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 / 김정태
바람은 제 힘만으로 앞서 가는 바람을 밀고 간다. 그리하면서 바람은 제 소리는 내지 않는다. 흔히 바람소리라고 하는 것은 바람이 어딘가로 밀려가며, 그곳에 있는 물체에 닿아 섞이고 포개지며 감기는 과정에서 나는 소리이다. 어느 날 담양의 대숲을 지나던 바람은 댓잎을 비비고 흔들어 소리를 만든다. 이것은 댓잎만의 소리도 바람만의 소리도 아니다. 순천만 갈대의 사운 대는 소리나 억새의 서걱거림도, 실은 그들의 몸이 바람과 비벼져 내는 소리이지 바람 자체의 소리는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바람은 제 소리를 제 목청으로는 내지 않고 다만 섞이고 감긴다.
바람은 때로 섞이고 비벼지는 과정에서 물체의 냄새를 제 몸에 섞는다. 이럴 때 바람과 소리와 냄새는 치정癡情의 관계로 얽힌다. 이 무슨 망발인가. 바람은 제 몸을 내주어 물체를 비비고 섞어 소리를 낳고, 소리를 내던 물체는 품고 있던 냄새를 바람에 얹는다. 이들 셋은 뗄 수 없어 서로에게 연민을 얹는다.
우리가 듣는 바람소리는 바람이 섞인 풍경이고, 소리는 풍경으로 기억되는 건 아닐까. 고창의 들녘에 일렁이는 청보리밭 군무를 소리 없는 영상으로 보고 있어도 우린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기억하는 풍경에 바람소리가 배어있고, 내 몸에 닿는 바람의 느낌이 기억을 소환하여 풍경으로 펼쳐진다. 바람에 부딪쳐도 소리는 나지 않을 것 같은 몸속의 어디에선가 때로 바람소리를 듣곤 한다. 그것은 어느 봄날의 따스한 바람이기도하고, 뉘엿뉘엿 저녁노을 진 가을 저녁의 풀냄새에 섞여 오기도 한다. 때로 바람은 스산함으로 느껴지는 상처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혀로 핥으며 살아내는 삶처럼, 바람은 상처를 핥을 때도 있다. 느닷없이 불어온 바람이 데려온 대책 없는 아픈 삶의 충동질이다. 어쩌다 바람이 가져온 이런 충동은 길 위의 삶 하나를 위태롭고 무질서하게 만들기도 한다.
봄날의 바람은 꽃잎을 데려가 흙에 눕힌다. 나는 어떤 글에서 이런 풍경을 풍장風葬이라 말한 일이 있다. 겨우 며칠 나뭇가지에 꼭지를 대고 있던 꽃잎이 바람에 날릴 때, 꽃잎의 아름다움은 절정에 닿는다. 양분을 공급받던 꼭지가 나무에서 떨어졌다면 꽃잎의 생은 이미 저문 것인데, 어쩌자고 바람에 실려 자신의 끝을 저토록 화려하게 장식하는가. 무리지어 나는 꽃잎들을 앞질러 나르는 몇 몇의 꽃잎은, 꽃상여 앞에서 휘날리는 만장輓章의 깃발처럼 나부끼며 길을 연다. 이때 풍장의 풍경은 절정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럴 때 바람은 소리 없는 연출자이고 꽃잎은 주연이 된다. 주연은 스스로 연기를 하지는 않는다. 오롯이 연출자의 몫이다.
바람은 내 몸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그러면서 까맣게 잊은 내 기억을 느닷없이 내 앞에 펼쳐 보이기도 한다. 풍경으로도 오지만 어느 때는 가뭇없이 몸에 닿아 남아있는 기억에 포개지고 계통도 없이 비벼지기도 한다. 몸에 닿는 바람은 기억인지 바람만 다녀간 것인지 난 구분하지 못한다. 바람이 바람만으로 바람을 밀어가 듯, 바람이 내 몸속의 오래된 기억을 밀어 풍경으로 되살린 건지 난 알지 못한다. 그도 아니면 바람이 자신의 창고에 있는 내 기억을 날아와 내게 가져다 준 건지 구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람이 내 기억을 소환해 준 것이라면, 바람은 내 기억의 주머니라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상념일 뿐이다. 귀가 순해진다는 나이를 훌쩍 넘어섰는데 바람의 어떤 소리도 구별하기란 여전히 내 몸 밖이다.
