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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6장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성경의 행간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노아의 다른 놀라운 비밀을 발견했다.
창세기 6장은 노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특히 뜬금없이 네피림에 관한 기록과 함께 멸망에 관한 기록이 나오면서 노아의 사적에 대해 설명한다. 성경의 기록은 허투루 된 게 없다. 특히 창세기는 문자 하나하나 행간 하나하나는 정말 중요하다.
창세기 6장의 핵심은 8절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구절을 흠정역으로 보면 정말 잘 이해된다. "But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았다"
이 구절중 여호와의 눈(the eyes of the Lord)에 관해서는 창세기 1장 4절에 최초로 나타나는데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고 표현된다. 그 뜻은 "여호와의 눈으로 보기에 좋았다"는 의미다. 창조의 결과물이 "여호와의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웠다. 여호와께서는 눈으로 보시는 것을 좋아 하신다.
이 구절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레위기의 제사 제도를 보자. 레위기 1장 5절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제사 제도에서 희생 짐승을 잡을 때 사용하는 용법인데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가 " 여호와의 눈 앞에서"란 의미다.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눈으로 너희의 하는 것을자세히 보시고늘 우리와 함께 하자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레위기에서 여호와 앞에서라는 구절은 셀수 없이 많다.
쉽게 말하면 여호와께서 나와 항상 눈맟춤을 하시려고 늘 우리를 보고 계신다.
사실 우리 인간 입장에서도 눈 맞춤은 관계 설정에서 중요한부분을 차지한다. 엄마와 아이가 서로 눈을 맟추고 있는 장면에서, 누구도 그 장면이 가식적이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지구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생물들에게 눈맟춤은 불편함을 유발한다. 대부분 영역싸움에서 오는 경쟁심을 부추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승들은 대개 눈을 마주치면 으르렁거리거나 싸움으로 변한다. 사람들에게도 어느정도는 그러하다. 그러나 동물과 달리 사람은 눈맟춤을 통해 유대가 강화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관계를 맺을 때 중요한 것이 눈 맞춤이다. 눈 맞춤은 사람의 감정 상태를 직관적으로 상대와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은 혀만큼이나 많은 말을 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철학자, 시인)
눈맟춤에 관한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1989년 미국의 소설가 조나단 켈러먼(Jonathan Kellerman)과 그의 동료 에드가 루이스(Edgar Ruiss)가 소위 "로맨틱한 실험"(romantic Research)이라는 연구주제를 다뤘다. 이 리서치에서 연구진은 생면부지의 남녀 48명을 무작위로 모아놓고 24명씩 두 집단으로 나눴다. 그리고는 한 집단에게는 2분 동안 서로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다른 한 집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눈 맞춤을 한 집단은 상대에 대해 더 많은 대화와 관심 등 서로 호감이 높아졌다. 반면 다른 한 집단은 더 관계가 냉랭해졌다.
이처럼 눈 맞춤의 효과는 빠르고 강력하다. 도대체 눈 맞춤은 과연 어떤 작용을 하길래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감정을 공유하고 호감을 느끼게 할까?
후에 워싱턴 포스트지 2016년 10월 3일 자에서 어떤 흥미로운 연구를 소개했다. 성인과 아기가 눈을 맞출 때, 뇌파 역시 동기화( (同期化: synchronization: 동시에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해 사건을 일치시키는 것)가 일어난다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연구진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뇌파 측정 장치(EGG) 를 아기와 성인의 머리에 각각 씌우고 두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첫 번째는, 아이에게 좋아하는 비디오를 선택해 보여 주면서 동시에 자장가를 불러줬다. 그리고 연구원이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장면을 화면에 담아 8개월 된 신생아 17명한테 보여줬다. 아기들의 뇌파를 측정한 결과 눈을 맞췄는지 아닌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두 번째 실험은 19명의 신생아 근처에 연구원이 직접 앉아 눈을 맞추며 자장가를 부르며 동시에 여러 가지 동작을 수행했다. 눈을 안 맟추는 것보다 눈을 맟추는 것이 아이의 뇌파의 반응이 훨씬 더 뇌파가 동기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눈을 맞출 때 아기들은 좀 더 자주 더 옹알이를 하기도 했다. 더욱더 놀라운 점은 이런 아기의 목소리가 연구원에게도 영향을 줘 동기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이번 연구는 아기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보호자와 자신을 동조(tune in)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이 실험을 주도한 Victoria Long 캠브리지대 심리학자는 말했다. 그는 또 이번 연구는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는 옛 말이 실제 과학적 근거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고, 덧붙여 "눈으로 하는 말은 사전 없이도 전 세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창 6:8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But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았다"라는 성경절을 더 탐구해 보자.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흘리는 눈물 속에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했다"는 이 본문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노아의 삶의 경로를 찾아보아야 한다.
