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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역사와 문화 II (개관)
선사시대/로마제국의 시대/프랑크왕국의 시대 중세 분열의 시대 (10세기-14세기)/부르고뉴(부루군디: 부르군드) 공국의 시대 *칼 5세의 시대 /종교개혁/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발전과 쇠퇴/ 필리페 2세의 시대/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80년 독립전쟁의 경과/ 황금의 17세기/네덜란드의 내분/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의 강화/ 렘브란트와 스피노자/ 루이 14세와 네덜란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네덜란드/ 나폴레옹의시대/ 19세기의 네덜란드/ 1차대전과 네덜란드 /2차대전과 네덜란드 / 2차대전 이후의 네덜란드
선사시대
네덜란드지역에 인류가 살아온 흔적은 석기시대(?-BC 2100), 청동기시대(BC 2100-700), 철기시대(BC 700-50)의 유물과 유적를 통해 잘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신석기시대이후 BC 3500년경 거석문화가 생겨나고 농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청동기시대에는 네덜란드의 3대 강인 라인강, 발강, 마스강유역에서 출토된 금,은 및 청동제품을 통해 귀금속이 네덜란드지역으로 유입되는등 유럽 다른지역과의 교역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네덜란드지역에는 금,은 구리등이 매장되지 않은 반면 동부지역에 약간의 철이 매장되어있다.) 또한 이시기 화장문화의 풍습이 자리를 잡았다. 철기시대에는 철제농기구를 사용하고 제방을 축조하는 등 농경지를 넓혀나갔고, 제염업이 발달하여 이에따른 교역도 이루어졌다.
로마제국의 시대
네덜란드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인이 원주민이었던 바타비아 인(게르만족과 셀틱족의 일파)을 정복한 것으로 시작 한다. 로마의 역사가 Pilinius는 네덜란드지역에서 발생한 서기 79년 Vesuvius화산 폭팔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 곳은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에 잠겼다 마르고 해서(...)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바다인지 땅인지 몰랐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살던 그들은 로마에 의해 정복당하자 자신들이 노예상태로 전락하였다고 한탄하였다.' 당시 네덜란드 동남부지역은 해면보다 높은 지역이여서 주거지로 적합하였다. Tacitus와 Caesar의 기록에 따르면 Zeeland, Vlaandern지역등 해안지역에는 Menapi족이, 북 Holland지역에는 Frisii인이, 또한 Eburones인이 남부지역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BC 51년 에부로네스족의 지도자인 Ambiorix(암비오릭스)가 시저의 군대에 항거하다 결국 패배하여, 이후 네덜란드 지역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되었고 많은 이민족의 이곳으로 이주하여 왔다.
케사르의 군대가 갈리아지역을 정복했을 때 (BC 57년) 라인강을 경계로 우변은 Frisii 프리시인이, 라인강 본류와 War강에 둘러싸인 지역에는 Batavi인이, 좌변에는 켈트족의 벨기에인이 살았다. 그는 로마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남부 네덜란드지역까지 진군하여 라인강지역을 평정하였다. 이후 그의 부장 Drusus 장군과 그의 아들 Germanicus로 하여금 게르만의 침입을 막기위해 Batavia를 요새화하였고 엘베강유역까지 진군하였다. 이후 라인강을 중심으로 네덜란드는 2개의 로마의 속주에 편입되었다. 즉 마스강 이북은 쾰른을 중심으로한 Germania Inferior에, 반면 마스강 이남지역은 trier를 중심으로한 Gallia Belica에 편입되여 로마인에게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다 하여야만 하였다. 하지만 네덜란드지역은 자체적으로 17개의 행정구역으로 분할되어 분권적인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로마의 통치 (Pax Romana 시대)시절 그들은 200년 이상 비교적 안정된 평화의 시대를 보낸 것만은 아니었다. AD 28년에는 프리즈인인 로마제국의 과중한 조세정책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후 Friesland는 로마의 행정구역의 하나인 Frisionum이 되었다. (게르만의 일파인 Frisii는 AD 1세기 경 북부 프리즐란드와 호로닝엔 지역으로 이주해 정착하였다.) 68년 로마황제 네로가 죽고 제국내부의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바타브출신의 Civilis는 반란을 일으켜 네덜란드지역에 반로마적 투쟁을 선도하였고 갈리아지역을 공격하였지만, 곧 영국에 주둔하였던 5천명의 로마의 군대가 투입되면서 전세가 반전되었다. 결국 로마와 바티브인은 라인강을 경계로 휴전하고, 시빌리스의 군대가 라인이북지방으로 철군하자 네덜란드지역은 다시 로마의 평화를 찾았다.
