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 도보 대행군 기행록(13)
13. 의견의 고장 오수 거쳐 춘향의 무대 남원으로(임실읍사무소 – 남원 향교 30km)
8월 19일(수), 아침에 안개 끼더니 오전부터 햇볕이 따갑다. 오전 6시 반, 숙소 근처의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을 들고 7시에 남원으로 출발하였다. 출발에 앞서 돌출상황, 10여 일간 코스리더로 수고한 강전 교수가 컨디션이 안 좋아 일정을 중단하고 돌아가겠다며 양해를 구한다. 아쉽지만 본인의 결정을 존중,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석별의 악수하며 드린 말, 문은 열려 있으니 언제든지 돌아오시라. 모두 같은 심정인 듯.
식당에서 나와 곧장 임실읍의 외곽에 접어든다. 군부대 옆 도로를 따라 한 시간여 걸으니 말치고개에 이른다. 그곳에서 풀숲 우거진 오솔길로 접어드니 웃자란 풀이 뒤엉켜 길 찾기가 어렵다. 낫으로 풀을 배며 조심조심 내려가는 길이 쉽지 않다. 간신히 큰길에 도착, 위험을 무릅쓰고 꼭 이 길로 가야하나?
가까스로 마을로 내려오니 오수면 봉천리, 들길을 한참 걸어 만난 거목 아래가 적당한 쉼터, 수령 25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유난히 커 보인다. 비석에 적힌 글, ‘한 알의 씨앗이 싹을 내어 이처럼 자라기까지는 당신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앞으로 더욱 아끼고 사랑해주신다면 당신과 당신의 후손들 곁에서 억겁을 살렵니다.’ 거목에 견줄 위인의 발걸음 따라가며 새길 좋은 글이다.
봉천리 거목에 다가서는 일행
봉천리 지나 30여분 걸으니 오촌리, 버스 정류장 옆에 세운 오수의견상(獒樹義犬像)을 살피고 교차로 지나 한 시간쯤 더 걸어 10시 40분 경 오수면사무소에 이른다. 면사무소는 코로나 때문에 일반인 출입금지인데 친절한 여직원이 화장실 이용하라며 문을 열어준다. 발열체크도 하고.
면사무소 입구에 '의견의 고장 오수면사무소'라 새긴 비석이 서 있고 청사 출입구에 ‘의로운 오수 개 이야기’를 새긴 동판이 걸려 있다. 그 내용,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거령현(오늘날의 지사면 천리)에 김개인 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매우 사랑하였다. 어느 날 외출을 하는데 개도 따라 나섰다. 김개인이 술에 취해서 길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들불이 일어나 개인의 몸 가까이 까지 번지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충성스러운 개는 곧 옆에 있는 냇가에 들어가 몸을 물에 적시어 불 주변을 빙빙 돌면서 풀이 물에 젖게 이 짓을 반복 하여 불길을 막고는 힘이 빠져 죽었다. 잠에서 깨어난 김개인은 개의 모양을 보고 슬프게 여겨 노래(견분곡)를 지어 이 슬픈 정을 쓰고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주고 지팡이를 꽂아 주었다. 그런데 얼마 후 지팡이에 잎이 피고 큰 수목의 나무가 되었는데, 이로부터 이 지명을 개 오(獒) 나무 수(樹) 두 자를 써 오수라 하였다.’
오수면소재지를 벗어나서 이른 점심, 식사 후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하여 한 시간여 휴식을 취하였다. 휴식을 취하는 중 남원의 백의종군애호가인 조용섭 지리산권 마실 대표가 찾아와 담소를 나누기도.
12시 30분에 오후 걷기, 30여분 걸으니 임실군에서 남원시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첫 고을인 사매면, 이어서 덕과면 지나 뒷밤재 넘어서 남원 향교까지는 14km쯤 이다. 전주에서 남원까지의 도로명은 춘향로, 걸어오는 중 이몽룡 고개라 표시된 지점이 보이고 뒷밤재 일원은 춘향전을 무대로 한 여러 장면의 파노라마가 이어진다. 개인적 소견, 픽션인 춘향전에 들이는 공력의 절반이라도 역사의 증거인 만인의총의 충절을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남원 향교에 도착하니 오후 5시, 폭염 속에 30여km를 걸었다. 한 사람도 낙오 없이 걸어 대견,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낸다. 흘린 땀을 씻고 내일도 씩씩하게 걷자.
뒷밤재에서 남원의 여러 정황을 설명하는 조용섭 대표
* 남원시에 소설가 최명희의 명작 혼불을 기리는 혼불문학관이 있다. 3년 전 이곳을 지날 때 혼불문학관 입구라고 쓴 표지를 보고 기회가 닿으면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 길을 지나게 되자 집행부의 승낙을 얻어 지원차량을 이용하여 잠시 혼불문학관을 다녀왔다. 걷는 코스에서 5km 가량 들어가는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
수려한 산세와 잘 어울리는 혼불문학관의 모습
1947년에 태어나 1998년에 51세의 나이로 타계한 최명희는 필생의 역작 혼불에 그의 삶을 불살랐다. 충무공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듯 최명희는 우리 삶의 근원을 탐색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혼불문학관 입구에 적힌 글로 그 의미를 새긴다. 문학관에서 살핀 그의 어록과 함께. ‘언어는 정신의 지문입니다. 한나라, 한민족의 정체는 모국어에 담겨 있습니다.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으로 잘 살고 갑니다.’
문학관 입구에 있는 혼불문학관의 설명문
첫댓글 정말 대단들 하십니다. 화이팅!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