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춘추)-68 僖公 上篇5
五年春 晉侯殺其世子申生(오년춘 진후살기세자신생)
5년 봄, 진후(晉侯)가 그 세자 신생(申生)을 죽였다.
杞伯姬來朝其子(기백희래조기자)
기(杞)의 백희(伯姬)가 와서 그 아들을 조회(朝會)시켰다.
夏 公孫茲如牟(하 고온자여모)
여름, 공손(公孫) 자(玆)가 모(牟)에 갔다.
公及齊侯宋公陳侯衛侯鄭伯(공급제후송공진후위후정백)
희공이 제후(齊侯)·송공(宋公)·진후(陳侯)·위후(衛侯)·정백(鄭伯)·허남(許男),
許男曹伯會王世子於首止(허남조백회왕세자어수지)
조백(曹伯)과 더불어 왕세자(王世子)와 더불어 수지(首止)에서 모임을 가졌다.
秋八月 諸侯盟於首止(추팔월 제후맹어수지)
가을 8월, 제후(諸侯)가 수지(首止)에서 맹약했다.
鄭伯逃歸不盟(정백도귀불맹)
정백(鄭伯)은 도망쳐 돌아가서 맹약하지 않았다.
楚人滅弦 弦子奔黃(초인멸현 현자분황)
초나라 사람이 현(弦)나라를 멸했다. 현자(弦子)는 황(黃)나라로 망명했다.
九月戊申朔 日有食之(구월무신삭 일유식지)
9월 무신삭(戊申朔)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冬 晉人執虞公(동 진인집우공)
겨울, 진(晉)나라 사람이 우공(虞公)을 사로 잡았다.
해설: 5년봄 왕의 정월 신해삭(辛亥朔)은 동지(冬至)였다. 주(周)의 정월은 하(夏)의 11월이다. 희공이 종묘에 고삭(告朔)한 뒤 대(臺)에 올라서 천문(天文)을 바라 보고 그 관찰한 바를 기록에 올리게 하였다.무릇 분(分: 춘분과 추분)·지(至: 동지와 하지)·계(啓: 입춘과 입하)·폐(閉: 입추와 입동)에는 반드시 그 기상(氣象)을 기록하도록 했는데, 이는 재변과 상서의 조짐을 살펴서 이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진후(晉侯)가 그 세자 신생(申生)을 죽였다. 처음에 진(晉) 헌공(獻公)이 여희(驪姬)를 부인으로 삼으려 하여 거북점을 치게 했더니 불길했으며, 산가지로 점치게 했더니 길하였다. 헌공이 말하기를, "산가지 점에 따르겠다"고 하니, 거북점을 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산가지는 짧고 거북은 긴 것이니, 긴것을 쫓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거북의 점에서 이르기를 ‘총애를 한 몸에 차지하면 마음이 변해서, 주군의 귀여움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향내나는 풀과 악취나는 풀을 한 곳에 두었을 때 10년 이면 악취는 오히려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산가지 점은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헌공(獻公)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여희(驪姬)를 세웠는데, 그가 해제(奚齊)를 낳았고, 그 동생이 탁자(卓子)를 낳았다. 해제(奚齊)를 태자로 세우려고 중대부(中大夫)와 함께 계획을 짰다. 여희가 태자에게 이르기를, "주군께서 제강(齊姜: 태자의 생모)을 꿈 꾸셨다는데, 빨리 제사를 올리십시오" 하니, 태자가 곡옥(曲沃)에서 제강을 제사 지낸 후 조(胙: 제사 지낸 술과 고기)를 헌공에게 바쳤다. 헌공이 때마침 사냥을 갔기 때문에, 여희는 그 술과 고기를 엿새 동안 궁(宮)에 두었다. 엿새 만에 헌공이 돌아 왔는데 그 음식에 독(毒)을 넣어서 드렸다. 헌공이 땅에 고수레를 했더니 땅이 솟아 올랐으며, 이를 개에게 주었더니 개가 죽고, 소신(小臣: 임금의 측근에 모시는 낮은 벼슬아치) 에게 주자 소신이 죽었다. 