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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나 개인 PC가 없는 사람을 찾는 것이 힘들 정도로 디지털이 보편화된 세상이다. 사람들은 중요한 정보부터 사소한 메모까지 손으로 쓰기보다는 타이핑을 통해 기록하고 저장한다. 또 그림을 그리는 등의 창작 활동에서도 태블릿PC와 스마트펜이 대중화되고 있다. 복사, 수정, 저장 등 모든 면에서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압도할 정도의 편의성을 제공하는 것이 그 원인이다. '내 돈 주고 펜이나 수첩을 사본 게 언제였더라?' 생각해 보면 아마 잘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노트를 연간 1천만 개 이상 판매하며 전 세계 '아날로그 문구'의 상징이 된 회사가 있다. 이탈리아의 문구 브랜드 '몰스킨(Moleskine)'이다. 사실 몰스킨의 수첩은 겉보기에 별 특징이 없어 보인다. 어두운 계열의 평범한 커버, 별다른 일러스트 하나 없는 프렌치 바닐라 색의 종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몰스킨 수첩을 선호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팬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하나에 2~3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에도 거리낌 없이 지갑을 열고 있다.
(몰스킨의 대표 제품인 노트북)
몰스킨은 1997년 탄생한 브랜드로,
지난 2세기에 걸쳐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사용해온 전설적인 노트북입니다.
몰스킨 홈페이지에서 브랜드를 소개하는 문구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 1997년에 탄생한 브랜드의 제품을 어떻게 2세기 전 인물들이 사용했다는 것일까. 실제로 200여 년 전 프랑스 파리에는 몰스킨 수첩이 있었다. 당시 여러 공방에서 만들던 작은 검은색 수첩을 통칭하는 것으로 '르 까르네 몰레스킨(les carnets moleskines, 인조가죽 수첩)'으로 불렸다. 과거 파리의 지식인, 예술가들이 즐겨 쓰는 수첩이었는데 이를 만들던 소규모 업체들이 대량 생산 문구류에 밀려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해 결국 1986년 생산이 중단됐다.
(마리아 세브레곤디)
잊혔던 이 수첩은 1995년 몰스킨의 공동창업자 마리아 세브레곤디(Maria Sebregondi)가 여행 중에 읽었던 한 수필로 인해 되살아난다. 영국 작가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이 자신의 여행 수필 '송라인(songlines)'에 자신이 애용하던 몰스킨에 대한 내용을 기록해두었던 것이다. 세브레곤디는 채트윈뿐만 아니라 피카소, 고흐, 헤밍웨이 등 예술가와 작가들이 사용했다는 그 수첩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확인해본 결과 더 이상 그 수첩을 만드는 업체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세브레곤디는 자신이 컨설팅하고 있던 밀라노의 디자인 및 출판회사 모도&모도(Modo & Modo)를 통해 '몰스킨'이라는 상표를 등록하고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과거 예술가들이 쓰던 '전설적인 노트북'이 출시되자 소비자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첫해 5천 개에 지나지 않던 노트북 생산량은 바로 다음 해 3만 개로 늘어났다. 유럽을 중심으로 빠르게 판매가 증가해 2000년에 들어서는 연 2600만 달러(약 3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커진 판매량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모도 & 모도는 2006년 6천만 유로에 유럽의 사모펀드 신테그라 캐피털(Syntegra Capital)에 인수되고 이때 회사명도 '몰스킨'으로 변경된다. 이후 2013년 이탈리아 증시에 상장했고 2016년 말에는 벨기에의 자동차 유통업체 디테른(D'leteren)이 지분 41%를 인수하는 등 지배 구조의 변화를 겪었지만 기본적인 브랜드 가치는 꾸준히 유지한 채 성장해왔다. 2017년에는 약 1억 5540만 유로(약 2천억 원)의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하며 글로벌 문구업체로서 위상을 과시했다.
사실 몰스킨의 성장은 이례적이다. 종이로 만든 수첩을 2~3만 원 이상의 가격에 팔아 연 매출 2천억 원을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몰스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옛날에 유명했던 수첩이라고 해도 왜 저 돈 주고 사느냐?"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몰스킨은 보란 듯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국내만 해도 이미 53개의 오프라인 매장(직영점 3개 포함)을 보유한 상태다. 이들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첫 번째는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이다. 앞서 소개한 내용과 같이 몰스킨의 창업 과정은 하나의 낭만적인 스토리다. 몰스킨은 과거 이런 수첩을 어떤 예술가들이 사용했는지, 어떤 과정에 의해 사라졌으며, 어떻게 다시 부활했는지를 하나의 동화처럼 소개한다. 덕분에 종이로 만든 수첩은 물리적인 실체를 넘어 과거 피카소, 헤밍웨이와 같은 예술가들의 정신적인 가치를 담은 제품이 됐다. 그리고 몰스킨은 그 자체로서 낭만적인 브랜드의 아이콘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타깃으로 삼은 계층이 분명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후반 몰스킨 수첩이 나오기 시작하던 시기는 미디어, 디자인 등 창조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지식 노동자 계층이 부상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몰스킨은 영상제작자, 디자이너, 작가, 건축가 등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이들에 집중했다. 과거 예술가들, 작가들이 사용했던 몰스킨을 통해 지식 노동자로서의 지위나 정체성 등 감정적인 니즈를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수첩을 활용해 아이디어를 적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실질적으로 창의적인 발상에 도움이 된다는 점 또한 강조했다. 전략은 적중했다. 유럽 각국의 예술가, 작가, 디자이너들은 몰스킨에 열광했고 너 나 할 것 없이 몰스킨의 충성고객 대열에 합류했다.
