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16
류인혜
* 카페 에스프레소
2003년 10월 21일(화) 로마에 짐을 부려놓고 며칠을 묵는다고 생각해선지 여유롭다.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작은 사실이 사람을 편하게 한다. 늘 풀었다 쌌다 하면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 이제 짐작해 본다. 아무리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도 시간을 따라가는 일은 힘이 든다.
길을 나서는 나그네의 삶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신발 벗을 곳이 있음이 행복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발을 벗고 편히 쉴 수 있어 간밤에는 잠을 깊이 잤다. 이제 겨우 여행자의 시간에 적응하는 것이다.
호텔은 시설이 훌륭하다. 로비 구석에 있는 식당으로 가는 길에는 명품인지 근사한 옷들과 액세서리를 전시해 두었다. 우리가 사용할 식탁을 안쪽 구석에 두 테이블 마련해두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끼리만 모여 오붓하게 먹는다. 간단히 시니얼과 오렌지주스와 과일 통조림으로 끝냈다. 빵의 종류도 여러 가지이고 맛있어 보이지만 아침 식사로는 부담이 된다. 많이 움직일 것을 생각하여 열량이 높은 것으로만 먹으니 속이 더부룩하다. 김치 생각은 없는데, 뜨뜻한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싶어졌다.
로마에서 더 남쪽 지방으로 내려간다고 하니 옷을 가볍게 입었다. 소지품을 간단히 하고 이제부터는 가이드가 설명할 때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다짐한다. 다른 것에 눈이 팔려서 혼자서 건들거리며 다니지 않고 열심히 적으려고 두 손을 자유롭게 했다. 바지 옆에 달린 주머니에 여권과 카드, 현금을 넣었다. 큰 가방에 잡동사니가 든 작은 허리 가방과 물, 카메라, 우산을 넣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물티슈도 챙겼다. 그동안 점심때는 빵을 뜯어 먹어야 하는데 손이 더러워 찜찜했다.
기다리던 폼페이로 간다.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다. 사진으로 보던 것과 직접 만나는 옛날 도시의 정경이 어떤지 기대가 된다. 가는 길은 산과 구릉과 평원이 어우러져 있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집으로 일찍 들어와서 가정의 일에 관심을 두는데 시간이 많으니 특별한 취미 생활을 한다. 집을 짓는 일이다.
먼저 터를 사놓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기초 공사는 전문적인 회사에 맡긴다. 그다음부터는 시간이 나는 대로 온 가족이 모여서 벽을 쌓고 기둥을 세우는 작업을 하는데, 조급하게 서둘지 않고 천천히 수십 년 동안 지어 간다고 했다. 집을 다 지어서 들어가 살면서도 겉을 바르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은 완성된 건물은 신고하고 세금을 내어야 하기에 미완성으로 남겨둔다고 했다.
가는 길에 짓고 있는 건물이 눈에 뜨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집을 지어 가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흐뭇하게 벅찰까? 흙벽돌을 만들어서 나도 집 짓고 싶다. 창을 크게 내고 천정도 높게 올리고, 베란다도 넓게 잡아서 식탁을 갖다 놓고, 가끔 이웃을 불러 차를 마시고 싶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할 일이 뚜렷해서 행복하겠다.
가는 곳마다 작은 기념품을 하나씩 사두고, 소소한 잡비를 쓴다는 생각으로 주머니에 10유로짜리 지폐를 두 장씩 넣고 하루를 시작했다. 어느 날은 그보다 더 쓰고, 어느 날은 잔돈이 남아있기도 했다. 버스가 휴게실에서 멈춘다. 이제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그곳은 잡화상이다. 지역 토산품도 진열되어 있다. 움직이는 피노키오 나무 조각을 샀다. 5유로다. 줄을 당기면 팔과 다리를 익살스럽게 움직여서 혼자 갖고 놀기에 좋다. 피노키오를 소재로 한 기념품이 눈에 많이 뜨이니 주력 상품인가 보다.
휴게소에서 파는 커피는 두 가지 종류이다.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이다. 에스프레소를 담아주는 작은 잔이 예쁘다. 언제 저기에 담은 에스프레소를 먹어볼까 기대를 했었는데 이탈리아의 휴게소에서 마시며 다닌다. 밑바닥에 깔아주듯 조금 부어주니 크게 두 모금만 마시면 된다. 한 모금은 그냥 마시고 나머지에 설탕 하나를 넣어서 마시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화장실에 얼른 다녀와서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신다. 아껴가며 조금씩 입맛을 다시듯이 마신다. 서울에 가면 이 짙은 커피의 맛이 생각날 것이다. 모든 커피의 기본이 에스프레소이다. 아무리 다른 것을 첨가해도 처음의 에스프레소의 맛에 좌우된다. 운명의 도시 폼페이로 가는 길이니 생각이 깊어지도록 만드는 커피가 제격이다.
폼페이에는 아직도 화산의 징조가 남아있기에 사람들이 살기를 꺼려서 이주자들에게 2만5천 불을 지원해 주며 이주를 권한다. 우리나라에서 농촌이주민들에게 특혜를 주는 이치와 같은 것인가?
폼페이의 역사를 찾아보았다.
