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애행 (無礙行) >
무애(無礙)란 막히거나 걸림이 없다는 뜻인데,
중생을 제도하는데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지 않는 대자대비한 마음을 말한다.
‘애’라는 글자는 두 가지(碍, 礙)로 쓰는데,
이 두 글자는 훈과 음이 같고 모양만 다른 이체자(異體字)이다.
碍가 쓰기 쉬워서 사람들이 礙보다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礙가 본래 모양이다. 碍는 엄밀히 말하면 속자이지만
널리 쓰이므로 정자 취급을 받는다.
그리하여 한량없이 깊고 많은 뜻을 섭지(攝持)해
해탈의 경지에 이른 자유인의 마음을 무애심(無礙心)이라 한다.
무애심은 무소득(無所得)의 마음이다. 얻을 바가 없는 마음이다.
소득(所得)이란 집착을 말한다.
집착을 떠난 무소득의 마음이 무애심이다.
무애심이 된 후라야 무애행(無礙行)이 나온다.
무애의 이치가 이와 같으니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하는 등
제멋대로 행동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은 무애인이 아니다.
그런 이의 행은 잡행(雜行)이요 기행(奇行)일 따름이다.
무애행(無礙行)이란 모든 탐욕이 사라져
밝은 행동, 깨달은 행동, 지혜로운 행동을 한다는 것이지
결코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고 아무렇게나 거리낌 없이
행동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무애행(無礙行)이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하는 삶을 일컫는데,
<화엄경>에 나오는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礙)라는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원래 무애(無礙)는 ‘나와 너’라는 경계를 짓지 않고,
만유가 적멸의 상태에서 하나가 됨을 통찰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이도 기초적인 각성에 해당할 뿐 무애의 심오한 가르침은
높은 보살과(菩薩果)에서나 운위될 고차원적인 문제다.
무애(無礙)의 공간은 탐ㆍ진ㆍ치의 중생심에 의한 세속제가 아니라
청정한 마음에 의한 승의제를 의미한다.
승의제(勝義諦)는 허공과 같아서 무애한데,
세속제(世俗諦)는 탐ㆍ진ㆍ치의 먼지가 많아 무애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오욕락(五慾樂)을 즐기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고 하는 격이라고 했다.
남과 나를 경계 짓지 않고 남과 내가 걸리지 않을 때 무애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코 중생심의 구도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더욱 더 망상만 일고 자신을 세속의 족쇄와 굴레 속에 얽매이게 할 뿐이다.
한말(韓末) 무애행으로 시비를 불러일으킨
경허(鏡虛) 선사의 솔직한 게송을 들어보자.
“이치는 단박에 깨치나 망상이 여전히 일어나도다.
단박에 깨달아 내 본성이 부처님과 동일한 줄은 알았으나
수많은 생애를 살면서 익힌 습기는 오히려 생생하구나.
바람은 고요해졌으나 파도는 여전히 솟구치듯
이치는 훤히 드러났으나 망상이 여전히 일어나는구나.”
소위 수행승이라 이름 하면서 이토록 적나라하게
자기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어찌 경허 선사만의 고뇌였겠는가.
이 땅에 살다가 간 수많은 수행승, 그리고 오늘도 수행에
정진을 거듭하고 있는 수많은 수행승들, 그들 역시 사람인 한,
끓어오르는 번뇌 망상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범속한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
열반의 경지가 있을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고 상대계를 와해할 때
오로지 유와 무를 초월한 절대계로 진입할 수 있다.
그 경지에서 우주를 바라볼 때 우주의 대섭리의 측면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대적멸(大寂滅)의 삼매 상태에서는 무아(無我)가 되고,
주체와 객체의 이원화가 사라지고, 주객과 사사물물이
훤히 원융무애(圓融無礙)한 경지로 현현하게 된다고 하겠다.