마지막으로는 기존의 수첩과 차별화된 포지션이다. 보통 수첩은 무언가를 메모하고, 일정을 기록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수첩은 '이 제품은 메모도 쉽고 스케줄 관리도 편하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몰스킨의 수첩은 전혀 다르다. 몰스킨은 수첩의 기능을 홍보하지 않는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이라는 표현을 통해 당신의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담기며 점점 완성될 한 권의 작품임을 강조한다.
물론 단순히 '이건 특별합니다'라는 것으로는 사용자를 사로잡을 수 없다. 그래서 몰스킨은 실제 소비자가 몰스킨의 특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우선 몰스킨은 일반 문구점이 아니라 서점을 통해 수첩을 판매한다. 또 일반 책에 부여되는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소중한 작품이 분실될 경우를 대비해 주인의 연락처와 함께 습득한 사람에게 줄 사례금을 적는 부분이 맨 앞에 있다. 이는 몰스킨을 일반 수첩과 다른 특별한 제품임을 소비자에게 보여주었고, 덕분에 월등히 높은 가격에도 몰스킨을 거부감 없이 구매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몰스킨이 '옛날 수첩' 하나에만 매달려 지금까지 성공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더 많은 고객들이 창의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왔다. 우선 몰스킨은 꾸준히 신제품을 개발했다. 현재 만년필, 가방, 액세서리 등 500여 가지가 넘는 제품을 판매 중이다. 창의적인 활동을 위해 필요한 제품을 고객에게 제공하고, 궁극적으로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지향하기 위해서다.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몰스킨 매장)
다양한 협업을 통해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고객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동안 몰스킨은 어린 왕자, 건담,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등 유명 작품과의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내놓았다. 올해 6월에는 미국의 뮤지션 밥 딜런(Bob Dylan)의 생애와 영감을 담은 한정판 노트북을 출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협업은 예술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몰스킨의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며, 몰스킨을 잘 모르던 새로운 소비자를 유입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달 말에 출시된 밥 딜런 리미티드 에디션)
아날로그를 바탕으로 성장한 브랜드지만 오히려 디지털을 껴안는 방식으로 혁신을 꾀하기도 한다. 몰스킨은 디지털과 경쟁하지 않는다. 수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디지털의 편리함을 따라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스킨은 아날로그 수첩에 디지털을 입히는 시도를 했다. 어도비(Adobe), 에버노트(Evernote) 등 IT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수첩에 있는 문구나 그림을 디지털로 변환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페이퍼 태블릿'으로 불리는 몰스킨의 수첩에 그림을 그린 후, 전용 앱을 통해 스캔하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얼마든지 옮겨 후속 작업을 할 수 있다. 또 스마트펜을 이용해 페이퍼태블릿에 메모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 실시간으로 동기화해 간편하게 편집, 저장, 공유가 가능하다. 아리고 베르니(Arrigo Berni) 몰스킨 최고경영자(CEO)는 "우리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 창의적인 세계에서는 '종이냐, 디지털이냐'를 고민하지 않는다. 둘 다를 포함한다"라고 하며 몰스킨이 디지털 제품을 확대하는 이유를 밝혔다.
(페이퍼태블릿 사용하는 모습)
속도와 편리함을 앞세운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직접 무언가를 적고 그리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는 사라지지 않는다. 몰스킨은 수첩을 활용하는 것의 즐거움 그리고 브랜드가 주는 특별한 감성을 활용해 디지털 시대의 소비자에게 종이 노트를 쥐여주었다. 잊혀가는 아날로그 산업이 얼마든 반격을 꾀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성공을 위해 몰스킨이 해왔던 노력이다. '옛날 것이니까 소비자들이 좋아하겠지.'라는 안일한 태도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브랜드의 스토리와 제품의 강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이를 통해 소비자의 감성을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단순히 아날로그 자체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니즈가 핵심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년에 수첩만 1천만 권을 넘게 파는 몰스킨도 500여 가지의 제품을 개발하고, 디지털 동기화가 가능한 스마트 라이팅 시스템에 투자하며 지금까지 성장해왔다. 아날로그의 반격은 브랜드에 대한 그리고 소비자에 대한 깊은 고민이 충분히 쌓였을 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