창세기 6장을 자세히 파악해 보면 6장 1절의 이야기가 일반론이 아닌 노아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의 아름다움(창 6: 2)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았다는 것은 당시의 결혼관에 대한 시대적 조류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행간에서 노아 역시 그 시대적 조류에 편승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이 이야기를 관해 창세기 4장의 행간에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창세기 4장은, 가인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가인의 6 세손인 라멕에 관한 긴 설명을 한다. 라멕(힘쎈자)은 두 아내를 취했는데 야다(꾸민자 장식) 와 씰라(감정에 휘둘리는 자, 딸랑거리는 자)다. 두 아내는 서로 경쟁을 하다가 급기야 남편에게 모두 버림을 당해서 바람을 피운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들)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내가 소년(들)을 죽였도다"(창 4:23)
아내 들와 바람을 피우던 젊은 청년들을 라멕이 죽이게 된다.
또 야다는 야발( יבל 끌려가다 인도하다 )과 유발 (끌려나가다 인도되다) 을 낳았고, 씰라는 아들과 딸 두발가인 (가인같이 행동하다)과 나아마(즐거움)를 낳았다.
그런데 이름을 이해하고 아래 표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라멕은 그의 자녀들이 아벨의 후손이라고 우기고 있다. 라멕은 3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고 아주 묘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의 아들들은 아벨의 이름(הֶבֶל)을 모방하여 모두 발 혹은 벨 (בל)의 음가를 가지고 있다.
특히 두발 가인의 이름에는 과감하게 첫 번째 살인자의 이름을 붙인다. 아벨의 향수가 풍기는 이름에 가인을 붙여 가인의 살인을 추억하고 쾌락을 즐기는 삶을 상상하게 하며 가인의 후손의 계보가 종결된다. 그리고 그의 노래에도 가인의 실명을 거론하며 살인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뱀의 후손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화잇은 이렇게 적었다. "신장과 체력이 탁월하고 지혜가 걸출하고 가장 정교하고 놀라운 일들을 고안하는데 재간이 있는 거인들이 있었다. 죄악을 엄격하게 제어하지 않는데 있어서 의 그들의 죄악은 그들의 재간과 전신적 능력에 비례하였다." 빛을 전한 사람들 상 71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아마이다. 성경에서는 뜬금없이 갑자기 이름만 밝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여성의 이름을 밝힐때 더욱 그러하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기억하는가? 롯의 처의 이름을 아는가? 성경에는 롯의 처의 이름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창세기 11장 27-29절까지는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아마도 하란이 장형이고 아브람이 동생인 한데 나이차이가 상당한 것 같다.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요 또 이스가의 아비였더라" 여기서 아브라함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 지 알 수 없지만, 아브라함의 다른 형제 나홀의 아내는 밀가였고, 밀가는 이미 사망한 아브라함의 장형 하란의 딸 즉 아브라함의 조카였다. 그리고 밀가의 자매가 이스가다.
여기서 갑자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창 11:29)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스가가 누구길래 성경에 언급되는가? 이방인 입장에서 이상한 일이며 이스가란 이름이 생경하지만 이스가는 당대에 유명한 여인이었다. 고대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이스가는 "롯의 아내다." "롯도 하란의 아들이니 아마도 이스가와 롯은 배다른 형제 자매지간이었던 것 같다."(Internatinal interpretation. vol3 p234) 고대 중동에서는 결혼 관례상 조카와, 혹은 배다른 남매와 혼인은 있을 수 있다.
