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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55
9월17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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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서 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타볼산을 만나게 되고 에스드렐론 평야로 접어듭니다.
좀 더 내려가다보면 사마리아 지방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 길가에 나인(Nain)이라는 작은 성(城)이 있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40Km, 나자렛에서는 남동쪽으로 10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으니,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 오늘 날까지도 네인(Nein)이란 이름의 작은 마을로 남아있습니다.
‘나인’(Nain)이란 말의 의미는 원래 ‘기쁨’ ‘환희’ ‘즐거움’이었습니다. 결국 나인성은 ‘기쁨의 고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카파르나움을 거쳐 나인성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날은 고을 전체가 기쁨, 환희, 즐거움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울적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나인성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직 갈 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외아들이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데, 유족이라고는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 혼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남편도 요절했고, 동시에 외아들마저 요절했으니, 이보다 더 기구한 인생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해도 해도 너무한 통념이 하나 있었는데, 요절을 죄에 따른 벌로 간주한 것입니다. 안그래도 남편과 아들을 잃고 슬픔이 하늘을 찌르는데, 중죄인 취급까지 당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사실 남편이 요절한 이후 어머니에게 외아들은 삶의 마지막 보루요 희망, 삶 전체였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냉랭하고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저 아들만 바라보며 견뎌왔습니다. 그런 아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인생 역시 끝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인성을 들어설 때 마주쳤던 상황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기쁨의 고을이란 이름의 나인성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름이 지닌 바처럼 환희로 가득 차있어야 할 나인성은 한 인간 존재의 죽음으로 인한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죽은 외아들의 관을 메고 걸어오던 사람들의 얼굴 역시 비통함과 상실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절묘하게도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에서 ‘딱’ 마주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언행을 유심히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혹독한 현실 앞에, 그 누구도 입 하나 뻥긋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 과부를 위로해 달란다거나, 외아들을 되살려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자발적으로 나서신 것입니다.
그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는 한 인간 존재 앞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을 느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신다거나 도움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전히 당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 행동하십니다. 관으로 다가서선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고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복음 7장 14절)
예수님에 의한 죽었던 외아들의 소생 사건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 죽음조차 지배하고 주관하시는 참 메시아시며, 참 하느님이심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 안에 이미 죽은지 오래 된 사람 조차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권능이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입증된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은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이심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죽음보다 더한 큰 슬픔에 잠긴 한 인간을 향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다가오시고, 어떻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시는 가를 세밀하게 보여준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니신 모든 능력을 오로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자비로운 소생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나인성의 과부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다양한 슬픔과 시련, 작은 죽음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한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거듭 부서지고 허물어져, 한없이 비참해진다 할지라도, 그 비참함을 묵묵히 견디다보면, 또 다시 새벽이 밝아오고, 또 다시 작은 희망의 문이 살짝 열릴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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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은총을 베풀게 하는 힘>
2003년 9월 25일 오전 3시 20분께 인천시 서구 가정3동 H빌라 34동 205호 김모(34.여) 씨 집에서 불이 나 김씨와 딸 조모(5) 양 등 2명이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아들(8)과 김씨 친구 서모(34.여)씨가 각각 중,경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불은 집 내부 28평 중 20여 평을 태우고 30분 만에 진화됐습니다.
서씨는 경찰에서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김씨와 함께 잠을 자던 중 방문 틈으로 연기가 들어왔다”며 “방문을 열어보니 거실 가운데에서 불이 나 김씨를 깨우고 작은 방에 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서씨와 함께 집을 빠져 나오다 작은 방에서 자던 자녀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집에 들어갔다가 쓰러져 소방대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숨졌습니다.
김씨 남편은 불이 난 날 당시 귀가하지 않아 화를 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불이 난 빌라가 지은 지 15년이 지난 점으로 미뤄 누전으로 인한 화재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 볼 것을 다 해보지 못한 채 자녀들이 죽게 되면 어머니의 이후의 삶은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불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 만약 김씨의 남편이 밖에 있었다면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아내를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미 늦어버린 듯해도, 만약 아내가 끝까지 불 속으로 뛰어들려한다면 남편이 차라리 자신이 뛰어들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아내가 죽게 되면 남편의 삶도 지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불 속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힘은 그 불 속에 있는 누군가를 향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도 하느님을 세상의 불속으로 뛰어들게 만든 어머니가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왜 오셨을까요? 오늘 복음이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어머니가 외아들의 죽음으로 매우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은 이제 땅에 묻혀 더 이상 나올 수 없을 처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물론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예수님은 아들의 죽음보다는 어머니의 슬픔을 보고 아들을 살려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연민에 그리스도의 자비가 더해지니 죽은 이가 부활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게 된 이유가 아들의 죽음과 어머니의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한 어머니가 온 인류의 죽음 때문에 매우 괴로워하고 계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이런 상황이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상징적으로 연출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는 분은 성모 마리아밖에 없습니다. 포도주는 성령,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혼인잔치의 생명은 역시 포도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모 마리아를 위로해주시기 위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카나의 기적은 오로지 성모 마리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다시 마시게 된 잔치의 손님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그런 기적을 얻었다고 자만한다면 그 기적을 베풀어주신 분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요? 성모 마리아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죽음을 앞두고 괴로워하시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이 세상 구원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이름만으로 하느님의 끊긴 은총을 불러오게 만드는 힘입니다. 우리도 만약 누군가에게 은총을 중개하고 싶다면 그 누군가에 대한 어머니와 같은 연민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의 기적을 불러오는 힘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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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7,11-17 : 젊은이여, 일어나라
예수께서는 나인이라는 곳에 가시다가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다. 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슬픈 상황이다. 동정녀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만나신다. 백인대장의 경우에는 병을 고쳐달라는 청을 받으시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부탁드리지 않았는데 주검 가까이 가신다. 예수님은 과부에게는 눈물을 빨아들이는 해면이 되셨고, 아들에게는 생명이 되셨다.
