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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評)
이는 디오니소스 신화와 디오니시아 제식의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논문이다. 여러 해석은 있겠지만, 그 제식의 실재진행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새로운 자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김봉철이 말하는 바 정도가 다일 것 같다. 또 이런 것들은 매우 인상깊다 : 김봉철은 헬레니즘 시대에 형성된 신담과 고전기 신화를 가능한한 엄격히 구별하면서, 디오니소스 제전에 대한 해석이 과잉의 신화적 해석으로 귀결되지 않게 하려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 디오니소스의 갱생, 부활, 분열의 이미지들.... 나도 앞으로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그래서 결론내리길, 디오니소스 신화와 디오니소스 제전의 연관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아네트테리아(Ἀνθεστήρια / Anthestếria) 때는 디오니소스가 배를 타고 아테네로 들어오는 장면이 재연되었다는데, 그 인상적인 장면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니! 그리고 나는 아드리아네와 디오니소스의 조우가 적잖이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곤하였는데, 여기에대한 해설도 이 논문에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색해보면, 이방인까지 참여가 허용되었던 이 제전의 기능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도 여러논문들이 있는 편이다( 이상덕, 대(大)디오니시아 제전(祭典)과 아테네 제국주의: ‘분리를 통한 통합’의 장, 2018. ). 니체와 관련된 디오니소스 연구는 너무 많아서 거론이 힘들 정도이다.
본(本)
디오뉘소스 신화와 디오뉘시아 제식의 연관성 - 고전기 아테네의 안테스테리아를 중심으로서 김봉철
Some Correlations between the Myth of Dionysos and the Anthesteria in the Classical Athens
김봉철 ( Bong Cheol Kim )
한국서양사학회 2007.03
서양사론 92권 5-39(35pages)
[5]그리스 신들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15세기경의 뮈케네문명 시대의 선상문자B 점토판들에서였 다. 그 점토판들에는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 디오뉘소스 등의 이름이 나온다.1)
[1) W, Burkert, Griechische Religion der archaischen und klassischen Epochem J. Raffan 영역, Greek Religion(Oxford, 1985), pp. 43-46; J. Chadwick, The Mycenaean World(London, 1976), pp. 84-101.]
[7]본 논문의 목적은 디오뉘소스 신화와 제식의 연관성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는 관념으로서의 디오뉘소스 신화와 실제 숭배행위로서의 디 오뉘시아 제식의 연관성을 조사함으로써, 신화의 종교적 의미를 구체적 으로 점검하려는 시도이다.
안테스테리아 제의의 주요 행사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안테스테리아(ta Anthesteria) 제의는 새 포도주항아리를 개봉하고 포도주 마시기를 즐기는 포도주 제전이면서도, 디오뉘소스와 아르콘 바실레우스의 아내와의 신성결혼 및 죽은 자의 영[8]혼을 위한 의식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Anthestéries : Les Anthestéries (en grec ancien Ἀνθεστήρια / Anthestếria), sont une fête de la fin de l'hiver et une fête des morts célébrée dans la Grèce antique en l'honneur du dieu Dionysos.
