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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1-12, 은혜의 수문 앞 광장 2024. 3. 10.
1. 먼저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성과 성벽의 중건을 마치고 성의 문을 달면서 경계를 위한 파수와 주의를 느혜미야가 백성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수문 앞 광장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공사에 참여했던 모든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모인 이유는 은혜가운데 중건이 되고 삶의 현실은 이제부터 보장이 되겠지만 이 것을 이어가는 그 무엇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이 갈급했습니다. 예배 공동체의 유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먼저 모여야 했고 들어야 했고 깨달아야 했는데 이 때에 말씀을 들으면서 각성하게 됩니다. 8: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水門)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온전히 성과 성벽이 세워진지 일곱 달이 지났는데 스스로 모였습니다. 당대의 학사 에스라를 모셔오고 여호와의 말씀을 부탁합니다. 말씀에 대한 기갈 때문에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수문(水門) 앞 광장, 타이틀이 멋있지 않습니까? 이름대로 풀이하면 물이 쏟아지는 문 앞입니다. 어떤 물이고 무슨 물인가요. 윗물입니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로 길러갔던 그 물입니다. 번제에 필요한 물이 들어가고 나가는 수문 앞 광장입니다. 여러분, 물은 마시고 마셔도 목이 마르고 갈증이 있지만 그러나 생수로 오신 분이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이 물은 에스겔을 통하여 보여주신 성전 문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발목을 적시고 무릎과 허리를 적시고 나중에는 온 몸이 잠기는 그 물입니다. 겔37;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영혼의 기갈을 해소시키는 물입니다. 더러움을 씻어내는 물입니다. 그 곳이 어디일까요? 수문(水門) 앞 광장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의 자리가 수문 앞 광장입니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장소이고 생명을 공급하는 곳입니까? 그 곳이 바로 수문 앞 광장이고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수문 앞 광장에서의 은혜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은혜와 같습니다. 수문 앞 광장과 마가의 다락방은 말씀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순절의 은혜는 기도를 통한 성령의 충만인데 수문 앞 광장에서의 은혜의 결과는 사모하는 마음 가운데 말씀의 충만 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며 말씀 앞에 경외하는 자세가 되며, 깨닫고 은혜를 나누고 그 뜻대로 행하게 됩니다. 이 것이 수문 앞 광장에서의 은혜입니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종과 여종 모두가 모였습니다.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다 모였습니다. 이 때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펼 때에 다 감격하여 사모하면서 일어났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하매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새벽부터 오정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더하여 레위 사람들의 가르침과 제사장들을 통하여 내용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통회의 역사가 나타났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9절에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지라. 다 울었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서로 나누고, 나누어 주고,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힘이고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경험하는 초막절을 지킵니다. 그런데 이런 초막절의 행사는 여호수아 이래 이 때까지 없었고 몰랐습니다. 수문 앞 광장의 은혜는 새로운 광야생활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것은 개인을 뛰어 넘어 9;1-4에 민족적 회개운동으로 번집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의 은혜가 민족을 바꾸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이루어진 현실 앞에서 갈급함과 사모함이 있습니까? 계속되어야만 하는 은혜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계속된 복은 은혜의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수문 앞 광장에 있어야 하고 수문 앞 광장에 모여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결단하고, 놓인 문제를 풀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루어진 성전과 성벽의 울타리를 지키는 것과 복을 받는 것은 5가지 단계로 나타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것과(1, 3절)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그 말씀 앞에 경외의 자세와 태도가 되고(5-6절)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깨닫게 되고(8-9절) 깨달으면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고(12절) 마지막으로는 그 말씀대로 행동하게 됩니다.(16절)
2. 수문 앞 광장의 은혜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금이라는 상황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느헤미야의 인도로 무너진 성벽을 최단 시일 52일 만에 중건하고 사람이 거하지 않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민들로 채워졌습니다. 갖은 협박과 음모와 모략과 비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느혜미야는 각자 적임자를 세우고 살만한 도시, 예루살렘이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완성되어지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매듭지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다 채워지고 만들어 졌지만 그 어떤 갈급함과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에스라를 통해서 백성들의 마음속에 말씀을 심어주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고 예루살렘 백성들과 이스라엘을 바꾸고 고민하는 백성들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갖추어질 것이 서서히 갖추어지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 왔지만 예배 공동체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 과정을 거쳐 지도자를 세우고 거기에 모이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인데, 모든 은혜를 주셨습니다. 결국 칠월 일일 나팔절과 칠월 십오일부터 한 주간 동안 광야와 여호수아가 지켰던 초막절을 지냅니다. 그런데 나팔 절은 월삭 중에서 가장 큰 7월 달의 월삭인데, 월삭은 초생 달이 뜨는 음력 초하루입니다. 율법에서 매달 첫날은 월삭이라고 해서 특별히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를 드리고, 칠월 첫날은 그 제물 위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왜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 후에 7월을 신년의 첫 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 다른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까 나팔 절은 장차 오셔서 새로운 역사를 펼쳐 나가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표하고 좁게는 나팔 절은 성도의 현재적인 삶 자체가 변화를 받아 거룩한 생활이 이루어지는 성화적인 새 출발입니다. 나팔의 역사는 살아나는 역사입니다. 성령의 감동 속에서 복음의 나팔이 울려 퍼질 때 죽은 심령들이 살아나고, 장차 재림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죽은 육체가 살아나는 새로운 역사입니다.
