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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지 金大池(1891 ~ 1942)】 "의열단의 고문,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1891년 10월 7일 경상도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부내면(府內面) 내이리(內二里,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상민 출신의 가난한 유생(儒生)이면서 밀양군 아전(衙前)이던 김경수(金景守)와 어머니 정라(丁羅)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이었다. 호는 일봉(一峰)이고, 베이징(北京)에서 김태일(金太一), 만주에서는 김치환(金致煥)·김자중(金子重)·김인식(金仁植)·김정창(金丁昌)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본명의 한자 표기가 ‘大地’로 되어 있는 자료가 많고, ‘大智’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고 10대 후반에 밀양의 사립 동화학교(同和學校)를 다녔으며, 밀양 부호의 장녀 박선이(朴仙伊)와 결혼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전홍표(全鴻杓) 교장의 발탁으로 동학학교 교사가 되었다. 훗날 의열단(義烈團) 창립단원 및 지도자가 되는 김원봉(金元鳳)·김상윤(金相潤)과 밀양경찰서 투탄의거의 주인공인 최수봉(崔壽鳳)이 그때의 제자들이었다. 학식 있고 몸가짐이 반듯함을 눈여겨 본 밀양 부호 박노인(朴老人)의 장녀 선이(仙伊)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1913년경 밀양의 구영필(具榮佖)·황상규(黃尙奎)·윤치형(尹致衡), 경북 칠곡(漆谷) 사람 이각(李覺, 본명 이수택(李壽澤)) 등과 함께 친목단체로 위장한 비밀결사인 일합사(一合社)를 결성하고 지역내 항일활동에 나섰다. 구영필·이각과 의기가 통하여 각각 일봉·일우(一友)·일몽(一夢)이라는 호를 지어 가졌다.
1913년 말~1914년 초에 황상규·이각과 함께 1년 전쯤 경북 풍기(豊基)에서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 등의 의병운동 경력자들이 결성한 비밀결사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였다. 1914년 군자금을 마련하려고 충남 천안(天安)의 직산금광(稷山金鑛)을 찾아가 보았는데, 실정을 알고나서는 사금 채취보다 부호들에게 징수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일 것임을 깨닫고 동지들에게 제안하여 호응을 얻었다. 1915년 7월 대구(大邱)에서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일부 단원들의 결합으로 대한광복회(光復會)가 결성될 때도 황상규와 함께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미상이다.
1917년 말에 광복회 조직이 일경에 노출되어 대대적인 수사가 개시되니 만주 펑티엔(奉天)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1918년 2월 구영필이 평양(平壤)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사건의 연루자로 일경에 붙잡혀가 조사받던 중에 일합사 조직이 드러나버렸다. 그로 인해 평안남도 경무부로 붙잡혀가 조사받으면서 손톱 여덟 개가 뽑히는 고문을 당하고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18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18년 11월 광복회 만주본부가 있는 지린(吉林)으로 건너갔고, 먼저 가있던 황상규와 함께 동향 선배이면서 국외 광복회의 간부이던 손일민(孫逸民)과 더불어 3인 결의형제가 되었다.
1919년 2월 말 김동삼(金東三)·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조소앙(趙素昻)과 함께 민족대표기관 수립을 위한 만주대표의 일원이 되어, 동향 후배인 청년지사 고인덕(高仁德)을 비서(秘書)로 대동하고 상하이(上海)로 갔다. 1919년 4월 10일 밤 각지 대표들이 상하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 60호에 모이도록 소집 실무를 맡았고, 그 자리에서 설치 결의된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의 의원(議員)이 되어 제1회 회의에 참석하였다. 4월 11일 임시정부의 각부 차장 선거 때 이영근(李渶根)에 의해 교통차장(交通次長)으로 추천되었는데, 선거 결과 선우혁(鮮于爀)이 당선되었다. 4월 22일 임시의정원 제2회 회의에서 정부 각 부처의 차장(전결)제 폐지와 동시에 위원(합의)제 실시가 결의되었다. 이에 따른 내무위원(총원 9인) 선거에서 김구(金九)·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선출되었다. 4월 25일 제3회 회의에 출석하여 임시의정원법 의결에 참여하였다.
