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쉬어가는 공원/김수지
고신대병원을 나와 약국으로 가기위해 큰 도로가 횡단보도 앞에 섰다. 폭염주의보를 알리는 재난 문자를 받긴 했지만 이 정도라니. 잡생각이 싹 달아날 만큼 따끔거리는 햇살의 폭력에 그저 멍하니 오만상을 쓰며 신호등 빨간색 숫자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오씨입..육, 오씨입오..”
혀 짧은 발음으로 1초마다 바뀌는 숫자를 허겁지겁 따라 말하던 아이가 불쑥 내게 말을 꺼냈다.
“엄마, 이제... 으음... 약을 타고오... 나서어... 16번 버스를 타고... 으음... 그... ‘나누리파크’에 가는 건 어떨까요?”
생각지도 못한, 꽤나 애를 쓴 긴 문장의 이 귀여운 제안을 들은 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 곳은 주말에 가끔씩 아빠차를 타고 함께 놀러갔던 곳인데, 16번 버스를 타고 고신대병원으로 가는 길 창문 넘어 지나가는 풍경으로‘나누리파크’를 보았던 모양이다.
오늘은 병원 진료 대기 시간이 유난히 더 긴 날이었다. 예약된 시간보다 1시간 이상 늦어지는 바람에 병원의자에 앉아 무료하게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아이는 한 번도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엄마가 너무 좋아서 엄마 품에 포옥 안겼다가, 혼자 재미있는 것을 상상하며 웃었다가, 엄마 얼굴과 입술에 수없이 뽀뽀를 해주었다. 그런데 진료가 끝나고 병원을 나서는 동안에도 어딜 가고 싶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제 약국에 가서 약을 받고 나면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는 걸 알아서일까. 딱 잘 맞춘 것 같은 기막힌 타이밍에 제안을 한 것이, 뭉클한 감정이 들만큼 너무 기특하고 귀여워서 땡볕아래 구겨졌던 내 얼굴도 미소로 활짝 피어버렸다.
‘나누리파크’ 앞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아이는 벌써 신이 났다. 폴짝폴짝 제자리 뛰기를 하며 흥분한 아이가, 또 다시 맥락이 전혀 없는 말들을 외치기 시작했다.
“코끼리! 거북이! 거북이! 거북이! 바다 거북이는 바다 속에서는 재빠르지만, 땅 위에서는 느릿느릿 걸어요!”
아이는 기분이 좋으면 이렇게 뜬금없는 말들을 웃으며 여러 번 반복한다. 세상의 모든 동물들을 좋아해서인지, 기분이 좋을 땐 특히 좋아하는 동물 이름들을 불쑥불쑥 외치고, 평소에 자주 연습했던 자신 있는 문장을 말하기도 한다. 자폐를 가진 아이들에게 흔히 보이는 모습이다. 하루 거의 대부분을 일방통행인 말만 늘어놓는 아이라 해도, 이렇게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직도 문득문득 신기하기만하다. 불과 2년 전까지 ‘엄마’ 라는 말도 하지 못했던 아이는 어느새, ‘나누리파크’로 가는 길 내내 씩씩하게 엄마 손 이끌고 앞장 서 들어가서는 직원이신 할머니께 인사도 예쁘게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뽀로로주스 딸기 맛 주세요!”
‘나누리파크’는 감천동에 위치한 공원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장소라 지금까지 서너 번은 온 것 같은데, 이렇게 아이와 둘이서만 온 건 처음이라 그런지 소소하나마 낯선 설렘이 느껴졌다.
이 공원은 어린이카페, 실내 놀이터와 야외놀이터까지 있어서 주말에는 항상 아이들로 붐볐던 터라, 이렇게 사람이 거의 없는 평일에 와보니 비로소 이곳의 풍경이 찬찬히 눈에 들어온다. 소박하게 잘 꾸며놓은 공원 뒤로, 햇살 아래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이 공원은 아이들 뿐 아니라 시니어를 위한 훌륭한 쉼터였다. 어린이카페만 들락거리며 아이를 챙기느라 몰랐는데, 바로 옆 건물은 어르신들이 차를 마시고 안마도 받으실 수 있는 문화카페였다. 문화카페 앞엔 다양한 운동기구도 있고, 한산한 어린이카페와는 달리 이미 문화 카페 안과 밖에는 꽤 많은 노년층들이 그 곳을 여유롭게 즐기고 계셨다. 산책로도 예쁘게 잘 꾸며져 있었고, 반려동물만을 위한 산책길도 따로 마련되어있는, 모든 공간들이 섬세하고도 다정하게 ‘쉼’을 배려해놓은 공원이었다.
멀리서 조금씩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공원 전체에 은은하게 흐르는 피아노 연주 음악 사이로, 볕을 머금은 초록 잎사귀들과 선명하게 피어난 여름 꽃들이 반짝반짝 흔들거린다. 한껏 신이난 아이가 갑자기 산책로 옆에 있는 작은 공연장에 올라서더니 즉석으로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씰룩쌜룩 어설픈 몸짓으로 춤까지 추면서 즉석 곡을 불렀는데, 지나가던 어르신 두 분이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끝까지 다 지켜보시고는 큰 박수를 쳐 주었다. 귀한 관객 두 분의 응원에 아이가 한껏 우쭐해진 표정이 되어 근엄한 눈빛으로 의기양양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온 신경을 집중해, 아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 음절 한 음절을 꼭꼭 눌러 담아가며 들어서인지, 노래 가사와 음을 단박에 다 외워버렸다. 자꾸만 흥얼거리게 되는 예쁜 곡이었다.
엄마가 사랑하면,
나도 사랑해요.
엄마도 사랑하고,
아빠도 사랑하고,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사랑해요.
나는, 나는, 벙글벙글
싱글싱글 벙글벙글
나는, 나는, 너무 좋아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랄랄라- 랄랄라-
나는, 나는, 강아지
나는, 나는, 고양이
우리 모두 좋아요!
작지만 조경이 참 아름다운 산책로를 아이와 두 바퀴, 세 바퀴, 손 꼭 잡고 걸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화용언어가 아닌 일방적인 말과 엉뚱한 질문들, 맥락을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의 향연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확실하게, 또 한 줌의 행복한 시간을 나누었다. 같은 장소에 함께 서서, 같은 행복감을 느끼며, 오래 함께 웃었다. 이해가 조금 안 된다는 것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 눈을 맞추지 못한다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닐 수 있었다. 꼭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사랑이라는 이 명확한 감정이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한다.
공원의 카페 직원들이 모두 시니어라는 점이, 이곳의 분위기를 더욱 따스하고 여유 있게 만든다. 모두 60대가 넘어 보이시는 분들이 깔끔하게 카페 유니폼을 맞춰 입고, 조금은 느린 듯 정성스레 커피와 음료를 집중하여 만드는 모습과, 아이 손님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할머니가 되어주시는 모습이, 그 자체만으로도 이 공원이 말하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잘 알게 해준다. ‘느릿함’이 주는 빈 시간들 사이로 ‘넉넉함’이 물드는 곳. 활짝 웃는 아이의 두 볼이, 석양에 발그레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