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벨리니~~

이탈리아의 화가로 베네치아를 피렌체나 로마에 견줄 만한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여겨지는 베네치아의 시의회당을 위한 그림들은 1577년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많은 제단화(예를 들면, 베네치아의 산 조반니에 파올로 교회의 제단화)와 그 밖의 현존하는 작품들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이야기식 표현을 강조하던 경향에서 자연스러운 배경과 풍경을 강조하는 새로운 자연주의로 꾸준하면서도 대담하게 전개해 나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아버지 야코포는 15세기 고딕 부흥운동의 주요화가인 젠 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제자였으며, 그를 따라 피렌체로 갔던 것으로 여겨지며 두 아들에 앞서 베네치아의 피렌체 르네상스의 원리를 소개했다. 그는 젠틸레와 조반니라는 2명의 아들 외에 딸이 1명 이상 있었으며, 그 가운데 니콜로사가 1453년 화가인 안드레아 만테냐와 혼인했다.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화실에서 그림을 처음 배웠으리라 짐작된다. 조반니 벨리니는 초기에 독자적으로 그린 그림들에서 야코포의 우아한 양식보다 파도바 유파, 특히 매 부인 만테냐의 수수한 양식의 영향을 더 강하게 보여주는데 1460년 만테냐가 만토바의 궁정으로 떠난 뒤에도 이러한 영향은 뚜렷이 보이고 있다. 이 시기보다 앞서 제작된 그의 초기 작품들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의 변모],[천사들이 떠받치고 있는 죽은 그리스도] 등이 있다. 이 시기와 이전에 제작된 몇몇 작품들이 미국에 있으며, 그 외의 것들은 베네치아의 코레르 시립미술관에 있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3폭 제단화 4점과 밀라노에 있는 2점의 [피에타] 역시 초기작품들이다. 초기 작업의 특징은 현재 런던 국립미술관에 있는 [구세주의 피]와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통]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모두 템페라로 제작되었으며 그 자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정서와 깊이 있는 종교적인 감성을, 파도바 유파의 장엄함, 엄격함과 잘 융합시켰다.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받은, 초기의 성모를 주제로 한 그림들은 대부분 표현이 부드럽지만, 장식적인 화려함보다는 자연 관찰에서 끌어낸 감각적인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다. 이 그림들에서는 형태를 나타내기 위해 양감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피렌체 화파의 전통이나 특히 만테냐 양식처럼 선을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에서는 선의 사용이 만테냐의 작품보다 자연스러우며 무엇보다도 묘사된 대상의 표면이 극적으로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며 드러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작인 마사치오와 당대에 가장 뛰어난 르네상스 회화를 보여주었던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와 마찬가지로 조반니 벨리니도 처음부터 자연광을 그린 화가였다.

