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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은 임진왜란을 종식 시키고 풍전등화같은 위기에 있던 나라를 구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고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민초들의 구국 정신을 기리는 명량대첩 축제가 올해도 10월 5일부터 해남 우수영 일원에서 열린다. 사진은 지난 명량해전 재현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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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가을 대표축제인 명량대첩축제가 곧 시작된다. 초요기를 올려라, 약무호남제례, 우수영 강강술래 공연, 수문장 교대식, 난장콘서트, 문화공연, 명량21품 공연, 수상오토쇼, 틴틴페스티벌, 해군 군악대·의장대 공연, 승전 퍼레이드, 명량해전 재현, 야간, LED 대형 연날리기, 명량의 밤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축제다.
지역축제를 치르다보면 가끔 무엇을 위한 축제인지 본래의 취지가 잊히고 축제를 위한 축제를 치르는 경우가 많다. 명량대첩축제는 그야말로 이순신장군의 생사를 초월해 나라를 지킨 충절과 가치관을 이 시대에 구현하기 위한 것. 축제의 한 가운데에 이순신장군을 우뚝 앉혀야 한다는 뜻이다.
해남인으로 긍지를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이유 중에 나는 한 때 장군과 함께 했던 왜군퇴치의 DNA를 일등으로 꼽아야한다고 본다. 비록 해남이 탯자리는 아니지만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명량대첩의 승리자, 해남의 자랑이자 민족의 불멸의 영웅이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신에게는 아직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등 수 많은 명언을 남긴 배경에는 그의 남다른 강직한 성품과 가치관이 있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한국인으로 이순신장군을 얘기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것 같지만 정작 그의 명성에 비해 고난에 찬 삶을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다. 장군은 1545년(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나 어릴 때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주해 살았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이며,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만포첨사, 진도군수, 전라좌도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관직은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1598년 11월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전 회 이유길 장수 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를 뒤흔들어 놓은 대 사건이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에 걸친 전쟁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전쟁터가 된 조선은 초토화되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20일 만에 한양을 빼앗고 2개월 만에 전라도와 평안도 일부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점령한다. 임란 1년 전인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된 이순신은 뛰어난 예지력으로 다가올 왜란을 대비하고 있었다.
한편, 육지에서도 의병들의 활약으로 웅치·이치 전투, 고경명과 조헌의 금산 전투 등으로 왜군은 조선 의병의 강력한 저항을 받는다. 왜군은 진주에서 전라도로 오는 길목도 차단당한다. 조선관군과 의병은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이어서 1593년 6월에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켰지만 전라도를 침략하지 못한다. 2차 진주성 싸움은 김천일, 최경회 등이 이끄는 3500명 호남 의병이 8만 명의 왜군에 대항하여 10일 동안이나 진주성을 사수한 전투였다.
당초 일본은 호남을 점령하여 군량 조달기지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무산된 반면에 온전하게 된 호남은 양곡 생산지·병참기지, 군 병력 송출 기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충무공의 입에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것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그나마 조선이 이 정도라도 지탱할 수 있던 것은 호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무너지는 하늘을 두 손으로 붙든 장군이었고 그 휘하의 전라도 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없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아찔하기만 하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비록 해남이 탯자리는 아니지만 이순신장군은 명량대첩의 주인공, 우리고장 해남이 영원히 모셔야 할 민족의 영웅이시다. 사진은 울돌목 바다위에 모셔진 충무공조각상.
당시 정치 권력자들의 우매와 역사의 아이러니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전쟁종식은 지지부진하는 가운데 다시 정유재란으로 이어지고 선조 30년(1597년) 7월 7일, 원균이 거느린 조선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400여명이 전사하고 200여척의 전선이 12척만 남게 되는 대참패를 겪는다. 원균의 모함으로 투옥 중이던 이순신장군이 다시 백의종군하게 되고 7월 23일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재임명을 받는다.