이로써 네덜란드 지역-특히 남부지역은 로마화 되었고, 로마의 문화가 유입되어 원형극장등이 세워지고 대규모의 농장을 중심으로 Villae가 생겨났다. 또한 Noviomsgus, Forum Hadriani와 같은 도시가 발전하면서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방의 자치지역에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많은 Vicus(촌락)이 생겨났다. 그곳의 거주민들은 로마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하였지만, 점차 상업과 수공업, 목축업, 농업, 제염업, 어업, 직물업등이 발전하면서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마스트리트와 같은 도시가 많이 생성되었다. 또한 수공업자들은 중세의 길드와 같은 Collegia를 조직하여 농기구등 생산기술을 개발하여 경제적인 부를 창조할 수 있었다. 반면 북부 네덜란드지역은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의 명으로 로마의 군대가 철수하자 상대적으로 로마와는 독립적인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로마제정 후기 군인황제시대가 도래하여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네덜란드지역의 국경선의 유지가 어려워졌다. 2세기이래 해안지역은 샤우크족등 게르만족에 침략당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한 요새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국경인근의 부족들은 로마의 용병이 되었다. 로마제정 말기 4세기경 게르만의 이동에 따라 프랑크인, 켈트인, 섹슨인들이 동남부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5개의 인종 중심의 부족국가가 형태가 네덜란드에 생겨났다. 특히 프랑크족은 Gallienus황제의 통치시기 네덜란드지역에 주둔한 로마군대에 커다란 타격을 입히고 네히메이언 서부 바티프지역을 점령하였다. 또한 340년 프랑크족은 로마와의 협정을 통해 라인강의 방어를 위임받고 다른 게르만계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405년 고트족과 반달족이 로마제국의 영토로 들어오자 이를 막기위해 네덜란드지역의 로마군은 철수하였다. 이후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북서부지역에는 수 많은 게르만의 부족이 이동하여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쇠퇴과정을 통해 네덜란드지역은 지리적인 이유로 로마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찬란한 로마의 유적을 이지역에서 찾기는 어렵고 마스트리트지역등에서 그 흔적의 일부을 볼 수 있다.
