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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진주 땅 돌맹이 하나하나에도 다 우리 민족의 정기精氣가 어리고 한恨이 서리고 있습니다. 지금 제 뒤에는 진주성, 촉석루矗石樓의 병풍이 있습니다. 이 앞에서 우리 불자님들을 모시고 부처님 말씀을 하게 되니 감회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공부를 많이 한 그런 수행자는 아닙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 혜능스님은 33조사 가운데 마지막 어른입니다. 이 육조혜능스님이 돌아가신 열반하실 때 나이가 76세입니다. 제 연치年齒가 올해 76세입니다. 그런데도 제 공부는 아직도 육조 스님께 비교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리만리 그러한 미숙한 차이가 있습니다. 장자불와長坐不臥를 몇 십 년 동안 했다고 해서 그것이 꼭 공부를 많이 했다는 그런 증거는 조금도 아닙니다. 여기 진주 와서 제가 좀 느껴보는 그런 깊은 감동은 이것은 한 천 몇백년 전에 신라 땅에서 같이 공부하던 그런 가까운 동기(도반)들을 이번에 만난 그러한 친밀한 그런 감정을,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 법은 절대로 그런 어려운 법이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출가할 때부터서 저는 어렵다고 생각을 안 했고 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더욱더 부처님 법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중생들이 제대로 부처님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이렇게만 생각해 봤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은 한 말씀으로 하면 사실은 안락법문安樂法門입니다. 어째서 안락법문安樂法門인고 하면 부처님 법은 이것은 우리 인간이 본래, 본래의 그 모습대로 닦는 그런 법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본래의 모습대로 닦지 않으니까 그것이 까다롭고 어렵고 또는 마음도 괴롭고 몸도 괴롭고 합니다만 부처님 법대로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우리 마음도 몸도 가장 쉬운 법입니다. 이른바 신안락身安樂 심안락心安樂입니다.(법화경 안락행품安樂行品) 몸도 안락스럽고 마음도 안락스럽습니다.
그러는데 부처님 법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부터서는 그 분열 상황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어렵게 생각이 됩니다. 또는 부처님 법만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종교가 가지각색으로 갖추고 있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 수행자나 우리 불자님들이 어렵게 생각합니다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로 어려운 법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가면은 갈수록 더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에 있어서 이른바 근본불교根本佛敎, 달리 말하면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말씀도 합니다만 이것은 소승불교라고 해서 대승大乘이 전혀 없다는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런 대승불법大乘佛法 은 잠재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지, 그냥 우선 표현의 그런 의미에서는 소승적인 법문이 주主가 되기 때문에 소승불법 그러는 것이지, 대승불법이 절대로 없다는 것은 그건 아닙니다.
헌데(그런데) 소승불법과 대승불법이라는 그런 문제가 또 우리 불자님들에 대해서 굉장히 무거운 짐으로 다가옵니다. 소승불법을 공부한 분들은 이 근본불교를 공부한 분들은 또 소승불법만이 이것이 부처님의 육성법문이다, 이것이 정통법문正統法文이다, 이렇게 우기기도 합니다. 또 대승법문大乘法文을 공부한 분들은 소승법문은 이것은 성불의 가르침이 아니라, 이것은 부처님의 참다운 뜻이 아니라 부처님의 방편설方便說이다 이렇게 우기기도 합니다.
저는 며칠 전에 한국에서 아주 참 권위있는 인망人望도 있고 덕도 있고 또는 공부도 많이 하신 한 80된 목사님의 신앙 고백서를 제가 좀 읽었어요. 읽었는데, 아주 참고로 될 만한 훌륭한 말씀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셨다 하더라도 우리 불교인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참 그분들하고 타협하기가 어렵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깊이 느꼈습니다.
그것은 특히 어떤 점에서 그런고 하면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불법에서는 대승불교의 특징으로 해서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삼신일불이라는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삼신三身이라 하는 것은 법신法身부처님 또는 보신報身부처님, 화신化身부처님 삼신 부처님이 원래 셋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헌데(그런데) 그 삼신일불도 우리가 법신부처님은 어떤 것인가? 그런 이른바 개념 규정, 이런 것에 대해서는 각기 불교학자마다 달리 이야기할 수가 있겠지요.
가령 이 법신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만 부처님이 아니라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우주의 상주에 있는 생명의 부처님 이렇게 보통은 다 정의대로 하지 않습니까? 헌데 이런 때에 있어서도 우리 사람, 우리 사람 같은 그런 생명의 부처님을 우리가 상상을 많이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할 때는 우리 불교가 인간중심밖에는 안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법신부처님을 말씀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 중심, 사람 같은 그런 부처님이 부처님의 생명의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항시 계신다 이런 정도가 아니라 다른 동물도 다 망라하고 또는 다른 식물도 망라하고 어떤 것도 어떤 존재나 또는 모양이 있는 존재나 없는 존재나 그런 모두가 다, 모든 존재의 참다운 실상생명實相生命, 참다운 실존, 이 자리가 바로 법신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돼야 이른바 화엄경이나 또는 법화경이나 그런 능엄경이나 그런 대승경전에서 말씀하신 법신부처님의 그런 개념이 되겠지요.
그리고 보신부처님은 이것은 우리의 중생이 마음을 닦아서 부처님 자리에 우리가 올라갈 때 부처님 자리까지 우리가 성취를 할 때 그때 우리한테 갖추어진 그런 공덕功德이 보신부처님이다. 이렇게 또 말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이 닦고 안 닦고 상관이 없이 영원 그대로 우주의 참다운 생명인 법신부처님의 그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그런 성품공덕性品功德 이것이 바로 보신부처님이다. 이렇게 또 말씀을 해야 그래야 이제 이른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신부처님의 개념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화신부처님은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우리가 소승불법, 근본불법에서 말할 때는 석가모니부처님 한 분만 우리가 화신부처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허나 대승불법에서는 이것은 좀 다르다 말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물론 사람으로 해서 이 금생에 정확히 말하면 현겁賢劫이라 하는, 현겁賢劫이라 하는 현겁이라 하는 이 세계에 있어서 가장 최초의 부처님이 되지 못할뿐만 아니라 네 번째 부처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의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승불법에서 화신불을 말할 때는 다만 석가모니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과거 천불千佛 또는 현재 천불千佛 또는 미래 천불千佛 이 삼천三天 부처님을 위시해서 어떤 존재나 간에 깨닫고 안 깨닫고 상관이 없이 어떤 존재나 간에 사람 이외의 다른 동물이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연계의 모든 그런 두두물물頭頭物物이나 또는 우주에 있는 현상계 모두가 다 화신부처님이다. 이렇게 되어야 이른바 대승적인 삼신불三身佛에 대한 개념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헌데(그런데) 아까 제가 훌륭한 목사님 말씀을 제가 하다 말았습니다만 기독교도 유사한 그런 법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실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이른바 삼위일체三位一體라, 불교에서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는 그런 개념이 그런 가르침이 탄생될 때와 또는 기독교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가르침이 나올 때는 우리 불교가 조금 앞서기는 하지만 별로 많은 차이는 없습니다. 없어서, 이 삼위일체는 이른바 서기 325년 서기 325년 때에 비로소 니케야 카톨릭 그런 공의회에서 확정이 되었단 말입니다. 이른바 카톨릭의 신조로 해서 확정이 되었습니다.