https://fr.wikipedia.org/wiki/Anthest%C3%A9ries
[8] 고전기 아테네에서는 1년에 4차례나 공식적인 디오뉘소스 제의를 거행할 정도로 그에 대한 숭배열이 높았다. 그 4차례의 제의들은 겨울과 초봄에 걸쳐 거행되었는데, 각각 제의의 이름과 거행 시기가 달랐다. 그 것들은 포세이데온(Poseideon: 현재 달력의 12월 후반과 1월 전반)달에 열리는 시골 디오뉘시아 혹은 소(小)디오뉘시아(ta kat' argous Dionusia, 혹은 ta mikra Dionusia),가멜리온(Gamelion: 현재의 1월 후반과 2월 전반)달에 열리는 레나이아(血 101#1),안테스테리온(Anthesterion: 현 재의 2월 후반과 3월 전반)달에 열리는 안테스테리아(ta Anthesteria) , 엘라페볼리온(Elaphebolion: 현재의 3월 후반과 4월 전반)달에 열리는 도시 디오뉘시아 혹은 대(大)디오뉘시아(ta astika Dionusia 혹은 ta kat' astu Dionusia 혹은 ta megala Dionusia)였는데, 각 디오뉘시아는 나름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10]고전기에 들어와 도시 디오뉘시아가 흥성하면서 레나이아의 기존 행사들이 퇴색했지만, 레나이아제의는 여전히 폐 지되지 않고 존속했다. 레나이아와 레나이온이라는 이름이 포도주 짜는 통(lēnos)에서 유래했다고 보면 포도주 제의로서의 성격이 암시되지만, 그 이름이 바코스 신도들을 가리키는 레나이(lēnai)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므로, 이름의 유래를 통해 제의의 성격을 규정하기는 어렵다.9)
안테스테리아는 안테스테리온달 11일에서 13일까지 거행되었다. 첫째날은 피토이기아(Pithoigia. 포도주항아리 개봉), 둘째 날은 코에스(Choes. 포도주단지), 셋째 날은 퀴트로이 (Chytroi. 음식용기)라 불렸는데, 그 이름들은 각기 그 날의 행사와 관련된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 날은 지난 가을에 수확한 포도로 담근 포도주항아리(pithos)가 처 음으로 개봉되는 날이었다. 11일 저녁부터 하루 동안 림나이(늪지)의 디오뉘소스 성소가 1년에 딱 한 번 개방되면, 아테네인은 처음 개봉한 포도주를 신에게 봉헌한 뒤 새 포도주를 마시며 즐겼다. 둘째 날은 특정한 규격과 형태의 포도주단지인 쿠스(chous)에 포도주를 담아 마시는 날이었다. 그 날의 주요 행사로는 행렬, 성소에서 의 제사 거행 , 디 오뉘 소스와 아르콘 바실 레우스 아내의 신성결혼, 연 회와 포도주마시기 시합이 거행되었다. 안테스테리아 제의 기간 중에 하루 동안만 림나이의 성소가 개방되었기 때문에, 안테스테리아의 중 심 행사는 11일 저녁부터 12일 저녁 사이에 거의 집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날의 행사는 행렬로 시작하는데, 그 행렬에는 디오뉘소스, 사튀로스 및 제물 . 제사도구 운반자들이 포함되었다. 그 행렬에는 배 모양의 수레, 즉 바퀴달린 배가 등장했고 디오뉘소스 대역(代役)이 그 배 위에[11] 앉아 행렬에 참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퀴달린 배 행렬을 안테스테리 아의 행사로 분류할 수 있는 직접적인 근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전기의 일부 도자기 회화와 후대의 문헌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그것 이 입증된다. 우선 고전기의 도자기에는 바퀴달린 배에 앉은 디오뉘소 스의 모습이 흔히 등장한다. 그 배 위에는 포도나무가 뻗쳐있고 디오뉘 소스는 술잔을 든 채 앉아있으며 그 주위에는 사튀로스들이 아울로스를 연주하고 있다.10)그 장면이 대체로 도식화되어 도자기에 자주 묘사되 었다는 것은 그것이 아테네의 어떤 디오뉘시아와 연관된 것임을 시사한 다. 문제는 그 묘사들이 어떤 디오뉘시아와 연관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디오뉘시아 중에도 세인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끄는 디오뉘시아, 즉 도시 디오뉘시아와 안테스테리아가 도자기 그림의 인기있는 소재로 채택되 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시 디오뉘시아는 디오뉘소스 엘레우테레우스 (Eleuthereus)를 기리는 제의이고 그 신은 흔히 보이오티아에서 유래했 다고 여겨진다. 보이오티아에서 아티카로의 전래는 통상적으로 육상교 통을 통해 이뤄졌을 것이기 때문에, 그 신이 배에 탄 모습으로 아테네 에 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안테스테리아는 디오뉘소스 엘레우테레우스보다 더 오랜 디오뉘소스, 즉 림나이의 성소의 디오뉘소 스를 기리는 것이었다. 림나이의 디오뉘소스의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신은 흔히 포도 우 포도주신으로 간주되었다. 바퀴 달린 배에 탄 디오뉘소스의 모습이 흔히 포도나무나 술잔과 함께 묘사 된 것을 감안하면, 그 행렬은 포도 . 포도주 제의의 일부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아테네의 디오뉘시아 가운데 포도주 제의로서의 성격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안테스테리아였다.
