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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명(何景明) 연보 요약
2020년 11월 22일
하경명(何景明, 1483-1521)은 홍치와 정덕 연간에 이몽양을 따라 하은주 삼대의 정치와 문학을 배우자고 고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홍치 연간에는 정치 혼란과 관원사회의 부패를 어느 정도 개선하였고 언론도 제법 열어놓았습니다. 이런 정치사회 환경에서 이몽양과 하경명이 문학을 개선하자고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덕 초년에 환관들이 어린 정덕 황제를 데리고 날마다 놀러다니며 정치는 환관들이 독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관원들과 지식인들이 환관 유근을 탄핵하였고 유근은 이들 53명을 퇴출시켰습니다.
아무튼지 홍치 연간에 그나마 일부 관원과 지식인 사이에서 활발한 사회의식이 형성되었다가 정덕 초년에 환관 유근이 권력을 독단하면서 관원과 지식인들이 흩어졌습니다. 따라서 흩어진 관원들이 각자의 적성과 환경에 따라 나름대로 길을 갔습니다. 이몽양과 하경명은 문학으로 길을 갔고 왕양명은 철학으로 길을 갔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사회의식은 송원명 시기의 통치방식에서 벗어나 한위당(漢魏唐)을 배워 하은주 삼대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복고입니다.
하경명 집안은 대대로 평민이고 잘살지 못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똑똑하고 일찍 철이 들어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임조부 지부 이기(李紀)가 아껴주고 희망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더구나 특별히 선생님을 모셔서 『춘추』를 가르쳐주었다고 합니다. 맏형 하경소는 『상서』를 가르쳐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과거시험 참여자들은 대체로 경전 글자수가 적은 『시경』 또는 『주역』을 전공과목으로 선택하였고 글자수가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 셋은 피하였습니다. 하경명이 왜 고문 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어렸을 때 경전 교육이 학술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몽양과 하경명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친 것은 늦어도 하경명이 26살에 고향에 돌아와서 여러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중기에 복고 운동이 언제 일어났고 이몽양과 하경명이 언제 어떻게 문학 논쟁을 벌였는지에 관하여 몇몇 연구논문이 있습니다.
왕양명과 하경명은 서로 잘 알고 지냈을 것입니다. 현재 남은 기록은 없으나 서로 만날 기회는 많았다는 것을 보면 잘 알고 지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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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付開沛,「何大復年譜」,「何大復年譜(續)」,『信陽師範學院學報(哲學庄會科學版)』,1982年第2期。
2、劉海涵,『何大復先生年譜』。
(劉海涵,字怡宣,光緒己亥歲貢,信陽白龍潭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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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景明(1483-1521),字仲默,號白坡,又號大復山人,信陽州(今河南信陽市人)。
고조부 하태산(何太山):
李夢陽,「何信夫婦合葬墓誌銘」︰“其先居(湖北)羅田(縣),曾祖(高祖)太山始徙信陽。”
→祖籍,湖北羅田縣卜船山人。
조상은 호북성 나전현 복선산에 살았고 증조부 태산공이 하남성 신양현으로 이사하였다.
→何大山約在元朝至正十一年(1351)秋冬,遷居信陽。
何景明,「封徽仕郎中書舍人先考梅溪公行狀」︰“高祖曰太山,始避紅巾亂,携母至信陽。”
증조부 하태산공은 원나라 지정 11년(1351)에 홍건적 반란을 피하여 하남성 신양현으로 이사하였다.
증조부 하해(何海):
증조부 하해(何海)은 신양현 매황향에 살았고 농사를 지었다.
→高祖何太山,曾祖何海,世居信陽梅黃鄉,以務農為本。
조부 하감(何鑑):
祖父何鑑,為陰陽學典術,曾任明港(今信陽縣明港鎮)巡檢。
할아버지 하감은 음양학(陰陽學) 전술이었고 하남성 신양현 명강진 순검(현재 경찰)을 지낸 적도 있다.
※ 음양학 전술(典術):
『元史、選舉志一』:“ 世祖至元二十八年夏六月,始置諸路陰陽學。”
『明史、職官志四』:“陰陽學。府,正術一人,州,典術一人。縣,訓術一人。亦洪武十七年置,設官不給祿。”
원나라 세조 지원 28년 여름 6월에 각 로(路, 지방행정단위, 현재 省)에 음양학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태조 홍무 17년에 부(府)에 정술 1인, 주(州)에 전술 1인, 현(縣)에 훈술 1인을 두었다.
관직은 있으나 봉록을 지급하지 않았다.
아버지 하신(何信):
父何信,生于明正統辛酉(1441),卒王明正德己巳(1509)四月。
何信,號梅溪,為陝西渭源驛丞。梅溪先娶羅山縣盧廣女兒為妻。盧卒,繼娶山東李氏。
아버지 하신은 정통 신유년(1441)에 태어났고 정덕 기사년(1509) 4월에 세상을 떠났다.
호는 매계이고 마지막에는 섬서성 위경역 역승을 지냈다.