교통의 요충지며 비옥한 토지를 조건으로 일찍이 오스크 인이 촌락을 이룬 뒤, BC 8세기 이후 그리스의 식민자 에투우리아 인이 이주하면서 마을이 확대되었다. 교역이 번창하여 농산물, 포도주, 어패류, 경석(輕石)을 산출해 수출하였으며 그리스 신전이 세워지는 한편 오스크 이탈리아 문화도 발전하였다. BC 5세기 삼니움 인에게 점령되었고, 누케리아를 맹주로 하는 도시동맹의 일원이 되어 귀족 공화정 체제를 갖추었다. BC 3세기 로마의 진출로 한때 독립하여 헬레니즘, 로마 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였다.
포에니 전쟁 때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편에 섰으나 그 뒤 로마 지배 아래 들어갔으며 동맹시 전쟁에서 다시 로마에 저항했지만 결국 로마시민권을 얻어 복속되고 많은 로마인을 식민지에 받아들였다. 도시 제도를 정비하고 라틴어를 수용하였으며, 극장, 베누스 신전, 이시스 신전, 목욕탕, 바실리카 등을 세워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로마 부유층의 휴양지로서 별장을 호화로운 조각, 모자이크로 장식하고 수도(水道), 포장로, 상점도 갖추었다. 최고 전성기의 인구가 약 2만 명에 이르렀다.
최후의 날 * 폼페이 최후의 날
서기 79년 8월 24일 아침에 지진이 시작되었다. 로마의 티투스 황제가 집권한 지 한 달이 지난 때다. 베수비오산 정상에서부터 시작되어 나폴리만으로 내려오면서 진동이 이어졌다. 그때까지는 농가와 포도밭으로 이루어졌던 한 푸르른 산이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일어나던 진동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잦아졌다. 나중에는 산꼭대기에서는 불꽃을 튀기면서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화산 폭발은 10세기가 넘도록 활동을 멈추었던 기존의 화산구 함몰지역에서 새 분화구가 터지면서 시작되어 아침 내내 계속되었다. 오후 한 시, 갑자기 베수비오는 굉음과 함께 수 킬로미터의 경석 기둥을 분출시키며 산꼭대기로부터 큰 소나무 모양의 엄청나게 큰 먹구름을 형성했다.
갑자기 온 세상이 깜깜해졌고 남동쪽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갔다. 먹구름은 지표면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첫 번 굉음 후, 반 시간이 지나자 재와 경석 더미 위로 힘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에르콜라노에서 쏘렌토 해안선 지역과 사르노 유역 안쪽, 남쪽으로는 파에스툼까지의 지역이 피해를 보았고, 가장 심한 곳은 폼페이였다. 폼페이는 사르노강 하구 화산의 경사 지역에 위치하여 약 17년 전 서기 62년 이미 지진을 겪었던 곳이다.
이 천재지변은 로마제국의 가장 비옥하고 아름다운 지역 중의 하나였던 곳을 파괴하였다. 로마는 이 지진을 공포와 긴장으로 맞아들였고, 원로원은 피해복구를 위해 구조대를 파견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란 남은 사람들을 지진의 피해가 없던 지역으로 피신시키는 일이었을 뿐, 큰 해결책이 없었다.
후에 몇 명 사람들이 우물이나 굴을 파서 매장된 보물이나 재산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이것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근처에 목자들과 농부들의 오막살이가 몇 채 들어서기도 했고, 화산의 비옥한 토지 경작을 위한 농가, 별장도 생겨났지만, 세월은 흘러갔다. 폼페이와 에르콜라노 그리고 스타비아에는 그때 그 사건은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 폼페이의 유적 발굴
폼페이의 유적 발굴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1860년 고고학자 피오렐리 교수가 플리니우스의 직필인 듯한 문서를 발견했다. 문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기원전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에 전대미문의 대분화가 일어났다. 거대한 불기둥과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산의 상반 부분은 휙 날아가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이 화구에서 흘러내려서 산록의 폼페이와 에르콜나노는 순식간에 멸망했다. 살아남은 주민은 거의 없었다.”
단서를 잡은 피오렐리 교수는 이탈리아 정부의 원조를 얻어 폼페이 발굴을 시작했다. 거대한 대 경기장의 일부, 로마의 귀족과 부자들이 휴가를 즐기던 별장의 유적을 비롯하여 사원, 저택의 문, 목욕탕, 극장, 장터 그리고 공회당 등의 건물 유적들은 거의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심지어는 빵 가게 앞에는 현재의 우리가 먹는 것과 똑같은 고대의 빵이 80여 개나 화석으로 발견되었다. 번화가의 네거리에는 육교가 있었고 산 채로 잿더미에 묻혔던 폼페이 사람들의 해골과 뼈도 나왔다. 또 여인들의 화장 도구며 꽃병, 촛대, 그릇 같은 것들도 나왔다.
피오렐리 교수는 발굴 도중 이상한 것을 알게 되었다. 문헌에 의한 인구에 비해 거의 시체가 나오지 않는 점이다. 골몰해 있던 교수는 마침 화산재에 뒤덮인, 인간의 형태를 한 동굴을 발견했다. 교수는 이 동굴에 녹인 석고를 흘려 넣고 굳어지자 석고 주위의 화산을 조금씩 깨뜨려 나갔는데 그곳에서 하나의 석고 덩어리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미모의 벌거벗은 여자였는데 육체와 시간이 함께 썩어 분해해서 생긴 일종의 주형이었다.
석고상은 희생자의 표정뿐 아니라 옷의 주름이나 머리 모양까지 완전히 보여주므로 그들의 직업과 건강 상태까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석고상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괴롭고 고통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