첫째 날과 둘째 날 행사가 포도주신 디오뉘소스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셋째 날 행사는 그와는 성격이 달랐다. 셋째 날은 일종의 사자의 영혼의 날이었는데, 작은 단지 퀴트로스(chytros)에 끓인 음식을 죽은 자들에게 바쳤다고 한다. 퀴트로이 날에도 전날과 마찬가 지로 포도주는 많이 소비되었던 것 같다. 그 날도 포도주를 마시고 술 취한 자들이 림나이 근처에서 비틀거렸던 것이다.14)
[14) 아리스토파네스,『개구리들』215-219. 안테스테리아의 일반적인 사항에 관해서는 Biirkcrt. Greek Religion, pp. 237-242; Jeanmaire, Dionysos, pp. 48—56; Parke, Festivals, pp. 107-119; Pickard—Cambridge, The Dramatic Festivals, pp. 1-25를 참조.]
[14]이들 이오니아 인들이 공통적으로 안테스 테리아를 거 행 했다면, 안테 스테 리 아는 그리 스의 이 오니 아인들이 소아시 아로 이 주 하기 이전에 이미 이오니아인들 사이에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20)이 오니아인들이 소아시아로 이주를 시작한 시기를 대개 기원전 11세기경 으로 보기 때문에, 적어도 기원전 11세기 이전에는 안테스테리아가 성 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안테스테리아는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된 디오뉘시아였기 때문에 신화적 전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본 논문에서는 안테스테리아 행사 중에서도 특히 포도주 제 의적인 요소(포도주항아리 개봉과 집단적 음주의식), 신성결혼,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한 제식을 사례로 들어 그것과 디오뉘소스 신화와의 연관 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1. 포도주 제의와 디오뉘소스 신화
안테스테리아는 근본적으로 포도•포도주신 디오뉘소스의 신성과 관련된 제의였다. 특히 첫째 날의 새 포도주항아리 개봉과 둘째 날의 포 도주마시기 시합은 아테네인들이 새 포도주를 신에게 봉헌하고 집단적 으로 새 포도주를 마시며 즐기던 행사였다. 그것은 포도재배와 포도주 제조를 주관하는 신 디오뉘소스에 대한 감사와 기원의 의식이었다. 포 도주항아리 개봉의 경우, 그 많은 항아리들을 모두 디오뉘소스 성소에 집결시킬 만큼 성소 공간이 넓은 것도 아니었고 단 하루의 신전 개방일 에 그것들을 모두 개봉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항아리 개봉의식이 성소에서 직접 거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아테네인들 은 미리 집에서 항아리를 개봉하여 그 일부를 술단지에 담아 성소로 가 져왔고, 성소에서 물과 섞은 첫 포도주를 신에게 바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절차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디오뉘소스에 대한 첫 헌주는 첫째 날 저녁에 거행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데모스테네스는 둘째 날인 안테스테리온달 12 일에만 림나이의 디오뉘소스 성소가 개방되었다고 하지만,이)첫째 날과 둘째 날의 행사일정을 감안할 때 12일의 성소개방은 전날 저녁에 이뤄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안테스테리아의 하루 일정이 직전 날 일몰에 서 다음 날 일몰까지라고 보아, 11일 저녁에 림나이의 성소가 개방되고 12일 저녁에 다시 폐쇄되었다는 것이다.22)만일 글자 그대로 12일에만 개방되었다면, 11일 행사인 포도주항아리 개봉의식은 개봉 자체로 끝나 고 후속행사는 없었을 것이다. 11일에 성소개방이 되지 않았다면 그 날[16] 새 포도주를 신에게 봉헌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신에게 새 포도주를 봉 헌하지 못했다면 아테네인들도 그 포도주를 즐길 수 없었을 것이기 때 문이다. 새 포도주를 신에게 먼저 봉헌하지 않고 인간이 마신다는 것은 포도주 제의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현재로서는 성소를 하루만 개방했다는 데모스테네스의 진술을 부정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일단 11일 저녁에 성소가 개방되었다고 보는 것이 낫다.