※ 역승은 명청시기에 주현(州縣)에 역참(驛站)을 설치하고 역승은 역참의 각종 설비(儀仗)、수레와 말(車馬)、맞이와 보내기(迎送)를 담당하였다. 역승은 품계가 있는 관원이 아니었다.
盧氏生景韶、景晹。
景韶,明成化丙午(1486)舉人。先為巴陵知縣,後遷東昌府判。
景晹,弘治戌午(1498)舉人,官安慶府通判。
어머니 노씨가 경소(景韶)와 경양(景晹)을 낳았다.
하경소는 파릉현 지현을 지냈고 나중에는 산동성 동창부 통판(通判, 정6품)을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경양은 홍치 무오년(1498)에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었고 안경부 통판을 지냈다.
李氏生子景輝、景明。女一。
景輝,在家務農。
女嫁孟洋(信陽人,弘治乙丑, 1505, 字望之,進士,歷官湖廣參議、陝西參政、京都御史巡撫、寧夏提督糧儲等職)。
친어머니 이씨가 아들 경휘(景輝)와 경명(景明)을 낳고 딸 1명을 낳았다.
하경휘는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
딸은 맹양(孟洋, 1483-1534)에게 시집갔다.
맹양은 1505년에 진사가 되었고 호광성 참의, 섬서성 참정, 북경 도어사 순무, 연하 제독양저 등 관직을 지냈다.
※ 맹양:
明、汝寧府信陽縣人,字望之,一字有涯。弘治十八年進士。授行人,進禦史,以論張璁、桂萼事謫桂林教授。後官至大理寺卿。有『孟有涯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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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명(何景明) 연보:
1歲,1483,成化19年癸卯,八月六日生。
孟洋,「何景明墓誌銘」︰“母氏李夢赤日而娠,及舉而命之曰景明。”
어머니 이씨가 붉은 해를 꿈꾸고 임신하였다. 그래서 밝은 해라는 뜻에서 경명이라고 이름지었다.
(李夢陽母夢日墮懷而生。)
(이몽양 어머니도 꿈에 해가 품 안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 낳아 이름을 몽양이라고 지었다.)
3歲,1485,成化21年乙巳,二月,何景明的繼配王夫人出生于河北唐縣。
4歲,1486,成化21年丙午,是年先生伯兄景韶擧於鄕。
큰형 하경소가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었다.
6歲,1488,弘治元年戊申。“六歲能對句,出奇字,日記數百言。知敬諸兄。至撻之,不敢詬見。群兒戱逐,即不同群。”
6살에 어른과 대구(對句)하면서 신기한 글자를 표현하였다. 날마다 수백 글자를 외우고 여러 형님을 잘 공경하였다. 매를 맞더라도 욕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면서 놀아도 가서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
8歲,1490,弘治3年。能屬文。“秀而癭,性沉敏有度,里師謂:何氏子童而神,遞避去。”
글을 잘 지었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성격은 차분하고 이해력이 빠르고 예절을 알았다. 동네 과외 선생은 “하씨 아들은 어려도 신동”이라고 말하고 점점 피하였다.
11歲,1493,弘治6年。劉譜︰“是年,先生隨父梅溪公之官陝西。”(?)
何景明十一歲到陝西省臨洮。(?)
아버지가 섬서성 임조부 위원현(渭源縣) 역승으로 전임하였고 하경명은 아버지를 따라갔다.
12歲,1494,弘治7年。
喬世寧,「何先生傳」︰“十二,父仕臨洮驛丞,乃隨侍臨洮。”
樊鵬,「中順大夫陝西提學副使何大復先生行狀」︰“十二歲,隨父官陝西渭源驛丞(前三年,臨洮府會寧驛丞),臨洮府知府李公(李紀)聞其奇,召置門下,甚愛重,為延師授『春秋』。其師間出,他長兒皆謔笑,履師坐,先生獨安坐,說『春秋』。李公瞷嘆曰︰‘何兒麟鳳也!’嘗束金盛衣冠,呼入謂其夫人曰︰‘汝視予貴耶?他日是子貴,奚啻予也?’”
12살에 아버지가 섬서성 위원역승으로 전임하자 따라갔다. 임조부 지부 이기(李紀)는 그의 뛰어남을 듣고 불러서 문하에 두고 아끼고 특별히 선생님 모셔서 『춘추』를 가르쳐주셨다. 선생님이 잠깐 나간 사이에 큰 아이들은 장난치고 웃고 선생님 자리에도 앉았다. 그러나 하경명 혼자 앉아서 『춘추』를 읽었다. 이기가 엿보고 감탄하여 “하경명은 기린이고 봉황이구나!”라고 말하였다. 받은 학비로 옷과 모자를 사서 입히고 부인을 불러 “당신은 내 관직이 높다고 생각합니까? 앞으로 이 아이가 높이 올라가면 어찌 내 관직 정도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姐夫孟洋,「中順大夫陝西提學副使大復何君墓誌銘」︰“十二,從梅溪公宦游陝西之渭源,臨洮守聞其奇,召置館下,甚愛重,令師授『春秋』。數月,即說『春秋』,其師辭不弗教也。”
何景明,「祭李默庵先生文」︰“景明昔寓于公,是時有毛夫人也。公執詩書,毛夫人執燈燭,晝夜課景明誦讀。居也視衣食,還也饋車馬。”
제가 옛날에 이기 선생 집에 살았는데 그때 모부인이 계셨습니다. 선생은 시서(詩書) 경전을 가르쳐주셨고 모부인께서는 밤에 등불을 밝히셔서 밤낮으로 저에게 경전을 읽도록 하셨습니다. 거기에 살 때는 먹고 입는 것을 돌봐주시고 고향으로 떠날 때 돈이 없자 여행비용을 주셨습니다.
