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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비운의 왕들
신라 35대 경덕왕은 하늘에 기도를 올려 결혼 15년만에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아들을 얻는 대신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그 아들이 36대 혜공왕으로 즉위했다. 혜공왕은 8세에 즉위해 16년간 재위를 유지했으나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결국 통일신라 최고 부흥기에 종말을 고하고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는 신라하대에 접어들게 했다.
경주 내남에는 본격적인 왕위 쟁탈전의 서막을 장식한 두 왕의 무덤이 있다. 희강왕과 민애왕이 비운의 주인공이다. 오솔길 같은 산길을 두고 희강왕과 민애왕의 무덤이 마주하고 있다. 희강왕릉은 왕의 무덤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하다. 민애왕릉은 호석이 남아있어 그나마 봉분이 유지되고 있다.
경주의 대표적인 불교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남산 대부분이 내남면의 행정구역에 포함돼 있다. 그래서 내남면에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남산의 천룡사지삼층석탑 등의 보물 4기와 사적지 3개소 등 지정문화재만 16건이 있다. 내남에는 청동기시대의 문화유적도 넓게 분포하고 있다. 안심리 암각화, 광석리의 지석묘는 석기시대에서 청동기로 이어지는 시기의 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주 역사기행의 진원지는 내남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남산의 문화유적은 이미 소개했다. 신라하대 왕위 쟁탈전 시작의 주인공 희강왕릉과 민애왕릉을 돌아보고, 청동기시대 유물 상신리의 암각화와 지석묘를 찾아본다.
◆신라중대의 몰락
신라는 56명의 왕이 1천여년을 영위해 온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서 깊은 나라다. 유구한 천년의 문화를 자랑하고 있지만 왕권에 대한 탐욕의 역사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혜공왕의 아버지 경덕왕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축하면서 신라 최고의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혜공왕대에 이르러 신라 중대는 막을 내리고 하대가 시작됐다. 특히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혜공왕 이후의 역사는 피로 점철됐다. 혜공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으로 나라살림을 꾸리면서 왕권에 대한 도전은 심각한 수위에 이르렀다.
혜공왕대에 신라 몰락을 상징하는 이상한 징조들이 많이 나타났다. 반란과 큰 사건들도 빈번했다. 항아리 크기만한 혜성이 떨어져 하늘과 땅이 진동했다. 궁궐에 세 개의 별이 떨어지고 지진도 자주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궁궐 북쪽 뒷간에서 연꽃이 피는 일도 일어났으며 경기도 김포들에서 벼이삭이 쌀로 변하는 일이 발생했다. 또 강주에서 땅이 꺼져 연못이 생겼다. 그 연못에서 잉어 5~6마리가 점점 커지면서 연못도 따라 커졌다. 흙비가 쏟아지고, 호랑이가 궁궐로 뛰어 들어와 발칵 뒤집어지는 일도 있었다. 768년에는 대공과 대렴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33일간이나 포위했다가 3개월만에 평정되었다. 그러나 혜공왕을 반대하는 세력과 측근들의 알력싸움은 계속되었으며 혜공왕은 오락에 빠져 나라일을 돌보지 않았다.
혜공왕은 즉위 후 연이은 반란을 겪어야 했다. 즉위 4년 일길찬 대공이 아우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33일간(삼국사기 기록, 삼국유사에서는 3개월)이나 궁궐을 포위했다. 군사는 이들을 간신히 물리치고 반란을 평정했다. 혜공왕 6년에는 가장 규모가 큰 반란인 96각간의 난이 일어났다. 각간은 제 1관등인 이벌찬을 지칭하는 말인데 당시에 제 1관등인 각관이 96명이나 있었는데 이들이 군사를 일으켜 서로 싸웠다.
결국 김양상과 김경신이 난을 진압한 여세를 몰아 혜공왕과 왕비를 살해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올랐다. 37대 선덕왕이다. 혜공왕과는 외사촌 간이다. 선덕왕은 함께 왕권을 탈취했던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등용했다. 기록으로는 선덕왕이 재위 5년에 왕위를 선양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만류가 많았고, 재위 6년에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선덕왕과 함께 왕권을 도모했던 김경신측의 살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도 가끔 야사로 전해진다.
선덕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조카 김주원을 왕위에 추대하려 했다. 김주원의 집이 궁궐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었다. 선덕왕이 죽고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범람해 김주원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신하들은 임금의 자리는 오래 비워둘 수 없고, 큰비가 내린 것은 하늘의 뜻이라며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했다. 선덕왕과 함께 혜공왕을 몰아냈던 김경신이 38대 원성왕이 된 것이다.
원성왕이 책봉한 태자가 둘이나 연이어 죽었다. 첫째 태자 인겸의 아들이 궁궐에서 벼슬을 하다 39대 소성왕으로 등극했다. 그도 1년 만에 죽고 아들이 40대 애장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41대 헌덕왕은 소성왕의 친동생으로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헌덕왕은 아들이 없어 동생 흥덕왕이 42대 왕위를 이어받아 1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흥덕왕도 아들 없이 죽자 치열한 왕권다툼이 벌어졌다.
흥덕왕의 사촌동생 균정과 조카 제륭이 전쟁을 벌였다. 두 파로 나뉘어 벌인 궁내전쟁에서 균정이 살해되고 김제륭이 43대 희강왕이 됐다. 그러나 2년 만에 희강왕을 도왔던 원성왕의 증손자 김명이 그를 죽이고 44대 민애왕이 됐다. 아군이 다시 적군이 된 것이다. 민애왕의 영화도 1년에 그쳤다. 희강왕과의 전쟁에서 균정을 도왔던 김양이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궁궐로 쳐들어 와 민애왕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김양은 균정의 아들 우징을 45대 신무왕으로 추대했다. 신무왕 김우징은 희강왕의 사촌동생이다.