헌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이른바 성부聖父, 성부하고 성부는 신성한 즉 말하자면 우주 창조하고 우주를 섭리한 이른바 하나님 아버지란 말입니다. 그런 성부하고 또는 성자聖子 성부로부터서 특별하게 성부의 성령聖靈 기운을 타고 나온 이른바 성자의 예수를 말합니다. 또는 성령聖靈, 이른바 신성神聖(성신聖神)은 석가모니 우리 부처님 가르침에 따지면 그야말로 하나의 보신부처님 정도로 우주의 성령을 즉 말하자면 기독교에서는 바로 이렇게 성신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 불교의 삼신부처님과 기독교의 그런 삼위일체를 우리가 대대(비교)를 시킨다고 생각할 때는 기독교의 성부는 우리 불교의 이른바 법신에 해당하겠지요 그리고 성령은 정말하자면 우리 불교의 보신에 해당하고 말입니다 또는 성자는 우리 불교의 화신에 해당하고 이렇게 해당할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인데 우리 불교에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승불법에서는 그 화신부처님을 석가모니부처님만 화신부처라고 보통은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승불법에서는 그렇지 않고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현상적인 존재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화신부처란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그런 삼위일체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나 간에 성자, 성자는 예수님만 예수님 혼자만 이른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상당히 제가 말씀드린 그 목사님은 개신교 목사님입니다. 또 그리고 진보적인 분이고, 미국이나 싱가포르?에 가서도 공부를 많이 하시고 신학 석사 과정도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그런 훌륭한 분입니다. 그런 분인데도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기독교에 있어서 이른바 성자는 예수님뿐이다. 결국 이렇다 말입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 일반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는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이 되겠습니까?
이런 분들은 다시 말할 것이 없이 오직 예수님만 성자라는 그런 관념과 또는 예수님의 근본 생명자리인 성부만이 다하고 다른 종교는 도저히 그런 범주 속에 못 들어간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을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독교 분들하고는 좀체로 대화하기가 곤란스럽구나, 이렇게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튼 그분들은 그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4대의 공관복음서나 그런 복음서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님 말로도 분명히 일반 사람한테 설법할 때에 하늘에 계시는 그대들의 아버지가 어떻다 이런 말씀이 한두군데가 아니만 말입니다.
지금 현재 기독교의 학자나 그런 분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러는데, 정작 그런 예수 자체의 말씀이 들어간 그런 복음서에 있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의 그 아버지가 바로 하느님이라는 그런 말 여러 군데가서 말씀 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말로 해서는 예수님 말을 우리가 신봉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부처님의 법신불法身佛과 또는 불교의 그런 보신불報身佛과 또는 불교의 화신불化身佛과 말입니다. 또 기독교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이른바 성부聖父와 성령聖靈과 성자聖子와 별로 차이가 없구나 이렇게 저는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에서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중세기에 있어서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신학자들 초대 교부敎父철학의 이른바 위대한 대표적인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란 그런 분인데, 그런 분도 역시 그런 분도 이른바 플라톤철학을 도입을 시켜가지고서 한 체계를 세웠단 말입니다 플라톤 철학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분은 대체로 아십니다만,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적인 사상입니다 범신론汎神論 이것은 우주가 바로 신이고, 신이 바로 우주다 그런 사상이란 말입니다. 우주 속에는 어떤 것도 모두가 다, 어떤 것도 두두물물이 다 조금 더 차이가 없이, 다 우주의 신으로부터서 되었다, 이런 사상이란 말입니다.
특히 스피노자(Spinoza, 1632∼1677), 스피노자는 이른바 그 당시에 유대교에서는 파문을 당했습니다만, 나중에 노바리스(Novalis, 독일시인, 1772~1801)다 뭐다 그런 시인들은 스피노자를 보고서 신에 치유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치유했단 말입니다. 그럴 정도로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그와 같이 깊이 그분이 경도(경주)하고 연구를 많이 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그 서구 철학에서 위대한 분들이란 분들은 대체로 다 범신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대중적인 우리 불자님들을 상대로 해서 무슨 그런 다소 난해한 철학적인 문제를 끄집어내서 안 됐습니다만 아무튼 범신론汎神論, 일신론一神論 정도는 적어도 우리 불자님들은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불교가 꼭 범신론 범주에 다 들어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철학적으로 규정할 때는 하나의 범신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플라톤Platon 사상이나 또는 그 뒤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나 말입니다 또는 그 뒤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교서를 인용을 해가지고 도입을 한 분들이 대체로 중세기 그런 유대한 신학자들인데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나 또는 에리우게나Eriugena 또는 안셀무스Anselmus나 말입니다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나 그런 훌륭한 신학자는 대체로 다 범신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들 사상은 사실은 우리 부처님 가르침하고 이 표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표현적인 그런 언어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개념 내용은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우리 불교의 삼신일불 하고 우리가 대비해서 같이 연구도 하고 대화할 때는 그런 것을 예수께서 직접으로 말한, 그런 바이블Bible에서 말한 삼위일체 사상을 우리가 그걸 참고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별로 마찰이 없이 대화가 되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헌데(그런데) 이와 같이 기독교와 불교가 대비해서 제가 말씀드린 것은 우리 대승불교의 일단을 제가 말씀드린 것에 불가합니다. 헌데 특히 우리의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는 어디가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을 대체로 우리 불자님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는 계십니다만 보통은 다 소승불교는 그냥 자기만 공부하고 자기만 통하는 것이고, 대승불교는 남까지도 포섭하고 우리가 보시도 많이하고 사회봉사도 많이 하고, 그런 이른바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대승불교다, 이와 같이 말씀들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만 가지고서는 이것은 상식적인 대승불교에 불과합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큰 차이 이것은 우리가 불교의 그런 교리적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대승불교는 분명히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떠나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소승불교는 아집과 법집을 온전히 못 떠나있습니다. 이런 구분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부처님이라든가, 부처님의 이른바 법신불法身佛이라든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그런 삼신불三身佛 사상이나 말입니다. 또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든가, 또는 불심佛心이라든가, 또는 불성佛性이나 이런 사상은 사실은 근본불교, 소승불교는 없습니다. 대승불교에 있어서만이 불심佛心이고, 또는 불성佛性이고, 진여眞如고 한단 말입니다. 헌데 이 진여眞如라는 것은, 이 불성이라는 것은 이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집과 법집을 떠나지 않고서는 사실은 진여眞如나 법성法性을 우리가 드밀(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이해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성佛性 말할 때는 모든 생명의 실상實相이 바로 불성이다, 이렇게 우리가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모든 생명의 실상이 바로 불성이면 우리 중생이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중생은 실상을 미처 우리가 느끼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지금 감기기가 있어서 말 음성도 그전 음성같이 평상적인 음성이 안 나오고 지금 그렇습니다 양해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성이나 또는 진여나 뭐다 그런 사상은 이것은 소승불교에서는 그것은 없는 말씀입니다. 없는 말씀인데 진여眞如가 성립이 되고 불성佛性이 성립이 되기 위해서는 꼭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있으면 안 된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 전에서는 이것은 우리가 있는 것을 분명히 실상으로 봐서는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지금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그런 분야에까지 미쳐 있습니다. 소승불교는 주로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우리 현상적으로 우리 중생이 있으면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 중생이 선善도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악惡도 있고 한다는 그런 차원의 가르침에서 우리 마음을 다스려가는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도 꼭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승불교에서는 내가 본래 없다는 그런 사상은 거기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로 해서 내가 어째서 없는가? '나'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러면 불교는 현실을 무시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가장 현실을 중요시합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현실을 바로 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로 해서는 분명히 있는 것인데 어째서 '나'라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 이른바 아집我執 아니겠습니까? '나'라하는 것이 있다는 그런 고집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아무리 학문적으로 많은 조예造詣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집을 미처 못 떠나 있습니다. '나'라는 관념을 못 떠나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집을 못 떠난다 말입니다.