※ 李紀,字朝振,號默庵,山西潞州人。舉成化乙酉鄉試,授故成知縣、臨洮府知府、福建運使。
13歲,1495,弘治8年。
在臨洮府,知府李紀處讀書。
14歲,1496年,弘治9年。
何景明,「封徵仕郎中書舍人先考梅溪公行狀」︰“在渭源又三年,值御史行縣。縣簿下至驛郵之吏,悉徒走奉輿馬,馳五六十里。公乃浩然嘆曰︰‘可以去矣!吾自為卑役至歷官,未嘗一日屈也。今不能為御史徒走。’遂稱足疾,求罷官還矣。”
위원 역승으로서 3년이 되었을 때 마침 어사가 위원현을 지나갔다. 현의 주부부터 역우(驛郵)의 서리까지 모두 수레와 말을 제공하느라고 50-60리를 뛰어다녔다. 아버지 하신은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 내가 노력하여 낮은 의무 역에서 역승까지 왔는데 하루도 굽힌 적이 없다. 지금은 어사를 위하여 걸어다닐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발에 병이 났다고 말하고 역승을 관두고 고향으로 갔다.
樊鵬,「中順大夫陝西提學副使何大復先生行狀」︰“父致仕,貧不能歸。李公饋之車馬,集諸官相送郊亭上。揚爵酌先生(何景明)曰︰‘吾小友。’”
何景明,「明故中大夫資治少尹,福建都轉運鹽使司運使李公墓誌銘」︰“揚爵酌先君曰︰‘吾老友’,酌景明曰︰‘吾小友’,夫予侍公三年也。”
15歲,1497,弘治10年。
何信返信陽縣白坡後,何景明入邑庠讀書。景明初號白坡。白坡有景明書館。
아버지가 신양현 백파(白坡)로 돌아온 뒤에 하경명은 동네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래서 하경명이 처음에는 호를 백파라고 지었다.
孟洋,「中順大夫陝西提學副使大復何君墓誌銘」︰“梅溪既歸,(景明)乃又從其兄(景韶)受『尚書』。”
하경명은 고향에 돌아와서 맏형 하경소에게 『상서』를 배웠다.
何景明,「祭亡兄東昌公文」︰“是時,二兄(景韶、景暘)學已就緒,予亦從父。施兄從客試之曰︰‘小弱弟可教也。’遂口解『經(尚書)』疑,手授簡筆,朝啟夕勵,不得相違。弗逾載,二兄與弟同舉于鄉。”
何景明,「東昌公哀詞」︰“(景韶)入政光前輩,傳『經』實我師。”
맏형은 나에게 『상서』를 가르쳐준 스승입니다.
沁水李御史瀚(李瀚),時試汝寧,調信陽諸生。先生從兄景暘往,御史讀其文,曰︰奇才!奇才!吾未見山川何盛,生此人也。
어사 이한(李瀚)이 마침 여녕현에 있으면서 신양현 학생들을 불러모아 시험을 보았다. 하경명은 둘째 하경양과 함께 어사에게 갔다. 어사 이한은 하경명의 답안지를 보고 “뛰어난 인재로다! 뛰어난 인재로다! 나는 산천이 얼마나 수려하기에 이런 사람을 낳는지 모르겠다.”고 칭찬하였다.
16歲,1498,弘治11年。
何景明與兄景暘,赴鄉試,同榜,景明舉鄉試第三名。
八月九日,考第一場;十二日,考第二場;十五日,考第三場。
하경명은 둘째 형 하경양과 함께 섬서성 향시를 보았고 둘이 합격하였다. 하경명은 향시에서 3등에 합격하였다. 당시에 신동이라고 소문이 났다.
17歲,1499,弘治12年。
會試不第,游太學。在北京留月餘,返信陽。
樊鵬,「何景明行狀」︰“次年春試,以文多奇字,覆省卷,見除,不第。入太學匝月歸。林祭酒作詩贈之。祭酒贈詩諸生,前未聞也。”
2월 회시에서 답안지에 낯선 글자가 많다는 이유로 답안지를 재심사하였으나 떨어졌다. 국자감에 들어가서 한 달 가량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국자감 좨주 임한(林瀚)이 어린 하경명의 시문을 높이 칭찬하고 떠날 때에는 시를 지어주었다.
