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定慧一體 第 三
(3. 정과 혜는 하나의 바탕인 것이다)
이 품에서는 定과 慧가 둘 아님을 설하시고,
또한 정과 혜를 바르게 요달하여
일상 일행삼매를 행할 것을 자세히 일러주시고
만일 정과 혜를 둘로보면
곧 相見을 이루게 됨을 지적하셨다>
師示衆云하시되 善知識이여 我此法門은 以定慧爲本이니
大衆은 勿迷言定慧別하라 定慧一體요 不是二니 定是慧體요
慧是定用이라 卽慧之時에 定在慧하고 卽定之時에 慧在定이나니
若識此義하면 卽是定慧等學이니라
諸學道人은 莫言-先定發慧거나 先慧發定各別하라 作此見者는
法有二相하여 口說善語하나 心中不善하여 空有定慧하여
定慧不等이거니 若心口俱善하여 內外一種이면 定慧卽等하리라
自悟修行은 不在於諍이니 若諍先後하면 卽同迷人이라
不斷勝負하여 却增我法하여 不離四相이니라
善知識이여!
一行三昧者는 於一切處에나 行住坐臥에 常行一直心이
是也이니라 如淨名經云으로 直心是道場이요 直心是淨土이니
莫心行諂曲하여 口但說直하고 口說一行三昧하면서 不行直心하나니
但行直心하여 於一切法에 勿有執着이니라 迷人은 着法相하며
執一行三昧하여 直言坐不動하고 妄不起心이 卽是一行三昧라하나
作此解者는 卽同無情하여 却是障道因緣이니라 善知識이여
道須通流거늘 何以却滯인가 心不住法하면 道卽通流거니와
心若住法하면 名爲自縛이니 若言坐不動是라면 只如舍利弗이
宴坐林中하다가 却被維摩詰訶니라 善知識이여 又有人이
敎坐看心觀靜하고 不動不起라고 從此置功하면 迷人不會하고
便執成顚하여 如此者衆하여 如是相敎나니 故知大錯니라
善知識이여 定慧猶가 如何等하면 猶如燈光하여 有燈卽光이며
無燈卽暗이니 燈是光之體요 光是燈之用이라 名雖有二이나
體本同一이니 此定慧法도 亦復如是니라
대사께서 대중에게 일러 보이시기를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이 되니
대중은 어리석게 정과 혜가 다르다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한바탕이요 이것이 둘이 아니니,
정은 이 혜의 體요
혜는 이 定의 작用이라,
혜에 즉할(작용이 어지럽지 않고 定할)때에
정이 혜에 있고, 정에
즉할(定이면서 밝게 머묾)때에
혜가 정에 있나니
만일 이 뜻을 알면 곧 이 정과 혜가 같음
(等)을 배운 것이니라.
모든 도 배우는 사람은
먼저 정에서 혜가 일어난다 거나
먼저 혜를 밝혀서 정이 된다 하여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일으킨 자는
법이 두 相이 있어(相見)서 입으로는 바른 말을 한다하나
마음 가운데 바르지 못하여 헛되이 정혜가 (달리)있어서
정과 혜가 같지않다 하거니 만일 마음(생각)과 입(말)이
모두 발라(善)서 안과 밖이 한 가지면
정과 혜가 곧 평등(不二)하리라.
스스로 깨달음을 수행하는 것은
다투는데(시비에) 있지 않음이니
만일 앞 뒤를 다투면(분별 시비하면)
곧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지라,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못하여
도리어 나다 법이다 하는 것
(아집, 법상집)만 더하여
四相을 여의지 못할지니라.
선지식이여!
일행삼매라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움직이고
멈추고 앉고 누움에 항상 한결같이
곧은 마음(바름 곧 청정본성)으로
행하는 이것 이니라.
정명(유마)경에도 이와 같이 이르셨으니
"곧은 마음이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이 정토이니
마음과 행이 굽고 아첨함이 없어
입으로는 다만 곧음을 말하고,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 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하지는 않나니
다만 곧은 마음으로 행하여
일체법에 집착을 두지 말지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법상
(모든 것들 또는 법이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며 일행삼매라는 것(말)에만
집착하여 바른 말이라하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마음을 망령되이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옳은 일행 삼매라'고 하나
이렇게 알게 되는 자는 정식이 없는 것
(무정물)과 같아서 도리어
바른 도를 장애하는 인연
(원인 되는 조건)이 되느니라.
선지식이여!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흐르게 할 것 이거늘
어찌 도리어 막히게 할 것인가?
마음이 모든 것(법)에 머물지 아니하면
도가 곧 통하여 흐르려니와
마음이 만약 모든 것(법)에 머물면(집착)
이름하여 스스로 얽매인다 하는 것이니,
만일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 만이 옳다고 말한다면
사리불같이 다만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다가
도리어 유마힐의 힐책의 말을 당하게 될 것이니라.
선지식이여!
또 사람이 있어 가르치기를
마음을 지켜 고요함을 관하고,
움직이지 않고 일어나지 아니하게 하는
이것으로 功(수행의 과)이 된다고 종용하면,
미혹한 사람이 알지 못하고
쉽게 거꾸로 뒤집힌 것에 집착하게 되어
이같은 자가 많게 되서
이와 같이 서로 가르치게 되나니,
그러므로 알라.
크게 그르치게 되는 것이니라.
선지식이여!