프랑크왕국의 시대
로마가 쇠퇴한 시점인 기원 후 4세기부터 이지역은 점진적으로 게르만의 맹주인 프랑크왕국(메로빙가, 카로링가)로부터 약 5세기에 걸친 지배를 받았다. 사실상 프랑크왕국은 여러 게르만의 족속들이 군사적으로 연합한 전사공동체였기에 처음에는 중앙집권적인 권력체계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쾰른 중심의 Riouari족과 부라반트중심의 Salier족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5세기 초 살리족의 Chlodio왕(당시 왕은 군사령관의 위치)은 남부 네덜란드지역(지금의 벨기에)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Doornik를 수도로 정하였다. 6세기 초 게르만의 강력한 프랑크부족의 메로빙가 클로비스 1세가 다른 게르만의 일파인 앵글족과 작센족을 물리치고 북서유럽의 지역을 평정하고 강력한 왕권을 세우면서 네덜란드지역도 프랑크왕국에 편입되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클로비스는 481년 갈리아를 정복하고 Syagrius휘하의 로마군을 물리치면서 갈리아인의 열열한 지지를 받았다. 이로써 프랑크왕국과 로마 교회는 밀접한 연관을 맺게되고 프랑크왕국의 영역은 기도교화되었다. (물론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4세기 말 네덜란드지역의 기독교도들은 Maastricht의 주교좌성당을 중심으로 교세를 점진적으로 확장하여 나갔다.) 한편 클로비스왕은 수도을 지금 프랑스지역의 Soissons으로 정하여 훗날 프랑스의 국부의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프랑크왕국은 4명의 자식들에게 분할되고 내분을 통해 혼란에 빠지고, 629년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군주 Dagobert I세가 등장할 때가지 국력이 쇠퇴해졌다. 그는 프랑크왕국의 Utrecht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리고 북부의 Friesii인의 저항를 이겨냈다. 그들은 689년 Pippin 2세에 점차적으로 복속되었고, 기독교로 개종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프랑크왕국은 네덜란드의 구 라인강( Old Rhein)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크왕국은 이후 서부지역의 Neustria와 동쪽의 Austria로 분열되고 대립되었다. 이로써 네덜란드의 플랑드르지역은 노이스트리아에 편입되고, 모젤, 라린, 마스강 유역은 아우스트리아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지역간의 권력투쟁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프랑크왕국의 왕권은 쇠약해진 반면 왕의 제상역할을 하던 궁제(Major Domus)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메로빙왕가는 결국 마지막 궁제였던 칼 마르텔에 의하여 카로링왕가로 대치되었다. 사실상 그는 687년 노이스트리아를 정벌한 궁제 피핀 2세의 사생사로 714년 아우스트리아의 귀족세력에 의해 어린나이에 궁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737년 파리근교에서 아랍세력을 물리치고 이후 북부 프리젠족을 완전히 정벌하였지만 작센정복에는 실패하였다.(작센정복은 그의 손자 칼대제때 성사되었다.) 사실상 그는 강력한 군사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봉건제도의 기초를 세웠다. 중세의 봉건제도는 왕이 제후와 가신에게 하사한 봉토에 대한 대가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군사적 의무를 이행하는 제도를 뜻하였다.
한편 프랑크왕국에 편입된 남부의 네덜란드인은 6-7세기경 이래 후진적인 촌락 공동체로써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북부지역 (지금의 네덜란드지역)은 색슨족과 동맹을 맺고 프랑크왕국과 기독교 개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지역도 8세기 중엽 칼 마르텔에 의햐 무력으로 병합되면서 점진적으로 기독교화 되었다. 한편 대다수의 Frisen과 벨기에인 7-8세기 로마교황이 후원하는 앵글로 색슨계의 수도승 Willibord와 Bonifacius의 선교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칼 마르텔 궁제( 714-741)의 아들 피핀은 751년 서유럽의 정치권력적으로 가장 강력한 카로링가 출신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러한 카로링가 프랑크왕국의 탄생배경에는 당시 북 이탈리아 롬바르다이족의 위협에 처해 있던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대가로 800년 바티칸에서 교황 레오 3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칼 대제가 비쟌틴제국(동로마제국)에 대항하는 황제(구 로마제국의 후계자로 계승)로 등극하였다.
8세기 프랑크 왕국의 카로링왕조:피핀(751-768), 칼 대제(768-814)는 네덜란드지역을 모두 정복하여 완전 기독교 개종이라는 무시무시한 과업을 본격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물론 홀란드인은 400여년간 강제적인 카톨릭 개종에 저항하였다. 칼 대제의 죽음 (814년)이후 프랑크왕국은 지금의 독일, 프랑스, 이태리지역으로 3등분되였고 홀란드(Frisland)는 동프랑크 독일지역에 편입되었다. 네덜란드는 베르덩조약(843) 이전 홀란드.벨기에, 룩셈부르크와 북프랑스 일부를 총칭하는 지역이었다.