겔45:17과 46:1-6, 왕이 성전에 나타나 성전 안뜰의 동문을 열고 제사하던 날로서 특별한 날이요, 안식일과 같이 성일로 지켰는데 기쁨의 날이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고 근심하거나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날에 여호와께 제사할 뿐 아니라 백성들이 모두 먹고 마시며 잔치하고 없는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주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를 통한 수문 앞 광장에서의 놀라운 영적부흥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오순 절 때의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난 부흥의 사건과 같습니다. 그 때 사도들은 여기 레위 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쳤고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회복했는데 결국 말씀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오늘 수문 앞 광장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동을 했던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았던 그래서 그 무엇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기뻐했던 사건은 오순절 날 변화를 받은 사랑의 공동체이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2-1. 은혜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그런데 3절에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사모했으면 이렇게 됩니까? 일제히 모이는 자세와 율법 책을 읽기만 해도 이토록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여호와를 사모했다는 증거입니다. 마치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요? 이 영적인 싯점이 바로 예루살렘에 거주자로 있게 한 이후입니다. 7:73절에 나타나 있듯이 제사장들 레위사람들 문지기들 노래하는 자들 느디님사람들 그리고 온 이스라엘과 같이 주어진 말씀에 대한 여러 가지 소임을 잘 받들어 행할 때 이와 같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늘 예배하고 늘 기도와 찬송과 헌신의 삶에 충실할 때 성령의 충만함이 왔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소명을 잘 감당할 때 이와 같은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배를 예배 되게 하고, 말씀을 사모할 때 성령의 충만이 있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모합니다.
일본 삿포로 농과대학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 동상이 유명해진 것은 그 동상의 주인공이 미국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고, 세계적인 석학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동상에 적혀 있는 그가 남긴 말 때문입니다. Boys be ambitious!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지라는 이 말 때문에 그 동상이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식물학자인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ck) 박사가 1876년 일본의 초청으로 삿포로 농림학교의 교장으로 초청되었습니다. 그 해 7월 초 클라크 박사와 그 일행(조수 2명, 학생 11명)은 일본 요꼬하마 항구에 도착을 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장학관을 내보냈는데 그 장학관은 클라크 박사의 큰 짐을 보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클라크 박사는 예!! 성경책입니다. 그 장학관은 정색을 하며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우리 일본에서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가져가실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들은 클라크 박사는 단호하게 그래요? 그러면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겠소. 순간 장학관은 당황해 하면서 아! 아닙니다.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그러나 강의 시간만큼은 피해 주십시오. 강의가 끝난 후에 가르치는 것은 가능합니다. 만약 클라크 박사가 돌아가면 자신이 문책을 당할까봐 엉겁결에 허락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학교는 개교를 했습니다. 개교를 한 후 한 관리가 학교 교칙을 들고 와서 박사님!! 이 교칙대로 운영해 주십시오. 그러자. 클라크 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 규칙대로 한다면 신사를 만들 수는 있지만 인간은 만들지 못합니다. 그 후 클라크 박사는 방과 후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계약기간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고별 연설을 하는데. 그 때 남긴 말이 바로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것만이 살길이다. 당시의 일본은 정치와 경제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청소년들은 가치관의 혼란으로 방황할 때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라크 박사에게 배웠던 그 청년들은 일본의 정신적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의 간디로 불리는 우찌무라 간조도 있고 다나까 수상도 나왔습니다.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그 학교 교정에 클라크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고 그 동상에 Boys be ambitious!,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지라는 이 말이 기록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말이 많은 사람의 인생과 나라의 역사를 바꾸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겠습니까?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귀에 들려질 때 그 말씀이 먼저 저와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이고, 우리의 공동체가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총독, 느헤미야를 선두로 해서 예루살렘 성이 다시 수축되는 광경입니다. 성이 완성되어지고 백성들은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수문 앞 광장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지금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뭔가 허전함이 있었습니다. 삶은 안정되고 나름대로 평안한 삶이 이어졌지만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꼈고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수문 앞 광장으로 몰려든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건이 그들의 허전함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살리고 그들을 회복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다시 세워진 안정과 은혜의 연속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그 공허함을 채우고 회복시킬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백성들의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물이 없어 갈급함도 아니고 양식이 없어서 갈급함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을 채울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도 수축했고 이제 시작이지만 안정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는 이 예배시간이 되시기를 그래서 내 자신과 공동체와 히메지와 나라를 살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말씀 앞에 경외하는 태도와 자세입니다. 5-6절에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일어났고 두 손을 들었습니다. 아멘으로 응답을 합니다.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댑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여러분, 성경책을 펼 때 모든 백성들이 기립하는 이 모습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찬양할 때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으로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를 했습니다. 여러분, 경외하는 겸손과 찬양의 마음은 은혜를 받으면 옵니다. 백성들이 말씀 앞에서의 경외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존중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펼 때에 백성들은 일제히 일어섰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쉽지 않은 시간입니다. 누워 있어도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서서 여섯 시간을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그만큼 말씀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암8;11.