죽은 사람이 땅에 묻히러 가고 있었다. 친구들이 그를 무덤에로 메고 가는 길이었다. 이 상여 길에서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분은 죽음과 부패를 파멸시키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죽을 운명의 우리 육신을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분이시다. 그분은 과부의 눈물이 그치도록 자비를 베푸신다. “울지 마라.”(13절) 여인을 울게 했던 원인이 그 말씀과 함께 사라졌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기쁨에 함께 하시며, 결국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여에 손을 대시고 상여를 멈추셨다(14절). 그리고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14절)고 명령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 젊은이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셨다. 이렇게 다시 살아난 아들이 어머니 품에 안기게 되었다(15절).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손을 대시어, 악행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온갖 육신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자.
예수께서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소외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심을 이 사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구원은 우리 인간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에게 내려지지만,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몫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들의 반응을 보면 처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로 바뀐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16절)고 한다.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살아났으며, 그 기적은 온 유대아와 그 주변 온 지방에 퍼졌고 모두가 감탄했다. 놀라운 기적 앞에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이 말은 우리가 항상 조그만 일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 변할 수 없다. 나 자신의 진정한 변화의 기적을 청하도록 하자. 그리고 감사하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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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부둣가에서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을 구해 주지 않고 구경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영도 잘하는 건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숨진 사람의 가족이 그를 신고하여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구해 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이 사회에서는 감옥에 가야 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런 상황이라면 유죄 판결이 내려질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 이유 없이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주위에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엾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가엾은 마음이 바로 하늘에 계시던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게 만든 힘인 것입니다.
이 “가엾은 마음”이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사랑하면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방관한다면 주님 앞에 가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라고 말합니다.
방관도 살인입니다. 나에게 “가엾은 마음”이 있는지요? 내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고 내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많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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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루카 7,12)
이 이야기에서는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다는 점이, 더욱이 그 외아들이 ‘젊은이’ 라는 점이(14절) 특별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사별’ 자체는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 세상의 현실이고, 일상적인 일(특별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들의 현실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울고 있는 과부가 바로 ‘나’일 수도 있고, ‘나의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무서운 일이고, 슬픈 일이고, 허무한 일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절망할 때가 많고, ‘내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되고, 죽음으로 인한 이별 때문에 크게 슬퍼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내세’에 대한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또 있다는 믿음,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고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는 믿음,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 이 믿음이 있다면, 먼저 떠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이 믿음과 희망은 ‘사별’의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믿음도 희망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인생은 허무하다는 생각만 하면서 살 것이고, 현세에 대해서만 집착하게 될 것이고, 목적지 없이 방황하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3-15)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시는 분입니다.(마르 6,34)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라는 말은,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게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인간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요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요한 11,35-36)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마리아가 울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죽음 앞에 서 있는 나약한 인간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라자로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에게 하신 말씀, “울지 마라.”라는 말씀은, 단순한 위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묵시 21,4)”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울고 있을 때 우리를 가엾게 여기셔서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고, 동시에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이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를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말씀은,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말씀, 즉 다시 살리시는 말씀인데, 우리는 “일어나라.” 라는 명령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명령은 ‘스스로’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실 때에도 무덤 속에 누워 있는 라자로에게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요한 11,43).>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다시 주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지만, 생명을 다시 얻은 사람이 ‘일어나는 일’은, 또는 ‘무덤에서 나가는 일’은, 죽었던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당사자가 일어나기 싫다고 하면, 또는 무덤에서 나가기 싫다고 하면, 그냥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 일을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과 우리가 신앙생활로써 그 일에 응답하는 것을 상징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알려 주시고, 인도하시는 일인데,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데리고 들어가는 일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라는 말은, “그 젊은이를 살리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받아서 누리기 위한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인간들의 생로병사의 고통은 여전하지 않은가?” 겉으로만 보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또 우리 자신의 부활도 믿고 있습니다. 또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며,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전과 예수님 후의 인간 세상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우리가 ‘서기’를 연호로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 강생 전과 강생 후의 인간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들의 세상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신앙인은)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의 인생은 믿음을 갖기 전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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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4년전, 저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여름, 장례미사를 준비하던 중 저의 외할머니 또한 쓰러지셨습니다. 저의 외할머니께서는 어려서부터 연년생인 저의 누나와 쌍둥이 형제를 어머니와 함께 돌봐주신 더 없이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채로 할머니의 병상에 찾아가 병자성사를 직접 집전하였습니다. 힘없이 누워계신 할머니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자인 저에게 성실히 고해성사를 보시던 할머니의 눈빛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병자성사를 곁에서 지켜보신 일이 있다면 아시겠지만 병자성사의 기도문을 읊는 일은 사제에게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는 가족 당사자가 직접 기도문을 읽기에는 다소 잔인하기 까지 합니다.