히브리어의 문장론과 구문론에 의하면 창 11:29절을 가리켜 독립형 첨언문 혹은 이접문장이라고 하는데 이런 용법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밝힐 수 없는 데 그렇다고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 있을 경우에 쓴다. 롯의 처 이야기도 그렇다 부끄럽고 밝히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언급 안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같은 이유로 여기 언급된 나아마 이야기다.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창 4:22)
나아마도 당대에 세명의 오라버니와 같이 아주 유명한 여인이었다. 특히 그의 이름에서 나타나듯, 어머니에게서 배운 탁월한 꾸밈솜씨과 화장술 그리고 뛰어난 언변과 세련됨으로 인해 그의 외모만 봐도 뭇 남성들에게 보는 즐거움이 되리만큼 탁월했다.
그렇다면 나아마도 같은 원리로 자랑스럽지 않고 부끄럽지만 밝힐 수밖에 없는 인물이어야 한다.
본교주석 1권 214쪽 " 유대 전승에 의하면 나아마는 노아의 아내로 되어 있다"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아들 노아가 결혼 전에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사람의 딸 나아마의 "아름다움을 보고"(창 6:2) 즉 세상적인 아름다움에만 반해 하지 말아야 할 결혼을 한 것이다. 노아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혀 다른 가치관이 만나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는 것이 힘든 일 일 수 있다.
아마도 노아는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새 인생을 산 듯한다. 그 힌트가 성경에 있다. 창세전 부조들은 대부분 거의 100세 전후에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았지만 신기하게도 노아는 "500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 5:22)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참으로 묘하다. 다른 조상의 기록을 보면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창5:6)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창 5:9)... "라멕은 82세에 아들을 낳고"(창 5장 28) 라고 했듯이 성경은 "누구는 몇 세에 누구를 낳았고" 라고 기록했지만 , 유독 노아에게는 "500세 된 후에" 라고 "후"라는 말을 덧붙여 새로운 인생을 산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한다 이것이 우연일까?
노아는 산전 수전을 다 겪은 후 즉 500세 된 후에 아이를 낳고서야 비로소 ("But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 ) "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았"다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이 시대의 우상숭배자들처럼 용어가 갖는 의미 그대로의 우상숭배자들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거나 섬기고 있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섬김의 대상이 하나더 필요하고 그것들을 통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보다 더 명확한 개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불행히도 노아의 설교를 앞장서서 거절한 자들은 (어쩌면 반쯤은 그리스도인일지도 모르는) 바로 이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물질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대표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권세와 위엄을 알아 보는 눈이 없었다(하나님을 보려는 눈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이나 그분의 요구의 신성성과 불변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더욱 더) 죄가 보편화 될 수록 그것이 점점 더 죄악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내 율법은 더 이상 구속력이 없으며 죄를 처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므로 하나님의 성품에 배치된다고 주장하였다." (빛을 전한 사람들 상 74.75)
노아는 여호와의 두눈에 송글송글 맺히는 눈물에서, 나같은 악한 자를 멸망시키려는 심판의 하나님이 아닌 동정의 하나님을 보았고, 어떻게든지 한명의 인류라도 구원하고자 애쓰시는 애씀을 보았고, 무엇이든지 용서하려는 용서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같은 심각한 영적무감각의 사람을,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으로 되게 하고자 무진 애를 쓰시는 여호와의 안스러움보았다.
남들은 거의 다 하나님의 눈을 외면했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 눈에서의 눈물을 보았다. 그가 여호와의 두 눈에서 나오는 눈물을 본 후에는 그는 이렇게 변화되었다. 성경에서는 네가지로 이을 요약한다.
창세기 6장 9-10절에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였더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었더라"
그는 의인이었다
의인의 기준은 본문의 말씀처럼 "은혜를 입은자"(창6:8)에게만 붙여주는 영예로운 호칭이다. 의롭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라, 은혜를 받았음으로 의인이다.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는 자"(잠 24:16)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자는 그길이 "돋는해"와 같아져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잠 4:18)
그는또 완전한 자였다.
