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르 까레는 원래 냉전 스파이 소설로 유명한 작가입니다만, 이번에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가 영화화 된다고 하여서 원작을 망치기 전에 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렛미인의 감독이라고 하더군요. 원작을 망치진 않을지도...) 생각보다 소설이 훌륭해서 그 작가 소설을 쭉 찾아읽고 있습니다.
소설은 대표작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포함하여 세 편 밖에 읽지 않았지만 냉전체제에 대한 '거의 절망에 가까운' 분노가 작가의 특징으로 보입니다.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원래는 사무직으로 돌아선 스파이가 옳은 해석이라더군요.)가 냉전체제 한테 농락당하는 중년 스파이의 비극이고 (상당부분 배경을 공유하는)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는 이중첩자의 존재를 확인해달라는 임무를 받고 분쟁 와중에 버림받은 사람들, 예전 동료들의 흔적과 기록을 뒤져가는 '스마일리'라는 주인공의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존 르 까레의 스마일리는 톰 클랜시 '잭 라이언'에 해당하는 중요 캐릭터입니다.)
비교적 후기작에 해당하는 '러시아 하우스'는 (숀 코네리, 미셸 파이퍼 주연으로 90년대에 영화화되기도 했으며)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배경으로 냉전 끝물에 군사과학정보를 폭로함으로써 위선적인 냉전 대립구도를 끝내고 싶어했던 '괴테'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숀 코네리가 연기한 '발리'라는 인물은 위스키를 사랑하고, 체스와 색소폰 연주에 능한 다소 퇴폐적인 매력 중년으로서 괴테의 영향을 받아서 서커스(영국정보부의 별명)의 의도가 아닌 자신 만의 옳은 길을 선택합니다.
소설 속 화자가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듯한 결말을 보여주는 전작들과는 달리 이 소설은 조금더 구체적인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괴테와 카짜의 열정은 그들을 도청하고 녹음된 내용을 정리하던 정보부의 관료들의 마저도 뒤흔들어댑니다. (영화에서는 그저 미국측에서 주도권을 가져갔다는 방향전환의 의미로 다뤄지면서 묘사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자신이 영웅적인 행동을 하게되면, 당신은 평범한 개인으로서 행동해달라'는 괴테의 강요가 이끌어낸 발리의 마지막 결론은 소설로서의 스펙터클에는 미치지 않지만 긴 여운을 줍니다.
소설이 쓰여진지 2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항상 시끄러운 뉴스 기사들 사이에서 '어떤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인지' 생각해본 적도 정말 오래된 것 같습니다. (삼겹살 600그램에 3천원 하는 세상?) 저도 영미권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러시아인 캐릭터처럼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P.S. 소설 뒤에 붙은 설명글에는 작가를 '반소련주의자'라고 지칭합니다만, 별로 옳은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소설 화자들은 이혼한 아내가 있다는 설정이 종종 등장합니다. 화자들은 아내와 소통하길 간절히 희망하지만 항상 이루지 못한 채로 결말을 맞습니다. 작가는 냉전의 반대편인 소련이나 동독이 언젠가는 화해해야할 배우자 같은 존재로 묘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