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호당문집 제9권 / 전(傳)
박연암선생전 계묘년(1903, 광무7) 〔朴燕巖先生傳 癸卯〕
박지원(朴趾源) 선생은 자가 중미(仲美)이다. 그의 선대는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인데, 지금은 서울의 대족(大族)이 되었다. 5대조 미(瀰)는 선조(宣祖)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고, 시로써 이름이 드러났다. 할아버지 필균(弼均)은 영조(英祖)를 섬겨 청백리의 명성이 있었고, 벼슬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어 돈녕공이 가련하게 여겨 가르침을 독려하지 않았다. 돈녕공이 죽은 뒤, 16세에 부인 이씨(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처숙부 교리 군(校理君)은 선생이 배울 기회를 놓친 것을 알고 훈계하기를 “어찌 사대부로서 배우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예!”라고 하였다. 교리 군이 책상 위의 〈신릉군전(信陵君傳)〉을 빼내어 구두를 가르쳐 주었는데, 선생이 이를 배워가지고 물러 나와 곧장 수백 마디 논설을 지으니, 교리 군이 크게 놀랐다. 이로부터 발분하여 학문에 힘써서 문밖을 나가지 않은 지 3년 만에 학업이 크게 진보하였다.
선생은 걸출한 외모에 의기가 시원하고 활달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이미 녹록하게 시문(時文)을 지어 유사(有司)에게 잘 보이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또한 요로의 고관과 위학(僞學)으로 세상을 속이는 부류들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면서 기롱하고 배척하여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짝할 사람이 없었다.
정조(正祖) 초기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원수에 대해 크게 보복하자, 사대부 중에 암암리에 형벌을 받아 죽은 자가 많았다. 친구 백영숙(白永叔)이 밤에 선생을 찾아와 말하기를 “자네의 벗 홍낙성(洪樂性) 공은 사도세자의 원수 무리로 사람들에게 지목되었네. 홍공이 위태로우면 자네 또한 안전하기 어려울 것이니, 숨어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은 옛날에 집이 가난하여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거처를 마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연암(燕巖)이라 불렀다. 이때에 와서 도성문을 달려 나와 먼저 개성에 몰래 지내다가 뒤에 연암에 이르렀는데, 곤란하고 초췌함이 극에 달하였다. 유언호(兪彥鎬) 공은 선생과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당시 외직을 맡고 있다가 선생의 형편을 듣고 탄식하기를 “어찌 우리 중미(仲美)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이에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기를 청하여 구휼해 주었다. 개성은 연암과 지역이 가까웠다.
정조 4년(1780)에 선생의 삼종형 금성위(錦城尉) 명원(明源)이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면서 선생에게 함께 가기를 요청하자, 선생은 흔쾌히 승낙하여 따라가 열하(熱河)에 이르렀다. 태학(太學)에 머문 것이 6일이었는데, 대리시 경(大理寺卿) 윤가전(尹嘉銓)과 거인(擧人) 왕민고(王民皞) 등과 질탕(跌宕)하게 담론하니 민고가 지목하여 ‘해상이인(海上異人)’이라 하였다.
정조 10년(1786)에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제수되고 여러 차례 옮겨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제릉령(齊陵令),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 되었다가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나갔는데, 당시 정조 15년이었다.
처음에 선생이 열하에서 돌아왔을 때 《열하일기(熱河日記)》 수십 권을 지어 혹 해학으로 자신의 감분(感憤)을 표현하였는데 임금이 일기를 열람하였다. 정조 16년에 임금이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 남공철(南公轍)의 문장을 보고 그 문체가 기이함을 병통으로 여겨 장난으로 벌금을 물리고, 인하여 남공철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문풍(文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박지원의 《열하일기》 때문이다. 너는 마땅히 박지원에게 편지를 보내 나의 뜻을 말하라. 만일 속히 한 부의 순정한 문장을 지어 《열하일기》의 죄를 속죄한다면, 남행(南行)의 문임(文任)을 내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중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남행은 음사(蔭仕)를 말한다. 나라의 제도는 문과로 출신(出身)한 자가 아니면 홍문관과 예문관의 문임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의 말이 여기에 미친 것이다. 남공철(南公轍)이 임금의 말대로 편지를 보내자, 선생이 답장으로 사죄하였는데, 말이 매우 아름답고 공교로웠고 스스로 속죄하는 뜻을 보였다. 남공철이 그 편지를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은 그의 재주에 탄복하고 다시 죄를 묻지 않았다.