베르덩조약에 따라 프랑크왕국은 분열되고 네덜란드지역은 로타(Lothar)의 영지로 있다가 동.서프랑크왕국에 각각 귀속변경이 있었다. (특히 Schelde강의 서쪽지역인 플랑드르지방은 서프랑크의 오랜지배로 프랑스화 되었다.) 따라서 네덜란드 지역도 10세기 후반 여러개의 공작, 백작영지와 주교관구로 분립되어 독립된 작은 봉건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따라서 이지역은 영주의 혼인,상속, 증여,매매,정복등의 방법으로 수 많은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한편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럽전역에 출몰하여 노략질하던 바이킹족이 지속적으로 네덜란드지역의 연안과 내륙에 침범하여 커다란 경제적 혼란을 야기시켰다.물론 이시기 프랑크왕국은 분열되고 약화되었다.
중세 분열의 시대 (10세기-14세기)
925년 네덜란드의 대부분에 해당되었던 Lotharingen지역은 독일왕 하인리히 1세의 영지가 되었다. 928년 이지역은 그의 사위였던 Giselbrecht공작의 영지로 상속되어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936년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 1세가 등극하여 로타링엔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이지역을 직접통치하였다. 한편 남부의 브라반트 백작령은 루벵과 부류셀지역으로 통합하고 후에 안트베르펜까지 영역을 넓혀 소규모의 독립제후국으로 발전해 나갔다. 또한 홀란드가문(시조는 Dirk i세)의 백작령은 서프랑크왕의 영지를 하사받아 로테르담까지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강력한 홀란드가의 디르크 3세는 통행세문제로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2세와 충돌하여 로타링엔공작과 유트레히트 대주교의 공격을 잘 견디어 냈다. 그는 수 백개의 제방을 축조하고 농경지를 확대시켜 주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또한 유트레히트 대주교는 네덜란드지역을 총괄하는 교회의 수장이면서 세속적인 권한(교회법과 행정, 군사, 조세권)을 갖고 있었던 실질적 군주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그에게 백작령을 하사하고 많은 특혜를 주었다. 사실상 유트레히트 지역은 중세 상업의 중심지로 네덜란드의 경제적 번영의 터전을 마련한 곳이다.
10세기경 네덜란드의 교회는 5개의 주교구(Utrcht, Koeln, Muenster, Osnabuerck,뢰이크)에 분할되여 소속되었다. 당시 주교는 황제가 임명하고 세습은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황제의 교회에 관한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11세기이후 교황과 황제의 대립으로 네덜란드지역은 독일황제의 영향력이 감소되었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독일보다는 영국과 프랑스와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고 상업적으로 번성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지역은 7개의 공국(Holland, Utrecht, Vlaandern, Brabant, Limburg, Vlaams, Friesland)으로 나뉘어져 각각의 자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한편 이들 공국은 14세기말 까지 세력확장에 주역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홀란드지역의 변화를 살펴보자. 1203년 홀란드의 디르크 7세가 죽자 상속문제로 'Loon백작의 계승전쟁: 1203-1213'이 일어나 Willem백작이 홀란드와 제이란트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후 빌럼가는 제방, 수문과 수로등의 건설을 통해 치수사업을 통한 내치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부라반테공국도 13세기 초 마스트리트를 획득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독일황제로부터 '작은 로마의 왕'이란 칭호를 얻게되었다. 