남도를 여행하며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다. 제 몸의 무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바람에 의지하지 않고 어느 순간 느닷없이 수직으로 뚝 떨어진다. 바람에 꽃잎 하나하나를 떼어주고 데리고 가는 대로 사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매화나 벚꽃의 개별적 생의 끝과 사뭇 다르다. 바람이 부는 날의 동백은 후드득 떨어진다. 문득 있었던 것이 문득 없다. 이때도 바람은 소리를 내지 않고, 떨어진 동백은 구접스레 땅 위를 구르지 않는다. 바람은 마치 소임을 다한 듯 뒤따라오는 바람과 포개져 가던 제 길을 간다. 나는 동백 앞에서 순결한 바람의 끝을 만난다.
내 몸에 닿는 모든 것에 민감해 있던 사춘기 시절의 어느 날,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바람결에 들었다. 그것은 바람이 전하는 바람 소리였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기에 나는 그 바람의 무늬와 질감을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독선이 어머니를 힘들게 했으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한 여인의 삶을 등한시한 사건은 한평생 어머니의 한으로 남아 삭혀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한낱 바람같이 지나쳐도 좋을 중년 남성의 낭만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세찬 바람을 온전히 받아내야 했던 것은 어머니의 몸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풍류와 낭만이 깃든 잠깐 스치는 바람쯤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파 몰아치는 첫새벽처럼 문을 열고 바람살을 안고 간 건 어머니 혼자였다. 바람을 몰고 왔던 아버지는 철없이 덩달아 펄럭이던 두루마기 앞자락을 여미고 태풍 지나간 밤 아침을 맞듯, 실바람마저 재워 놓고 선산에 잠들었다. 이제는 자식의 얼굴조차 희미해져 가는 구순의 어머니는 그날의 모래알 섞인 돌개바람의 소리를 기억하고 계실까. 아니면 기억의 창고가 있을 것 같은 바람 이는 곳에 어머니의 기억이 풍경으로 저장돼 있는 것은 아닐까. 자칫 젖어버린 속옷을 갈아 입혀드리면 뽀송한 요대기 위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소녀, 바람은 소리 없이 제 길 인양 스쳐지나갔지만 소녀의 가슴에 쌓였을 모래바람 일던 날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다.
바람은 어디든지 가고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바람이 머문다는 것은 이미 바람이 소멸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 일터인데 우리는 흔히 바람이 잔다고 한다. 그날에 불어와 어머니가 들어야했던 바람소리는 가뭇없이 가라앉는 당신의 몸 속 어디에서 자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어머니만이 볼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던 바람의 무늬와 질감을 몸에 새기고 있지는 않을까.
지나가는 바람은 무언가에 부딪쳐 소리를 낸다. 어릴 적 동구 밖에서 불어온 바람은 고샅을 지나고 삽짝을 들어서서 마당의 흙먼지를 한 번 뽀얗게 일으키고, 남향의 부엌궁둥이에 감기며 숨을 거뒀다. 그런 바람은 봄에도 불고 가을에도 불었다. 여름의 바람은 맨살에 감기어 칙칙하고, 겨울의 그것은 깊이 파고들어 소란하고 매정하다. 예고도 않고 대중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충동적이고 무질서 하다. 신라의 바람과 백제의 바람결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7세기의 바람과 21세기의 바람의 성정이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바람이 일고 사그라진다는 것은 우주의 과학 원리를 들먹여야만 설명이 가능하니 사소한 일은 아닐 터, 삶의 길 위에서 바람소리는 들리고, 들어야 할 때가 있다. 바람의 소리인지 바람이 무엇엔가 스며들어 내는 소리인지를 구별해야 할 나이가 된 듯하다. 하지만 아직 귀가 순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스스로에게 연민을 얹을 뿐이다.
대숲에 가고 싶다. 억새와 갈대숲에 눕고 싶다. 창창한 청보리밭 가운데 서 있어 보면 어떨까. 눈 내리는 추운 날, 같이 하얘진 자작나무숲이면 또 어떠랴. 댓잎소리, 억새와 갈대의 사운 대는 소리, 청보리의 눕고 일어나는 춤사위에 배어있는 소리, 자작나무의 속살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싶다.
바람이 실어와 펼쳐놓은 풍경만으로 바람의 소리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