청정한 마음의 여여(如如)함만이 무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화엄경>의 이사무애와 사사무애의 경지에 이르려면
의상(義湘) 대사처럼 법성게(法性偈)를 창조할 수 있는
경지가 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일반 선사들이 무애행이라고 함부로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안(五眼)을 구족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라한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 역사 속에 소위
무애행이라는 파격적인 행동을 보인 고승들이 간혹 있었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등 종단의 계율을 깨뜨리는 모습만을 보면
분명 파격이요 일탈이지만, 일체가 하나의 전체성임을
온 몸으로 보여준 그들의 걸림 없는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어 차별상에만 머무는 사람들의 눈을 틔어주기도 했다.
신라의 원효(元曉), 구한말의 경허(鏡虛) 등이 그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종단의 기득권을 버리고 야승(野僧)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민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는 점에서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면이 있었다.
이들은 광대한 마음으로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증득해
자유로이 초탈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때를 만나지 못해 하열(下劣)한 사람의 자리에
자신을 숨긴 채 자신을 낮추고 도(道)를 스스로 즐겼다고 할까.
홍곡(鴻鵠)이 아니면 홍곡의 큰 뜻을 알기 어려운 법이니,
한갓 중생이 어떻게 그 뜻을 시비하겠는가.
특히 경허 선사는 무너져 가는 조선을 걱정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누어도 편치 않구나’라고
노래한 우국(憂國)의 선승이었다.
한국선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선각자요 정신적으로는 실종자이기도 하다.
경허의 실종과 불귀(不歸)는 망국(亡國)의 조선,
식민지 대한제국의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너무도 조선적인 비극이 응축돼 있다.
경허의 생애가 후대에 전해지고 검토되는 기준에는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전승과 기록으로 전해지는 전기(傳記)가 있다.
기록으로 남겨진 전기는 연대(年代)와 그 인물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장치가 갖추어지고 있는 것에 비해서 구전된 이야기들은
선사로서의 엄숙함은 찾아볼 수 없고 때로는 엉뚱하기조차 하다.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경허>는
현대 한국선의 달마, 경허에 관한 필자의 오랜 그리고
절실한 사랑의 기록이다. 필자는 이 평전을 쓰기 위해서
수년간 인간 경허, 시인 경허, 선승 경허의 체류지를 답사했으며,
경허선(鏡虛禪)의 세계를 축약해 전하는 1943년판 원본
<경허집(鏡虛集)>을 몇 번이고 숙고하며 읽었다.
필자는 경허의 길을 추적했으며,
왜 경허 스스로 이단자라는 운명을 감수하고
저 북방고원에서 방랑자로 쓸쓸히 소멸했는지 변호하고자 노력했다.
선의 탐구자들은 소문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경허를 둘러싼
진부한 소문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오직 경허의 선과 인생을 알고자 하는 소수의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위는, 민족사가 펴낸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경허>라는
일지 스님이 쓴 경허 선사 전기의 출판사 서평이다.
조선말기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난 경허 선사의 속성은 송씨(宋氏),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가 경허(鏡虛)였으며, 법명은 성우(惺牛)였다.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618m)에 있는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해
계허(桂虛) 스님 밑에서 5년을 보내며, 기초 불교경론을 배웠다.
다시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萬化) 스님에게서 불교경론을 배우면서
제자백가를 섭렵했다.
만화 스님은 경허 스님에게 법을 전한 전법사이다.
그리고 경허 스님은 1871년 23세에 동학사의 강사가 됐다.
1879년 옛 스승 계허 스님을 찾아가던 중
천안 인근에서 폭우를 만났으나, 마침 돌림병의 유행으로
인가에 유숙할 수 없어 빗속에서 나무 아래에 앉아 밤을 새다가
생사의 일이 크고 무서움을 깨달았다.
그 길로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시킨 후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문 밑으로 주먹밥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서 밥만을 얻어먹으며,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받쳐 놓고 졸음을 쫓으며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3개월이 되던 11월 15일 곡식을 싣고 온
사람들이 벼 가마니를 내리면서,
“중은 시주 밥만 축낸 관계로 죽어서 소가 된단다.”