그러나 1247년 홀란드의 빌럼 2세가 교황세력과 결탁하여 부라반트의 지배권을 얻게되었다. 1256년 그는 서프리스와의 전투에서 죽자, 그의 어린 아들 플로이스 5세가 후계자가 된다. 당시 친프랑스적이며 반 영국적인 외교정책을 수행한 플로리스 5세는 1289년에 서프리스 정복에 성공하였지만 친 영국파에의해 로 영국으로 압송되던중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이후 홀란드는 1299년부터 4년간 Henegouwen (헤이너하우엔)의 얀 백작의 위임통치를 받게되었다. 당시 그의 행정적 재정적 개혁정치는 훗날 홀란드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홀란드의 빌럼 4세가 1345년 프리스 원정에서 전사하면서 상속문제가 그의 누나 마가레트와 그녀의 아들 빌럼간의 싸움으로 번져갔다. 결국 홀란드는 양진영으로 대립하였다. (마가레트의 지지세력인 Hoeken파와 빌럼파인 Kabeljauwen의 투쟁) 이들세력간의 싸움은 15세기 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홀란드의 정치적, 경제사회적인 많은 변화를 야기시켰다. 특히 1358년 빌럼 6세가 부루군디 공작이며 동시에 플란더런의 백작었던 필립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네덜란드의 역사는 부르군디공국과의 밀접한 연관을 맺고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3-4세기 네덜란드지역은 중세적 봉건제도를 개선하여 군주는 토지보다는 급여를 통해 관리를 통솔하게 되었다. 당시 자유민출신의 기사계급이 성장하게 되면서 귀족출신의 기사계급과 마찬가지로 봉건제도를 떠받치는 세력이 되었다. 또한 제조업과 상업등을 통해 동업조합인 길드가 조직되면서 도시의 역할도 증대되었다. 따라서 특히 시민층의 신분이 상승되었고 교육열도 높아졌다. 당시 파리와 볼로냐드의 대학에 유학하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네덜란드는 문화적으로 계몽되어졌다. 또한 13세기 네덜란드지역은 특히 북독일 한자동맹(무장한 공동체란 뜻이지만 경제적 공동체의 역할을 함)에 소속되어 스칸디나비아지역까지 교역이 활성화되고 동부지역의 경제적 부를 창출케하였다.
그러나 13세기말 홍수등 천재지변으로 전 유럽적인 불황으로 경기가 침체하고, 14세기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네덜란드에도 마찬가지로 위기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하지만 근면 성실한 네덜란드인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농업과 축산업을 통한 생산력을 증대에 노력은 물론 도시를 통한 교역을 증대시켰다. 또한 은행이 설립된 금융도시 암스테르담등 주요도시를 중심으로 맥주제조업에 명성을 얻게되었고, 특히 도르트레히트는 교통의 요지로, 부류허는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3세기 말이래 문화적으로 공용어인 라틴어 사용은 물론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로 쓰여진 문학작품이 발표되었고, 이에 따라 대중적 연극도 성행하였다. 13/4세기 건축은 교회의 고딕양식이 유행하였다. (예:유트레히트 Dom).
부르고뉴(부루군디: 부르군드) 공국의 시대
부르군드족은 원래 민족이동전에는 Weichsel과 Oder강을 둥심으로 북부독일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인구가 증가하자 중부독일 보름스지역 (413)까지 이동하였다. 그들은 436년 훈족과의 방어전에서 승리하자 부르군드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프랑스지역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443년 부르군드왕국은 로마군대와의 충돌에서 승리하자 프랑스 남부의 Arles지역과 북부의 Dijon과 Besanson지역을 확보하게 되었고, 455년에는 스위스 남서부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부르군드 족은 6세기 이후 프랑크왕국에 복속되었다가 9세기부터 점진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였다. 마침내 11세기에는 부르군디 왕국으로 도약하였지만 1361년 프랑스에 의해 몰락하였다.