정과 혜가 같음이 무엇과 같으냐 하면,
마치 등의 광명과 같아서 등(定)이 있어
곧 빛(慧)이 있으며 등이 없으면 곧 어두우니
등은 이 광명의 體요
광명은 이 등의 작用이라
이름은 비록 둘이 있으나
바탕(체)은 본래 서로 같으니,
이 정혜의 법(실상의 진리)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강설
"定과 慧로써 근본이 된다" 하신 것은
定은 고요하고 청정한 바탕인 體요,
慧는 그 빈 바탕에 묘하게 있는 반야를 일컫는 것으로,
定은 혜의 바탕인 그릇이라면
慧는 상즉해 있는 작용할 줄 아는 것이니
둘이 아닌 것이다.
마치 잉크물이라면 물과 푸른색은
나눌 수 없는 둘 아닌 잉크이듯이
반야가 없는 體인 定은
자성이니
법성이니
할 것도 없는 空無의 단멸공 일 뿐인 것이다.
부처가 부처다운 조건은
곧 체(定)에 이 반야가 소소영령하게
妙有함으로써인 것이다.
따라서
혜에 상즉(작용이 어지럽지 않고 定할)하기에
정이 혜에 있고 정에 상즉(定이면서 밝게 머묾)하기에
혜가 정에 있다 하신 것은
곧 둘 아닌 것을 이르신 것이니,
이 바른 지혜가 없으면
본성은 흐려 고요하지 못하고
어지러워(번뇌, 망상)지며
이 체가 고요할(定) 때에
혜가 발현된다는 말씀이며,
상즉한다는 것은
서로 함께(相卽)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선후가 없고 둘이 아니니
이것을 스스로 분별하는 소견으로
다르다 하는 무리들이 있어
두가지로 보게 되는 것(相見)이니,
이런 자는 입으로는 불법을 운운하나
마음에는 바르게 깨달은 지견이 없어
허물을 짓게 되는 것이외다.
마음(생각)과 말(입)하는 도리가 함께
옳바르(善)면
안(體: 마음: 定)과
밖(혜가 밝아 바른 작용, 바른 생각 포함)이
평등(절대 空한 不二, 같음)한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길은 분별망상을 여의어야
고요(定)하고 밝음(반야)을 증득하는 것이니,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으로 일 삼는다면
어리석어 헛된 짓임을 모르고
도리어 아상 법상만 더하므로
아, 인, 중생, 수자상인
四相을 여의지 못함을 경책하신 것이다.
※
정혜 不二는
본성의 平等門
(진공묘유의 일체 공한 실상)의
法(진리)을 설함이요,
정혜를 따로 이름하는 것은
差別門으로 살펴 볼 줄도
더불어 밝게 알아야 할 것이다.
또, 곧은 마음이란 것은
바른 마음(直心)을 말하는 것이요,
바른 마음은 곧 청정본성이니
이 청정본성은 진공묘유라
참으로 맑아 깨끗하여 상이 없는 가운데
묘한 있음(반야)이 있어 맑아 밝은 경계인 것이다.
行, 住, 坐, 臥 때와
곳에 상관않고
이 마음 그대로 행하는 것을 일행삼매
(산란한 마음을 고요히 하여 바르게 되어
망념에서 벗어난 행)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행삼매라는
언사(말)의 법상에 집착(말에 떨어져)하여
앉아서 일체 생각을 끊음을 삼매로 삼아
식정이 없는 무정물(無機物)과 같이 空이나
無記에 떨어지게 되면
도리어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因이 되는
큰 병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바른 삼매는
항상 망상 망념이 끊어져야 하되
밝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것이다.
그렇게 되는 수단의 지름길이
화두를 들어 의단이 커지면
자연 定 가운데 깨어있는 일행(일체의 행) 가운데
삼매에 들 수 있음을 참고로 일러두는 바이다.
도(진리: 覺)는
통달함이거늘 낙공, 무기에 떨어지거나
아집 법상집에 국집하게 되면
도리어 장애가 됨을 일깨워 주셨으며
생각이 일체에 끄달려 집착하지 않으면
통달하게 되지만,
만약 아상 법상으로 일체 무엇이든 집착하면
스스로 그 집착하는 것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니,
만일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을 바른 수행으로 삼는다면
사리불이 깊은 산 속에서 좌선한다고 앉아 있는 것을
본 유마거사가
"세상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을
참선이라고 생각지 마시오.
불도의 깊은 뜻은 일체가 공한 것이라
모든 존재(相)를 인정하지 않아 집착하지 않음이요,
그대처럼 모든 것을 피하여 앉아서 공에 머묾은
오히려 모든 것(여기서는 空)을 인정하는 것이니,
산속에 은거해 앉아 있을지라도 마음이 산란함은
오히려 여읠수 없는 것이요" 라고
힐책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라 하는 것이다.
또 만일 앉아서 마음지켜 고요함을 관하고
움직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는 것만을 국집하여
功이 된다(장좌불와도 목적이 아닌 수단임)고
가르친다면 꺼꾸로 뒤집혀 잘못 아는 어리석음이 되니,
크게 그르침이 되어 그렇게 배우고 전하여
수행을 그르치게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과 혜는 등과 등의 불빛과 같으니
등은 不동인 體니 定이요,
불빛은 어둠을 밝히는 작用인 慧라,
정과 혜가 둘 아닌 것이다.
일체의 행하는 가운데
상에 집착하여 망념을 일으키지 않고
깨어 있기를 한결같이 청정본성대로(곧게)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일행삼매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