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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는 우연성을 바탕으로한 음악, 아방가르드적 음악들을 남긴,
20세기 후반에 끊임없이 음악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했던 현대작곡가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4분 33초"입니다. 아무것도 연주되지 않는 음악으로 유명하죠.
몇 년전에 MBC에서 방영된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음악드라마에 이 곡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존 케이지의 작품은 성격상 음악회에서 자주 연주되기 보다는, 학술적인 프로그램이 있을 때 다뤄지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존 케이지는 어린시절부터 음악 이외에도 건축, 미술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작곡가 쉔베르크에게 화성이론 및 작곡법을 배웠는데,
전통적인 작곡방법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음을 느끼고, 자신만의 특별한 작곡법을 연구했습니다.
항상 정해진 소리에 의해 음악이 표현되는 것을 진부하다고 느꼈던 그는
"소음"과 "만들어진 소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고,
피아노 현에 볼트, 장난감, 고무, 나모토막 등등을 놓고 연주는 하거나
피아노 뚜껑을 닫아 놓고 주먹이나 다른 것을 이용하여 소리를 내어 연주하는 작품들을 구상하게 됩니다.
훗날 prepared piano(장치된 피아노) 를 위한 작품들 도 발표합니다.
또한 침묵 (silence)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 무렵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옮겨, 컬럼비아 대학에서 2년동안 스즈키 다이세츠의 강의를 듣게 됩니다.
새로운 것, 비어있는 것 등등에 대한 연구가 "선"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일주일에 한번씩 스즈키 다이세츠의 수업을 수강하게되었습니다.
* 사실 예전에 존 케이지에 대해 공부할 때 "선불교에 대해 공부했고, 그 사상을 작품에 표현하였다" 정도 알고 있었고,
클래식 음악과 불교와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존 케이지의 4분33초"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강의를 들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연구소에서 그 분의 이름이 거론되어도,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
어제 수업자료를 정리하다가 새롭게 알게되었습니다. 달라이라마 친견까지 했던것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네요.
이 때가 존 케이지의 인생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존 케이지는 스즈키 다이세츠의 강의가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하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언제나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소리"에 대한 연구와 끊임없는 시도를 해 왔는데,
선에 대한 공부를 하게되니, 모든 의문점이 다 충족되지는 않았을 을지라도,
어느정도의 갈증은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컬럼비아에서의 2년이 없었으면 그 음악사적으로 획기적인 작품을 남기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의 음악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맞는 종교는 '선불교'뿐이다" 라고 했고,
후에 자신이 맡은 예술강의에서 선불교에 대한 부분도 넣고 싶었지만,
사정상 비트겐슈타인과 불교 라는 내용으로 대신했다고 합니다.
스즈키 다이세츠를 만나 선불교를 만났을 무렵 작곡된 그의 피아노 작품 "In a Landscape (1948)"은 상당히 명상적입니다.
그의 작품 중 같은해에 작곡된 "Dream" 과 이 곡만이 이런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는 소음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prepared piano를 위한 곡이라던지 다른 작품에서는
듣기 편하거나 귀에 익숙한 소리 보다는 불편하고 낮설고 거슬라는 소리들이 많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In a Landscape (1948)
Stephen Duruy, pianist
1952년, 그의 대표작인 4분 33초가 발표됩니다.
그가 한 대학의 무향실(무음실)에 들어갔을때,
완벽한 흡음으로 아무 소리가 나지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두 가지 종류의 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율신경계에서 나는 소리와, 혈액이 흐르는 소리라는 설명을 듣고서,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침묵"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
즉 "완전하고 영원한 침묵"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침묵속에서 우연히, 비의도적인 상태에서 발생하는 소리 역시 음악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작품에 담아내기로 했습니다.
"4분 33초"는 273초, 즉 절대온도 273도를 뜻 한다고 합니다.