1363년 프랑스 국왕 얀 2세의 넷째 아들 '용맹공' 필립은 부르군디 촏독으로 부임하고, 1364년 부르군디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람스백작의 여식인 마가렛따와 결혼하여 플람스지역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의 영토적 지배력은 당시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플란더런, 아르테시아와 프랑쉬 공떼등의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마침내 그는 수도와 행정부를 디종과 레이썰에 정하고 재상을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수행하여 나갔다. 또한 그는 결혼정책을 통해 홀란드, 제이란드, 헤이너하우엔과 협력체계를 유지하면서, 부르군디가의 14/5세기 네덜란드 전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강화시키는 발판을 만들 수 있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을 통해 부르군디의 필립공은 대체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정책을 수행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왕실과의 혈연관계의 유지는 물론 프란더런등지의 모직물산업으로 인한 영국과의 교역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1405년 필립공의 아들 '겁없는' 얀이 부르군디공국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는 중앙집권적 통치에 반대한 지역귀족( 특히 플람스지역의 도시 귀족)의 저항을 받았지만 잘 견뎌내었다. 그의 동생 안톤이 부라반트 의회의 결의에 따라 부라반트의 지도자로 추대되면서 이지역도 부르군디공국의 지배영역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홀란드, 제이란드, 헤이너하우엔의 백작이었던 빌렘의 여식 야코바가 얀 4세와 결혼하였지만 후사없이 사망하자 이지역들도 부르군디공의 '겁없는 '얀의 큰 아들 '선량공' 필립의 영토로 변하였다.1419년 '겁없는' 얀이 피살당하자, 네덜란드에는 '선량공' 필립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즈음 부르군디공국은 영국과의 양모수출을 증대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하였다. 따라서 '선량공' 필립은 1421년 Namen 백작령을 사들이면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해나갔다. 필립공(선량공 1419-1467)은 저지대의 동프랑스지역을 정복하고 백년전쟁시에는 영국과 영구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부르고뉴가의 지배시대(14세기 말-15세기 말)에 네덜란드지역은 경제적으로 도약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특히 모직물공업을 중심으로 Bruge, Gand. Ypres, 안트워프등 주요도시가 발달하여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필립과 그의 아들 샤를르가 지배한 부르고뉴 공국은 경제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진 못하였다. 그러나 1430년 '선량공' 필립은 자문기관으로 각 지역의 귀족들로 구성된 금양모 기사단을 창설하였고, 또한 프랑스식 정부조직을 본뜬 재상을 중심으로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기구( 재무성등)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의회의 역할은 프랑스 3부회를 본뜬 귀조그 승려와 도시늬 대표로 구성된 전국회의와 대회의(궁정회의: 의장은 재상이 겸하였다.)를 통해 담당케하였다. 이로써 그는 지방세력의 권한을 통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기사단의 위상은 증대되여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였고, 특히 전쟁도 기사단의 동의없이 수행할 수 없게되었다. 기사단은 독립전쟁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지도자 윌렘(Willem)을 배출하였다.
부르군디가의 성공은 결혼정책에 따른 영토확장과 중앙집권적 통치방식에 있었다. 부르군디 공국은 홀란드, 제이란트, 헤이너하우엔등지에 총독을 파견하고 중앙의 재상의 통제를 받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수행하였다. 당시 Nikolaas Rolin은 40년간(1422-1462) 재상의 임무를 수행한 탁월한 정치가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선량공' 필립이 수도 부류셀을 중심으로 사치스러운 향락생활을 즐기면서 궁정경비가 등대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이제 군주의 권위는 십자군 참가등으로 인하여 의회의 동의없이 세금을 걷을 수 없을 많큼 약화되었다. 따라서 지방의 귀족과 도시의 시민들은 중앙집권적 통제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특히 1453년 부류허와 헨트지역의 폭동이 일어나자 공작의 군대는 15000명을 사살하였다. 1467년 필립공이 죽자, 그의 아들 '용맹공' 칼(쌰를르)이 부르군디공작으로 승계되었다.
