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하안거 결제법어
조계총림 방장 현봉대종사
마조(馬祖)가 오랫동안 좌선을 하고 있으니,
어느날 회양선사가 마조 앞에서 벽돌을 갈고 있었다.
마조가 묻기를
“벽돌을 갈아(磨塼) 무엇하시렵니까?”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이걸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하였다.
마조가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하니,
회양선사가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지 못하는데,
어찌 좌선하여 부처가 되겠는가?”하였다.
마조가 묻기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비유하면 수레에 소를 메워 끌어갈 때,
만약 수레가 가지 않으면 소를 때리는 것이 곧 옳은가?
아니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하였다.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릴 것이 아니라
소를 때려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 이 ‘이야기의 참 뜻’
즉 화두(話頭)는 무엇인지는 각자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송광사 조계총림을 개설하신 구산대선사께서는
보조국사께서 자호를 목우자(牧牛子)라고 하셨듯이,
자호(自號)를 타우자(打牛子)라고 하셨습니다.
타우자는‘소를 때리는 사람’ 또는
‘소를 치는 사람’이란 뜻이니,
그냥 줄여서‘소친애’라고도 쓰셨습니다.
방장 현봉스님
조계총림을 개설하고
보조국사의 침실이던 조사전 자리에다
수선사(修禪社) 선방을 지었는데,
거기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큰 둥근 거울을 걸어놓고
그 앞에서 대중들이 예불 올리고 정진합니다.
남악회양선사에게 누가 묻기를
“거울이 형상을 만드는데<如鏡鑄像>
형상이 이루어진 다음에
거울의 밝음은 어느 곳으로 향해 갑니까?”하니,
선사는 말하기를
“대덕이 어린 동자였을 때의
그 상모(相貌)는 어디에 있는가?
그와 같다”하였다.
다시 묻기를
“그렇게 형상이 이루어진 뒤에는
어째서 비추지 못합니까.
<只如成像後 爲什麽不鑑照>”하니,
회양선사는 말하기를
“비록 그렇게 비추지는 못하지만,
그를 한 점도 속이지 않느니라.
<雖然不鑑照 謾他一點不得>”하였다.
거기에 저는 다르게 말합니다.
安居掩門坐
空庭也蕭灑
霞彩紅天海
雲卷碧山野
안거하며 문을 닫고 앉아 있으니
빈 뜰은 깨끗하고 산뜻하구나.
노을빛에 하늘과 바다는 붉어지고
구름이 걷히면 산과 들이 푸르네.
<<조계총림 송광사 하안거 결제 대중>>
-출처 :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