이후는 왕권이양이 어느 정도 순조롭게 아들 또는 동생으로 이어졌지만 끊임없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 신라하대는 피의 전쟁으로 얼룩졌다. 결국 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게 포석정에서 죽임을 당하고, 56대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 투항하면서 천년 신라는 막을 내렸다.
◆희강왕릉과 민애왕릉
신라하대 가장 치열한 왕권다툼을 벌였던 왕은 희강왕과 민애왕, 그리고 신무왕을 손꼽을 수 있다. 피의 전쟁으로 왕권을 거머쥐었던 희강왕과 민애왕은 모두 2년, 1년의 짧은 기간의 왕좌에서 죽음으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희강왕과 민애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왕릉은 내남면 망성3리 한적한 구릉에서 좁은 산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희강왕릉은 왕릉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다. 흔하게 쌓아올린 호석 하나 없다. 남북으로 경사진 비탈에 곧 흘러내릴 듯한 불안한 모습의 봉분이다. 안내표지판이 없다면 누구도 왕릉이라 생각하지 못할 조금 큰 분묘일 뿐이다. 사적 제22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지만 보수의 손길이 아쉽다.
민애왕릉은 다듬어진 돌을 삼층으로 쌓아 올린 호석으로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는 왕릉의 모습이다. 1970년에 사적 제19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민애왕릉은 광복 이전에 두 차례나 도굴을 당했다. 1981년에도 도굴당하는 장면이 주민들에 발각되기도 했다. 1984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주변을 발굴 정비복원했다. 당시 고분의 아래 둘레 호석에서 깊이 18㎝, 지름 25㎝ 크기의 구멍 12개를 발견했다. 구멍에서 10㎝ 크기의 작은 십이지신상 쥐, 돼지, 소, 닭 등의 4구를 찾았다. 나머지 12지신상은 멸실된 것으로 보인다.
희강왕릉과 민애왕릉은 망성리 마을 뒷산에 위치해 있다. 마을안길에서부터 조성된 산책길은 왕릉 입구까지 이어져 있다. 피의 역사로 이루어진 두 왕릉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천년이 지나면서 울창한 숲속에서 푸르기만 하다.
◆안심리 암각화
경주 내남면 상신리에 자연부락 안심마을이 있다. 넓은 들판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입구 계곡 옆 들판에 사랑채 크기의 바위가 하나 앉아있다. 마을사람들이 여우바위로 부른다. 어둑할 무렵 멀리서 보면 여우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어서 그렇게 불렀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28개의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윗부분에는 10여개의 성혈도 확인된다. 여우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는 칼로 새긴 검파형문양이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지금은 풍화작용 등으로 마멸이 가속화되고 이끼가 덮여 가까이에서 보아도 문양을 확인하기 어렵다.
안심리 암각화는 상신리 암각화로도 알려지고 있는데 경주 금장대, 칠포, 남원 봉황대, 고령 양전동과 안화리, 영천 보성리, 영주 가홍동 등의 검파형 문양과 동일한 성격으로 분석된다. 학자들은 청동기시대의 동일 문화권을 상정하는 자료로 분류하고 있다.
안심리 암각화는 다른 지역의 암각화에서 태양으로 추정하는 동심원, 방패형, 발자국, 석검 등의 문양이 등장해 암각화 문화의 총체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에 반해 검파형 문양만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다른 지역과 달리 기본적인 일자형 구조 아래 중간부분을 경계로 대칭으로 성혈문양을 각각 두 개씩 조각한 것도 특징이다.
학자들은 지리학적으로 해안지역인 칠포의 곤륜산암각화로부터 내륙인 경주의 금장대 암각화, 울산의 천전리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를 잇는 중간지대에 위치해 중요한 자료로 주목하고 있다.
◆광석리 지석묘
경주 내남면 안심리에 있는 여우바위로 불리는 암각화 바위. 바위에는 28개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윗면에는 10여개의 성혈 흔적도 있다. 지금은 풍화작용으로 마멸되고 이끼가 덮여 암각화를 확인하기 어렵다. 경주 내남면 안심리에 있는 여우바위로 불리는 암각화 바위. 바위에는 28개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윗면에는 10여개의 성혈 흔적도 있다. 지금은 풍화작용으로 마멸되고 이끼가 덮여 암각화를 확인하기 어렵다.
광석리는 상신리의 자연부락이다. 안심마을과 작은 개울 하나를 이웃해 넓은 들로 연결된 마을이다. 광석리(廣石里)는 마을 이름이 말하듯 넓은 돌, 지석묘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마을 들판의 곳곳에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특히 마을 북쪽 큰들이라고 부르는 평야지대 논과 밭에 집중 산재해 있다.
광석리 지석묘들은 해발 70~80m 높이 들녘에 남북으로 길게 열을 지어 분포한다. 들판 지석묘의 서쪽 왕산자락에도 10여기의 지석묘가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1962년 광석리 지석묘 일부에 대해 조사하기도 했다. 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로 이어지면서 형성된 지석묘로 분석된다.
광석리의 지석묘군은 안심리 암각화와 300∼400m 정도 떨어져 위치하고 있어 학자들은 상호관련성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상신리의 암각화와 지석묘는 지금 살고 있는 마을사람들이 태어나기 훨씬 오래 전부터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더러 불평스런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바위에게 거슬리는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천년 전부터 지켜온 고요한 잠을 그들이 경운기 소리로 깨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2016.10.17
첫댓글 문화재 관리가 소홀하다는 지적의 목소리는 곳곳에서
들려온다
희강왕과 민애왕릉을 찾아가는 길 안내판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