특별히 병자성유를 도유할 때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의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이 교우에게 거룩한 기름을 바르오니, 당신의 능력으로 그를 회복시켜 주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위로해 주시어, 이 교우로 하여금 힘을 다시 얻어 악을 쳐이기고 희망을 가지게 하소서”.
이 병자성사의 모습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고, 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유학길에 올라 멀리서 할머니께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찾아 뵈었을 때, 묻혀 계신 할머니의 자리를 보며 얼마나 아쉽고 허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순간까지 내 손자가 나를 너무 사랑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는 할머니의 소식을 들으며 그분께 위로가 되었음에 안도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인간의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하여 있음을, 언젠가는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다다르자,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 삶을 지탱해준 많은 도움과 하느님의 위로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곳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나인이라는 곳은 열왕기 4장 18-37절에서, 예언자 엘리사가 과부의 아들을 살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들렀을 때 상여에 실려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과부와 그의 죽은 외아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슬픔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을 여읜 과부의 비극적인 삶,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이것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이 그대로 지나치실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따뜻한 음성으로 “울지 말라!”라고 위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마음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우리의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 예수님은, 결국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하심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을 되찾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 자체만을 바라보고 기대하게 됩니다. 현재의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죽음과 질병이라는 고통과 슬픔을 당장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시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죽음이라는 한계는 결코 바로바로 극복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다른 종교인들과 무신론자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 복음을 통해서 깨닫고 명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과부의 슬픔을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려움에 닥쳤을 때, 그 어려움을 주님께서 당장 해결해주시길 바라지만, 인간의 방식이 아닌 주님의 방식대로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그 와중에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며 손을 꼬옥 잡아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따르는 주님이십니다.
때로 우리의 삶은 슬프고 잔인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함께 해 주시는 예수님의 위로와 따뜻한 손길 또한 함께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 사제인 손자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숨결의 그 순간 제가 느꼈던 안도감과 하느님의 은총이, 다른 이들에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더불어,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은총과 축복을 전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말씀하시는 대상은 죽은 이가 아닙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우리가 그 대상입니다.
오늘 묵상 중에 이러한 주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바라며 하느님의 뜻에 순명할 것을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일어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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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인한 알베르토 신부님]
<과부의 아들>
몇 년 전 주일이었습니다. 홀로 계신 제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본당 신자 할머니가 병자성사를 청했기에, 비록 마음은 어머니에게 가 있었고 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은 아팠지만 눈물을 삼키며 그 할머니에게 정성스럽게 병자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미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어머니 병실을 찾아가 볼 수 있었습니다. 사제의 삶은 지금 맡겨진 이들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머니를 떠나 복음 전도를 위해 여행하시는 예수님도 부모를 몰라라 하는 분이어서가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 지금 가난한 사람들, 지금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더 사랑하시려 함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복음을 묵상하다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의 아들을 바라보시며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떠올리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과부인 저희 어머니를 떠올려보았습니다. 문득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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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희망의 배달부>
새로운 모임에 처음 가게 되면 가족 관계에 대한 물음 외에 종종 듣게 되는 것이 취미에 대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너무 진부한 듯하여 ‘독서’라고 대답하는 것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신 있게 답을 합니다.
사실 이런저런 책을 읽고 지식과 지혜를 쌓아가는 기쁨도 크지만, 그 내용을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큰 기쁨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배달해주시는 분들이 반가운 소식의 전달자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과부는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배달부를 만납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던 그에게 위로자로서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서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진 그에게 잃은 아들을 되돌려주심으로써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배달부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누구에게 희망을 둘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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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영규 안셀모 신부님]
<"일어나라">
언젠가 티브이를 통해 바다에 사는 바다게가 탈피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바다게가 자기 껍질을 벗어버리기 위해 한참을 고통스런 몸부림친 뒤 겨우 껍질 밖으로 몸이 빠져 나오는 장면이었습니다.
