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묵 한 사발
글/송악
무심코 책장을 넘기던 잡지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보았다.
성북구 정릉동 아리랑시장 골목에 있다는 어느 메밀묵집의 이야기다.
허름한 식당의 객장이 부족해 주인집 안방에서 주문한 메밀묵을 먹고, 옆에는 초등학생 어린이가 상위에 책을 펴놓고 숙제를 하고 있는데, 주인 할머니께서 손님들에게 손자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조용히 빨리 먹고 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메밀묵이 어찌나 맛이 있던지 줄을 선다는 호기심 끌리는 기자의 소개 글을 보고 정릉동의 터주대감 내 친구 김진수군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다.
“아리랑시장 골목에 유명한 묵집이 있다 카던데, oo식당이라고 알고 있나?”
“한 번 가보기는 해봤었네, 와 묵이 묵고 싶은가?”
“그래, 언제 가서 한 그릇 사 묵어 보세.”
“묵이 뭐 별거 있나. 묵이 묵고 싶으마 우리 집으로 오거라. 막걸리 한 되 받고, 두어 모 사다가 우리 집에서 쳐 묵으마 되지.”
(허얼! 점잖은 체면에 쳐 묵다니?)
친구의 처가가 고제면이니 부인께서 묵 치는 방법을 모르기야 하겠는가.
다 비운 묵사발, 마지막 국물 마실 때 ‘메루치대가리’가 귀찮던 경험을 해본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면 ‘쳐 묵는다’는 말의 진의를 틀림없이 오해하리라.
사람마다 각자의 기호음식이 있겠지만 어려서부터 유독 메밀묵을 좋아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덕유산자락에 파묻힌 심심산골 동네.
가파르고 척박한 산비탈 자갈밭도 갈아서 골을 치고 씨앗만 뿌리면 절로 잘 자라는 작물이기에 메밀 농사를 많이 지었다.
메밀이야 어디 덕유산 골짝에서만 흔했을 것이며 메밀음식에 묵만 있겠는가.
북한에서는 냉면이요 강원도 춘천지방에서는 막국수로 만들어먹는다.
일본식 메밀국수 ‘소바’도 있어 더운 여름철엔 몇 짝씩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이 있다.
명동 국민은행 본점 뒤, 프로야구 심판위원장이었던 모씨가 운영했던 집의 깔끔한 메밀국수와 무즙이 일품이었고, 건너 무교동에는 10짝 이상을 먹으면 돈을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집이 있어서, 한지로 된 벽지엔 모월 모일 어디에 사는 머시기가 메밀국수 몇 짝을 배석자 누구 앞에서 먹고 기록을 냈다는 낙서들이 도배가 되어 있기도 했다.
한때, 냉면 맛의 식도락을 즐기겠다고 이름 있는 냉면집들을 순례했었다.
월남한 북한출신 사람들이 직접 경영한다는 무슨무슨 면옥들.......... 종로통 시계골목, 을지로 oo면옥, 장충동oo면옥, 대한극장 뒤 필동의 oo면옥, 지금은 없어진 서소문동oo면옥, 오장동oo냉면, 의정부 가는 쪽 창동의oo면옥, 허름한 집을 헐고 깔끔하게 빌딩을 올리고서는 맛이 이상해져버린 구파발oo면옥, 세검정의 oo옥, 그리고 냉면발이 굵은 양평군 옥천냉면까지...........
그렇지만 솔직히 냉면가락의 주성분은 전분으로 메밀가루의 함량은 극히 적다.
함흥냉면이든 평양냉면이든 공히..........
메밀을 재료로 하는 또 다른 음식으로 강원도식 막국수도 좋은 음식이다.
80년대 5공화국시절, 속가의 형님 효림스님은, 몇 해 전 열반하신 동양화를 그리시던 도반 전곡스님과 함께 곤지암 근방의 작은 토굴에서 여러 해를 수행하고 있었다.
직장인이었던 내가 주말에 가끔 찾아뵌 적이 있어, 바람도 쐴 겸 두 분을 모시고 남한강 이포대교를 건너서 여주군 천서리의 막국수집엘 두서너 번 갔었다.