1919년 5월 지린으로 귀환하였고, 그때 막 결성되어 있던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의 회계과장 황상규와 ‘대일(對日) 육탄혈전(肉彈血戰)’의 선봉이 될 청년결사대 창설에 대하여 상의하고 같이 추진키로 하였다. 그리고는 군정사 중앙위원 손일민과도 의논하면서 새 조직의 산파역(産婆役)으로 나섰다. 그 얼마 전 난징(南京)에서 지린으로 와 있던 황상규의 처조카 김원봉으로 하여금 창단 동지들을 규합해오게 하니, 김원봉은 펑티엔성(省) 류허현(柳河縣)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가서 생도 여러 명을 포섭해 지린으로 데려왔다. 그들 중 김원봉·이종암(李鍾巖) 2명을 7월에 상하이로 데리고 가서,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 단원들과 함께 영국인과 광둥인(廣東人) 교사로부터 3개월간 폭탄 제조법 및 조작법을 배우게끔 하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지도 조언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지린으로 돌아간 후인 11월에 의열단이 그곳에서 창립되었다.
임시정부 의정원 임시회록에 기록된 김대지(『신한민보』 1919.9.6) [판형3] |
1919년 11월 임시정부 국내조사원으로 선임 특파되어 밀양으로 잠입하였고, 몇몇 재산가의 성향과 동태를 알아본 후 비밀리에 방문하여 설득하고 자금 헌납을 받아냈다. 매형(妹兄)인 정동찬(丁銅燦)으로부터도 400섬(石)지기 전답을 저당 잡혀 확보한 1만 7천원의 거금을 임시정부에 헌납토록 기부 받았다. 12월에 상하이로 귀임하여 활동결과를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창단 직후 의열단은 국내 일제기관 대타격 거사를 계획하고 김원봉·이성우(李成宇)·곽재기(郭在驥) 3인이 상하이로 가서 무기구입을 위해 백방으로 애쓴 결과, 1920년 3월 탄피 3개 및 폭약과 기타 부속품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것들을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 보강리(寶康里) 60호의 자기 집으로 가져오게끔 해서 완성품 폭탄을 제조토록 하고, 안둥현 세관원이었다가 임시정부 수립 후 외무위원 및 외무차장을 역임한 바 있는 장건상(張建相)에게 부탁하여, 그의 이름으로 안둥현의 영국인 세관원 ‘유스 보잉’에게 소포로 우송토록 하였다. 뒤쫓아 안둥으로 간 곽재기가 그것을 인수하였고, 원보상회(元寶商會) 주인이면서 임시정부 비밀연락원인 이병철(李丙喆)에게 건네져 옥수수 가마에 담아서 밀양으로 몰래 보내졌다.
그 후 1920년 여름 이회영·신채호(申采浩)와 같은 행보를 취하여 베이징으로 옮겨갔고, 구고루대가(舊鼓樓大街)에 거주하였다. 동년 9월 무장독립운동 노선 확립과 한인군사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준비조직으로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가 베이징에서 발족될 때 참여하였다.
1921년 4월부터 6월까지 베이징에서 박용만(朴容萬)과 신숙(申肅)의 주도로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가 개최되었을 때는 불참하였으나, 동년 11월 군사통일회의가 대조선공화국임시정부(大朝鮮共和國臨時政府)를 세움을 선포했을 때 내무총장(內務總長)으로 지명 내정되었다. 그러나 이 정부는 제대로 수립 가동되지 못하고 유야무야되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을 때, 의열단이 어느 당파에 가담해야겠느냐는 김원봉의 질문에 대해, “현하 혁명시대에 처해서는 정부의 형식을 갖춘 기관을 조직할 필요가 없다. 지금 국민대표회의의 상황을 보면 모두 기관의 존재를 생명으로 하지 않는 자가 없으므로 어느 당파에도 속해서는 안된다”고 답변 교시하여 불관중립(不關中立) 자세를 견지토록 하였다.
1924년 초 일제관헌 첩보보고에도 김원봉의 학생시절 선생으로서 큰 경의(敬意)를 현재도 받고 있으며, 의열단의 행동에 관해 김원봉이 매사 상의하고 의견을 경청할 만큼 지모가 풍부한 고문격 인물이며 “의열단의 흑막적(黑幕的, 막후: 필자) 주모자로서 크게 주의를 요”하는 대상으로 지목받고 있었다. 글씨를 잘 쓰고 인각(印刻)에도 재주가 있어서, ‘의(義)’ 글자를 ‘양(羊)+아(我)’로 풀이하여 양의 형체를 그려 넣은 의열단의 비밀인장도 고안했다 한다.