바다게는 일생 동안 15회 내지 20회 자기 자신의 껍질을 버리고 새 몸을 만드는 고통의 과정을 겪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탈피를 해야 그 때마다 자기의 몸이 1.5배내지 2배 성장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는 과정을 통해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길고 가는 다리 껍질을 빠져 나올 때는 정말 엄청나게 힘들고,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요.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해산하는 것 처럼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누가 도와 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혼자의 힘으로만 그 과정을 견딜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바다게는 탈피하는 과정 중에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포기하게 되고, 그래서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장을 위한 고통스러운 탈피의 과정은 바다게 뿐만 아니라,무엇보다 우리 신앙인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은 여전히 세속적인 육의 영역에만 안주하며 살고 있습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3,6-7)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아직까지 육의 영역에서 머물고 있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영의 문턱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금새 육의 영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육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는 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할 뿐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생명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육에 매몰된 삶을 탈피해야 영의 영역인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 생활 가운데 끊임없이 영적 성장을 위한 고통스러운 육의 영역을 탈피하는 과정을 이겨내야 합니다.
코린토 2서 4장16절부터 18절까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죽은 과부의 외아들이 일어나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듯이, 죽어가는 우리의 영혼도 생기있게 살아나 주님을 향해 일어나 앉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세상 일에만 매달려 막상 우리 자신의 영적인 삶은 뒷전이었습니다. 죽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그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우리 자신이 오늘 생기있게 일어날 수 있도록 간청합시다.’
주님, 제가 당신과 친밀한 사랑의 일치를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사랑에 온전히 의존되어 있음을 일깨워 주십시오. 당신 안에 제 삶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깨닫도록 이끌어 주십시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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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엾은 마음>
루카 7,11-17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가엾은 마음>
스치는 이의
슬픔마저
스칠 수 없기에
슬픈 이
곁에 머물다
또 하나의 그가 되어
슬픔이
기쁨이 되도록
스스로 다 내주고
아무 것도 안 한 듯
아무 것도 아닌 듯
자취 없이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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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부르심에 대하여….>
오랜만에 잘 걷지 못하는 자매님께서 성당에 오셨습니다. 자매님 아들이 차로 성당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사 끝날 때까지 좀 기다리라고 하시지요.”라고 했더니, 그냥 가라고 했답니다. “그럼, 미사 후에 어떻게 가시려고요.”
그러자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이 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안수 기도 받고 나아서 걸어가면 되지요.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은총으로 백인 대장의 노예를 낫게 하신 후에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함께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나오는 한 행렬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나이도 채우지 못하고 죽은 한 젊은이의 관이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그 외아들만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에게 가엾은 마음으로 한 말씀 하셨습니다.
“울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슬픔을 아시고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예수님에게는 그 젊은이가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젊은이를 바라보시는 것은 그 젊은이는 여전히 살아있고, 할 가능성이 있고, 그리고 내일이 있고 소망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마르코 복음 5장 4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젊은이는 놀랍게도 살아났습니다.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저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넌 아직 죽지 않았어. 넌 얼마든지 잘할 수 있어. 그러니 이렇게 맥없이 누워있지 말고 일어나서 다시 해봐. 일어나라!”
사랑하는 고운님들!
“세 나무의 꿈”이란 동화를 아시나요? 세 그루의 나무가 저마다 꿈을 꾸고 좌절하며 삶의 참된 부르심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보석함을 꿈꾸던 나무는 구유가 되었고, 큰 배를 꿈꾸던 나무는 작은 배가 되었고, 큰 나무를 꿈꾸던 나무는 밑동이 잘리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보석함을 꿈꾸던 나무는 예수님 모시는 구유로, 큰 배를 꿈꾸었던 나무는 예수님을 태웠던 작은 배로, 큰 나무를 꿈꾸었던 나무는 예수님께 못 박았던 십자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나무들은 자신만의 부르심을 발견했고 행복해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는 것이 어렵고, 고달프더라도 살아갈 이유가 분명하다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자신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하느님께서 고운님들 자신을 부르신 소명을 잊지 않고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되고, 축복을 가져다주는 축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너의 소명이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지금도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으로 어머니와 아들을 바라보셨던 자비와 사랑 가득한 눈으로 저희를 바라보시며 “너희도 일어나라!” 말씀을 들으시는 복된 날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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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57)
♧♧ 시편 50편 4절….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심판하시려 저 이 하늘과 땅을 부르시네.
이스라엘인들의 경우, 재판을 진행할 시에 그 공정성을 꾀하기 위하여 반드시 두 명 이상의 증인을 채택합니다.(신명기 19장 15절.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땅, 즉 온 누리를 증인들로 채택하시며, 그들 앞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이 곧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 시편 50편 5절….