그럼 불교에서는 어째서 아我가('나'가) 없다고 하는가? 이런 아我가 없다는 소식, 이른바 무아無我 아니겠습니까? 무아를 모르면 사실은 불교는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의 상식적인 분야밖에는 모른다 말입니다. 따라 상식적인 분야에서는 해탈解脫이 없습니다. 참다운 우리 인간의 구제가 없다 말입니다. 이른바 영생永生도 그때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인연법因緣法이라 하는 인연법(연기법緣起法)이 이것이 불교의 핵심 강령 아니겠습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인연법을 떠나서는 불교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도 인연법을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나를 참다웁게 안다고 생각할 때 인연법을 안다. 이런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연법도 소승차원에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따라서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났으면 저것도 생겨나고 이것이 원래 생生하지 않았으면 저것도 원래 없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것 이른바 상대 유한적인 조건부의 문제, 상대 유한적인 조건부의 문제는 그것은 우리가 보통 아는 문제란 말입니다 헌데(그런데) 소승적인 인연법은 대체로 그런 차원의 인연법입니다. 모두가 다 조건부이기 때문에 고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도리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걸로 해서는 아, 그러면 태초의 그 원인은 무엇인가? 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나'나 '너'나 또는 모든 존재가 분명히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의 가장 시초 근본적인 이른바 제일제第一題(제일문제)는 무엇인가? 이렇게 우리가 질문을 할 때는 이 소승불교에서는 답변을 못 한단 말입니다. 답변을 못 합니다. 따라서 대승불교에 들어가서야만이 비로소 그런 해답이 나온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의 제 1위는 결국은 다 불성佛이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말입니다. 헌데 우리가 그 진여불성은 어떻게 아는 것인가? 이것은 그냥 개념적인 우리의 분별지혜로 해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관념적인 우리가 소양을 많이 쌓았다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은 이것은 모양이 안 보이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분명히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니까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허나 그 마음이 이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성도 공간성이 없어나서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으면서 마음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와 똑같이 일체의 존재가 일체 존재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 존재의 근원이 분명히 있을 거란 말입니다. 존재의 그 근원이 이른바 제일제第一題가 이것이 분명히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다만 시간 공간성에서 사는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유한상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해서 이른바 염불念佛도 많이 하고 어떤 화두話頭도 참구하고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시하고 훌륭한 그런 성인들이 이른바 우리한테 교훈을 주신 그런 교훈에 따라서, 우리 마음이 고요히 맑아져야 우리 번뇌 업장에 가셔야 그래야 비로소 우리 근본적인 생명을 그때는 우리가 스스로 직관적으로 안단 말입니다.
직관적으로 안다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집我執이라 하는 '나'라는 생각이 가시고, 동시에 일체의 존재가 우리 눈으로 보는 대로 사실로 있다, 이런 것이 법집法執인데 법집이 가신단 말입니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가시고서 모든 존재의 그 참다운 본래 모습, 본래모습을 그래야 비로소 본단 말입니다. 그때 보아지는 것이 이른바 이것이 불성佛性이고, 이것이 법성法性이고, 다 진여眞如입니다. 따라서 일반 중생들은 법신法身과 진여眞如와 우리 불심佛心이나 그런 것을 사실은 말로만 듣고 아는 것이지, 우리가 도저히 체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위제희 부인은 부처님 당시에 빔비사라Bimbisara 왕의 그분의 왕비 아닙니까. 왕비인데 자기가 못된 아들 아사세 태자 때문에 결국은 옥중에 가서 유폐가 되었단 말입니다. 유폐가 되었는데 어떻게 참 그야말로 구제를 자기가 받을 기회가 없단 말입니다. 자기 부군도 같이 유폐가 되고 자기 부부간 같이 되어나서 자기 못된 아들 때문에 갇혀있지만 어떻게 구제를 받을 길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숭앙하는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부처님한테 아주 갈앙渴仰을 했단 말입니다. 간절히 호소를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 옥중까지 일부러 오실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목건련 존자나 사리불 존자를 보내시던가 말입니다. 그럼 아난 존자를 보내서 지금 저의 그런 딱한 사정을 들어 주소서 하고 간절히 참 며칠이고 기원을 드렸단 말입니다.