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주체가 누구입니까?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낸다. 하나님께서 보낸 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기근은 양식에 대한 기근입니까? 물에 대한 기근입니까? 아닙니다. 그 기근은 말씀에 대한 기근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갈급함이 있다면 그리고 뭔가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과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럴 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무너진 성을 다시 수축하는 것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평안하게 사는 것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채울 때에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인한 평안입니다. 말씀으로 인한 부요입니다. 심령이 회복되고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말씀으로 인한 부흥입니다. 여러분!! 부흥이 무엇입니까? 6절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갈급한 심령에 채워지면서 입술에서는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아멘!! 이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에스라가 얼마나 기뻐하고, 힘이 났을까요? 은혜를 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이 삶에 절대적인 가치와 영향력이 있으십니까? 나의 삶과 공동체가 새롭게 변화되고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꾸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은혜입니다. 해석이 달라지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해석을 하고 거기에 따른 행동을 합니다. 8-9절에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여러분, 해석이 중요해요. 당시의 표현으로 기록이 되었지만 문자적 해석과 함께 영적해석을 해야 합니다. 오늘 에스라가 성경을 낭독하고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 곁에서 열심히 성경을 가르쳐서 깨닫게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아는 것도 좋지만 그 말씀 속에서 감동되어지고 깨달아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성령께서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서 성령의 말씀으로 깨닫게 될 때 신앙은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골1:6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그래서 바울은 골1:9에서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했다고 말합니다. 왜요?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이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말씀을 절대적으로 대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말씀을 듣고 회개를 했습니다.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그들의 기준과 인생의 기준과 삶의 기준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왜요? 해석이 되니까요. 여러분, 나름대로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인지, 나름대로 느끼는 은혜인지 알 수가 없을 때가 많아요. 여러분, 예수님이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계속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주님은 그 상황에서 제자들을 꾸짖기만 했을까요?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중심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름 자기 자신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은혜이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깨닫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근본 의도를 바로 깨닫고 받는 은혜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근본 의도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고,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은 자기중심적이 아닌 하나님 중심적으로 받았더니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눈에는 눈물을 쏟아지며 회개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드릴 때 마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은혜의 자리에 있을 때마다 주님이 원하시고 뜻하신 변화가 일어나고 깨닫는 그래서 주의 뜻을 이루는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4. 받으면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12절에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자기중심에서 이웃 중심으로 그 가치관이 변합니다. 나의 것을 나누어주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오늘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이스라엘, 그 것도 예루살렘, 고국으로 돌아오자, 성을 수축하고 자신들의 집을 짓고 인생의 낙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에서는 무엇인가 공허함이 자리 잡게 되었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허망한 것만 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였고 말씀을 찾게 되었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2절,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제는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누는 기쁨으로 인하여 즐거움이 싹텄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전하십니까? 생명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나누며 전하십니까? 원망과 비방과 낙심이 아닌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며 소망과 비전을 공유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모두가 사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행동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회복이 되고 위대한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람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왜요? 은혜를 받아야 지체를 알고 욕심도 사라지고 사랑하게 됩니다. 언제나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서로 서로 나누는 역사가 있습니다. 부림 절도 그랬고 오순절에도 그랬습니다. 서로 돕고 섬기며 어우러져 사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한 솥에 밥을 먹고 마시고 헤어진 후에도 못 잊어 하는 사랑하는 사랑의 공동체 이것이 바로 은혜를 받는 성도들의 예표입니다. 오늘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5. 은혜를 받으면 그 뜻대로 행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지니게 됩니다. 말씀이 말씀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말씀 때문에 행하게 되고 말씀 때문에 실천하게 되고 말씀 때문에 더욱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16절,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백성들은 나팔 절만이 아니라 칠월 15일 초막절도 율법의 말씀대로 성대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17절,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앙생활이 됩니다. 억지가 아니라 간절한 소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느8;1절도 간절한 소원이고 13절도 소원입니다. 나팔 절 성회가 강제가 아닌 백성들 자체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었고, 초막절 역시 백성들 자체에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체험과 경험과 은혜입니다. 오늘 수문 앞 광장에서의 은혜는 자원함으로 이루어진 체험과 경험과 사모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기까지 인도하고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 받았지만 더욱 은혜를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은혜를 받으면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나누게 됩니다. 그 뜻대로 행하여지게 됩니다. 수문 앞 광장의 5가지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같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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