林瀚,字亨大,福建人。成化二年進士,弘治初為國子監祭酒,典國學垂十年。
18歲,1500,弘治13年。
伯兄景韶為巴陵縣令,景明隨兄到巴陵。
맏형 하경소가 파릉현 지현이 되었고 하경명도 형을 따라 파릉현에 갔다.
19歲,1501,弘治14年。
從巴陵歸信陽,在信陽西四十里堅山寺讀書。
파릉현에서 신양현으로 돌아와서 신양현 서쪽 40리에 있는 대복산(大復山) 견산사에서 과거시험을 공부하였다. 하경명은 나중에 호를 대복(大復)이라고 지었다.
孟洋,「宿堅山寺何仲默有讀書樓」︰“山深微見月,夜久獨聞泉。海內無多地,人間有別天。松岩花雨落,雲間梵音懸。為問登樓客,長安何處眠?”
“산은 높고 골짜기가 깊어 달도 조금 보이고, 밤이 깊으면 샘물 소리만 들린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곳이 많지 않다.”
堅山在大復山東麓,信陽市西六十里處。
何景明,號大復山人,當在是時。
20歲,1502,弘治15年。
中進士,留京不久,回信陽,娶張氏夫人。
2월 회시에 합격하였다. 개인적으로 높은 사람 누구도 찾아가지 않아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북경에서 잠시 머물다가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돌아가서 장씨 부인과 결혼하였다.
二月,吏部侍郎吳寬、翰林侍讀劉機為會試考試官。
三月,戶部尚書劉健、禮部常書李東陽、兵部尚書謝遷、吏部尚書馬文升、戶部侍郎倌鍾、兵部左侍郎熊翀、刑部尚書閔珪、工部尚書曾鑒、都御史戴珊、通政使沈祿、大理寺卿楊守隨、侍講學士武衛張芮,充殿試讀卷官。
21歲,1503,弘治16年。
同張夫人回京師。
關中李夢陽、濟南邊貢以文章雄視都邑,先生往造,語合。
結交李夢陽、邊貢。
何景明,「李大夫行」︰“憶年二十當弱冠,結交四海皆豪彥。文章天上借吹噓,杯酒人中回顧盼。”
기억해보니 스무살에 세상 사람들과 사귀었는데 모두 뛰어났다. 문장 짓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허풍을 떨었고, 함께 술을 마시면서도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였다.
李夢陽,「送昌穀」︰“是時,少年誰最文?太常邊丞(邊貢)、何舍人(何景明)。”
이때 젊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문장을 제일 잘 짓는가? 변공과 하경명 둘입니다.
22歲,1504,弘治17年。
授中書舍人。
冬,張氏夫人卒京邸。
겨울 장씨 부인이 북경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何景明,「悼往」︰
行雲不歸山,游水難重回。與子一為別,流光倏如推。
形神往無存,夢想弗克諧。孤塚日荒穢,幽泉翳窮埃。
重扃一以閉,千秋寧復開?時至展遐沉,傾醑澆黃菜。
人生重恩義,況茲比翼乖。何能眷新歎,棄擲故所懷?
한 번 흘러간 구름은 산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기 어렵답니다.
이별한 뒤에는, 세월이 밀듯이 빨리 갔습니다.
몸과 마음도 다 떠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
꿈속에서 만날 수도 없습니다.
23歲,1505,弘治18年。
初在京師,五月,奉哀詔,出使雲南、貴州。
5월에 효종 황제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전하려고 운남성과 귀주성에 갔다.
兵科給事中王廷相(1474-1544)奏︰“今天下大可懮者,在於民窮財盡,其勢漸不可為。”
戶部主事李夢陽(1473-1530)上疏。
皇后母金夫人及張鶴齡深恨李夢陽,下錦衣衛獄。
호부 주사 이몽양이 壽寧侯 장연령 형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감옥에 갇혔다.
五月初七,孝宗朱祐樘皇帝崩于乾清宮,享年三十六。
五月十八日,武宗朱厚照繼皇帝位,明年為正德。
武宗繼位後,信任東宮宦官劉瑾、馬永成、谷大用、魏彬、張永、邱聚、高鳳、羅祥等八人。
무종이 즉위한 뒤에 동궁 환관 유근을 비롯하여 8명을 믿고 행정을 맡겼다.
날마다 환관들을 따라 놀러나갔다.
何景明由西安經襄陽至武漢,再西南行。
秋,到武昌。
七月七日,住岳陽。
到湖南,寫詩寄李夢陽。
游華容,至武陵。
八月中秋,住查城(貴州省)驛舍。
路經清平、平越、新添習,到貴陽。
九月九日,住貴州。
出貴陽,到平垻。
由貴州抵雲南。四個月後,孟冬十月初,到永寧。
十二月,到雲南郢中(今江陵)。
何景明,「嗤盜文」︰“盜以為,雲南人稱多異產,到其地,必購香木、珍貝、犀象、齒角、怪石、金銀之屬以還。”
24歲,1506,正德元年。
五月前在信陽,後返北京。
何景明由南方返信陽後,再娶唐縣(河南省唐河縣)王氏。王氏二十二歲嫁何景明。
하경명은 남방에서 신양현 고향집으로 돌아갔고 하남성 당하연 왕씨와 결혼하였다.