평소에도 부처님을 이렇게 아주 갈앙하고 숭앙하는 마음이 간절한 위제희 부인인지라, 더구나 자기 부부가 다 곧 죽을까 말까 하는 생사간로(생사기로)에 있어놔서 부처님을 구하는 간절한 마음은 더욱더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이 심각했겠지요. 그래서 그 심각한 정도, 우리가 부처님한테 기도를 모실 때나 신장기도를 모실 때나 우리가 기도 모시는 그런 정성精誠 따라서 꼭 가피加被가 있게 됩니다. 정성에 걸맞게시리 우리한테 상응된 그러한 가호加護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부처님을) 모시는, 부처님을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하도 사무쳐서, 그런 사무친 가운데 홀연히 그 위제희 부인 앞에서 극락세계極樂世界의 찬란한 황홀한 모습이 현현되고 말입니다. 그러고 동시에 부처님의 그 음성이 울려나온다 말입니다. 그 극락세계의 그야말로 광명찬란한, 무량광명無量光明을 그때 위제희 부인께서 그대로 참배를 하고서 그래가지고서 그때에 환희용약 가운데서 자기 마음이 자기 범부심이 바뀌어져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무생법인을 증證(증득)했단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범부의 마음이 성자의 마음으로 바뀌어져야 그래야 이른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우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것은 원래 낳지 않고 죽지 않는, 없을 무無자 낳을 생生자 원래 낳지 않고 죽지 않는 그런 도리를 안단 말입니다. 무생법인을 증해야 이제 비로소 참다운 견성오도見性悟道가 되는 것입니다. 무생법인을 증하지 못하면 그때는 견성오도가 못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은 그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사실은 보통 다 부인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없으면 그때는 철학적으로 성립이 안 되지요. 동시에 어느 종교도 역시 성립이 안 됩니다. 영생해탈이나 또는 영평永平?다나 그런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마음이 현실적인,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는 그런 집착을 끊고서 '나'라는 집착을 끊고, 동시에 모든 존재가 참말로 있다 하는 모든 존재相나 '나'라는 존재나 이것은 하나의 가유假有에 불과합니다. 거짓 가假자 있을 유有자 하나의 가유假有에 불과하다 말입니다. 이것이 (현상적인) 가유假有인 줄을 모르면 도저히 우리가 실유實有라, 참다웁게 있는 그런 실상實相, 영원적인 그런 무생법인에서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실상지혜實相智慧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실상지혜를 얻어야 비로소 열반涅槃이고, 해탈解脫이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부처님 법은 먼저 부처님 법에 의지해서 혜해탈慧解脫(지혜해탈)이라, 혜해탈이란 말입니다. 먼저 지혜로 해서 먼저 이론적인 걸로 해 가지고 이른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철학적으로 본체론적인 문제나 또는 현상문제나 말입니다 본체와 그런 현상문제나 또는 법신과 우리 중생문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우리가 이치로 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해오解悟입니다. 해오. 이때 해오解悟는 이것은 지혜 혜慧자 혜오가 아니라 이것은 풀 해解자, 풀 해解자 하고 깨달을 오悟자 해오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우리가 새삼스럽게 지금 성불이나 열반을 우리가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무수한 성자가 이미 개발해 있단 말입니다. 무수한 성자가 다 증명證明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뒤에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 같은 사람은 억울하게도 그 뒤에도 제대로 못 따라갔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미 나이가 많이 먹어서도 참 그야말로 한탄恨歎 한탄이 참 한도 끝도 없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 지금 탄탄대로 부처님과 무수한 성자가 그렇게 다 이루어놓으신 탄탄대로가 있는데도 제대로 못 따라간단 말입니다.
따라가는 길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잘못 보는 이 가유假有, 있지 않는 것을 우리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왜 있지 않는 것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 있는 것 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어느 것도 있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일체의 있는 것은 이것은 꿈이요, 헛깨비요, 그림자요, 거품이요, 또는 풀 끝에 이슬이요 또는 하나의 번개불이란 말입니다. 사실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금강경도리를 우리가 천 번, 천만 번 외인다 하더라도 그런 헛깨비같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 아닌 걸로 봐야지, 그렇지 않고서 사실이 아닌 헛깨비같은 것을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금강경을 수천 번 수백 번 외인 그런 공덕이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상식적으로 부처님을 아는 정도로 그쳐선 안됩니다. 또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해오解悟라,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이론적으로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본래의 본체本體인 그런 불성佛性자리하고 현상적인 그런 용用자리하고 말입니다. 또는 성품과 현상과 이런 도리를 이른바 본체론과 현상론 이런 것에 대해서 좀 알았다고 해서 불교를 아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철학적으로 먼저 한 체계를 이뤄놔야 됩니다. 그래야 아까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가 비로소 안락법문安樂法門이란 말입니다. 길을 아니깐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가짜보고 진짜라고 생각하고, 도둑 보고 그야말로 참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보고 도둑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격이나 같다는 비유가 불경들에는 많이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고, 또는 내 것이란 존재가 있고, '나'라는 존재가 본래 없거니 (무아無我) 내 것이란 존재가 있을 턱이 없겠지요. (무소유無所有)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존재는 이것은 몽환포영夢幻泡影인데, 몽환포영夢幻泡影 같은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몽환포영이란 말입니다. 꿈이 실제로 있을 수가 없듯이, 우리가 그렇게 아끼는 내 몸뚱이나 관념이나 사실은 그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본래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도, 어느 순간도 사실은 고유한 자기 몸뚱이가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한 찰나의 몇 억분의 일 정도도 우리 몸뚱이 세포가 그대로 지금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순간순간, 순간찰나찰나 그대로 지금 변화무쌍變化無雙한 것인데 우리 중생이 그 상속되어가는 그것만 우리가 느끼고서 끊어져가는(변화해 가는) 그걸 우리가 못 느낀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그렇다 하더라도 전자나 또는 중성자나 양성자나 이런 것은 있지 않을 것인가. 모든 물질로 구성한 그런 소립자 같은, 그런 원자 단계에도 그런 것도 역시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주의 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어떻게 결합되는가? 진동 여하에 따라서, 플러스Plus 전하를 띄고 있으면 그때는 양자다, 양성자다 또는 마이너스Minus 전하를 띄고 있으면 그때는 전자다 이러는 것이지, 그렇게 물리학자가 가명假名을 붙인 것이지, 원래 그런 존재가 실제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다만 에너지 하나의 파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가끔 말씀드립니다만 에너지라는 것은 사실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의 그것이 시간 공간성을 떠난 하나의 우주의 장場(장에너지)의 하나의 생명체란 말입니다. 저는 지난달에 무슨 한국일보사의 (신문의) 한 쪽지를 봤습니다만, 현대 물리학자가 가장 지금 궁금하고 또는 문제시 하고 있는 것이 지금 무엇인고 하면, 지금 진공眞空이 무엇인가? 우주의 허공虛空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우주의 진공이 무엇인가, 허공이 무엇인가, 허공에 대해서 모른다는거란 말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정밀한 기계로도 이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측정이 안되니까 말입니다.