여희가 울면서 말하기를, "도적은 태자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태자는 신성(新城: 곡옥)으로 달아 났으며, 헌공은 그 부(傅)인 두원관(杜原款)을 죽였다. 어떤 사람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주군께 변명 하시오. 주군께서는 반드시 받아 들이실 것입니다"고 했으나, 태자가 말하기를, "주군께서는 희(姬)가 아니면 가만히 있어도 편안치 않고 잘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니, 재가 변명 한다면 희가 반드시 죄를 받게 될 것이다. 주군께서는 이미 늙으셨고 나도 변명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이에 "그렇다면 나라를 떠나 시렵니까?"하니, "주군께서는 정말 그죄를 살피지 못하고 계시다. 이 죄명을 쓰고 나간다면 누가 나를 받아들이겠는가?" 라고 했다. 그리고 무신(戊申)에 신성(新城)에서 목매어 죽었다. 여희가 다시 중이(重耳)와 이오(夷吾) 두 공자를 참소 하여 말하기를, "이들 두 사람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고 했다. 그래서 중이는 포(蒲)로 달아 나고, 이오는 굴(屈)로 달아 났다. 진후(晉侯)가 사자를 보내어 태자 신생을 죽인 까닭을 알려 왔다.
처음에 진후(晉侯)가 사위(士蔿)를 시켜 중이와 이오를 위해 성을쌓게 하였다. 튼튼히하지 않고 잡목의 나뭇가지를 주춧돌 밑에 묻는 엉성한 공사였다. 이오는 불안하여 이를 헌공에게 호소했다. 헌공이 사자를 보내어 야단을 치자, 사위는 계수(稽首: 머리를 깊이 숙이는 절)하며 말했다.
"제가 들은 말에 의하면, ‘상(喪)도 아닌데 조심스런 얼굴, 반드시 걱정스런 일을 당하리라. 싸움도 없는데 성쌓기, 도리어 원수의 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적의 성이 될 물건을 어찌 튼튼하게 하겠습니까? 분부를 받고도 분부를 거역했으니 불경이지만 적의 성을 튼튼히 쌓는다면 이는 불충입니다. 충과 경이 없이 어찌 임금을 섬길수 있겠습니까? 시(詩)에 이르기를, ‘덕이 있으면 나라가 편안하고, 자식들이 화목하면 그것이 바로 성이된다’고 했습니다. 주군께서 덕을 닦으시고 아드님을 튼튼히 세우신다면 어떠한 성이라도 그것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대로라면 3년안에 전쟁이 일어 나겠지요. 어찌 꼼꼼한 공사 따위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나라 안이 소란스러워 지자 헌공은 시인(寺人) 피(彼)를 시켜 포(蒲)를 치게했다. 중이가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명에 항거할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명령을 내리기를, "항거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나의 적(敵)이다"하고는 담을 넘어서 달아났다. 피가 그소매를 베었으나 결국은 적(翟: 狄)으로 달아 났다.
기(杞)의 백희(伯姬)가 귀녕(歸寧: 근친하는것)했다. 그 아들이 아직도 어리고 약하여 우리 희공께 조현(朝見)하는 예를이루지 못했으므로, 그 어머니(伯姬)에 의지해서 조현했다. 여름에 공손자(玆)가 모(牟)로 가서 아내를 맞이 했다. 제후(齊侯)가 수지(首止)에 모인 것은, 왕(王)의 태자 정(鄭)과 모임을 가져서, 주나라를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혜왕(惠王)이 태자 정(鄭)을 폐하고 왕자 대(帶)를 세우려 했기 때문에 제 환공이 태자와 모임을 가져서 그 지의를 굳히려는 것이었다.
