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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는 정말 3차원 공간일까?
- 거울명상을 하기에 앞서 -
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가?
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가?
집에서 책을 읽고 있는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가?
직장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가?
친구들과 술을 한잔 하고 있는가?
내가 어디서 뭘 하든,
내 몸은 항상 ‘지금 여기’라는
공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는
내가 오감으로 인지하는 공간입니다.
육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는 촉감으로
이뤄진 오감속에 갇혀 있게 됩니다.
오감 [五感]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
만일 내가 집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면 내 육안 시야에 들어오는 방 전체와 창밖의 풍경 전체가
‘지금 여기’라는 공간입니다.
만일 내가 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면
내 육안에 들어오는 사람들과 물건들이 쌓아놓은 모습 등이
‘지금 여기’라는 공간입니다.
만일 내가 직장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 내 육안 시야에 들어오는 사무실 내부와 창밖 풍경이
‘지금 여기’라는 공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공간이
3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즉 그 공간 속의 사물들이
가로, 세로, 높이가 있는 입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내 몸을 바라보세요
나는 육안의 위치에서
육안의 시야에 들어오는 내 몸 한쪽 면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몸 뒤쪽을 바라보세요.
역시 육안의 위치에서 육안이 시야에 들어오는 내 몸의 한쪽 면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늘 한쪽 면만을 바라보면서도
‘내 몸은 입체다’라고 믿습니다.
내 몸을 입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물들도
내 몸과 같이 서로 분리된 입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물들은 사실 존재할까요?
아니면 육안이 바라볼 때만 존재하는 환영일까요?
만일 모든 게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이 어떤 것도 붙잡으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것이 붙잡히지 않는다 해서
부정적 감정이 생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이 억눌려 있던 부정적 감정도 싹 사라질 것입니다.
관광지에 놀러가서 사진기로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을 촬영한다면
단 한 장이 사진만이 나옵니다.
내 몸도, 동료들도, 관광지도
앞쪽 면만 나옵니다.
앞면이 아닌 다른 면들은 실제로 존재할까요?
(그것은) 내 마음속에만 존재합니다.
예컨대 내 육안은
지금 내 손에 잡힌 핸드폰의 앞면만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뒷면을 보는 순간
시간은 이미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즉 핸드폰의 앞면에서 뒷면까지
돌리는데 걸리는 시간만큼 늙어버린 것입니다.
핸드폰도 빛의 떨림 빛의 진동입니다.
그래서 찰나 찰나 달라집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이 핸드폰만 존재합니다.
육안의 시야에 들어오는 현실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보고 있지 않은 이면(뒷면)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마음속의 생각으로만 잠재해 있다가 육안의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앞면으로 깜짝 등장합니다.
현실은
사실 앞면면 보이는,
진동하는 빛의 홀로그램입니다.
어떤 남자가 삽을 들고 평지를 쌓는다고 가정해보자
언덕을 쌓기 위해서는
평지의 흙을 파내면,
그 흙이 파내진 구덩이도 동시에 생긴다.
언덕이 커지면 구덩이도 커진다.
언덕은 없던 것이 생겼으니 풀러스 에너지이고 구덩이이는 있던 것이 없어졌으니 마이너스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덕만 바라보며
‘저건 언덕이야’라고 생각한다.
구덩이만 바라볼 땐 ‘저건 구덩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덕이라는 생각 에너지 플러스 에너지와 구덩이라는 생각 에너지 마이너스 에너지를 빌려서 만든 것이다.
두 생각 에너지를 합치며 제로이다.
생각이 사라지면 언덕도 구덩이도 사라진다.
생각을 빌려 생각을 만들고 홀로그램을 만든다.
실제로 존재하는 건 없다.
내 몸은 어떤가?
내 몸이 70%는 물이다.
나머지 30%는 음식을 먹어서 생긴 살, 뼈, 근육 등이다.
그런 내 몸에서 물을 빼내면?
내 몸의 70%는 사라진다
내 몸에서 살과 뼈, 근육을 빼내면?
나머지 30%도 사라진다.
대체 내가 나라고 믿는 그 ‘몸’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텅 빈 허상, 이미지, 환용, 홀로그램이다.