선생이 안의(安義)에 있을 때 정사를 행함이 청렴하고 자애로워 아전을 단속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았으나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일찍이 흉년을 만나 진휼을 베풂에 진휼을 받는 남녀노소 사족과 서민들로 하여금 각각 그 위치를 달리 하여 혼란을 방지하였고, 여러 차례 사형죄를 심리함에 공평하고 명쾌하게 판결하였다. 임기 6년을 채우고 돌아왔다가 1년 남짓에 다시 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제수되었다. 이때 제주 사람 이방익(李邦翼)이 배가 표류하여 청나라 팽호(澎湖)에 이르렀는데, 청나라 사람이 우리나라로 돌려보냈다. 임금이 불러 그가 지나온 산천과 풍속을 물었는데, 방익은 말로 아뢰어 대답하였다. 선생이 폐사(陛辭)하니, 임금이 희정당(煕政堂)에서 인견하여 이방익이 말로 아뢴 것을 거론하며 “방익의 일은 매우 기이한데 애석하게도 좋은 기록이 없으니, 네가 의당 한 편을 지어 올려라.”라고 하였는데, 선생이 물러나 안설(按說)을 지어 올리자, 임금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정조 22년(1798) 임금이 중외(中外)에 하교하여 농서(農書)를 구하였는데, 선생은 예전에 지은 《과농소초(課農小抄)》한 책이 있었으니, 우리나라의 농정(農政)이 엉성함을 개탄하여 지은 것이었다. 여기에 안설(按說)을 달고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한 편을 붙여 올렸는데, 논한 것이 모두 순정하고 절실하였으니, 대개 또 이것으로 스스로 속죄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 임금의 시대가 다하도록 끝내 등용한 일이 없었다.
순조(純祖) 초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승진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늙었다는 이유로 자핵(自劾)하고 돌아왔다. 몇 년 뒤에 죽으니, 나이 69세였다.
선생의 학문은 비록 백가를 두루 섭렵하였으나 근본은 육경에 있었다. 문장은 유창하고 분방하며, 전아하고 간결하여 위로는 사마천(司馬遷)과 한유(韓愈)를 뒤쫓아 여파가 소식(蘇軾)에 깊이 들어가, 우뚝이 우리나라 제일의 명가가 되었다. 곁으로 병농(兵農)ㆍ전곡(錢穀)ㆍ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서화(書畫)ㆍ성률(聲律)까지 섭렵하였고, 아래로 백공의 기예에까지 이르렀다. 한 때 문학의 영재인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 및 재상 이서구(李書九) 등이 모두 경도되고 사모하여 사우(師友)로 지냈다.
선생이 죽은 지 90여 년에 서울의 사대부들이 서로 돈을 내어 유집을 간행하였다. 문집 가운데 일을 논한 것 중 큰 것이 네 가지인데, 첫째는 〈허생전(許生傳)〉이니 효종(孝宗)이 청나라 정벌의 도모가 소활함을 애석해 한 것이고, 둘째는 〈거제설(車制說)〉이니 우리나라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아 가난하고 약해짐을 비판한 것이고, 셋째는 〈북학의서(北學議序)〉이니 우리나라가 이용후생의 도에 졸렬함을 병통으로 여긴 것이고, 넷째는 〈서얼소통소(庶孽疏通疏)〉이니 우리나라 습속이 편협하여 버려지는 인재가 많음을 비판한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설들은 모두 당시에 배척당하였으나 오늘날에 징험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또 특별히 이 편에 드러내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됨을 더욱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손자 박규수(朴珪壽)는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다음과 같이 찬한다.
옛날 풍산(豐山) 홍길주(洪吉周) 공이 선생의 문집에 적기를, “기상은 족히 천지 사방에 횡행하고, 재주는 족히 천고를 능가하고, 문장은 족히 만물을 전도시킨다.”라고 하였으니, 뜻이 있도다! 이 말이여. 선생의 대략을 알았던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또 보건대, 선생은 젊어서부터 뜻을 세워 논의를 펼침에 격앙되고 활달하여 지역의 풍속이나 세속의 견해 밖으로 완전히 벗어났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건대, 종종 미리 내다보고 예상하여 결정한 것이 많이 있었다.
아, 선생의 재주와 처지에서 실로 온순한 모습에 부드러운 태도로 부귀영화를 추구했더라면 어디엔들 합당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도리어 굳이 저런 입장에서 벗어나 차라리 제 몸을 굶주리고 곤궁할지언정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이인(異人)이 아니겠으며, 또한 호걸스런 선비가 아니겠는가.