진(晉)나라의 원도도는, 정나라의 신후가 소릉(召陵)에서 자기를 배반 했음을 원망 했다. 그랬기 때문에 신후에게 권해서 제 환공이 내려준 고을인 호뢰(虎牢)에 성을 쌓으려고 했으므로 말하기를, "훌륭한 성은 큰이름을 남기게되며 자손이 잊지않는다. 내가 그대를 도와서 청(請)하리라"하고 제후(諸侯)에게 청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그리고는 정백(鄭伯)에게 참소 하여 말하기를, "그 내려준 고을에 성을쌓는 것은 장차 배반하려는 것입니다"고 했다. 신후는 이것때문에 죄를 얻게되었으며 마침내 죽음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다.
왕세자 정(鄭)이 회맹 하지 않았으므로, 가을에 제후(諸侯)가 비로소 맹약했다. 왕이 주공(周公)을 시켜 정백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힘을 빌려주어 초나라가 너를 따르게 하고, 또 진(晉)나라도 너를 돕게 하면 조금은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정백이 왕명을 기뻐했으나 제나라에 조회하지 못했음을 두려워 하여 도망쳐 돌아오고 맹약하지 않으려 했다. 공숙(孔叔)이 이를 말려서 말하기를, "한 나라의 임금된 자는 경솔해서는 안 됩니다. 경솔하면 친한 이를 잃게 되고, 친한 이를 잃게 되면 재앙이 반드시 옵니다. 어려운 때를 당하여 맹약을 청한다면 잃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정백은 이 말을 듣지 않고 그 군대를 버려둔 채 돌아 왔다.
초나라의 투누오도(鬪穀於菟)가 현(弦)을 쳐서 없애자, 현자(弦者: 현나라의 임금)는 황(黃)으로 달아났다. 이 무렵 강(江)·황(黃)·도(道)·백(柏) 등의 나라는 모두 제나라와 친목 관계에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현(弦)과 인척 관계에 있었다. 현자는 이것을 믿고서 ,초나라도 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 진후(晉侯)가 또 우(虞)나라의 길을 빌려서 괵을 쳤다. 궁지기가 말하기를, "괵은 우(虞)의 거죽(表: 껍데기)입니다. 괵이 망한다면 우는 반드시 이에 따르게 마련입니다. 진나라에 길을 열어 주어서는 안되며, 도적을 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환 번도 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두번 다시 할수 있겠습니까? 속담에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가 서로 의지 하며, 입술이 없어 지면 이가 시리다[보거상의(輔車相依) 순망치한(脣亡齒寒)]’는 것이 바로 우와 괵을 두고하는 말입니다"고 했다. 우공이 말하기를, "진나라는 우리와 동성이다.
어찌 우리를 해칠 것인가?" 하니, 궁지기가 말하기를, "태백과 우중(虞仲)은 태왕의 아들이나 왕실을 계승하지 않고 오나라로 도망갔습니다. 괵중과 괵숙은 태백과 우중의 아우가 되는 왕계(王季)의 아들로서 주문왕의 경사가되어 주왕실의 공로를 세운 기록의 문서가 맹부에 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동성인 괵을 치려 합니다. 하물며 우리를 사랑할리 있겠습니까?"라고 했으나,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궁지기는 그의일족을 데리고 떠나면서 말하기를, "우는 이번 섣달(12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12월 병자 삭(丙子朔)에 진(晉)나라는 괵을 쳐 없앴는데, 괵공 추(醜)는 경사(京師)로 달아 났다.
진나라의 군대가 돌아 오는 길에 우에 머물렀다가 드디어 우를 엄습해서 이를 쳐없앴다. 우공과 그 대부 정백(井伯)을 붙잡아서 진(秦) 목희(穆姬)의 시집가는 데로 따라가게 했다. 우나라의 제사는 진나라가 맡아서 하기로 하고, 그 직책과 공납(貢納)은 왕에게로 돌려 보냈다. 경문(經文)에 진나라 사람이 우공을 잡았다고 한 것은 우나라를 죄줌과 동시에 그것을 쳐없애는 것이 쉬웠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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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 春秋
春秋(춘추)-68 僖公 上篇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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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8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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