하나님 외엔 완전은 없다 그럼에도 완전하다고 했다. 불완전하고 흠이 많음에도 완전하다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보니 완전해졌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수 있다. 실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완전하다고 선언하셨다.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우리가 완전한게 아니라 노아가 완전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그분의 마음에 들어가서 그분의 아픔이 노아의 아픔이 되고. 그 분의 눈물이 노아의 마음이 눈물이 됨으로 완전하다고 칭함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가슴에 담고 사람들의 죄악됨을 진정으로 슬퍼했기 때문이다.
관계가 유지되는 한 우리는 완전하다."내가 온전한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그는 또 하나님과 동행했다
홍수 전의 열조 중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의 극명한 예가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에녹이요 하나는 노아다.
창세기 5장 24절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동행하다의 히브리어는 יתהלך "Hithalak"인데 영어로 "Business" "work"로 번역된다. 그런데 여기 히브리어 본문은 특별한 특장이 있다. 여기서 저자는 히브리어를 "재귀강조형" 동사를 씀으로써 "동행하다"는 동사의 이해를 명확하게 하였다. 히브리어 동사 형태로는 단순형(칼) 강조형(니팔) 사역(피엘)형으로 나뉘고 상태로는 능동(푸알) 수동(히필) 재귀형(호팔)으로 나뉘는데 우리말 동사는 재귀형이 없어서 이해하기 힘들다.
동행하다의 단순형은 "동행하다"며 강조형은 "같이 혹은 늘 동행하다"로 사역형은 "같이 동행하게 만들었다. 동행하도록 시키다"며 능동형은 "동행하다" 수동형은 "동행되었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재귀 강조형은 " 억지로라도 함께해 봤더니 결론적으로 동행되어 있었더라"라고 해석한다. 우리말 동사는 재귀형도 없고 특히 재귀 강조형( 再歸强調形)(히트파엘)도 없어서 조금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이 동사형을 창세기 6장 9절에 적용시키면 "노아는 하나님의 강력한 이끌림에 위해 같이 하려고 매일 노력한 결과, 나중에 보니 하나님과 동행되어 있었더라"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을 강조하는 용법이 재귀강조형인 것이다.
동행한다를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한다. "늘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노아처럼 의인이어야 하고 완전해야하고 동행하는 삶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내리는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는 평가여야 한다. 이것을 내가 평가하면 교만이요, 다른사람이 평가하면 숭배가 되고, 하나님이 평가하실 때만 구원이 된다.
그런데 이들의 동행은 우연히도 자녀를 낳은 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창세기 5장 21절 이하에는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창세기 5장 32절에 "노아는 오 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그리고 6장 9절에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영감의 기록은 이렇게 말한다.
"에녹은 장남을 낳은 후 더 높은 경험에 이르고 하나님과 더 친밀한 가운데 이끌려 들어갔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더 완전히 깨달았다.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사랑과 그의 보호에 대한 아이의 단순한 신뢰를 볼 때 , 또한 그의 장남에 대한 깊은 애정과 부드러움을 마음에 느꼈을 때 그는 당신의 아들을 사람들에게 희생으로 주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 아버지 안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신뢰의 귀중한 공과를 배웠다." 빛을 전한사람들 상 66.
신약에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히 11:7)고 설명한다. "이와같이 하여 그의 믿음은 온전케 되었고 분명하게 드러났다" (빛을 전한 사람들 상 74.) 노아는 그 집을 구원하였다. 이전의 나아마와의 관계에서 오는 이상한 가정을 멀리하고 새로운 집을 구성하여 집을 구원하였다.
여호와의 눈물의 은혜를 보는 것을 우리의 최고의 소망으로 삼자. 하나님의 눈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발견하고 나를 위해서 자신을 기꺼히 버리신 분을 아는 것이 은혜다. 예수님의 눈물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은혜받은 자들이고 은혜받은 대로 사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노아가 발견한 하나님의 눈물은 노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자가 되었고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의 표현이 되었다.
창6:8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했다."이것이 노아의 복음이다.
죄가 죄가 되지 아니하고 죄가 좋아지고 보편화되고 점점 좋아져서 급기야 죄의 무게가 아주 얇아져서 내가 죄의 보편성에 의해 지배되는 지금의 우리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벧후 3:11)를 질문하고 반추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