1923년 여름 의열단이 일본 관동군 관할하 남만주철도회사의 안봉선(安奉線, 안둥-펑티엔) 간 철로 폭파 및 열차전복 거사를 추진할 때, 텐진(天津)에서 김원봉 등 간부진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협의하였다.
1924년 7월경 톈진에 있는 다물단원(多勿團員) 이우민(李愚民)을 찾아가 만나서, 의열단 가입을 권유하고 승낙 받아 통신부 연락원이 되게끔 하였다. 1926년 3월경에는 그에게 의열단 소유의 브라우닝 권총 3정을 맡겼다가 얼마 후 되찾아갔다.
1926년 5월 군사통일촉성회 활동 때 친교를 맺었던 전(前)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의장 문창범(文昌範)의 초청이 있어서 러시아로 가려 하였다. 그러던 차 북만주 닝안현(寧安縣) 닝쿠타(寧古塔)에 있는 구영필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자기가 현지에서 밀정·변절자 혐의를 받고 있으니 그리로 와서 누명을 벗겨달라는 부탁이었다. 이에 닝쿠타로 가서 조사작업을 벌였는데, 그러던 중 9월에 구영필이 신민부(新民府) 요원에게 피살되니 장례를 치러주고 『渤海古都 寧安城발해의 옛도시 영안성』을 집필하여 200여 쪽의 등사본으로 펴냈다. 1927년 1월 부인이 차남을 데리고 멀리 밀양에서 찾아오니, 러시아행을 포기하고 닝쿠타 동대가(東大街)에 거처를 마련해 계속 재류하였다.
1927년 봄부터 만주지역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이 시작되자 적극 호응하여 독립운동진영 내의 과도한 이념논쟁과 파벌화 및 분열상쟁 행태를 격렬히 비판하고 대동단결을 주장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정의부(正義府)의 김동삼·이청천(李靑天), 신민부의 김좌진(金佐鎭)·정신(鄭信), 조선공산당 화요파의 김찬(金燦) 및 ML파의 한빈(韓斌) 등과 두루 연락하여 하이룽(海龍)·우창(五常)·닝쿠타·아청(阿城)·삔현(濱縣) 등지에서 수차 회합하고 상의하면서 항일역량의 통일과 조직통합에 주력하였다. 그럼에도 유일당운동은 큰 진척을 보지 못한 채 중단되어버리고 1929년 3부(三府) 통합운동으로 진로가 바뀌었는데, 그마저도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만주지역의 유일당운동이 실패하고 말았음에 실망하여, 1930년 이동녕(李東寧)·김두봉(金枓奉)의 연락을 받고 관내(關內)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여비가 없어서 포기하였다. 1929년 말에 둥칭성(東京城)으로, 1933년에는 하얼빈 인근의 삔장성(濱江省) 아청현으로 옮겨가 살았다. 젊었을 적 배워둔 한의술(韓醫術)로 주민들을 구병(救病) 해주고 그것으로 생계를 겨우 도모할 정도의 극빈 상태로 내몰렸다.
1936년 부인이 산후풍으로 사망한 후 몇 년간 둥징성의 대종교(大倧敎) 계열 독립운동 근거지인 안희제(安熙濟)의 발해농장을 자주 방문하였다. 베이징·상하이의 동지들과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중국인처럼 변복하고 하얼빈·펑티엔 등지를 종종 왕래하였으며, 그 지역에서 동지들이 오면 자기 집에서 회의를 자주 가졌다 한다. 장남 철수는 닝안현 항일유격대에, 차남 철준(이명 명(明))은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과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제3지대에 참여하여, 부자(父子) 2대의 독립운동가 집안이 되었다.
1943년 음력 10월 26일(양력 11월 23일) 숙환인 폐병과 기관지 천식 악화로 아청현 취원창(聚源昶)의 자택에서 별세하였고, 마을 동쪽 구릉지의 한인묘지에 묻혔다. 그 후 묘지가 옥수수 밭으로 바뀌어버려서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니, 2003년에 경북 경주시 인근의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 옆에 가묘가 유족에 의해 조성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