[주-D001] 5대조 미(瀰) : 박미(朴瀰, 1592~1645)를 말한다.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선조의 다섯째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문인이다.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주-D002] 필균(弼均) :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을 말한다. 초명은 필현(弼賢), 자는 정보(正甫),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종숙부 박세채(朴世采, 1631~1695)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725년(영조1)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사헌부 지평,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청백리로 알려졌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주-D003] 처숙부 교리 군(校理君) : 이양천(李亮天, 1716~1755)을 말한다. 자는 공보(功甫), 호는 영목당(榮木堂),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박지원의 장인 이보천(李輔天, 1714 ~1777)의 동생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주-D004] 백영숙(白永叔) : 백동수(白東修, 1743~1816)를 말한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인재(靭齋)ㆍ야뇌(野餒),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무예가 뛰어나 당대에 창검(槍劍)의 일인자로 꼽혔고, 마술(馬術)과 궁술(弓術)에도 뛰어났다. 박지원(朴趾源)ㆍ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여 학문에도 높은 성취를 이루었고, 서예에도 능하였다. 1790년(정조14)에는 왕명으로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였다.[주-D005] 홍낙성(洪樂性) 공 : 1718~1798. 자는 자안(子安), 호는 항재(恒齋),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744년(영조20)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사서, 대사성, 이조 참판 등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효안(孝安)이다.[주-D006] 유언호(兪彥鎬) 공 : 1730~1796. 자는 사경(士京), 호는 칙지헌(則止軒),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1761년(영조37)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 규장각 직제학, 평안 감사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저서로는 《칙지헌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주-D007] 금성위(錦城尉) 명원(明源) :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을 말한다. 자는 회보(晦甫), 호는 만보정(晩葆亭),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영조의 3녀인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다. 1776년(영조52)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세 차례 정사(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박명원이 죽자 정조가 직접 그의 신도비문을 지었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주-D008] 윤가전(尹嘉銓) : 1711~1781. 청나라 때 박야현(博野縣) 출신이다. 거인(擧人) 출신으로 산동성(山東省)과 감숙성(甘肅省) 등을 다스렸고, 대리시 경(大理寺卿)에 이르렀다.[주-D009] 남공철(南公轍) : 1760~1840.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潁)ㆍ금릉(金陵),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792년 문과에 급제한 뒤, 규장각 직각ㆍ대사성ㆍ부제학 등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당시 제일의 문장가로,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박지원을 비롯하여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분이 있었다. 저서로는 《금릉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주-D010] 남행(南行)의 문임(文任) : 남행은 조상의 공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거나 자신의 높은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오르는 벼슬을 말한다. 음사(蔭仕)와 같은 말이다. 문임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종2품 제학(提學)을 이른다.[주-D011] 남공철(南公轍)이 …… 보였다 : 박지원의 편지는 《연암집》 권2의 〈남 직각에게 답함[答南直閣書]〉을 말하고, 남공철의 편지는 여기에 원서(原書)로 붙어 있다.[주-D012] 폐사(陛辭) : 명을 받고 외직으로 떠나는 신하가 임금 앞에 나아가 하직 인사를 드리는 일을 말하는데, 사폐(辭陛)라고도 한다.[주-D013] 선생이 …… 올리자 : 《연암집》 제6권 별집의 〈이방익의 사건을 기록하다[書李邦翼事]〉를 말한다.[주-D014] 이덕무(李德懋) : 1741~1793.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ㆍ아정(雅亭)ㆍ청장관(靑莊館)이다. 저서로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가 있다.[주-D015] 유득공(柳得恭) : 1748~1807.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 호는 영재(泠齋)ㆍ가상루(歌商樓)ㆍ고운당(古芸堂)ㆍ고운거사(古芸居士)ㆍ은휘당(恩暉堂)이다. 저서로는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발해고(渤海考)》 등이 있다.[주-D016] 박제가(朴齊家) : 1750~1805)를 말한다. 자는 차수(次修)ㆍ재선(在先)ㆍ수기(修其), 호는 위항도인(葦杭道人)ㆍ초정(楚亭)ㆍ정유(貞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저서로는 《북학의(北學議)》, 《정유고략(貞蕤稿略)》 등이 있다.[주-D017] 재상 이서구(李書九) : 1754~1825.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愓齋)ㆍ강산(薑山),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여러 지방관과 호조 판서ㆍ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강산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주-D018] 박규수(朴珪壽) : 1807~1876. 초명은 규학(珪鶴), 초자(初字)는 환경(桓卿), 자는 환경(瓛卿)ㆍ정경(鼎卿), 호는 환재(桓齋)ㆍ환재(瓛齋)ㆍ환재거사(瓛齋居士),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1848년(헌종14년) 증광시에 합격하여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 형조 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등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시호는 문익공(文翼公)이다.[주-D019] 풍산(豐山) 홍길주(洪吉周) 공 : 1786~1841. 자는 헌중(憲仲), 호는 항해(沆瀣),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807년(순조7)에 진사에 합격한 뒤 만년에 지방 수령이 되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지냈다. 저서로는 《현수갑고(峴首甲藁)》, 《표롱을참(縹礱乙懺)》, 《항해병함(沆瀣丙函)》 등이 있다.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남춘우 (역)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