夏五月,何景明由信陽返京。
二月,大學士劉健等,以吏戶兵三部及都察院的名義,上疏揭露宦官劉瑾的罪行,被宦官阻撓。
四月,罷吏部尚書馬文升,以閹黨焦芳代吏部尚書。
五月,罷兵部尚書劉大夏。
十月,戶部尚書韓文等上疏,誅內臣馬永成等八人,帝不聽。罷大學士劉健、大學士謝遷。
十一月,劉瑾借旨,謫李夢陽山西布政司經歷。
李夢陽揭露張延齡兄弟的非法事,被下獄。劉瑾意要殺李夢陽,康海救命,免於不死。
이몽양이 장연령 형제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거꾸로 감옥에 갇혔다. 환관 유근이 이몽양을 죽이려고 들자 강해(康海, 1475-1540)이 구명운동을 벌여 죽음을 면하였다.
何景明上書許太宰(許襄毅),勸其堅持正義,敢與宦官鬥爭。
書曰︰“竊為明公劃二策,惟明公自擇焉。一曰守正不撓,不容權閹而去者上策也。二曰自貶以求容於權,而閹不容於天下後世者下策也。”
冬,劉瑾逮南京給事中戴銑等二十餘人。
何景明,「甘露頌」,劉瑾禍國殃民,不行正道,皇帝年少,且不聽勸告。年底決意稱病歸信陽,而不得旨。
25歲,1507,正德2年。
三月,劉瑾借旨,大學士劉健、謝遷、尚書韓文、楊學隨、林瀚、都御史張敷華、郎中李夢陽、主事王守仁等五十三人定為奸黨。(『明武宗實錄』)
『明、武宗毅皇帝實錄』,卷二十四:
正德二年三月,辛未,敕諭文武群臣。朕以幼沖嗣位,惟賴廷臣輔弼,匡其不逮。豈意去歲奸臣王岳、范亨、徐智,竊弄威福,顛倒是非,私與大學士劉健、謝遷、尚書韓文、楊守隨、張敷華、林瀚、郎中李孟暘、主事王守仁、王綸、孫磐、黃昭、檢討劉瑞、給事中湯禮敬、陳霆、徐昂、陶諧、劉茝、艾洪、呂翀、任惠、李光瀚、戴銑、徐蕃、牧相、徐暹、張良弼、葛嵩、趙士賢、御史陳琳、貢安甫、史良佐、曹閔、王弘、任訥、李熙、王蕃、葛浩、陸昆、張鳴鳳、蕭乾元、姚學禮、黃昭道、蔣欽薄、彥徽、潘鏜、王良臣、趙祐、何天衢、徐玨、楊璋、熊卓、朱廷聲、劉玉(合計53人),遞相交通,彼此穿鑿,曲意阿附,遂成黨比,或傷殘善類,以傾上心,或變亂黑白,以駭眾聽,扇動浮言,行用頗僻?朕雖察審,尚務優容,後漸事蹟彰露,彼各反側不安,因自陳俯,遂其休致之請,若自僨則公譴謫之典。其敕內未罪者,吏部查令致仕,毋使惡稔追悔難及。夫人臣以忠敬為本,不聞以阿附為榮。朕不明言暴白,群臣何以知悉?邇來,朕一遵祖宗成憲,申明舊章,除宿弊,汰冗官,欲臻治理爾。文武群臣,尚惟精白一心恪供乃職,必以光明正大為期,必以黨比阿附為戒。且如張懋等凡遇會,奏論列,並無片言,隨人符同,輒聽詭計,列銜而行。朕皆爾釋以後,毋蹈覆轍,自貽累辱。國有昭典,朕不輕貸,故諭︰“是日早朝罷,傳宣群臣跪於金水橋南,劉瑾以敕授鴻臚宣讀之。”其文乃瑾私人屬筆,或曰焦芳為之。
春,伯兄何景韶死於山東東昌府。
春,何景明稱病歸信陽。
봄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是年,何景明長子出生。
26歲,1508,正德3年。
劉瑾免何景明官。
何景明,「述歸賦」︰“皇上御極之三年,詔許罷歸鄉里。”
무종 황제가 즉위하고 3년 뒤에 환관 유근이 하경명 관직을 파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六月壬辰(二十六日),“午朝退,有遺匿名書於御道,數劉瑾罪者。瑾矯旨召百官跪奉天門下,及日暮,盡收下錦衣衛獄,凡三百餘人,而主事何釴等三人已渴死。”
6월 26일 아침 조회를 마치자 어떤 사람이 이름을 숨긴 글을 황제의 전용 도로에 놓았는데 환관 유근의 죄악을 낯낯이 열거하였다. 유근이 황제의 어지를 가짜로 만들어 모든 관원에게 봉천문 앞에 무릎 꿇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모두 금의위 감옥에 가두었는데 300명이 넘었다. 주모자 병부 주사 하익(何釴), 순천부 추관(推官) 주신(周臣), 진사 육신(陸伸) 3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꿇어앉았다가 목이 말라 쓸어지고 죽었다.