최악의 여건이었지만 이순신은 8월 3일부터 8월 17일까지 전라도 남방 330여km를 우회하여 부임하면서(전남도가 추진하는 남도 이순신 길 코스로 섬진강 화개장터에서 곡성과 순천, 보성, 강진을 거쳐 해남 우수영까지 육상과 해상 등 250㎞를 연결하는 길이다) 병력과 군량 및 무기를 찾는데, 이 결과 경상우수사 배설이 갖고 도망친 패잔전선 12척을 수습하고 전라우수영에 계류 중이던 전선 1척을 포함하여 총 13척의 전선으로 무장한다.
그 때까지도 조정 신료들은 겁에만 질려 있고,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편입하여 싸우라는 교서를 내린다. 이때 이순신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의 내용이다.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으로 싸우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폐선이나 다름없는 전선 열두 척으로 수백 척이 넘는 왜군을 맞선다는 생각을 어찌할 수 있었을까. 장군만이 할 수 있었던 이미 목숨을 건 각오와 발언이었다.
생즉필사,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요
충무공은 적은 숫자로 많은 적을 맞아 싸워야 하기 때문에 넓은 바다보다는 좁은 물목을 지켜 적을 막고자 했다. 그래서 울돌목의 지형적 특성을 이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울돌목의 곳곳에 산재한 암초의 위치와 시간대 별로 조류의 유속까지 정확히 계산해 작전계획을 세우고 일본 함대를 유인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장병들 사기 고양과 신뢰 회복이었다. 명량해전 하루 전날 장수와 장병들을 모아 놓고 그 유명한 말을 남긴다. "생즉필사 사즉필생, 일부당경 족구천부(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한 명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의 적도 떨게 할 수 있다)" 라는 말로 사기를 북돋우고 출정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조선 수군은 왜적 기세에 눌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위기의 순간에 이순신은 최전선으로 나갔다. "대장선이 가장 먼저 적진으로 진격할 것이다. 적을 섬멸하지 않는 한 결코 이 바다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부하들도 죽기를 각오하고 용감히 싸웠다.
명량대첩, 급류가 부딪쳐 울며 돌아나가는 곳이라 해서 '명량' 혹은 울돌목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밀물과 썰물의 조류현상을 활용한 전술은 지휘관의 솔선수범, 장병들 사기가 합해져 조선수군에게 대승을 안겨주었다. 실로 기적 같은 싸움이었다. 때는 선조 31년(1597년) 9월이었고 대승의 주역은 이순신장군이었지만 숨은 주역들이 있었다. 어선과 식량을 스스로 갖고 나와 이순신장군의 수군을 도와 싸운 전라도 민초들이었다. 수영성 밑에 사는 주민들이 일시에 의병으로 나서서 군세를 북돋아 대승을 거두게 했다고 전해진다. 동네 주민들이 병사를 자청해 수군을 도왔다는 스토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강강술래와 합해졌고 노적봉의 스토리로도 만들어졌다. 이런 것들이 오늘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우수영성지에 기억되는 가치요 정신이다. (다음 회에 계속)
기대되는 '온 겨레 강강술래 한마당'
강강술래의 기원은 달밤에 춤을 추고 노래하던 원시시대 유습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원시시대의 다양한 유습이 추석이나 정월 대보름에 부녀자들이 즐기는 놀이로 정형화되었고, 이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를 의병 술로 활용하면서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는 주장이 보편적이다.
올해 명량대첩축제는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강강술래의 대외 홍보강화와 전승 보전을 위해 전남도내 뿐만 아니라 시도 강강술래 단이 함께 참여하는 '온 겨레 강강술래 한마당'을 3일간 연다고 한다. 강강술래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국가와 인종을 초월해 모두를 하나로 묶는 세계인의 놀이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해남의 전통 민속놀이만이 아니라 한국의, 세계의 전통문화가 되었다고 봐야한다. 그 옛날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화해와 조화의 의미를 담아 부녀자들이 손에 손잡고 커다란 원을 돌며 즐기던 놀이, 여기에다 이순신 장군의 의병 술과 얽힌 스토리까지 있으니 문화콘텐츠로서의 가치는 100배 더해진 셈이다. 강강술래의 종주지로써 해남의 강강술래는 더욱 예술적으로, 축제적으로 차별화되어야 하며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첫댓글 강강술래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찡해 옵니다.
그 옛날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손잡고
돌던 강강술래...........
가슴이~~~감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