: 불행 중 다행히도 해방이 되고 나서 조선어 학자들이 사전 원고를 찾았습니다.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서울역 창고에서 나왔어요. 창고에서 옥살이를 한 <조선어 사전> 원고, 그래서 조선어 학자들이 그 원고를 보고서 다들 눈물을 흘렸다고~,
이윤석: 왜 눈물이 안나겠습니까
다니엘: 진짜 다행이네요.
최원정: 다 소각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심용호한: 드디어 1947년 <조선어 큰사전>을 편찬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참 특별한 시간입니다. 한글학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말 큰사전 초판본이 이곳에 왔습니다.
일동: 박수
이윤석: 이게 어떻게 왔지~~
최원정: 지금 세 박스에 담겨져 있는데요.
이윤석: 이거 지금 그냥 사전으로 안 보여요.
류근: 여기서 제가 말을 한번 찾아 볼게요. 말이 뭐라고 쓰여졌는지~ 우리 말, 언어, 말-사람의 생각을 나타내는 소리라고 되어 있어요.
이윤석: 우리의 말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지키는 거예요.
다니엘: 생각을 내는 소리, 좋다.
최원정: 역사란 어떻게 정의를 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요.
류근: 잠깐만요 역사가 많아 여기 찾았어요. 역사(歷史)-역사는 자연세계와 인류문화의 변천되어 내려온 과정, 또는 그에 대한 기록.
박용규: 역사(歷史)는 지나온 사건을 기록한 것을 보통 역사라고 하거든요. 비슷하게 제대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최원정: 굉장히 고민한 흔적들이 있어요. 글자를 풀이한 게 아니라 함축적인 게 담겨 있어요.
이윤석: 사전을 말모이 라고도 하잖아요. 그게 말을 모았다 라고도 하겠지만 제 생각에는 또 말의먹이라는 느낌이 있어요. 조선어 한글 학자들이 심어놓은 언어의 씨를 우리가 하나씩 하나씩 쪼아 먹으면서 언어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류근: 요즘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인 인기잖아요. 그 앨범이 나오면 세계의 아미들이 한글가사를 번역한다고 하더라구요. 우리 말과 글이 없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죠.
최원정: 일제 강점기 때 긴 기간 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 땀이 어린 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게 몇권입니까. 여섯권으로 보고 있으니까 마음이 울컥합니다.
박용규: 이 사전이 해방되어 나오면서 1957년에 마지막 권이 나오지만 이게 북쪽이든 남쪽이든 전부 퍼졌습니다. 현재 말글은 분단이 안되었습니다. 이극로는 1948년 4월에 남북연석회의 기간에 북쪽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잔류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바로 말글을 지킨 이극로 선생님의 업적은 우리 민족이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최원정: 맞는 말씀인데 우리가 북한언어를 다 이해하고 알아듣잖아요. 그런 저변의 이유가 있었구요.
다니엘: 저는 언어라는 건 정말 한민족의 어떤 문화, 정신,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걸 지키는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에는 한글날 이라는게 따로 지정되어 있으니까 그게 사실 되게 부러워요. 다른 나라에는 거의 자기 글을 위한 기념일이 따로 없어요.
최원정: 글을 만든 날을 모르니까,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한글 창제일이에요.
다니엘: 그건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요즘에 외래어도 많기는 하지만 정말 한글을 계속 지키고 정신을 계속 유지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류근: 20세기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철학자 비트겐 슈타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비트겐 슈타인.
우리 민족이 공유하는 정신적 세계의 한계를 확장시켜준 조선어학회 여러분들의 노고와 신념과 고초에 정말 시인으로서 다시 한번 진심어린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꼭 전해 드립니다.
최원정: 감사의 말씀과 더불어서 정말 아나운서로서 또 국문학 전공자 방송인으로서, 시인으로서, 우리가 바른말 고운말을 쓰도록 이 시간을 계기로 다짐을 해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말을 사랑하는 다니엘씨도 동참해 주기바랍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윤석: 오늘 다니엘씨를 보고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깨달았어요.
최원정: 각성됐어요. 우리 말을 지켜냈던 조선어학회 이야기는 여기까지 나누도록 하고요. 다음 시간에는 올해(2019년) 최초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부마민중항쟁이야기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역사저널 그날 시즌2 45화 “1929년 조선어 학회에서” 에서 정리).
①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사학자들에 의해서 새로이 발굴 되어 기쁘다. 조명하 대만 감옥에서 순국, 신채호 뤼순 감옥에서 순국, 그리고, 우리말과 글을 지키느라 독특한 경력을 가진 언어 독립운동가, 바로 이극로 선생이다. 처음 알게 되었다.
② 일제강점기 1921년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조선어연구회 조직, 1926년에 음력 9월 29일에 가갸날 선포, 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지 480년만이다. 그런데, 1929년에 이극로가 유럽에서 귀국한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킬 결의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는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고 핵심인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바꾸고 108명의 발기인을 모아서 조선어 사전편찬회를 조직한다.
③ 이극로는 경상남도 의령, 빈농출신, 1911년 19살에 독립군이 되기 위해 만주로, 1915년 홍범도와 포수단 가담, 1916년 상해 동제대학 입학, 1922년 독일 베를린 대학 유학, 1923년 독일 대학에 조선어 강좌개설,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경제학, 철학, 인류학, 언어학 등을 체계적으로 공부한다. 이극로는 독일에서 유럽의 현실, 즉 아일랜드와 폴란드의 경우를 봤다.
④ 조선어는 훈민정음 예제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500년 동안 제대로 관리가 안되고, 뜻 위주로 글을 쓰는데 띄어쓰기도 없고, 용례도 다르고, 어휘도 다르고, 1933년에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 언어를 통일하였다. 그런데 조선어학회의 숙원사업은 사전편찬,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 고로, 사전을 만들면 식민지로 가더라도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결심.
⑤ 많은 동포들이 조선어 학회에 자금지원, 무역상 이유식은 1만7천원을 보냈고(현재가치로 대강 17억원 정도). 서울 북촌 한옥 개발자 건축왕 정세권은 연구용으로 2층 양옥집을 지어서 조선어학회에 기증하였다 (현재가치로 16억 8천만원 정도),
⑥ 드디어 <조선어 대사전>의 원고가 완성, 1940년 3월 7일 조선총독부에 조선어사전 출판허가원 제출, 그런데 1942년 9월 5일 조선어학회 정태진이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쓰게했다는 이유로 함흥경찰서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자로 체포, 같은 날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급습,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회원들 일제에 검거, 죄목은 치안 유지법 위반, 모든 조선어 사전원고를 가져감
⑦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이 검거,---이윤재, 한징,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이중화, 이우식, 김법린, 이인, 김양수, 김도연, 장현식, 장지영, 정열모, 김윤경, 이석린, 권승욱,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이병기, 서승효, 윤병호, 이은상, 정인섭, 서민호, 안재홍, 신현모, 김종철, 권덕규, 안호상-----재판도중 해방이 되어 모두 석방이 되고 다행히 사전 원고는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
⑧ 최초 한국어 사전은 모두 여섯 권인데 해방이 되어 첫번째권이 나오면서 1957년에 마지막 권이 나왔다. 그러나, 이극로는 1948년 4월에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북쪽으로 갔다가 거기에 잔류했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던 여운형이 사회주의 노선을 걷다가 암살당했고, 조선의열단 단장을 한 김원봉이 사회주의를 신봉, 월북하여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은 참으로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