是年,康海罷修撰,回陝西武功縣。
이몽양을 구명하려고 애썼던 강해(康海, 1475-1540)도 수찬 관직에서 파면되어 섬서성 무공현으로 돌아갔다. 이몽양이 감옥에 갇히자 강해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강해가 이몽양을 구명하려고 환관도 만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환관에게 아첨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강해는 억울하다고 반박하였다. 이 사건을 소재로 잡극 『중산랑(中山狼)』이 유행하였다.
何景明,『何大復先生集』,卷三十四,「(袁凱)海叟集序」︰
저는 관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학사와 대부 등과 시(詩)에 관하여 토론하였습니다. 저는 말하길 “하은주 삼대 이전에는 하루도 시(詩)가 없는 날이 없었기에 정치도 아름답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삼대 이후에 정치를 말하면 삼대에 비교할 수 없고 시(詩)도 달리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삼대의 좋은 정치가 사라지면서 시(詩)도 전해오지 않습니다. 원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학(理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시를 작은 재주라고 비웃고 짓지 않아 사(辭)도 없어졌습니다. 시를 짓는 사람들은 세상 유행에 따라가고 민의를 정치에 반영하는 상달(上達) 기능을 몰랐기에 시를 짓는 의미(意)도 사라졌습니다. 사와 의 모두 없어지면서 하은주 삼대의 왕도정치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 삼대를 아주 좋아하고 깊이 믿지 않는다면 시 짓는 것이 대성하기 어렵습니다. 악기 타는 것에 비유하면, 옛날 곡조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고 배우기도 어렵습니다. 요즘 곡조는 복잡하면서도 듣기 좋고 쉽게 배울 수 있고 대중들이 좋아합니다. 시인이 자신감을 갖지 못하면 누가 쉽게 배워서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에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옛날 도리를 회복하더라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저는 시(詩)를 배운 것이 향시에 합격한 16살부터 지금까지 관직생활하는 10년입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예전에 배운 것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가 당나라 시기에 극성하였고 당나라 시기에 삼대를 좋아하였던 시인은 진자앙(陳子昂, 659-700, 여러 주장이 있음)이 있고 나중에는 이백(李白, 701-762)과 두보(杜甫, 712-770)을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백과 두보의 가행(歌行)과 근체(近體)는 정말로 본받을 만하더라도 고문(古作, 삼대의 문장을 모방한 작품)은 삼대와는 거리가 있기에 모두 본받을 것은 못됩니다. 그래서 저는 가행과 근체를 배우면서 이백과 두보를 배웠고 당나라 초기와 성당시기 시인들도 배웠습니다. 고문은 한나라와 위나라 시기의 작품을 참고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가행, 근체, 고문 모두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남보다 못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올해는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왔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기에 옛날 시인의 글을 마음대로 읽고 또한 명나라 여러 시인의 문집도 읽었으나 많이 읽지는 못하였습니다. 읽어본 것 가운데 제 마음에 드는 것은 없고 오직 명나라 초기 시인 원개(袁凱)의 시가 가장 낫습니다. 원개의 가행과 근체는 두보를 배웠으나 고문은 옳지 못한 것도 많은데 그가 배운 방법은 반드시 한나라와 위나라 시기 이후의 작품에서 배웠고 도달한 경지는 구체적이지만 대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제가 아는 것이 부족합니다.
景明仕宦時,嘗與學士大夫論詩,謂三代前,不可一日無詩,故其治美而不可尚。三代以後,言治者弗及,詩無異。其靡有治也,然詩不傳,其原有二。稱學為理者,比之曲藝小道,而不屑為,遂亡其辭。其為之者,率牽於時好,而莫知上達,遂亡其意。辭意並亡,而斯道廢矣。故學之者,茍非好古而篤信,弗有成也。譬之琴者,古操,人所不樂聞又難學;新聲,繁艷易學,人又喜之。非果有自信,孰不就所易學以媚人所喜者也?若是,將使古道復,至於無聞焉而已矣。
景明學詩,自為舉子(16살),歷宦於今十年(26살),日覺前所學者非是。蓋詩雖盛稱於唐,其好古者自陳子昂後,莫若李、杜二家。然二家歌行、近體,誠有可法,而古作尚有離去者,猶未盡可法之也。故景明學歌行、近體,有取於二家,旁及唐初、盛唐諸人,而古作必從漢魏求之。雖迄今一未有得,而執以自信弗敢有奪。今年罷宦歸,自以有餘力得肆觀古人之言,又欲取我朝諸名家集讀之,然弗多得,其得而讀之者,又皆不稱鄙意,獨海叟詩為長。叟歌行、近體法杜甫,古作不盡是,要其取法亦必自漢魏以來者,其所造就,蓋具體而未大耳。噫!其所識亦希矣。
雖迄今一未有得,而執以自信弗敢有奪。今年罷宦歸,自以有餘力得肆觀古人之言,又欲取我朝諸名家集讀之,然弗多得,其得而讀之者,又皆不稱鄙意,獨海叟詩為長。叟歌行、近體法杜甫,古作不盡是,要其取法亦必自漢魏以來者,其所造就,蓋具體而未大耳。噫!其所識亦希矣。
吾郡守孫公懋仁,篤於好古,其子繼芳者從予論學,大有向往。嘗索古書,無刻本者,以傳予,謂古書自六經下,先秦兩漢之文,其刻而傳者,亦足讀之矣。海叟為國初詩人之冠,人悉無有知之,可見好古者之難而不可以弗傳也,乃以授之而並系以鄙言,觀者亦將以是求叟之意矣。
叟姓袁氏,名凱,其集陸吉士深(陸深,1477-1544)所編定者,李戶部夢陽有序,其履歷可考而知也,茲不復述。
27歲,1509,正德4年。
何景明在信陽。
二月,又黜大學士劉健、謝遷為民。
四月三日,父何信卒。四月二十九日,母李夫人卒。
何景明悲哀之極。
4월 3일 아버지 하신이 세상을 떠났고 26일 지나 4월 29일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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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인용문 출처:劉海涵編,『何大復先生年譜』︰
28歲,1510,正德5年。
先生居憂。
『(李夢陽)空同年表』︰是年,得先生(何景明)論文書。
이몽양 연표에 따르면 하경명이 문학을 논하는 글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八月,劉瑾伏誅。
환관 유근이 사형당하였다.
