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살티 김영제와 김 아가타 묘(순례지/성지)
간략설명:온몸에 흐른 피고름과 동정녀의 희생
지번주소: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산218-1
부산 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인 살티 공소에 그 묘가 모셔져 있는 병인박해 당시의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1827-1876년)는 일찍이 그 위세가 지방에 크게 떨치던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조부 김교희 프란치스코(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부는 당시 서울을 왕래하면서 남인파에 속한 선비이자 초대 천주교회의 창설자인 권일신, 정약용 등 양반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익히고 함께 영세함으로써 부산 지방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 김상은 야고보(1804-?) 역시 부친의 뜻을 따라 입교해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조부 김교희는 교난을 피해 인근 간월골(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피신했다. 여기서 김영제는 김상은과 경주 최씨(마리아)의 사이의 2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가 전국을 휩쓸면서 쫓기던 신자들은 영남 지방에까지 밀려왔다. 이때 김상은 야고보는 지방 관리들의 횡포와 고발, 재산 탈취, 집안 어른들의 배교 강요를 견디다 못해 간월을 떠나 경상북도의 자인골, 청도의 정자동, 월성군 탑곡 등을 전전하며 피해 다니다 박해의 칼날이 무디어진 1850년 12월 다시 간월의 불당골로 돌아왔다.
간월로 돌아온 김영제는 부산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경상도 지방을 담당한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 및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맞이해 공소를 설립하고 1858년에는 공소 건물을 짓기도 했다. 당시 간월골에는 경기 · 충청 · 전라도 등지에서 박해를 피해 온 많은 신자들이 모여 교우촌을 이루었다.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후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등도 이 지방에서 살다가 붙잡혔다.
1860년 경신박해로 김영제는 부친과 여동생 김 아가타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부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이 박해는 조정과 무관하게 지방 관리들이 사사로이 일으킨 것으로 조정의 반대와 당사자들의 파면 등으로 9개월 만에 그치고 대부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김영제만은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대구 감영을 거쳐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풀려났다. 결국 경신박해의 여파로 인해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공소도 불태워져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