초기의 작품들 중에는 인물들이 서 있는 수직적인 단순한 풍경 뒤 하늘이 수평으로 물줄기처럼 드리워져 있는 작품이 많았다.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통]에서는 수평선이 위로 올라가 있으며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깊고 넓은 풍경이 이 장면의 극적 효과를 나타내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풍경의 정교한 선적 구조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무엇보다도 새벽빛을 받은 듯 그늘 속에서 반짝거리는 것이나 찬란하게 반사되는 면을 표현한 색채가 가장 주목할만하다. 이것을 그 뒤 1세기가 넘도록 끊임없이 발전한 베네치아 풍경화의 첫 작품이다. 지금도 베네치아의 산 조반니에 하올로 교회에 있는 성 빈센트 페레르에 관한 구성이 뛰어난 제단화는 아마 10년 뒤인 1470년대 중반쯤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인 구성의 원리와 화법은 변하지 않았으며 표현이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벨리니가 완숙기로 나아가는 과정에 가장 커다란 도움을 받았음이 틀림없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영향을 받은 시기는 아마 그 뒤 오래지 않아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여행하는 동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페사로에서 그린 뛰어난 그림인 [성모의 대관식]은 완전히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그린 최초의 베네치아 회화로서, 보르고 산토폴크로의 산 아고스티노 교회에 있는 여러 폭 그림의 가운데에 있다가 분실된 후 기록에서 빠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성모의 대관식]에 나타난 개념들을 구도에 깊이 반영하고 있다. 성령의 광채를 받으며 그리스도가 성모에게 대관식을 베푸는 장면은 봉헌의 엄숙한 행동이며, 옥좌 곁에서 입회인으로 서 있는 4명의 성인들은 그들의 자애로움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신부의 특징, 옷의 질감, 지니고 있는 물건들 등의 세부묘사가 잘 나타나 있다. 마사치오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전경과 옥좌를 처리한 색감과 원근법은 마치 인물들이 실제 공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그 뒤의 배경으로 확장되며 이 장면을 온통 감싸고 모든 형태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하늘의 광휘에 의해 무한한 느낌을 주도록 처리되었다. 조화는 모든 예술의 목표이지만 조화의 중요성은 그 자체의 밀도뿐만 아니라 각 부분들이 수행하는 역할에도 달려 있다. 여기에서 벨리니는 인간성이 깃든 자연의 웅장함을 보여주는데, 그 자연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통일성에는 그의 독특한 정서적 온기가 스며 있다. 이 시기에 조반니 벨리니는 기법면에서 또 다른 업적을 남겼다. 그가 이때 이미 유화를 주로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가 뛰어났다고 할 수 없다. 당시에는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화가들도 이미 유채를 사용하고 있었다. 1475(또는 1476)년 베네치아에 있었던 안토넬로다 메시나의 소개로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템페라를 그만두었다는 설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재료는 상당히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재료의 사용방법이며, 그것은 화가의 의도와 시각에 달려 있다. 앞으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의 풍부하고 폭넓은 시각이었다. 유화는 좀더 투명하고 녹기 쉬운 특성이 있으므로 광택의 정도를 높여주고 반투명의 색면층을 걸쳐 칠함으로써 더욱 풍부한 색채와 색조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전례 없는 다양한 유화기법을 통해 그는 베네치아파의 풍부함을 자신의 완숙한 화법에 접목시킬 수 있었다. 형인 젠틸레 벨리니가 베네치아의 시의회당에 중요한 역사적 장면들을 그리는 일을 맡아 하던 중 1479년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자 조반니 벨리니가 그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1480년까지 그는 6-7점의 새 작품을 그리는 일뿐만 아니라 시의회당의 그림들을 복원하는 일에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이것들은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었지만 1577년 화재로 거대한 시의회당과 함께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지금은 다만 그의 조수 중 1명이 완성해 서명한 작품으로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교회에 있는 [성 마르코의 순교]에서 그 구도를 비슷하게나마 유추할 수 있을 뿐이며, 1507년 젠틸레 벨리니가 베네치아에서 죽은 뒤 그가 대신 완성한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르코]를 통해 그 제작방식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대형 제단화와 그 외 비교적 운반이 쉬운 작품들은 매우 많이 남아 있으며, 꾸준하면서도 대담한 작업의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 페사로에 있는 제단화의 원리와 기법은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된 산조베 예배당의 제단화인 커다란 성모화에서 굉장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후방의 커다란 옥좌에 않아 있는 성모와 양옆의 성인들이 마치 금방이라도 반사되는 빛에 녹아 들어갈 듯이 보인다. 이 그림은 연대가 밝혀진 그의 작품 중 가장 초기(1487)의 것으로 역시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알베레티의 성모] 보다 앞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의 초기 20년 동안에는 성모와 피에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등으로 주제가 제한되어 있었으나, 15세기말경에는 매우 풍부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주제(여전히 주로 종교적이었음)를 더욱 폭 넓게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의 실제 배경인 주위 환경이 새롭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뛰어난 풍경화가로서의 외광의 효과를 충실히 나타냈기 때문에 그림에 나타난 풍경으로 계절뿐만 아니라 하루중의 어느 시간이지도 알 수 있다. 벨리니는 또한 상상의 장면들, 즉 지금까지 그려왔던 것이 아닌, 처음으로 그리는 색다른 소재의 그림에도 뛰어났다. 베네치아에 있는 산타마리아 데이미라콜리 교회의 중앙 제단을 위해 그린 [명상에 잠겨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와 프릭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는 [황홀경에 빠져 있는 성 프란키스쿠스]에서는 대지의 구조를 신체의 구조에 못지 않게 상세히 연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주의의 목적은 사실적인 세부묘사를 통해 이상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풍경화 [신성한 알레고리]에서 그는 처음으로 환상적이고 신비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제자인 조르조네(Giorgione)는 그 뒤 이러한 성격의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초상화에서도 이와 똑같은 이상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런던 국립박물관에 있는 [총독 레오나르도 로레단]에는 절대군주가 지니고 있는 현명하고 관대하면서도 확고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으며, 영국 왕실이 소장하고 있는 [피에트로 벰보] 는 시인의 감수성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예술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의 생애는 평온하고 순조로웠던 것 같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의 유파는 권위와 찬사를 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영향을 널리 퍼뜨렸다. 제자들 가운데 그보다 6년 일찍 죽은 조르조네와 티치아노는 스승을 능가하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에 관한 개인적인 서술로 현존하는 유일한 자료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6년 베네치아에서 독일의 인문주의자인 빌리발트 피르크 하이머에게 쓴 편지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이 내게 그가 매우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진실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은데도 여전히 가장 뛰어난 화가입니다."

자료 출처 :http://blog.naver.com/ngseol.do?Redirect=Log&logNo=40018184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