어떤 것도 허공이 무엇인가, 또는 진공이 무엇인가, 이걸 지금 모른다는 말입니다. 오직 부처님 가르침 만이 압니다. 이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인 것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고(불생불멸不生不滅) 또는 오염도 안되고(불구부정不垢不淨) 또는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말입니다.(부증불감不增不減) 우주에 언제나 상주부동常住不動한 그 자리가 바로 이것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현대물리학은 지금 석가모니가 나오신 뒤에 2600년 훨썩 지난 뒤에도 아직은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은 몰라서 다만 물질이 지금 종당에는 다 비어간다, 종당에는 다 공空이다 말입니다. 현대물리학은 모든 것이 다 공이다. 이런 도리는 안다 말입니다. 그러나 공 그 자리는 무엇인가? 그 자리가 바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자리가 바로 진여眞如요 불성佛性이요 또는 불심佛心이란 말입니다. 진여요 불심이고 또는 불성이고 이것만이 사실은 실상實相입니다. 물질이 아닌지라, 모든 것이 물질이 아닌지라, 공간성도 시간성도 아닌 그런 물질이 아닌지라, 다 어느 것도 공간성도 시간성도 본래로 있지 않은 하나의 거품같은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이 적당히 모여서 각 원소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모여서 분자가 되어서 이 성분으로 되어서 하나의 형체가 이루어진다 말입니다.
그 근본 원소, 근본 원자가 본래 공이거니, 본래 공인 원소로 이루어진 일체 존재도 똑같이 우리중생이 봐서 이 사람같이 보이고 뭣같이 보이는 것이지, 다 공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색즉공色卽空입니다. 색즉공은 색이라는 그런 물질을 천만 번 분석해서 공이라는 것이 아니라 색즉공이라, 물질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당체즉공當體卽空)
다만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 그대로, 다이아몬드고 뭣이고 물질 그대로 바로 공인 것이고, 우리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 그대로 사람이면 사람, 김가면 김가 박가면 박가란 말입니다. 우리 개인적인 인생고人生苦를 우리가 해탈하기 위해서 제아무리 몸부림 친다 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까 반야심경 독송을 하셨으니깐.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조견오온개공 다음에 가서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 그런 성구가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여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일체고액一切苦厄을 오온五蘊이 다 비었다는 것을 비추어 봄으로 해서 일체인생고를 떠난다 말입니다. 오온은 무엇인가? 오온 이것은 이 몸뚱이나 또는 일체 물질이나 또는 우리 인간의 그런 때묻은 그런 관념 분별망상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오온법 아닙니까. 이런 것이 다 본래 비어있다는 비어있다고 우리가 분명히 봐져야 그래야 비로소 인생고를 떠납니다.
인생고 이것은 개인개인 고苦뿐만 아니라 정치고나 사상고나 또는 경제고나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대적인 이 복잡한 상황, 얽히고설킨 무서운 이 정보화 시대 이런 때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렁저렁한 그런 상식적인 문제라든가 또는 아직은 특출하지 못한 철학적 이론이나 말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제대로 치유를 못합니다.
오직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도 대승적인 가르침 그 가르침 속에서 가장 핵심이 무엇인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의 존재가 본래로 비어있단 말입니다. 본래로 비어있다고까지만 알면 그때는 너무나 허무하겠지요. 본래로 비어있는 그 정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쉬운 말로 부처님 눈으로 보면 다 부처님이고 이런 말씀이 쉬운 말을 같지만 이것이 바로 진리란 말입니다. 진리입니다. 우리의 중생이 보면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선善이 있고 악惡이 있고 이렇게 다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승二乘이라, 이승은 다만 공도리空道理만 안단 말입니다. 이른바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이 이승 아닙니까? 소위 말하는 소승이란 말입니다. 소승은 다만 공도리만 안단 말입니다. 공도리도 법집이라 하는 그런 것은 온전히 못 떠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공도리는 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승二乘, 성문聲聞,연각緣覺이라 하는 모두가 다 본래로 공이다. 이런 도리밖에 모른 사람들은 그때는 허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고집한 사람들, 성문 연각만 고집한 사람들은 그때는 참다운 보살이 못되지요. 그 공이 아닌 우리 중생 잘못 보는 것은 비록 공이지만은 그 실상은 공이아닌 그때는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비록 알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가 불교인이 됐으면 금생에 얼마나 축복받은지를 모릅니다. 축복받는 우리가 불교인이라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를 그냥 현상적인 아까 제가 말씀드린 상식적으로 그냥 상대 유한적인 차원 밖에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축복받을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산중에 들어가서 우리가 금을 캐고자 해서 들어간 사람들이 금도 못 캐고서 그 자갈이나 그런 것만 주워 가지고 그냥 갔단 말입니다. 참다운 금을 캘라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본래로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허망한 가상假相이다. 이렇게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알아놓으면 우리가 경계에 부딪혀서 실제로는 성자같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때그때 우리가 아차아차하는 그런 자기 스스로 자기를 반조返照해서 자기를 발할?(바르게 해 갈)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세계적으로는 60억 인구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서 기독교가 개신교 가톨릭 합해서 20억 정도가 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힌두교, 힌두교는 한 9억 정도라고 합니다. 제가 이제 몇 개월 전에 그 통계를 봤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12억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불교는 3억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얼마나 우리가 참 그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포교하는데 게으름 부렸다 하는 것을 참 사무치게 느끼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이 세계를 구제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부처님 가르침 외에는 실상을 제대로 지금 보지를 못한다 말입니다. 가상을 가상대로 제대로 규정도 못합니다. 지금 난마亂麻같이 얽혀있는 다원시대에서의 사상체계 또는 종교의 그런 혼란 이런 것도 모두가 다 부처님 가르침, 특히 대승적인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가까스로 60억 인구에서 그 20분의 1밖에 못 된단 말입니다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입니까. 그것은 우리 불자님들이 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있지 못한단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이 절대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참 안락법문安樂法門입니다. 한 걸음 가면 한 걸음 간만치 간만치, 우리 몸에도 우리 마음에도 우리 집안에도 우리 주변에도 훨썩 더 행복이 증장이 됩니다. 부처님 그 불심佛心은 무엇인가? 불심은 이것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빛이란 말입니다. 전기불이나 태양광선 같은 그런 빛이 아닙니다. 청정적광淸淨寂光입니다. 청정적광입니다. 기멸起滅이 없는,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우주에 언제나 그대로 있는 그런 청정광명淸淨光明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무량광명無量光明입니다. 이런 광명이 우주에는 항시 충만해 있습니다. 이런 데서부터서 우주가 이루어지고 모든 중식?(중생)이 이루어진다 말입니다. 청정광명으로부터서 우주가 이루어지고 우리 중생이 태어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또 청정광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부처에서 왔다가 부처로 지금 가는 것입니다. 지금 어느 천문학도, 어느 과학적인 천문학도 불교의 우주론과 같이 그와 같이 합리적인 천문학은 없습니다. 우주라는 것은 텅텅 비어있는 물질이 아닌 그런 광명세계로부터서 하나의 형체가 이루어지고, 그 형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중생衆生의 공동업(공업共業)으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텅텅 비었는데 우리 중생의 업이 어디가(어디에) 있는가?
