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는 나의 것(Keep Smiling, 2012): ‘엄마’의 정치학, 또는 ‘나’를 위해 웃는 법
<천국의 모퉁이>를 이야기 하면서, ‘엄마’라는 좋은 말에 담긴 더 좋은 뜻을 잠시 짚어보기도 하였습니다만, 그건 순전히 ‘엄마’의 보드라운 쪽만 살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무서운 존재이지요. 무서운 말이기도 합니다. “엄마”하고 가만히 불러보면 참 따뜻하니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지만, 이 말이 다른 말들과 결합하는 순간, ‘엄마’는 변신괴물이 되고야 맙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모’국, ‘모’국어, ‘모’성애, 등등.
이 영화의 영문제목은 “계속 웃어요(Keep Smiling)”이고, 한국어 제목은 “미소는 나의 것”입니다. 제목만을 놓고 본다면, 제가 왜 ‘엄마’의 무서움을 자꾸 끄집어내려는지 고개를 갸웃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영화내용을 말하지 않을 수 없지요.
‘새 조지아 엄마 선발대회’에 나온 10명의 여자들이 있습니다. ‘미스코리아’는 이미 잘 아실 테니, 그에 비유해보자면, 미세스 코리아 선발대회 쯤이 되겠습니다. 10명의 여성들은 자기야말로 ‘새 조지아’를 대표하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라며 별의 별 선발과정을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입니다. 난민캠프를 찾아가 요리를 선보이며 최고의 요리사를 뽑히기도 하고, 관객들이 선택한 최고의 재주꾼이 누군지를 알아내기 위해 무대 위에 서서 있는 재주 없는 재주 다 끌어내기도 하지요. 한 두어 사람을 빼놓자면, 이들은 일종의 생계형 참가자들입니다. 먹고 살게 없는 상황에서, 상금과 상품(아파트!)을 쟁취하기 위해 이 대회에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렸는데, 그것도 ‘아줌마’들끼리 경쟁인데, 얼마나 치열하겠습니까.
1991년에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한지 얼마 안 된 조지아는, ‘신생’국가답게 그 ‘엄마’됨을 서둘러 발굴해 내려 안간힘입니다. ‘새로운 조지아’를 상징하기에 적절한 ‘새 조지아 엄마’를 선발하겠다는 영화 속 상황은 말 그대로 영화적이지만, 소련이나 러시아가 아닌 ‘조지아’로서 험한 세계 속에 첫발을 내딛어야 하는 조지아의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는 풍자적 장치로서 ‘새 조지아 엄마 선발대회’는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참가자들 모두는 무언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입니다. 은행융자금을 갚지 못해 길바닥에 나 앉게 된 가족을 위해, 난민으로서의 비참한 생활에 이골이 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정치적 야심을 위해 아내에게 투자해대는 남편을 위해,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젊은 애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엄마를 위해, 그들은 ‘웃는 법’을 이제야 배웁니다. 단 한사람만이 자신을 위해 무대에 오릅니다만, 현실에서 그다지 좋은 ‘엄마’일 수 없는 그녀는, 국가적 엄마를 뽑겠다는 역사적·정치적·남성적 무대장치들 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참가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 ‘엄마됨’을 부리지 않(못)했던 그이의 결말을 잘 살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전달되리라 봅니다.
‘엄마’라는 말, 참 좋지요. 하지만, 그 엄마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대의명분을 위해 희생될 때, ‘엄마’는 더 이상 그 좋은 ‘엄마’일 수 없습니다. 이데올로기와 강자들의 역사가 빚어내는 무대 위의 꼭두각시가 되어 웃고 우는 일밖에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조지아’가 아니라면, 또 그 조지아를 살아내고 있는 그 유명한 조지아의 여성감독들이 아니라면, 지금 여기에서 ‘엄마’의 정치학을 도발적으로 드러낼만한 시선이나 실력을 우리는 얻지 못할 뻔 헸습니다. 조지아와 그 여성감독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그렇다고, 웃지 말자는 말은, 그 대신 울자는 말은 아닙니다. 웃어야지요. 특히 여성들은 보란 듯 웃어야 합니다. 다만, ‘엄마’로서 웃지는 말아야지요. ‘엄마’라는 미소는 본디 없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우리들은,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계속 웃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결국, 마지막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