포도주와 관련된 또 하나의 행사는 집단적인 포도주마시기 시합이었다. 11일 저녁부터 13일에 이르기까지 아테네인들은 공적으로나 사적으 로 포도주 마시기에 흠뻑 젖어있었던 것 같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 인 포도주마시기는 12일의 집단적인 포도주마시기 시합이었다. 그것은 참가자들이 테스모테테이온(Thesmotheteion)에서 각자 일정한 분량의 포도주를 신호에 따라 동시에 마시기 시작하여 그것을 가장 먼저 마시 는 자가 승리하는 시합이었다. 그 시합에는 아테네인뿐 아니라 노예와 어린이도 참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승자가 받는 상은 포도주가 가득 들어있는 가죽부대였다. 그 때 참가자들은 각자의 술단지를 가지고 왔 으며 포도주를 마실 동안에는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23)그런 관행은 고 대 아테네의 일반적인 연회 모습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아테네의 연 회에서는 흔히 주인이 연회에 필요한 일체의 음식과 용기를 제공했으며 또 침묵보다는 떠들썩한 주연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 하 지만 오레스테스 전설이 그 술마시기 시합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오레스테스가 아테네에 왔을 때, •이미 아테네인은 안테스테리아를 거행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이전의 안테스테리아에서는 그리스의 일반적인 연회방식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아테네인이 매년 안테스테리아에서 새 포도주항아리를 개봉하고 첫 포도주를 디오뉘소스에게 봉헌했다는 것은 포도와 포도주신으로서의 디 오뉘소스의 특별한 신성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디오뉘소스 신화에서 가장 먼저 확인되는 신성은 단연 포도 - 포도주 신으로서의 면모였다. 적어도 호메로스 시대에는 그리스에서 포도주신 으로서의 디오뉘소스 신성이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호메로스가 디오뉘소스를 포도 혹은 포도주신으로 직접 밝힌 적은 없다. 그가 포도 와 포도주에 대해 수차례 언급하면서도 그것들을 디오뉘소스와 관련지 어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메로스 시대에는 디오뉘소스의 그런 신 성이 아직 확립되지 못했다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 는『일리아스j 14.325에서 세멜레가 ‘인간에게 기쁨(charma brotoisinY 인 디오뉘소스를 낳았다고 서술한다. 여기서 ‘인간에게 기쁨’이라는 표 현은 헤시오도스의 시에 등장하는 ‘기쁨(c/rarma)’을 연상시킨다.# 헤 시오도스는 디오뉘소스가 인간에게 제공한 포도와 포도주를 ‘기쁨’으로 묘사하므로, ‘인간에게 기쁨’이라는 호메로스의 표현은 디오뉘소스가 인 간에게 포도와 포도주를 제공하여 기쁨을 주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호메로스 당시에 이미 디오뉘소스가 포도주의 신으로 여겨졌을 것[18]이라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19]안테스테리아에서 출현신화의 반영으로 볼 수 있는 행사는 바퀴달린 배에 탄 디오뉘소스 행렬이었다. 그것은 그가 배를 타고 바다에서 출현 했음을 암시한다. 현재로서는 바다와 관련된, 포도주신 디오뉘소스의 아 티카 출현신화로 명백하게 인정될만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
[20]그러나 그 신화가 고전기 아 테네에서 통용되었다고 볼만한 근거자료가 없으며 안테스테리아 행렬 의식에서 이카리오스나 이카리아와의 관련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기 때 문에 그 행렬과 이카리오스 신화를 연관지을 수가 없다.