비록 물질생활하는 물질세계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른바 무색계無色界라, 무색계에는 그런 물질세계가 아닌 의식세계만 있는 것인데, 그런 세계에도 아직 성불을 못한 중생이 존재한단 말입니다. 중생의 의식意識이 존재합니다. 그런 의식들이 좋다 궃다 하는 그런 마음 싫다 좋다하는 그런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것이 업이 됩니다. 그 무수한 그런 공업共業들이, 공동업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래서 이 우주 천체를 구성한다 말입니다. 그런 소리가 소상히 나와 있습니다.
현대 지금 정밀물리학은 두고두고 두고두고 우리 불교를 공부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인슈타인 이론?들도 보면 과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정신 태도가 무엇인고 하면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다 말입니다. 우주 하나의 생명으로 봐야만이 참다는 과학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그런 천재는 비록 종교인은 아니어도 역시 다 종교인은 거의 됐습니다 물질을 연구하다 연구하다 보니까 물질이 속에 있는 신비로운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힘을 느낀다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마음은 바로 그러한 불심佛心입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광명光明 자체입니다 그 광명은 한계가 없습니다. 참다운 광명 이것은 한계가 없습니다. 시간 공간을 떠나 있습니다. 따라서 '갑'이라는 사람 마음도 우주의 끝도 갓도 없이 무변무량無邊無量으로 충만되어 있고, 또는 '이가'라는 사람 마음도 역시 우주의 무량무변하게 충만해 있습니다. 우주라는 것은 오직 부처님 광명뿐입니다. 어느 것도 지금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을 보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지금 보는 것입니다.
물질은 있지만 그냥 우리 중생이 보는 잘났다 못났다 그런 물질이 아닙니다. 다 부처님같이 보는 어느 사람도 부처님같이 보이는 그런 물질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으로 되었거니 어떻게 모양을 했다 하더라도 부처님 같은, 부처님이라는 그런 자리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물질이 아닌, 물질이 아닌 그런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적당히, 적당히 조건부로 모여서 사람같이 보이고, 다른 동물도 보이고, 식물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그런 성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때나 주저없이 순교도 하는 것이고 남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바치고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가 따로 있고 남이 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차원에서는 참다운 보시, 참다운 자유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있다고 생각할 때는 상相이 있는 것이지요. 내가 있고 네가 있는 차원에서는 항상 자기를 못 떠납니다. 따라서 사실은 따지고 보면 우리 중생들은 위선僞善을 어느 누구도 못 떠납니다. 위선僞善을 떠나기 위해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 생명이 모두가 하나의 생명이다. 거기까지 우리 생명이 이르러야 그래야 이제 비로소 위선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물질문명이 얼마나 우리한테 풍요로운 행복을 주는가를 충분히 만끽을 합니다. 우선 저 같은 사람도 아침부터서 4시간 거의 가까이 되는 승용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걸 생각할 때 얼마나 편리한가를 아주 참 가슴 깊이 절감을 합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우리 불자님들의 은덕恩德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생각할 때 이 물질문명의 혜택도 끝도 갓도 없습니다. 끝도 갓도 없는데, 없다고 보는 것인데
그 물질물명의 가장 모든 것을 다 이루어지는 핵심이 내내야 원자력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마음자리는 그보다도 훨썩 더 비교할 수 없는 무한성능의 하나의 에너지장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원자력만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우리 불심은 우리가 과소평가합니다. 왜소하게 본단 말입니다. 내 마음은 지금 못생긴 내 머리나 심장이나 어디에 가 있겠지, 이렇게만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 이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누구 마음이든지 간에 우주에 다 편만遍滿해 있습니다. 우리가 한 방안에다가 등불을 몇 개를 우리가 켜 본다고 합시다. 그러면 등불마다 서로 싸우고 뭐다 그렇게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모두가 서로 피차 화합되어서 결국 밝아온다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김이라는 사람 마음이나, 또는 박이라는 사람 마음이나,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존재의 본래 성품의 그 마음이 지금 우주에 같이 화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느 원자력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무한 성능의 그런 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은 이것은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다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누구나가 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생명의 본래의 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분명히 다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불자님들은 삼명육통을, 아 이것은 그런 신통들은 외도나 하는 것이지 하고서 부인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도의 법문이 아닙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나 특히 아함경阿含經 같은 근본경전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삼명육통 같은 신통자재通力自在라 하는 그런 말씀이 수십 군데가 있습니다. 따라서 즉 이런 것은 어느 특수한 만(분)이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잠재적으로 누구나가 다 할 수가 있는 것인데 다만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못하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 않고서 정말로 우리가, 정말로 우리 마음이 100%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한순간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선 제 스스로 먼저 못하니깐 부끄럽습니다만 따라서 제 스스로도 100% 부처님 말씀을 다 믿고 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겠지요. 제가 진정으로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일념一念 동안에 우리한테 본래 갖추어진 어디서 꾸어서 올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 삼명육통을 다 충분히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토경(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정토경 가운데서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일념왕생이라. 우리가 임종 때 우리가 그 간절한 마음으로 해서 우리가 참 평소에는 그냥 그렁저렁 살다가도 죽을 때는 인제는 뭐 다시 여유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때는 하여튼 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믿어야 되겠구나. 내가 의지할 데는 부처님밖에 없구나.(부처님을 100% 믿어야 합니다) 임종 때 그 간절한, 그 절박한 일념一念으로 해서 꼭 일념으로 부처님을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일념一念 그것으로 해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우리가 이제 비약적으로 초승超昇한다 말입니다. 그런 도리가 불교는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즉 그런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이제 사람을 참 그야말로 많이 살인도 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한 그런 악독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우리 본래 불성자리는 오염이 안 된다 말입니다. 오염이란 것은 이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 오염이 되는 것이지, 모양이 없는 우리 마음은 이것은 오염이 안 됩니다. 오염이 안 되기 때문에 비록 몇 사람의 사람을 죽이고 그런 무서운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참회懺悔를 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다 죄가 삭혀지는 것입니다. 죄가 소멸된다 말입니다.
여러분들 기억하시죠. 부처님 당시의 앙굴마鴦掘魔(앙굴리마라)라, 앙굴마라는 사람은 몇 사람을 죽였습니까? 그렇게 죽였지만 부처님을 만나서 참회를 하고 바르게 닦아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했다 말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사형대에 올라가서 있는 순간도 역시 우리 마음은 그 순간도 구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도 구제를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위대한 것입니다 위대한 것이 하나의 참 징표입니다.