“나에게 모여라. 내게 충실한 자들아 제사로 나와 계약을 맺은 자들아!”
* 내게 충실한 자들아...
이는 일차적으로 하느님과 시나이 산에서 계약(탈출기 19장 5, 24장 1-11절. 참조)을 맺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의 새 계약(히브리서 8장 10-13절, 13장 20절. 참조)을 맺은 신약시대의 모든 주님께 충실한 자들(교회)을 뜻하는 것입니다.
* 제사로 나와 계약을 맺은 자들아...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시나이 산 계약을 맺음에 있어 희생 제물을 잡아 피 흘려 하느님께 제사 드림으로 변하지 못할 약속의 증표로 삼은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탈출기 24장 8절. 참조) 그런데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주님께 충실한 이들(교회)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친히 흘리신 계약의 피로 인해 하느님과 새 계약을 맺은 이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히브리서 9장 12절. 참조)
♧♧ 시편 50편 6절….
"하늘이 그분의 의로움을 알리네. 하느님, 그분께서 심판자이심을. 셀라"
여기서 ‘하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권위 있고 신빙성 있는 증인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한편, 과거 야훼 하느님께서 직접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창조주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공표하셨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심판자가 되시는 하느님의 정의를 하늘이 알려 줌으로써 당신의 백성이 된 충실한 이들은 정의로우신 그분을 절대 신뢰하고 순명해야 하는 서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셀라...’는 시편에 자주 나오는 음악 용어로서 노래를 부를 때 소리를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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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며칠 전, 비 온 다음 날 새벽에 아침 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끌고 도로를 나갔습니다. 밤새 비가 많이 왔는지 이곳저곳에 빗물이 고여있었습니다. 그래서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앞으로 가다가도 빗물이 고여있는 곳을 피해서 가거나 아니면 물이 튀지 않도록 속도를 줄여서 고여있는 곳을 조심히 건넜습니다. 물이 튀어서 옷과 자전거가 지저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한 대의 승용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가면서 고인 물이 물벼락처럼 제게 날아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습니다.
옷도 엉망이 되었고, 자전거도 개흙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지저분함 그 자체입니다. 여기에 제 얼굴도 엉망진창이 되었지요. 짜증과 함께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뒤 저는 신나게 자전거를 탈 수가 있었습니다. 어차피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니 빗물이 고여있어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오히려 물을 튀기면서 지나는 재미를 즐기면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워낙 엉망진창 몸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나빠지지는 않더군요. 사실 우리는 피하려고만 하면서 오히려 더 힘든 순간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냥 즐기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눈치를 보면서 조심에 조심을 더할 뿐입니다. 이 과정 안에서 스스로의 힘듦만 가중됩니다. 즐긴다는 것은 어쩌면 내 몸을 완전히 내어주었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습니다. 주님께 우리를 완전히 맡기면 편안함과 함께 큰 기쁨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보다는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지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데 더 큰 관심이 있기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한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과부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는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찬양하고 감사를 드렸던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께 푹 안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이 순간을 즐길 수가 있으며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닌 세상에 집중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못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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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조금 더}
한 학생이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성공한 사업가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학생은 사업가에게 성공의 비밀이 과연 뭐냐고 물었지요. 사업가는 한동안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한 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밖에 조금 더.”
“나는 어린 시절에 보통 사람과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의 차이가 그 한마디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최고인 사람들은 자기 몫을 다하고 ‘그 밖에 조금 더’했다는 사실을.”
