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시인 헤르만 헤세는 그의 시《안개 속에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이상하여라! 숲도 돌도 홀로 있고, 나무들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홀로이다.”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덕산산악회 회원 열 분과 함께 소백산 백두대간 코스를 걸었습니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눈앞을 가로막은 것은 탁 트인 산세가 아닌, 자욱한 안개였습니다. 기대했던 산뜻한 풍경은 사라졌지만, 그 몽환적인 묵향 속에서 저는 산이 건네는 전혀 다른 대화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개는 풍경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산이 자신의 속살을 잠시 숨긴 채 우리에게 깊은 '상상의 여백'을 선물해 준 것이었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산길을 걸으며 역설적으로 비구름 속을 뚫고 지나가는 비행기를 떠올렸습니다. 창밖은 온통 잿빛 안개뿐이지만, 기장의 정교한 계기와 승무원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있기 때문에 목적지에 무사히 닿듯이, 우리의 산행 역시 이대장님, 회장님과 산행대장의 묵묵한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이대장님과 회장님은 회원들의 안위를 챙기며 전체를 아우르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고, 산행대장은 선두와 후미를 오가며 위험요소를 미리 살피고 걸음의 속도를 조절해 줬습니다. 세 분의 끊임없는 배려와 노고는 안개 속에서 무엇보다 환하게 빛나는 ‘인간 이정표’였습니다.
덕분에 시야가 흐림에도 불안함보다는 안도감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안개 속을 헤치고 마침내 마주한 소백산 정상의 주목군락은 그 자체로 거대한 감동이었습니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간다’는 주목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거친 비바람과 세월을 견뎌낸 단단한 기품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안개에 싸인 기암괴석과 고고한 주목의 자태를 바라보며, 문득 그곳에서 우리 산악회의 선배 회원님들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이대장님을 비롯한 선배님들께서 보여주신 노익장은 커다란 울림이었습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산행대장의 안내에 따라 주춤거림 없이 땅을 디디는 그 힘찬 발걸음은, 수백 년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내며 소백산을 지켜온 주목을 꼭 닮아 있었습니다. 세월의 무게에 굴하지 않고 청청하게 서있는 그분들의 등 뒤에서, 저는 '젊음이란 나이가 아닌 마음의 각도'라는 진리를 실감했습니다.
발길이 위태로울수록 서로를 향한 손길은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힘겨워하는 회원들을 위해 걸음을 늦추고, 짙은 안개를 뚫고 서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그 어떤 맑은 날의 조망보다 포근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일은 정상을 밟아 정복하는 독주가 아니라,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체온을 나누는 동행의 예술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올라선 정상에서는 산행의 피로를 씻어내는 또 하나의 커다란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낭 속에서 하나 둘 꺼내 놓은 정성 어린 음식들은 안개 낀 산 정상의 풍성한 성찬이 되었습니다. 달콤한 과일과 정갈하게 챙겨온 떡과 범벅, 정성껏 싸온 김밥을 서로의 입에 넣고 음료를 기울이며 나누는 웃음꽃은 쌀쌀한 정상의 공기마저 훈훈하게 감쌌습니다. 잘 차려진 산수화 속에서 회원들과 마음을 터놓고 나눈 그 소박한 나눔이야말로 땀 흘려 오른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힐링이자 참된 동행의 맛이었습니다.
인생 역시 안개 낀 소백산 능선과 참 닮았습니다. 때로는 미래가 흐릿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고, 가파른 오르막 앞에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산과 주목을 가린다고 해서 그 존재가 사라지지 않듯이, 우리가 찾아야 할 가치와 희망 역시 잠시 보이지 않을 뿐 언제나 그 자리에 단단히 서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아니라, 우리를 이끄는 산행대장과 회원들을 믿으며 내딛는 '지금 이 순간의 한 걸음'입니다.
정상에서 바라본 안개는 우리의 시야를 잠시 가렸을지언정, 고고하게 자리를 지킨 주목의 기상과 서로를 향한 회원들의 따뜻한 헌신까지 가리지는 못했습니다. 맑은 날의 산이 화려한 겉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준다면, 안개 낀 소백산은 천년 주목과 함께 조용히 내면을 여물게 하는 시간을 선사합니다.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음에 감사하고, 묵묵히 길을 밝혀준 이대장님을 비롯한 길잡이들과 험한 길을 함께 걸어준 소중한 회원들이 곁에 있음에 행복했던 시간. 이번 소백산 산행은 제 삶의 길목에서 안개를 만날 때마다 거뜬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따뜻한 등불로 남을 것입니다.
첫댓글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길이 었는데 살아서는 못 가겠고 ...죽어서 영혼이라도 갈까? 역시 글을 잘 쓰셔서 감동적이네요. 고맙습니다
함께 해주신 좋은 분들 덕분에 안전하고 즐겁고 행복한 산행이었습니다 . 몇 십 년을 이끌어 주신 이대장님 존경합니다 . 현직에서 고생하신 김대장님 전회장님 감사드립니다 . 함께 내일을 위하여 덕산 덕산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