[21]해적일화는 고전기 아테네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일화를 처음 언급한 것은 호메로스찬가였다. 그에 따르면, 튀르세니아(Tyrsenia)의 해적들이 디오뉘소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납치하자, 디오뉘소스가 신성 을 발휘하여 이적을 보였다고 한다. 즉, 배에 포도주가 흘러나고 풍성한 포도줄기가 돛을 타오르며, 해적들이 돌고래로 변하고 오직 디 오뉘소스의 신성을 알아본 키잡이만이 화를 면하고 신의 축복을 받았다 는 것이다.37 아테네인이 해적일화를 알고 있었음은 에우리피데스의 비 극, 기원전 6세기의 엑세키아스(Exekias) 도자기의 회화, 기원전 4세기 후반 뤼시크라테스 기념물 상단의 부조를 통해 확인된다.쭈)이 일화에 서 안테스테리아의 바퀴달린 배 행렬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디오뉘 소스가 배를 타고 있다는 점, 디오뉘소스가 포도와 포도주를 통해 기적 을 보인다는 점이다. 또 배의 키잡이가 디오뉘소스의 신성한 권능을 알 아보고 디오뉘소스의 복을 받았다는 것은 스뮈르나의 디오뉘시아행렬 에서 디오뉘소스사제가 배의 키잡이 역할을 한 것을 연상시킨다. 그러 나 그 해적일화는 아티카와의 특별한 연관성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아티카 출현신화로서의 면모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일화는 안 테스테리아 제의에서 포도와 포도주의 아티카 전래신화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고 본다. 만일 그것이 안테스테리아의 배 행렬과 연관되었 다면, 그것은 아티카 출현신화로서가 아니고 포도 • 포도주신 디오뉘소 스의 신성한 이적을 재현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그렇 다면 안테 스테 리 아에 서 는 포도주신 디 오뉘 소스의 일 반적 인신성은 제의상으로 확인되지만, 그 신의 아티카 출현과 관련해서는 신화와 제의의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2. 신성결혼 제의와 디오뉘소스신화
안테스테리아의 또 다른 독특한 행사 중의 하나는 신성결혼 의식이 [22] 었다. 그 신성결혼은 디오뉘소스와 아르콘 바실레우스의 아내 사이에 치 러지 는 결혼의 식 이 었다. 데모스테네 스에 의 하면, 아르콘 바실레 우스 의 아내는 오직 그녀만이 출입할 수 있는, 림나이의 디오뉘소스 성소에 들어가 ‘디오뉘소스에게 아내로 바쳐졌고(eksedothē toi Dionusoi gunē)’ 국가를 위해 조상 대대로의 제의를 이끌었다고 한다.39)그 성소 는 안테스테리온달 12일에만 개방되었다고 하므로, 그녀는 11일 저녁이 나 12일 낮에 성소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1일 저녁에는 새 포도주 헌주의식 때문에 성소가 분주했을 것이므로, 그녀는 12일 낮에 성소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아르콘 바실레우스의 아내는 성소에 들어가서 여사제들의 서약을 진행했으며 국가를 위하여 ‘비밀스런 제물 (ta arreta hiera)’을 신에게 봉헌하고 신에게 아내로 바쳐졌다고 한 다.40)여기서 그녀가 그녀 혼자만 보도록 허용된 디오뉘소스의 성물(B 해)을 신에게 바쳤다는 것은 그녀가 신과 단독으로 대면했음을 의미한 다. 아마 그녀가 단독으로 수행하는 비밀제의에는 그녀 자신을 신에게 아내로 바치는 행위, 즉 신성결혼의식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성소에서 의 신성결혼 의식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내막을 알 기 어렵다. 데모스테네스는 단지 ‘디오뉘소스에게 아내로 바쳐졌다.’ 혹 은 ‘디오뉘소스에게 아내로 주어졌다(toi Dionusoi gune edothe)’41)라 고만 표현할 뿐,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고대 오리엔트 의 경우 여사제가 밤에 신전에 혼자 남아 남신과 동침했다는 전승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42) 아르콘 바실레우스의 아내 역시 밤중에 성소에 혼 자 남아 디오뉘소스와 ‘결혼’했을 수 있다.