내 몸은 길게 잡아 100년 전 엄마의 뱃속에서 들어가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새로 태어났으니 플러스 에너지이다.
하지만 플러스 에너지가 생기는 순간 이면에서 그 에너지에 상응하는 마이너스 에너지도 동시에 생긴다.
플러스 에너지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생긴 양 에너지이고 , 마이너스 에너지는 생긴것을 끌어내리는 음 에너지, 즉 중력이다.
양과 음을 합하면 제로가 된다.
내 몸은 그래서 생기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린다.
양 에너지인 내 몸은 실제로 존재할까? 아니다.
왜냐하면 상응하는 음 에너지 즉 중력이 늘 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음 양 에너지를 합하면 제로이다.
내 몸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홀로그램이다.
지구도, 우주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박사는
“우주의 모든 물질은 양이다.
우주의 모든 비물질은 음이다.
우주의 에너지의 총합은 제로이다”
라고 말했다.
뉴욕 시립대의 이론 물리학자 마치오 카쿠교수도
“우주는 완벽한 공에서 탄생한다. 우주는 공짜로 먹는 점심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내 몸도, 지구도, 태양도, 우주 전체도 시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짝을 이루는 생각들을 빌려 생기는
홀로그램이다.
이 홀로그램은
내가 의식하는 생각이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속의 생각이든,
내 생각에 따라 생기고
내 생각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홀로그램 현실은
내 생각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이처럼 우리가 물질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현실 세계 전체가
사실은
내 마음속의 생각이 투사된 홀로그램이기 때문에,
현식 속의 모든 행위도 실제로는 일어나는 게 아니다.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빛의 움직임일 뿐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아 꿈이었구나! 하고 알게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ㅑ9
예컨대 ‘간다’는 생각이 생기는 순간 이면에서 ‘온다’는 생각도 동시에 생긴다.
그래서 ‘간다’는 행위가 일어나면 ‘온다’는 행위가 뒤따르게 된다.
또 ‘올라간다“는 생각이 생기는 순간
이면에서 ‘내려간다’는 생각도 동시에 생긴다.
그래서 ‘올라간다’는 앵위가 일어나면 ‘내려간다’는 행위가 뒤따른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 이면엔 ‘먹은 것을 배출한다’는 행위가 숨어 있다.
‘만난다’는 행위 이면엔 ‘헤어진다’는 행위가 숨어 있다.
‘태어난다’는 행위 이면엔 ‘죽는다’는 행위가 숨어 있다.
실제로 몸의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무의식 속에서 짝을 이뤄 올라오는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빛이 홀로그램을 내 눈으로 보는 것이다.
글서 양자물리학도 한 번 짝을 맺은 미립자들, 즉 빛 알개이들을 서로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놓아도 어김없이 정반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하고 있다.
한쪽 빛 알갱이가 왼쪽으로 회전하면 짝이 되는 다른 쪽 빛 알갱이는 오른쪽으로 회전한다.
한쪽 빛 알갱이가 올라가면 다른 쪽 빛 알갱이는 내려간다.
그래서 양쪽 행위를 합쳐서 바라보면,
즉 시간과거리가 없어지면 왼쪽으로 회전하는 행위도 없고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행위도 없다.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행위도 없다.
바라보는 사람이 ‘어 올라가네?’하고 생각하는 순간 올라가는 모습이 보이고, ‘어 내려가네?’ 하고 생각하는 순간 내려가는 모습이 보일 분이다.
이처럼 생각이 생길 때 시간과 거리가 생긴다.
감정은 어떤가?
감정도 생각이다.
느낌을 일으키는 생각,
즉 몸에 반응을 일으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감정도 역시 풀러스, 마이너스 에너지의 움직임이다.
반드시 짝이 있다.
합치면 제로가 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미움을 빌려 생긴다.
기쁨은 슬품을 빌려 생긴다.
행복은 불행을 빌려 생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반대편 에너지를 빌려서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겼다가
합쳐지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감정을 다 받아들이면
마음은 텅 비어버린다.
내 눈앞에 1초간 도깨비불이 ‘반짝’하고 나타났다 사라진다면?
이 도깨비불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환영일까?