지치고 힘들었을 때,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 ‘그밖에 조금 더’하면 어떨까요? 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때 ‘그밖에 조금 더’ 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누군가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에도 ‘그 밖에 조금 더’ 하면 어떨까요? ‘그밖에 조금 더’는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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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유를 잘 모르지만, 오른쪽 다리에 염증이 생겼습디다. 처음에는 조금 무겁게 느껴졌는데 며칠 지나면서 다리가 붓고 열이 났습니다. 다행히 항생제가 있어서 한 알 먹었더니 열도 내리고, 좋아졌습니다. 궁금해서 항생제가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항생제는 세균에 의한 감염증의 치료제로, 세균을 사멸하거나 증식을 억제하는 물질이다.” 항생제는 인류와 세균의 경쟁에서 생긴 물질입니다. 인류는 세균의 감염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세균의 감염으로 많은 사람이 치료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항생제의 발견과 개발로 인류는 세균 감염에 의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항생제가 저도 기억하는 ‘페니실린’입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항생제는 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였다고 합니다. 항생제는 그냥 생긴 게 아닙니다. 환자를 치료하려는 열정과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항생제를 발견하고, 개발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봉사자의 자질과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봉사자는 무엇보다 가정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봉사자는 공동체에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봉사자는 겸손해야 하고, 봉사자는 정직해야 하고, 봉사자는 교만하면 안 되고, 봉사자는 성실해야 하고, 봉사자는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저도 그런 봉사자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분들이 계신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고, 그분들이 계시기에 공동체가 활력이 넘칩니다. 몇 년 동안 차량 봉사를 하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봉고차를 매주 가져오셨고, 깨끗하게 세차하셨습니다. 봉고차에 신자들을 모시고 오시는 형제님의 환한 웃음이 생각납니다. 주일 오후 사람들이 빠져나간 성당에서 쓰레기를 치우던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꽉 조이던 형제님의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손이 생각납니다.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에게 추석이나 설이면 떡을 나눠주시던 방앗간 형제님도 있습니다. 형제님은 소년 가장에게 장학금도 몰래 주었습니다. 나중에 면장님께 그런 사실을 들었고, 저는 형제님의 선행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업고 다니고 싶었습니다. 매주 미사 후에 점심 봉사를 하던 자매님들이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하였습니다. 겨울이면 만두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곳 뉴욕의 가톨릭 평화신문도 많은 봉사자가 있습니다. 80이 훌쩍 넘으신 어르신들이 우편물 봉투를 만들어 주십니다. 기쁜 마음으로 글을 보내 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평화신문의 발전을 위해서 광고를 내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봉사자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말씀하십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온 것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평화신문에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분의 딱한 사정이 지면을 통해서 전해지면 많은 분이 기꺼운 마음으로 성금을 보내 주십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눔의 항생제, 사랑의 항생제, 희생의 항생제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항생제는 부작용이 없고, 효과가 평생 갈 것입니다.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하는 걸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해야 할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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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기쁜 소식>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인 우리를 찾아 오셨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 앞서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십니다. 끊임없이 사람을, 당신 백성을 찾아 오시는 하느님입니다. 언젠가 읽은 동방 영성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평생 하느님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죽음에 임박해 포기하려던 순간 뒤에서 마냥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보니 쫓아오는 하느님이었다는 일화입니다.
업은 아기 3년동안 찾는다는 말도 있듯이 독일의 중세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외출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나인데 하느님은 집에 있는데 밖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했습니다. 언젠가 돋보기를 쓰고 한참동안 돋보기를 찾은 적이 있는데 이 또한 흡사합니다.
하여 저는 어디나 하느님이 계신 성지인데 궂이 하느님을 찾아 비싼 돈 들여 성지순례할 필요가 있는가 회의할 때도 많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기도하며 수도원 배밭을 걸을 때도 주님과 함께 성지순례하는 마음으로 걷습니다. 하여 아주 예전에 써놨지만 자주 애송하는 짧은 자작시가 있습니다.
-“나무에게/하늘은/가도가도/멀기만하다
아예/고요한 호수가 되어/하늘을 담자”-
이제 그만 밖에서 하느님을 찾지 말고, 이미 오늘 지금 여기 와 계신 주님을 만나 모시고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시입니다. 엊저녁의 기분 좋았던 행복한 체험도 생생합니다. 얼마전 피정왔던 5남매 자녀를 둔 40대 중반의 가장이 보내준 가족 사진을 보는 순간, 강론의 실마리가 잡히면서 저절로 오늘 복음 말씀중 다음 말마디를 강론 제목으로 택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 오셨다.”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 사진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 주신 것처럼 ‘사랑의 빛’ 가득한 분위기였고 요즘 전개되는 암울한 현실에 어둡고 무거웠던 마음이 환해지는 듯했습니다. 하여 즉시 감사와 격려의 답신을 보냈습니다.