필자는 아테네인이 그들 신랑신부에게 종교적 성소가 아니라 굳이 국가의 행정관청에서 신방을 꾸리게 한 데에는, 부콜리온이 신랑거처라 는 점 이외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아테네의 이런 신성 결혼 의식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는 디오뉘소스의 결혼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신화에서 디오뉘소스의 정식 배우자로 거론된 대표적인 여성은 아리아드네였다. 아리아드네의 이름이 디오뉘소스와 관련하여 처음 등장한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였다. 호메로스는『오뒤세이아』11.321-325에서,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와 함께 아테네로 오던 중에 ‘디오뉘소스의 증언 때문에(Dionusou marturieisin)' 디아(Dia)에서 아 르테미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디오뉘소스의 증언’이 무엇 을 뜻하는지 는 불분명 하다. 주정 하기 로는, 디 오뉘 소스가 아르테 미 스의 신성과 연관된 어떤 문제에 관해 아르테미스에게 고했고 그에 따 라 아르테미스가 아리아드네를 죽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케레니(C. Kerényi)는 아리아드네의 도피 행각이 여성적 영역의 죄악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디오뉘소스가 아르테미스를 불러 그것을 호소했을 것이 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25]따라서 호메로스의 아르테미스 묘사를 감안하면, 아르테미스가 아리아드네를 죽인 이유는 아리아드네가 여신에게 불경 을 저질렀거나 아니면 여성의 순결과 관련된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 다. 여기서는 디오뉘소스가 연루된 것으로 보아, 그녀는 디오뉘소스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 때문에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르테미스와 연 관된, 둘의 문제는 결국 남녀 사이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26]그렇다면 고전기 아테네의 문헌 및 시각자료는 디오뉘소스의 결혼을 다루면 서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아테 네 항해 및 디오뉘소스와 아리아드네의 결혼전승이었다. 고전기 자료의 이런 공통점은 헬레니즘시대 이후의 자료에서도 대체로 반복되어 나타 난다.55)
[27]하지만 고전기 자료의 결혼전승에서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연인관계가 어떤 연유로 디오뉘소스와 아리 아드네의 부부관계로 변모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헬레니즘시 대 이후의 자료에서는 그에 대한 설명이 다양하게 소개된다. 디오도로 스는 디오뉘소스가 디아, 즉 낙소스에서 아리아드네의 미모에 반해 그 녀를 테세우스에게서 탈취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고 전한다. 디오뉘 소스가 테세우스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아리아드네를 포기하라고 위협 하자 테세우스가 그녀를 버리고 갔다는 것이다.56) 디오뉘소스의 개입을 부각시키는 디오도로스의 서술태도는 아폴로도로스와 파우사니아스의 저 술에 서 도 나타난다. 아폴로도로스는 디 오뉘 소스가 아리 아드네 와 사랑 에 빠지고 테세우스는 그녀를 잃은 슬픔에 잠겼다고 전하며, 파우사니 아스도 디 오뉘 소스가 아리 아드네 를 테 세 우스에 게서 빼 앗았다고 기 술하 는 것이다.57)그에 반해 오비디우스는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를 스스로 버렸다고 전한다.56 58 59) 플루타르코스 역시 오비디우스의 서술을 반영한다. 57그가 언급한 전승들에서는 테세우스의 자발적인 아리아드네 유기와 테 세우스의 비자발적인 아리아드네 유기가 서술된다. 즉 테세우스가 다른 여성을 사랑하여 일부러 아리아드네를 버렸다는 전승이나 테세우스가 그럴 의사가 없었는데도 결과적으로 그녀를 유기하게 되었다는 전승이 언급되는 것이다. 플루타르코스가 아리아드네와 디오뉘소스의 결혼 전 승도 함께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디오뉘소스의 개입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플루타르코스는 주로 테세우스의 태도를 중 심으로 이별과정을 설명한다.59)