“그러나 소가 되어도 콧구멍이 없는 소만 되면 되지.”라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 때 스님의 시자 원규(元奎)라는 사미가 이 말을 듣고는 전하면서,
“시주의 은혜만 지고 죽어서 소로 태어나되 콧구멍 없는
소만 되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말에 경허 스님은 크게 깨달았다.
이후 경허의 행적은 난삽했다.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라 오해 받을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했고, 남의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했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돌연 환속해 저 북방 함경도에 가서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해서, 서당 훈장이 돼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술 담배를 즐겨,
윤리와 도덕을 한국불교에서 깔아뭉개기 시작한 것은
경허 성우(鏡虛 惺牛) 이후라고 평하는가 하는 사람도 있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불교 학자였던 이능화(李能和) 같은 사람은
경허를 사악한 자, 사기꾼이라 혹평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918년도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경허 스님을 음행과 투도를 끊임없이 자행한 무법자이며,
선종총림에서 마땅하게 제거돼야 할 마설(魔說)을 설한
기인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
그리하여 후대인들 중에도 경허를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일탈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일탈은 한두 번에서 끝나야 하고 지속돼서는 안 된다.
깨달았다고 해서 막행막식을 해도 좋다는 것은 율장 그 어디에도 없다. 부
처님도 그러신 적이 없고 마조, 조주, 대혜 종고,
그리고 보조 국사, 청허 휴정 등 역대 고승들도 음주와 여색을 한 적은 없다.
심지어 장로 종색(長蘆宗賾) 선가 편찬한 <선원청규(禪苑淸規)>에는
불음주, 불사음계를 범하면 추방하라고 명시돼 있다.
경허 스님의 반복적 지속적인 술과 여색은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승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경허 스님은 선은 크게 일으켰지만 동시에 한국불교를
깊은 수령으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들이 ‘깨달은 선승의 무애행’이고
‘깨달은 분상에서 대 자유인의 경지’라고 왜곡돼선 안 된다.
무애자재란 번뇌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며,
욕망으로 인해 본분사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차법(開遮法;허용과 제한)이란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서이다.
막행막식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 윤창화
하지만 홍곡(鴻鵠)이 아니면 어찌 홍곡의 그 큰 뜻을 알랴,
알기 어려운 법이니, 한갓 중생에 지나지 않는 처지에
어떻게 그 큰 뜻을 시비하겠는가.
참으로 경허 선사를 두고 이런 저런 말을 함부로 하기에 버거운 분이다.
그래서 훗날 경허 선사의 제자 한암(漢岩, 1876∼1951) 스님은
뭍 승려들을 향해 말했다.
“화상의 법화(法化)는 배우데,
화상의 행리(行履)를 배우는 것은 불가하리니...”라고 경책했다.
이러한 한암 스님의 경책은 서투르게 깨달아
경허 스님의 행리처럼 무애행(無碍行)이라는 탈을 쓴
이행(異行)을 흉내 내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경허(鏡虛), 그는 누구인가?
경허의 법제자 만공(滿空)은
경허 선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시를 읊었다.
선(善)은 부처를 능가했고, 악은 호랑이를 능가했으니 (善惡過虎佛),
그분이 바로 경허 선사이시다. (是鏡虛禪師).
열반하셨으니 어디로 가셨는가 (遷化向甚處)?
술에 취해 꽃처럼 붉은 얼굴로 누워계시네 (酒醉花面臥).”라고 했다.
즉, 선한 측면으로 보면 부처를 능가하고,
악한 측면으로 보면 호랑이 보다 더했다.
선승의 측면을 보면 그 도력이 부처님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파계와 패륜을 일삼아 불교에 해악을 끼친 측면에서 보면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의 행패보다 더 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떻든 만공에겐 더 없이 소중한 스승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술에 취해 꽃밭 속에 누우셨도다’는 구절에는
제자 만공이 파악한 스승 경허의 고독했던 일생을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고승들이 보여준 이런 파계행위를
불교적 깨달음과 세간적 윤리 간의 일정한 긴장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기보다 파계가 오히려 깨달음의 경지라는
치졸한 잡승들의 오류로 확장될까 염려스러운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