-“너무 아름답고 평화롭습니다! 성가정만 이뤄도 무조건 구원이요 성인입니다! 주님 친히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기회되면 자랑스런, 기쁜 마음으로 강론때 사진 나누겠습니다. 아! 정말 하느님 축복의 선물입니다! 저절로 행복해지는 기분입니다!”-
-“신부님,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찾기전에 당신 백성인 우리를 찾아오셨고, 찾아오시고 있으며, 앞으로도 찾아오실 것입니다. 성서는 거의 대부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 오신 기록들입니다. 하느님은 구약의 성인성녀들은 물론이고 교회의 모든 성인성녀들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우리를 찾아 오신 사건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니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는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 오셨다.”하고 고백합니다. 저는 후자의 고백에 더 공감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그대로 두 행렬의 조우입니다. 하느님의 방문을 상징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렬이 생명과 희망과 빛을 상징한다면 과부의 죽은 외아들과 함께 하는 이들의 행렬은 죽음과 절망과 어둠을 상징합니다. 흡사 동터오는 태양빛에 사라지는 밤의 어둠같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죽은 젊은이는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마치 이 거룩한 미사중 생명과 희망의 빛으로 당신 백성인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느님앞에 우리 모두는 젊은이들입니다. 좌절하거나 절망할 때, “젊은이야,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즉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분도회는 각별한 마음으로 중세 독일의 위대한 수녀원장이자 여성 신비가이자 교회학자로 명성을 떨쳤던 성녀 힐데가르트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81세로 선종하기 까지 다방면에 연구를 통한 그의 저서는 단테나 윌리엄 블레크에 견줄만하다 합니다. 하느님은 역시 성녀를 통해 당신 백성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교회내 감독자의 자격과 봉사자의 자격에 다루고 있습니다. 길다 싶지만 너무 닮고 싶은 참 좋은 자질들이라 그대로 일부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참 좋은 자질들을 갖춘 ‘교회의 사람들’을 통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접대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봉사자들도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비단 주교나 사제들뿐 아니라 교회내의 믿는 이들 모두가 본 받아야 할 참으로 바람직한 자질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어 풍성한 은총을 주시고 하느님의 자녀로, 빛의 자녀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하나하나를 통해 당신 백성을 찾아 가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는 온전한 마음으로 걸으오리다. 불의한 일을 제 눈앞에 두지 으오리다.”(시편101,2ㄷㄹ-3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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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기적을 낳는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좀 더 확실히 보여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또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생활을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여주면 오히려 두려움을 가질까요? 어찌 되었든 당장 내가 요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기적을 행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니셨지만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어디에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면 기어이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때뿐입니다. 열심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고 기이한 현상에만 눈길이 머물러있습니다. 그들은 실천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기적이 믿음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을 보거들랑 하느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으로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새롭게 눈뜨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루카7,13)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백성을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파하는 당신 백성을 보시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슬픔을 없애 주십니다. 우리도 제대로 보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줘봤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예’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 ’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그들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그의 필요를 채워주었듯이 우리도“보고” 마음의 공명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에 찬 말씀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면 능력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4,14)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3,7)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믿음으로 그들을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행동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비한 현상은 어디에나 있어도 믿음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께로 모아지길 바랍니다. 은총 덩어리보다 은총의 주관자를 만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사랑을 외치는 예언자이셨듯이 우리도 세상의 예언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40,31)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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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의 말씀에서는 교회가 보입니다. 죽음과 생명, 상실과 회복의 여정을 반복해 걷는 동안 그리스도의 몸으로 눈부시게 성장해가는 우리의 교회 말입니다.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었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루카 7,12)
나인이라는 고을 성문에서 예수님이 장례 행렬과 마주치십니다. 과부의 외아들 장례라고 합니다. 여성의 지위가 종속적인 당시 사회에서 과부라는 신분도 기댈 곳 없는 약자에 속하는데, 그나마 하나 있던 아들까지 잃었으니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가련한 신세가 된 한 여성이 거기 있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루카 7,13)
누가 봐도 안타까운 상황이라 고을 사람들도 큰 무리를 지어 애도하고 있고, 예수님 역시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십니다. 그분 마음에 솟구치는 연민은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처지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향한 사랑이었을 겁니다.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루카 7,13)
예수님께서 행렬을 멈추십니다. 애도와 슬픔의 행렬을 중단시키시는 겁니다. 이제 생명의 주인이 나서실 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루카 7,15)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거대 악의 손아귀에서 그 젊은이를 빼내어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그에게는 생명을, 그녀에게는 미래를 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기적의 근원에는 죽음으로 대변되는 악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인류를 향한 연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자리합니다.
교회는 많은 표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지요.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의 어머니라는 표상을 지닙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을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는 어머니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생명을 교회를 통하여 받게 되므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에서 여전히 죽음의 세력은 교회를 박해하고 있지요.
슬프게도 우리는 매일 거리에서, 광장에서, 성문에서 이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인권이 죽고 정의가 살해되고 공정이 병사한 슬픈 장례 행렬입니다. 편리주의와 소비주의로 환경이 죽어가고, 자국이기주의와 인종차별주의로 범세계적 공동선과 협력관계가 파괴됩니다. 극단주의는 종교적 진리를 왜곡해 저격하고, 신 계급사회와 물신주의는 차별과 구분으로 인간 존엄성을 살상합니다.