[28]웹스터(T. B. L. Webster)는 이런 아테네인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테세우스를 국가적 영웅으로 간주하던 아테네인은 테세 우스가 아리아드네를 버린다는 것에 대해 마음이 상했으며, 이에 아테 네인은 테세우스가 아테네에 귀국하는 것이 마땅하고 아리아드네는 디 오뉘소스의 신부가 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그녀를 버린 것으로 보 고자 했다는 것이다.이)필자는 신화상의 디오뉘소스-아리아드네-테세 우스의 3자관계 변화에서도 아테네인의 그런 태도가 작용했다고 본다.//[29]아테 네 인들로서 는 아리 아드네 를 둘러 싼 디 오뉘 소 스-테세우스의 관계가 아테네의 영예와 이익에 합치되기를 원했을 것 이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신의 아내가 되는 것은 디오뉘소스의 신성과 아리아드네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았으며, 새로운 여자 때문에 아리아드네를 버리는 테세우스의 배은망덕한 행위는 분별있는 지도자 의 이미지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테세우스가 디오뉘소스의 뜻에 따라 아리아드네를 포기한 것이라면 테세우스는 신에게 순종한 경건한 인간으로 부각되고 디오뉘소스와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이었다.
안테스테리아 제의의 신성결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테네왕과 연관된 디오뉘소스-아리아드네--테세우스의 3자관계를 주시할 필요가 있 다. 테세우스는 최초로 아티카의 통합국가를 건설했다는 아테네의 전설 [29]적인 왕이었으며, 신화에서는 그가 크레타의 왕녀 아리아드네와 함께 귀국하다가 디오뉘소스의 뜻에 의해 아리아드네를 그 신에게 바쳤다고 한다. 아테네의 신성결혼은 디오뉘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상의 결혼 을 재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화상의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역할 이 제의에서는 아르콘 바실레우스와 그의 아내로 대체되었다. 테세우스 가 디오뉘소스에게 아리아드네를 바쳤던 것처럼, 아르콘 바실레우스 역 시 그의 아내를 디오뉘소스의 신부로 바쳤던 것이다.62)
3. 죽은 자를 위한 제의와 디오뉘소스신화
따라서 고전기 아테네의 퀴트로이 날의 기본적인 행사는 지하세계의 헤르메스와 죽은 자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었다고 하 겠다.
하지만 안테스테리아 제의의 모순성, 즉 흥겨운 포도주제전과 죽은 자에 대한 암울한 제의의 상반성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 이다.
[32] 그러나 필 자는 죽음과 폭력의 모티프가 디오뉘소스 신화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는 굴드의 주장이 고전기 안테스테리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다.//고전기까지의 디오뉘소스 신화에서 죽음과 죽은 자 에 관한 신화요소가 특별히 부각되지 않았음을 들어 그의 주장을 보완 하고자 한다.
그의 찢겨 죽음 및 재생에 관해서는 헬레니즘 시대 이후의 자료만이 언급할 뿐이다. 그런데 디오뉘소스의 ‘세 번째 탄생’ 전승이나 티탄족에 의한 찢김 전승이 고전기에도 통용되었다고 볼만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세 번째 탄생’ 전승은 데메테르 모친설을 근간으로 한, 또 다른 신화체계의 반영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그리스인들 일부에게 받아들여졌을 것이지 만, 아테네를 포함한 고전기 그리스에서 통용되던 지배적인 전승은 분 명 아니었다.
[35]이런 묘사는 아직 아테네에 디오뉘소스의 모친생환 일화가 유 포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디오뉘소스의 지하세계 여행에 대한 이야 기가 등장하는 것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자료들에서였다.
헬 레니즘시대 이전에는 거론되지 않던 디오뉘소스 관련 부활신화가 그 이 후에 자주 거론되는 것은 헬레니즘시대에 죽음과 부활에 대한 관념이 크게 부각된 탓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