용맹한 칼은 야망에찬 군주로써 수도를 Mechelen으로 옮기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는 로타의 제국을 연상케하는 엘사스-로타링엔지역을 확보하는 전쟁을 위해 11000명의 상비군을 창설하고 이를 유지키위한 과중한 세금인상정책을 추진하였다.(1471년에서 1476년까지 세금은 3배인상 되었다.) 한편 그는 1468년 영국왕 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 마가렛트와 결혼하며 영국과의 관계를 돈독히하면서 그의 방해물인 프랑스를 견제하였다. 마침내 그는 로타링엔 정복에 올랐지만 강력한 스위스의 군대에 2차례 대패하고 말았다.(부르구니 전쟁 1476/77) 1477년 1월 5일 그가 로타링엔군과 스위스군과의 낭시전투에서 전사하므로서 부르고뉴가의 중앙집권체제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로써 칼의 외동 딸 20세의 마리가 후계자가 되었지만 부르구디의 많은 영토는 프랑스의 수중에 떨어지고 스위스도 일부분 영토확장을 하게 되었다. 이제 부르군디공국에는 의회의 권한이 막강해지고 마리의 권위도 추락하고 말았다. 그녀가 발표한 대칙령은 '이름 없는 헌장에 불과하여 전쟁도 의회의 동의 없이 수행할 수 없게되었다. 또한 홀란드, 플란더런, 나먼, 부라반트의 독립적 자치도 허용되었다.
한편 부르군디공국의 약세를 틈타 프랑스왕 루이 11세의 군대가 영토확장을 목표로 침입하였다. 당시 부르군드의 영지는 2개로 나뉘어져 프랑스와 독일지역의 분리된 중간부분을 차지하였고 탄탄한 경제력을 보유하였다: 1.부르군드와 자유백(Jura와 Loire사이) 2. 룩셈부르크, Hennegau, Picardie, Artois, Flandern, Brabant, Holland (즉 북프랑스,벨기에,라인지역,Zuider호수의 지역). 마리는 전국회의(재상과 2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를 통해 각주의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지방 호족들은 분권적인 요인을 증대시켰다. 칼의 재위시 요직을 독점하였던 귀족층의 후껀 (Hoeken)세력은 약화된 반면, 마리의 재위시 반대파였던 까발야우엔 (Kabeljauwen)세력이 팽창하였다. 양진영간의 대립투쟁이 심화되면서 네덜란드지역은 여러개의 주로 분립되고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마리는 프랑스 세력을 억제하기위해 의회의 동의를 구하고 합스부르크가 프리디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혼인하게 되어 아들 필립과 딸 마가렛트를 두었다. 그녀가 1482년 승마중 낙마하여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서 부르군드의 저지대: 남부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지역의 영토는 합스부르크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의 통치방식은 네덜란드 각지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지만 그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485년 플람스의 반란) 1483년 막시밀리안은 독일왕이 되고 네덜란드지역의 총독에 Albrecht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지역은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맞서 계속적으로 저항하였다.
막시밀리안이 1493년 신성로마황제로 즉위하고 독일로 떠나자, 그의 15세의 아들 필립이 부르군드의 공작이 되었다. 이제 부르군디공국은 합스부르크식 중앙집권적 통치로 바뀌게 되었다. 필립공은 네덜란드 중부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던 Utrcht 대주교(1433년-1453년 루돌프 대주교가 재위하였다.)로 그의 아들 다비드를 임명하자 성직자와 시민세력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되었지만 막시밀리안황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시켜나갔다. 이로서 유트레히트 주교관구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리고 부르군디-합스부르크화 되었다. 또한 헬러공국, 프리스란트, 호러닝언등의 지역도 점차적으로 합스부르크화 되었다.
한편 네덜란드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의 명목적인 그늘에서 낙후된 촌락공동체로 남아있지만은 않았다. 이 지역은 13세기 이래 부단한 노력으로 중요한 상업과 무역 도시를 중심으로 근대국가로 발전할 면모를 갖추었다. 16세기 이후부터는 르네쌍스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홀란드는 유럽의 무역과 공업의 중심지역으로 급성장하였다. 근대 시민적 국민국가의 면모를 갖출 수 있는 경제적, 문화적 역량도 이 때 마련되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종교개혁과 르네쌍스의 영향하에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 갔다.