비단 부처님 가르침만 그런 것에 대해서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바이블Bible을 보면 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예수님이 자기 제자한테 하는 말로 해서 그대들이 가령 겨자씨 한 알만한 그런 신심信心만 있다고 할지라도 앞에 있는 이 산더러 저쪽으로 옮겨가라 하면 옮겨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 말입니다 마태복음서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7:20)
우리 부처님 법문에 그 능엄경楞嚴經이나 또는 유마경維摩經 보면 이런 법문도 있습니다. (모탄거해毛吞巨海 개납수미芥納須彌) 겨자씨, 겨자씨 하나 가운데 개납수미芥納須彌라, 수미산須彌山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수미산인데 겨자씨 하나 가운데 수미산이 들어가고, 들어가서도 조금도 좁아졌다는 생각도 없고 말입니다. 좁다는 생각도 없고, 또는 물방울 하나 가운데 사해四海가 들어간단 말입니다. 모든 그런 광대무변한 바다가 다 들어간단 말입니다. 들어가고도 오히려 여유가 있단 말입니다. 겨자씨 하나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큰 산이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물방울 하나 가운데 이 사해四海의 물이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우리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되겠지요. 납득이 안 가는 것이 부사의不思議 법문인데, 불가사의 법문인데 그런 법문이 가능한 것입니다. 왜 가능한가? 겨자씨나 또는 수미산이나 또는 물방울 하나나 또는 사해의 바다 같은 물방울이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로 그것이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닙니까. 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을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눈으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런 상을 내고 또는 탐욕심貪慾心을 내고 또는 진심瞋心을 내고 또는 치심癡心을 내고 그런 마음 때문에 가려서 우리가 지금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이 참다운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우리가 상相을 내지 않아야 됩니다. 어떻게 상을 내지 않을 것인가? '나'라는 것이 본래 없고 '너'라는 것이 본래 없고 사실은 '나'라는 것이 본래 없거니 내 것이란 것도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 도리만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한국의 무서운 그런 경제난 이런 것이 어디 가서 붙을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말씀으로 우리가 표현하면 홍로일점설紅爐一点雪이라, 뜨거운 화로에다가 눈 한 줌 넣으면 순식간에 녹아버리겠지요. 어떤 것이나 경제고나 또는 사상고나 우리 인생고 모두가 다 부처님 사상을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홍로일점설입니다. 그냥 다 (그런 고를) 없애 버린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참 잘못 삽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떠한 누구나가 다 꼭 승려가 되어야 한다는 그런 가르침은 아닙니다. 자기 몸은 어디가 있든지 간에 부처님 가르침은 이것은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로 가는지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더디고 빠를뿐인 것이지, 모두가 다 부처가 꼭 되어야만 됩니다. 몇 생 뒤에도 되어야 됩니다 잘못되면 그냥 쉽게 못 되면 그때는 윤회하겠지요. 우리가 어머니 되고 또는 아버지 되고 남편 되고 아내 되고 자식 되고 뭐다 그런 인연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인연이 굉장히 참 소중합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그래서 그런 인연을 함부로 할 것이 그건 못됩니다.
허나(그러나) 그런 인연들을 가장 잘, 가장 효과적으로 하는 인연이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길입니다. 자기 남편이 부처님을 오로지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자기 아내를 부처님같이 생각해야 되겠지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한테 대하던지 간에 가장 그 사람을 좋게 대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부처님같이 우리가 대하는 것이 가장 좋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평화스럽고 더 화평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되어가는 길에 여러분들이 아시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그런 방법도 있고, 염불念佛 방법도 있고, 주문呪文도 있고 하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모든 방법이 다 훌륭한 방법입니다. 성자들이 말씀하신 방법은 다 우리가 참고하고 어느 방법을 취하던지 간에 다 성불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방법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현대라는 사회가 하도 복잡하고 불안의 시대입니다. 불안한 시대는 가장 쉽고 가까운 방법을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에 본래가 부처이기에, 부처가 부처님을 생각하는 방법이 사실은 제일 쉽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염불念佛 아닙니까? 염불이라.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는 염불은 근기가 낮은 분들이 염불하고 근기가 수승한 분들은 화두나 그런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치에 닿지 않은 그런 말씀입니다. 그건 왜 그런고 하면 사실은 우리가 참선의 할애비라고 하면 물론 가장 먼 할애비는 석가모니 부처님이겠지만 우선 가까운 할애비는 중국의 달마 스님 아닙니까.
달마 스님 때부터 육조혜능스님 그때까지는 이른바 정통조사, 참선으로서는 가장 위대한 저작著作을 많이 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작들을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달마스님 때부터 육조혜능스님 때까지 제일 많이 한, 제일 많이 하고 역설을 한 법문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일행삼매라. 일행삼매一行三昧는 한 일一자 행할 행行자 일행삼매입니다. 육도단경만 해도 일행삼매라는 그런 구절이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4조 도신스님이나, 중국에서 4조 도신스님 때 비로소 하나의 선원을 형성해서 500명, 700명이 같이 공부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도신스님께서 내신 책이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인데 그 책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일행삼매에 대해서 소상히 어떻게 닦으라는 말까지 다 들어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일행삼매의 내용이, 일행삼매의 법도 여러 가지 법이 있으나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오직 그 부처님한테 대해서, 우리가 부처님 생각할 때, 부처님이라고 말할 때는, 부처님이 내 밖에 있다 이런 부처님은 참다운 부처님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우주가, 우주 모두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 아님이 없다. 우주는 바로 부처님이라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다. 이렇게 생각해야 그래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승적인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염불도 부처님이 저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러면 이것은 참다운 염불이 못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말입니다. 또는 어느 때 언제나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을 해야 그래야 참다운 이것은 염불입니다. 이렇게 염불하는 것은 그때는 바로 염불참선念佛參禪이 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도신스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또는 5조 홍인스님 말씀이나 말입니다. 또는 육조혜능스님 말씀이나 모두가 다 일행삼매를 역점을 두신 것인데, 특히 그 육조단경의 부촉품付囑品 부족품은 하나의 경經의 결론 같은 것인데 그 가운데 가서는 어떻게 말씀했는가 하면, 그대들이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응당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지니라. 이렇게 말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방금으로 말씀을 소상히 했습니다.