『武宗實錄』,正德五年九月,“吏部奏正德二年以來,職官降調、致仕閒居為民,如某某及中書舍人何景明等五十三人,年力才識,皆堪任使。諭皆復其官,俟有缺,斟酌取用。”
이부는 정덕 2년 이후로 직관을 좌천시키거나 사직하고 백성으로 사는 사람 아무개와 중서사인 하경명 등 53명은 나이도 젊고 행정능력과 식견도 관원이 될 만하다고 보고하였다. 황제는 복직시키되 결원이 생기면 참작하여 임용하라고 지시하였다.
『明、武宗毅皇帝實錄』,卷六十七︰
正德五年九月癸酉,
吏部奏正德二年以來,內外大小文職官員,降調,致仕,閒住為民,充軍者,不可勝舉。如尚書李杰、孫需、侍郎陳勖、鄧璋、胡富、陶琰、馬中錫、都御史張憲、賈錠、李貢、邵寶、胡瑞、羅鑒、通政司參議任良弼、府丞趙璜、司業羅欽順、編修何瑭、給事中楊禠、劉澤、徐忱、安奎、潘希曾、陳伯獻、御史吳漳、王潤、曾大有、劉子厲、楊南金、王時中、郎中劉思賢、員外郎韓俊、葉釗、主事唐胄、傅浚、謝廷瑞、趙璧、評事羅僑、中書舍人何景明、布政姜洪、沈林、按察使金獻民、邢義、參政楊守隅、楊茂元、吳彥華、副使劉遜、陳恪、李金、吳廷舉、僉事方良永、盧翊、知府劉麟、張津,凡五十三人,年力才識,皆堪任使。詔皆復其官,俟有缺,斟酌取用。
29歲,1511,正德6年。
服闋。用李東陽薦,復授中書舍人,直內閣制敕房,經筵官。
부모님 삼년상을 마치고 이동양의 추천을 받아 다시 중서사인이 되었고 내각에서 황제 칙서를 짓는 방에서 숙직하였고 경연관도 하였다.
30歲,1512,正德7年。
是年,李夢陽提學江西,以淮王府校與諸生爭,夢陽笞校。王怒,奏之。下江御史萬實,按治夢陽。恐萬實右王,因訐奏之,與對簿。
何景明移書楊一清爭之,始得白。空同年表亦稱,獨何景明上書冢宰楊一清,乞為申解,遂得閒居。
李夢陽與(何景明)書曰︰“僕交遊遍四海矣,赤心朋心,惟世恩、德涵(康海)與仲默(何景明)耳。其難如此,可悲可歎。”
이몽양이 강서성 안찰사 부사 제학을 3년 동안 지내는 동안에 곧 정덕 7년에 회왕부 교위와 학생들이 다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몽양은 교위에게 매질을 하였고 회왕이 화가 나서 황제께 보고하였다. 황제는 어사 강만실(江萬實)을 파견하여 이몽양 사건을 처리시켰다. 강만실이 회왕을 비호할 것 같아 상소문을 올려 법정에서 호소하였다.
이때 하경명은 양일청에게 서신을 보내 이몽양 구명을 요청하였고 사실이 밝혀져 이몽양이 석방되었다.
31歲,1513,正德8年。
八月,兄子士舉於鄉。
32歲,1514,正德9年。
正月,乾清宮災,先生應詔,言時事,以人事不修,天變將復作。至詆曰︰“義子某不當畜也,某宦官不當寵也。”語極剴切,因留中不出,人為之寒心。
33歲,1515,正德10年。
三月三日,前臨洮守李默菴卒。先生四月聞訃,自以髫齡受知遇,為文遣祭,語極懇至。又默菴嘗求先生生(墓)誌,至是為作墓誌以應。
3월 3일 임조부 지부 이기(李紀)가 세상을 떠났다. 하경명은 4월에 부음을 듣고 어릴 때 자신을 알아주신 은혜를 입었기에 제문을 지어 보냈고 제문이 아주 간절하였다. 이기 선생은 하경명에게 묘지명을 써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기에 하경명은 묘지명을 지어 보답하였다.