악보에는 오선과 음표대신
세 개의 각 악장 첫 부분에 침묵을 뜻하는 Tacet 이라는 표시외에
피아노 뚜껑을 열고 닫는 지시가 있었으며,
각 악장을 1분 33초, 2분 40초, 1분 20초간 연주해야 한다는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4'33"(1952) David Tudor, pianist
이 곡이 초연되었을때, 평가가 극과 극을 달렸습니다.
저게 뭐하는 짓인가, 장난인가, 음악인가 아닌가. 작곡이나 연주를 아무나 하겠다....
하지만 4분 33초 이 곡은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날 피아니스트는 아무 음도 연주하지 않았지만,
이 연주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발생한 모든 소리는 이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됩니다.
청중의 기침소리, 연주자가 넘기는 책장소리, 연주회장에 날아다니던 날파리의 소리 (만일있었다면..)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아서 저게 뭘까 궁금해하면서 옆사람에게 물어보려고 귓속말 할때 스치던 코트의 소리 등등,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모든 의도되지 않은 소리들이 음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이 4분 33초가 연주 되고나서, "저것이 진정한 선(Zen)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연주는 4분 33초의 오케스트라 버전입니다. 1분40초 정도에 1악장 연주가 끝난 후를 보세요. ^^
이런 무작위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을 만든 존 케이지를 흠모했던 사람이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었습니다.
존 케이지의 음악과 작품세계에 반한 백남준은 1958년에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1957년은 나에게 BC (Before Cage) 1년이다" 라고 하며,
또한 기원후는 1993년 (존 케이지가 타계한 이듬해)라고 할 만큼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 무한한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존 케이지가 prepared piano(장치된 피아노)를 고안해 낸것처럼,
백남준은 건반을 연주하면 연결된 선을 통해 라디오가 켜지고, 헤어드라이기가 작동하는 "총체피아노"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또 피아노위에 여러개의 브라운관이 높여져있어 널리 알려진 "TV 피아노"라는 작품도 그의 영향을 받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백남준 아트센터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새장(cage)속에 피아노 해머를 잔뜩 집어 넣은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게서 우연성, 무작위성의 예술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존케이지는 백남준에게서 미디어를 통한 소리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백남준이 가마쿠라에서 살았던 적이 있으므로 어쩌면 선불교에 심취한 존 케이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작품을 초연하기도 했는데,
연주 중 무대에서 뛰어내려와 관중석에 앉아있던 존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린 일화가 있습니다.
곧 존 케이지의 시대가 온다는 의미의 퍼포먼스였는데,
백남준이 타계한 2006년, 그의 팬이 똑같은 방법으로 그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익숙한 악기의 소리에서 벗어난, 소리와 소음에 대한 연구가,
역으로 침묵(silence)에 대한 물음으로 바뀌고,
오랫동안 집착해왔던 침묵, 근본적인 소리에 관한 의문이 선불교를 만나게 되어,
'완전한 침묵은 없다'는 깨달음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관념을 뛰어넘어 진정한 비어있음과, 비의도적, 무작위적 모든 소리에 대한 영감으로 이어져,
서양 현대음악사에서 획기적인 남기게 되었으며,
또 다른의 전위적인 예술장르까지 영향을 끼지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추천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리 연구소 역사상 이런 격조높은 글은 처음입니다. 음악도, 저는 지금 시내에 나가봐야 하기에 다녀와서 천천히 음악을 음미(?)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백남준이 가마쿠라에 살았던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그랬군요. 가마쿠라에서, 살아왔군요. 저도 가마쿠라에서 살아왔습니다. 지진 쯔나미가 나면, 가마쿠라가 제일 위험하답니다. 반은 물에 잠긴다고요. 제가 가마쿠라에 가면 자는 유스호스텔이 바닷가인데, 해발 6미터였습니다. 어제 밤에 티비에서 베르디의 아이다에 대해서 설명을 격틀여 가면서 연주해 주는 것이 있어서 잠시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김선생님의 글을 만나려고 그랬나 봅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