“그야 당연히 환영이지!”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깨비불이 ‘반짝반짝’ 명멸하면서 10초간 지속된다면?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도 당연히 환영이지“
당신은 여전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깨비불이 깜빡임이
1년간, 10년간, 100년간 지속된다면?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움직임이 멈춘다.
움직임이 멈추면 사라진다.
이 움직임들은 어디서 태어났는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속에서 태어난다.
어디로 사라지는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속으로 사라진다.
텅 빈 공간 속에서 유한한 기간만 움직이다가 텅 빈 공간 속으로 사라진다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환영인가?
나는 눈을 뜬 채 명상하는 습관이 있다.
명상하다가 생각이 사라지면
눈앞의 사물이 투명한 하얀빛을 반짝이며 감쪽같이 사라진다.
‘엇?‘ 하고 눈의 초점이 맞춰지면
다시 투명한 빛이 반짝이며 사물이 생긴다.
빛이 어머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명멸하면서 내 두뇌속에 생각이 입력되면 환영이 생기고, 생각이 사라지면 환영도 사라지는 것이다.
거울명상 중에 여러분도
자신의 얼굴이나 몸이 사라지는 걸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도깨비불과 사물은 뭐가 다른가?
빛이 명명하는 시간의 길이가 다르고,
진동수가 달라 서로 다르게 느껴질 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진다.
생각도 생겼다가 사라진다.
감정도 생겼다가 사라진다.
몸도 생겼다가 사라진다.
동식물도 생겼다가 사라진다.
지구도, 태양도, 우주도 생겼다가 사라진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생겼다가 사라진다.
일정기간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은 환영인가, 아닌가?
내 몸도 10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00년 후에는 사라진다.
다른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집은? 자동차는? 나무들은?
각기 존재하는 기간만 다를 뿐 죄다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들로 가득하다.
내 몸도 환영이고,
내 몸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환영이다
내 몸은 일정기간 환영의 세계속에 들어와 살다가 사라지는 환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전자현미경으로 만물을 쪼개고 또 쪼개고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때까지 쪼개서 확대해보면
텅 빈 공간만 나오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 무한한 배경,
즉 텅 빈 공간,
텅 빈 마음뿐이다.
움긱이는 모든 것은
텅 빈 마음 속의 환영이다.
환영이 사라지면 3차원 공간도 사라진다.
지구가 없어도
내 몸이 없어도
공기가 없어도
우주 전체가 없어도 공간은 존재한다.
공간 속이 모든 사물이 사라져도
공간은 존재한다.
사물이 모두 사라지면 텅 빈 공간만 남는다.
텅 빈 공간은 3차원 공간인가?
아니다.
모든 사물이 사라지면
거리도, 시간도 사라진다.
A라는 사물과 b라는 사물이 있어야먄 거리도 생기고 시간도 생긴다.
사물이 완전히 사라지면 3차원 공간도 저절로 사라진다.
이 3차원 공간은 사물이라는 환영이 존재한다고 우리가 착각할 때만 생기는 허상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3차원 공간이 허상이라면
허상의 공간에 떠 있는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다.
허상에 공간에 떠 있는 모든 것들도 허상이다.
우리는 허상의 공간 속에 떠 있는 무수한 허상들 가운데 하나인 몸에 ‘나’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살아간다. 그 딱지를 붙이는 순간 나는 생각이 꾸며낸 생각의 세계에 빠져버린다.
생각의 세계에선
몸이 살아서 움직인다.
생각이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딱지가 붙는 모든 것들이 살아서 움직인다.
100년쯤 계약기간이 만료도 내 생각이 완전히 멈추면 나는 생각의 세계를 떠나게 된다.
그때 생각에 따라 움직이던 모든 것들도 움직임을 먼추고 내 몸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라.
내 인생 전체가 내 마음속의 생각이엇음을 알게 된다.
육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나는 내 생각이 꾸며낸 이미지들에 내 감정을 투사하며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인생도 그렇게 살아가 끝나게 된다.
붙잡을 것도 없고, 억누를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원래의 나’
‘진정한 나’ 는
아무런 한계도 없는
무한한 마음을 가진
‘창조차’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