이처럼 인류가 겪는 무수한 실존적 죽음 앞에서, 날마다 피흘리며 죽어간 소중한 외아들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어머니인 교회는,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품을 활짝 열어 눈물과 애곡과 절규를 받아들이며 나아가는 중입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으로 직접 관에 손을 대어 죽음의 행렬을 막아서시기 때문입니다. "울지 마라."(루카 7,13) 위로하시고, "일어나라."(루카 7,14) 끌어당기시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감독, 봉사자의 자질, 자격, 조건을 세세히 나열합니다. 일일이 체크해 보자면 나름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는 사람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그 기준이 상당히 높지요. 이 체로 거르면 교회 직분 안에 누가 남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바오로 사도가 부적격자를 가지치기하기 위해 내놓는 조건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지상의 나그네인 교회는 세상 안에서 존재하고 살아가기에 때도 묻고 주름도 지고 죄악에 오염되기도 합니다. 이기주의와 차별, 물신주의처럼 세상을 좀먹는 악이 교회 안에 버젓이 스며들어와 더 깊은 생채기를 남기기도 하고요. 하지만 교회는 거기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문턱에서 예수님이 죽음의 세력을 막아서고 중지시키며, 위로하고 되살리고 촉구해 날마다 그 생명을 되돌려 주시기에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힘껏 새 생명을 보호하고 양육합니다.
죽음과 생명, 상실과 회복을 연거푸 겪고 있는 교회는 아들을 잃고 또 다시 그를 얻습니다. 잃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날마다 더 푸르게 더 싱싱하게 되살아납니다. 죽고 사는 반복을 거치는 동안 부족함 가득한 몰골로는 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질로 변모됩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1티모 3,9) 교회는 본성상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되찾은 새 생명은 예수님의 연민이 낳은 결실입니다. 미약하고 부족한 존재지만 세상의 거대한 죽음의 행렬을 막아서고 죽음의 손아귀에서 생명을 빼내어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는 힘도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연민,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 연민은 교회 담장을 넘어 세상을 정화하고 되살리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가 일상 안에서 사소한 차별, 사소한 구분, 사소한 편가르기, 사소한 배금사상을 이 연민의 힘을 빌어 내려놓으면, 그 사소함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이웃들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불의하고 슬픈 장례 행렬을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을 지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이 실패한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시작한 수도회가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자기가 창설초기에 생각했던 그런 모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카리스마는 사라져가고 제도로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였지요.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과 따지기 위해 라베르나 산에 올라 대피정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화두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할 정도로 그 크신 사랑을 내가 느끼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겪으신 그 고통을 나도 체험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게 네 수도회냐, 내 수도회냐?"라는 하느님의 응답에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회의를 말끔히 떨쳐 버릴 수 있었고, 오상을 받음으로써 예수님의 그 고통을 실제로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지금 어떤 영육간의 고민을 가지고 있나요? 그리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하느님께 어떤 청을 드리고 있나요? 오늘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로 그 고민에서 말끔히 벗어나 나인의 과부처럼 새 생명과 희망으로 충만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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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란
진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다. 그래서 말이 오히려 방해가 되며 상상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빛이요 생명이며, 충만한 진리로 들어감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중에서
♣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고 난 후부터는 오직 여기에만 참 기도의 길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마음을 완전히 순응하는 기도입니다. 생활 전체가 그분께 순응해야만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그분의 뜻에 온전히 나 자신을 내맡기는 데에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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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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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7,14)
예수님께서 죽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십니다.
남편도 잃고 외아들도 잃어버린 과부의 처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 그 과부의 외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십니다. 그래서 그 과부도 살리십니다. 과부의 비참함을 거두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 우리의 도움, 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가엾은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너에 대한 관심이 약해져 있는 요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관심은 점점 더 약해져 가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 가장 약한 사람,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태25,40 참조)
우리는 엉뚱한데서 하느님을 찾고 이웃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주변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보고, 그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이 되어줍시다!
그래서 그 이웃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하느님의 일꾼들, 하느님의 봉사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올바로 이해된 문화적 다양성은 교회의 일치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보내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고 우리가 성삼위의 완전한 친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풍요롭고 다양한 은사를 가져다주시면서 동시에 결코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조화인 일치를 일구어 주십니다."('복음의 기쁨', 11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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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인정>
'젊은이여~ 일어나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을 살리시는 일에 힘을 쏟으셨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어떠해야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가?
진솔하고 현명하며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때 대부분 인정하게 되지만
인정받기 위해서 살면 늘 쫓깁니다.
나를 좋게 말하고 인정하면 기분 좋지만
나를 업신여기고 무시하면 기분 나쁘죠.
그러나~ 사람이 인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자기 기준에서 보기에 미흡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
예수님같이 흠잡을 데 없으신 분이
지지도 반대도 끊임없이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무시받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지금의 할 일을 하는것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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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 14)
삶도 죽음도
사랑도 이별도
생명의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생명의 주님을
모른 채
살았습니다.
일으켜 세우시고
일어나게 하시는
생명의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그 어떤 생명도
버려지는 일이
없습니다.
소중한 사랑을
되돌려 놓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생명없는 이별
사랑없는 이별을
아파합니다.
사그라들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다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젊은이의 사랑을
다시 살리십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빼앗아 갈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지금 여기
이곳에 함께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사랑하게하시는
다시 살게하시는
사랑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루카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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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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