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장 신돌석(壯山 申乭石)장군 기념관
항일의병장 신돌석 장군 기념관
신돌석장군 유적지내 기념관은 1999년 11월 18일 의병장 신돌석의 우국충정을 기념하고 항일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설립하였으며
신돌석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종합적으로 수집·보존하여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안에는 신돌석 장군의 흉상을 비롯하여 일제의 침략 만행과 의병활동, 영덕군 지역의 항일운동,
일본군의 무기와 형장구 및 신돌석의 약력과 설화, 신돌석의 태백산 전투, 그림으로 보는 신돌석의 일생,
신돌석의 전략과 전술, 신돌석 진의 조직도 등 그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고
장도·화승총·창검류·처결문서 등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입구 중앙에 자리한 의병장 신돌석 장군 흉상
의병장 장산 신돌석(壯山 申乭石,1878.11.3.(음력)~1908.12.12)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순경(蕣卿)이고, 호(號)는 장산(壯山) 본명은 태호(泰鎬)이다.
이명(異名)은 돌석(乭石), 태홍(泰洪), 태을(泰乙), 대호(大浩)이며 태백산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8년(고종 5년)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당시는 영해군 남면 복평리)에서
아버지 신석주(申錫柱, 족보에는 신석주(申淅柱))와 어머니 분성(盆城) 김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맏아들로 출생하여
퇴계(退係)의 방계인 육이당(六怡堂) 이중립(李中立)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영해 의병진을 창군, 활약하다 1896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해산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되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3월 장군도 영릉의병진(暎陵義兵陳)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시 창군하니 각처에서 모여든 동지가 300명이 넘었다 한다.
그 때 장군의 나이 29세였고 장군은 최고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항쟁한 의병장이기도 했으나,
일월산, 백암산, 대둔산 등지에 요새를 두고 소수정예로 적을 섬멸하는 게릴라전에도 능했다.
1907년 이인영(李麟榮) 13도창의 총대장으로부터 경상남북도를 합친 교남창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서울 공략전에 참여했으나 평민이란 이유로 배제되었다.
1908년 11월 18일 엄동설한을 앞두고 굳게 믿었던 부하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어 3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으며, 1971년 장군의 유해가 국립묘지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95년 도곡리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1999년 장군의 혼이 어린 자리에 장군의 항일 정신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 빛내기 위해 성역화 공원과 기념관이 세워졌다.
방명록
신돌석 장군 유적지와 연표
의병 활동 자료
신돌석 장군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으며
2021년 2월 경북남부보훈지청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자리한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2월의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신돌석장군 일기
울진 우편취급소 공격
울진에 전초기지를 건설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한 신돌석 장군은 이를 봉쇄하기 위해 여러 차례 울진 공략에 나선다.
울진에 있는 일본인 거류민과 일본 선박을 공격하고,
당시 화페를 담당하던 울진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확보한다.
의병 활동에 사용되었던 무기
신돌석 장군의 항일운동 격전지
신돌석 장군에 대한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