헌데(그런데) 그 방법은 무엇인고 하면, 제가 몇 번 말씀을 해 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본래 부처거니, 우주가 본래 부처거니 있는 그대로, 우리가 에누리가 없이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가 부처를 부처로 생각하고서 부처를 부르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 부처 이름도 하도 많은데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을 어렵게 생각을 절대로 말으십시오.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라, 부처님 이름이 무슨 부처, 무슨 부처, 일광여래, 월광여래, 뭐다 하여튼 3천 불명이나 있고, 또는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많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부처님이 그 우주 공간내에 가서 어디에 가서 뿔뿔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오직 하나의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상이 없는 자리거니, 모양이 없는 자리거니 시간성, 공간성이 없는 자리거니 이른바 이름도 어떻게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 모양도 없지만 무량광명無量光明과 모든 그런 만덕萬德을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만덕을 갖추어 있으니 그 만덕을 다 우리가 일일히 헤아릴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그 만덕 따라서, 자비심 따라서 또는 지혜 따라서, 또는 행원 따라서 이렇게 그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는다 말입니다. 자비심 따라서 관세음보살, 또 지혜 따라서 문수보살, 또는 대세지보살 말입니다. 또는 원력 따라서 보현보살,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을 저 극락세계나 천상으로 인도하는 또 그런 공덕 따라서 지장보살, 그러는 것이지 뿔뿔이 모양이나 몸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아닙니다. 그 보살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증거로 우리가 장엄염불莊嚴念佛을 할 때에 장엄염불은 주로 그 나옹懶翁스님(1320~1376), (장엄염불은) 나옹스님이나 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2) 스님께서 주로 하신 것을 간추려서 냈습니다. 또 화엄경에서도 뽑기도 하고, 헌데, 끝에 가서 삼백육십만억三百六十萬億 일십일만一十一萬 구천오백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그 아미타불이 아미타불이 몇 분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도 수가 많으니까 일십일만一十一萬 구천오백九千五百 그러니까 그 하도 많으니까 일일히 못 헤아리고서 많은 수를 (표현을) 했단 말입니다. 일십일만一十一萬 구천오백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라 동명동호라. 같은 이름 같은 호란 말입니다. 동명동호同名同號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나'나 '너'나 김가나 박가나 모두가 다 아미타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중생이 보면 김가박가 하지만은 성자의 밝은 눈, 본래 면목을, 본래 실상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동명동호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도신스님께서나 육조혜능스님께서나 그렇게 우리한테 권장하신 염불은 그런 염불입니다. 그런 염불은 어떠한 공부하고도 절대로 그때는 충돌이 안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화두는 무엇 때문에 드는 것인가? 일체 존재가 모두가 부처 아님면 없다 이런 도리를 한말로 느끼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잠시간 거기다가 무슨 문제를 제시해서 화두가 있는 것이지, 어느 누구나가 다 '나'나 '너'나 일체 존재가 다 모두가 부처다 이렇게 확신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화두가 개입할 것이 없습니다. 화두가 나올 것이 없습니다. 화두는 빨리 타파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거기까지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타파하라는 것인가? 모두가 다 부처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알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운문스님(雲門文偃, 864~949)한테 어느 스님이 가서 '여하시 불佛잇꼬' 부처가 무엇인가? 똥마른 막대기라. 하필이면 부처를 갖다가 (묻는데) 똥마른 막대기가 있다. 똥마른 막대기라. 똥마른 막대기까지도 부처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그런 도리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지금 중생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생의 몸을 아직은 지금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처지입니다 중생의 몸으로 해서 어떻게 빨리 우리가 부처가 될 것인가.
그러면 어느 하나의 방법을 골라서 무간수無間修라, 무간수라. 없을 무無자 사이 간間자 말입니다. 사이 없이 사이 없이 닦아 나가야 됩니다.(무간수無間修) 우리가 과거 전생에도 우리가 많이 업을 짓고, 금생에도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고, 그런 것이 모두가 업業으로 해서 우리 불성佛性에 다닥다닥 지금 그림자로 붙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없애야 됩니다.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본래의 중심에다가, 중심은 부처 아닙니까. 본래 중심에다가 딱 우리가 붙여놓고서 그래놓고서 아까 말한 일행삼매라, 오로지 우리가 생각 생각에 사이 없이 다른 망상이 낄 수가 없도록까지(염념상속念念相續,무간수無間修) 우리가 무슨 점포를 보면서 고객을 만나나 우리가 무슨 물건을 파나 말입니다. '다 모두가 부처구나' 미운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다 부처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그래야 상相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실은 부처인데 우리가 그렇게 못 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볼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아니니깐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각念생각念에, 생각 생각에 다른 생각, 다른 상을 내지 말고서 무간수無間修라, 사이없이 닦아 나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우리 버릇이 차근차근 가신단 말입니다. 딱 그래서 온전히 가시면, 온전히 가시면 그때는 천지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천지가 뒤바뀐단 말입니다. 천지가 광명세계光明世界가 됩니다.
플라톤의 유명한 국가론에서 이른바 태양과 동굴의 비유라, 이것도 역시 태양은 성자의 세계고, 동굴은 우리 중생의 세계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다 있는 것보고 우리가 없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참말로 다 부처가 있는 것인데 없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없는 것 보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나'라는 것은 분명히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에 '나'같이 지금 보일뿐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화두도 좋고,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한테 가는 우리의 그 삼독심三毒心을 녹여서 본래 면목으로 가는 하나의 길잡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쉬지 않고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분명히 훨썩 더 가벼워집니다.
아까 제가 삼명육통三明六通 말씀을 드렸지요. 분명히 참말로 깨달아서 그 번뇌의 습관성이 녹인 사람들은 꼭 신통神通을 다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래 우리 몸뚱이가 본래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의 순수에너지,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그때그때 이와 같이 헛깨비같이 그림자같이 모양을 보일 뿐이기 때문에 사실은 어느 몇 킬로나 그런 중량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번뇌로 중량을 느끼는 것입니다.
부처님한테로 가는 길이 가장 건강한 길입니다. 가장 행복스러운 길입니다. 가장 좋은 아버지가 되고, 가장 좋은 어머니가 되고, 가장 훌륭한 스승이 되는 길입니다. 그런 길은 가장 쉬운 길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허두에 누누이 말씀드린 바 안락법문安樂法門입니다. 제일 편안한 길입니다. 세계를 구하는 길도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경제이론이 나와도 그 무아의 도리, 본래 내가 없다는 도리를 알아야 훌륭한 경제이론을 보다 더 훌륭하게 쓸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훌륭한 경제이론도 역시 본래 내가 없다는 성자의 보시, 성자의 사회봉사, 이보다도 더 훌륭한 봉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무아無我를 다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지요. 원수가 원수라고 보이면 사랑이 되겠습니까? 원수라고 안 보인다 말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도 끝도 없는 우리의 그런 진여불성眞如佛性, 불성자리를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서 위없는 행복을 참구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19981031 청화큰스님 진주대법회 법문
* 영상법문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gdwh8j9wV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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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주대법회 법문이 큰스님의 주옥같은 법문입니다만 기존 텍스트가 없는 법문입니다.
유튜브 영상작업으로 녹취하였습니다. 영상법문은 아침에 공개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근념하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