五月十二日,次子立生。
34歲,1516,正德11年。
是時,四方學士咸願知先生,車馬填門巷,即元老臣卿亡不欲出門下。
사방에서 지식인들이 하경명을 만나려고 몰려왔기에 대문 들어가는 골목에는 수레가 가득하였다. 원로와 높은 관원들도 하경명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였다.
是年,門人樊鵬舉於鄉。
35歲,1517,正德12年。
陞吏部驗封司員外郎,仍直內閣。先是京官非有罪,無九年不遷者,先生特以危行連蹇湮滯中書凡十餘年,始轉今職。
36歲,1518,正德13年。
七月,陞陝西提學副使。
37歲,1519,正德14年。
“春,予董學事,出徽州,入峽白水江,下略陽。”是時,正按試略陽也。
先生教士以德行道誼為先,以秦漢文為法,條約精密,以教法為守令首務。
하경명은 학생들에게 덕행과 도덕을 먼저 배우고 진한(秦漢)시기 글을 법을 삼아 배우라고 가르쳤다.
38歲,1520,正德15年。
按試藍田,值大旱。其山上有泉,先生登山投祭文泉中,須臾大雨。
陝西屬所試諸奇者,悉取正學書院,親自督課,間出俸錢,贍所不給。關中人材於斯為盛。
39歲,1521,正德16年。
正月,作「學約古文序」。
二月,以形勞慮深,卒然嘔血。時,王廷相提學四川,先生一日走書曰︰“孔孟亟矣,學漸支離塗歧矣,後生汶汶以塞。邇得經說數十,欲與約境上之會,期數月之講。”然竟不果。
六月,棄官歸,會道暑益極,抵家六日卒。蓋八有九日也。
2월 과로하고 생각을 많이 하여 갑자기 피를 토하였다. 왕정상(王廷相, 1474-1544)이 사천성 제학을 맡았는데 하경명이 서신을 보내 “공자와 맹자 학술 연구가 시급합니다. 학술이 점점 쪼개지고 갈라져서 후학들은 길이 막혀 막연합니다. 최근에 경전에 관한 주장 수십 조목을 써놓았는데 경계지역에서 만나 몇 달 동안 토론하고 싶습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루지 못하였다.
6월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서 날씨가 몹시 더웠고 집에 온지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다. 8월 9일이다.
先生事兄恭順,能承父母之志,其父母諸兄亦獨甚愛先生。先生一切不好華靡,不治生產。居官所入祿,則又常分所親,故既歸,餘白金不滿三十兩。所在不齎方物。疾且亟,王孺人泣曰︰“官貧,諸兒女幼,君即有不諱奈何?”先生曰︰“若無多患,第不昧天理足矣。”孺人故有內疾號痛,莫支越十六日亦卒,是年十月七日,合葬典術公墓側,在城西七里許,土人至今猶呼為何家饗堂。
하경명은 형님들을 잘 모셔서 글공부를 배웠고 진사가 되고 관원이 되어 부모님의 바람을 이루어드렸다. 부모님과 여러 형님도 하경명을 아꼈다. 하경명은 화려하고 낭비하는 것을 모두 싫어하였고 돈 버는 생업도 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는 동안에 봉록을 받으면 항상 가까운 가족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남은 돈이 겨우 30량도 못 되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지방 특산물을 사거나 물건을 받지 않았다. 병이 위급하자, 부인 왕씨는 “관직하는 동안에 모아놓은 돈도 없고 아이들은 어린데, 당신은 걱정하지 않으니 어찌합니까?”라고 하소연하였다. 하경명은 “큰 걱정거리 없이 하늘의 도리를 어기지 않고 살면 잘하는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왕씨 부인도 질병이 있기에 아프다고 울었고 16일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0월 7일이다. 할아버지 묘지 곁에 합장하였다. 지금도 동네 사람들은 하씨 선영이라고 말한다.
先是,先生病革,屬後事,謂墓文必出李夢陽。張以言、孟望之,以何李論文不合,恐不能得李文。至是,樊鵬撰行狀,孟洋撰墓誌。
王士禎云︰“弘治四傑,惟何氏之後最大!”噫!先生之澤長矣。
하경명은 병이 심할 때 뒷일을 일러주면서 묘지에 관한 글은 반드시 이몽양 선생에게 받으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장이언과 맹양은 하경명과 이몽양이 문학에 관한 견해가 달라서 이몽양에게서 글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경명 문인 번붕이 행장을 짓고 맹양이 묘지명을 지었다.
왕사정은 “홍치 연간의 사걸(이몽양, 하경명, 변공, 서정경) 가운데 하경명 후손이 가장 잘되었다.”고 말하였다. 아! 하경명 선생의 덕택이 후손까지 내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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