*칼 5세의 시대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기독교 이념에 바탕을 둔 '통일된 유럽세계'는 여지 없이 쇠퇴하고 붕괴되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가의 칼 5세(1519-1556)는 16세기 최종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통일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의 조부는 오스트리아 대공이었던 막스밀리안 1세이며, 그의 부친은 스페인 출신과 혼인한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지금의 벨기에지역)의 통치자 필리페 1세(필립)였다.
필립은 스페인의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공과 카스틸랴왕국의 이샤벨라 공주사이의 딸 요한나와 결혼하여 아들인 스페인왕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낸 칼 5세를 낳았다. 이로써 16세기 초 네덜란드지역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편입된 속주가 되고 총독은 이 지역의 경제력을 신성로마제국의 기틀로 담당케하였다. 이로써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관계는 기나긴 16/17세기 독립전쟁과 종교전쟁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1500년 네덜란드 Gent 출생의 칼 5세는 부친의 영지인 네덜란드를 상속받았고, 막스밀리안 1세가 죽자 1519년 19세의 나이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강력한 유럽의 군주로써 지리상의 발견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그의 제국은 독일과 유럽지역을 넘어 '해지지 않는 나라'의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해외 경략을 통해 획득한 스페인의 엄청난 부의 축적은 그의 정치적 야망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러나 그의 카톨릭 제국은 무수한 종교적, 정치적 분쟁의 소용돌이에 힙싾이게 되었다. 즉 칼 5세는 루터파등 신교와의 전쟁, 스페인에서의 도시자치제의 반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문제로 인한 프랑스와의 전쟁, 해외식민지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와의 투쟁, 오스트리아을 위협한 오스만 터어키세력의 유럽침입등과 관련 무한정한 소모전쟁을 치뤄야만하였다.
특히 황제는 오스만 터어키세력의 유럽침입으로 1529년 비인을 포위하고 대부분의 헝거리 지역이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또한 그는 교황과 결탁한 프랑스 국왕 Franz 1세(프랑수아 1세)와의 전쟁(1521-1526, 1526-29, 1536-38, 1542-44) 그리고 1531년 신교파 제후들의 동맹 (Schmalkaden 동맹: 신교파 8명의 제후와 14개 도시들의 동맹)과의 전쟁(1546-47)등에서 거의 국력을 소진하였다. 이러한 전쟁을 치루는 동안 칼 5세는 Augusburg 아우구스부르크의 Fugger 푸거가에 막대한 빚을 져야만 했다. 실제로 황제는 8만여 굴덴의 빚을 졌고 (당시 시골 신부 연봉 2-3굴덴), 반대로 푸거가는 황제로부터 광산체굴권을 독점하여 유럽 최대의 금융업을 통해 갑부가 되었다.
한편 1531년부터 네덜란드 지역은 칼 5세의 여동생 마리아의 섭정통치를 받게되었다. 칼 5세는 네덜란드의 통치를 위해 부류셀을 행정적 수도로 삼고,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운영을 위하여 국가위원회, 비밀위원회, 재정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또한 각주에는 총독이 파견되었다. 1548년 칼 황제는 아우구스부르크 의회에서 네덜란드를 독립자치지역으로 선포하고, 이듬해 황제칙령을 통해 이지역에 대한 필립 2세의 상속권을 공표하였다. 따라서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를 통해 그가 스스로 스페인의 작은 수도원으로 룰러나자, 필립 2세는 네덜란드를 지배하게 되었다. 칼 5세는 1558년 수도원에서 여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Philippe필리페 2세(1556-1598)의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와 칼 5세의 동생인 보헤미나왕을 겸하였던 Ferdinand I 페르디난드 1세(1556-1564)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로 나누어졌다.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황제들: 1564-76: Maximillian II 막시밀리안 2세, 1576-1612 Ludolf II 루돌프 2세, 1612-1619: Mattias 마티아스, 1619-1637: Ferdinand II 페르디난드 2세, 1637-1657: Ferdinand III페르디 난드 3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