삶은 메밀육수의 구수함과 매콤하고 아리한 막국수로 호젓한 점심시간을 가졌던 추억의 그 집은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져버렸다.
당시에도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지만, 방송을 여러 번 타고난 이후에는 기백 명씩 수용할 수 있는 별관을 짓고도 번호표를 받아서 30여분을 기다려야 할 만큼 대단한 성업을 하고 있다.
이웃에 유사한 집들도 여럿 생기더니 동네 명칭까지 이젠 천서리란 이름대신 막국수마을로 불리어지고, 원조집이나 새로운 집이나 별반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건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원조집 앞에만 길게 줄을 선다.
여러 가지 메밀음식들이 모두가 특색이 있고 고유의 맛이 있지만, 역시나 우리 경상도사람들에겐 메밀묵이 제격이다.
탱탱하게 탄력 있는 묵을 굵직하게 직사각형으로 썰고, 멸치국물에 쉰김치를 고명으로 썰어 올리는 고향 식 묵사발은 생각만으로도 구수하다.
‘묵사발처럼 망가졌다.’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예부터 망가지든 말든 묵을 귀히 여기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모두에게 두루 사랑을 받았던 이 수수한 음식은 특히 잔칫상에는 빠질 수 없는 필수메뉴이다.
홍어가 빠진 잔칫상은 말짱 헛것이라는 것이 전라도의 풍습이라면, 메밀묵이 빠진 경상도 잔칫상은 말짱 도루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연세 많고 치아가 부실한 노인들도 편히 드실 수 있는 효자 음식이었다.
묵에 대해 좋은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묵 맛을 보게 해주겠다는 서울친구를 따라 경기도 장흥까지 갔더니 아뿔싸, 이건 상추 겉절이에 무쳐 담은 도토리묵이었다.
난, 묵 하면 당연히 메밀묵이겠거니 여겼는데 친구는 도토리묵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찬바람에 낙엽이 구르고 눈이라도 곧 쏟아질 듯 컴컴해지는 어느 초겨울 날의 저녁, 버스에서 내려 귀가하려는 나를 어떤 아주머니가 불렀다.
“아저씨, 내가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주소를 잊어버려서 이사 간 딸내미네 집을 찾지 못하고 도로 내려가려고 하거든요. 이거 묵을 좋아하는 우리사위 주려고 쑤어온 메밀묵인데........ 아저씨가 차비나 좀 보태주고 고마 잡수이소.”
시골스러운 차림의 60대 아주머니가 안쓰럽기도 하고 군침 도는 메밀묵에 욕심이 나서 댓모나 되는 묵보따리를 지폐 두 장을 주고 몽땅 사버렸다.
충청도 사람인 아내도 나와 결혼하고서는 우리 고향식의 묵을 쳐 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터이다.
집에 와서 묵보따리를 풀었더니 묵이 좀 이상하였다.
순수메밀묵이 아니라 다른 잡곡식가루가 섞인 것이, 곱게 빻은 가루도 아니어서 꺼끌꺼끌하게 씹히는 묵을 먹는 기분은 아주 고약했다.
좋은 묵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좋은 메밀을 사용해야겠고 물에 불린 메밀을 맷돌에 가는 일에서부터 묵을 쑤는 공정이 매우 까다롭다. 가마솥의 온도조절은 물론이요 타거나 눌어붙지 않도록 계속 저어주다가 적당히 걸쭉해지면 다른 그릇에 퍼 담고 식혀서 응고를 시킨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시간과 경험과 기술과 정성을 필요로 한다.
여름철엔 묵이 쉬어버리는 일도 있으므로 주의를 해야 하고, 식을 때 생긴 딱딱해진 윗거죽은 아이들 몫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묵의 상부에 랩이나 비닐을 덮어서 식히면 거죽이 생기지 않는다니 알아 둘만하다.
요즘은 각종 잔치나 행사가 닥쳐도 식당이나 전문식장을 이용하며 편리하게 치러내지만 불과 한세대 전만해도 크고 작은 경조사를 모두 집의 울타리 안에서 치러야 했다.
혼사 같은 큰일이 닥치면 무엇보다 음식준비가 걱정거리였는데 우리 고향에서는, 엿 고우기, 콩지름(콩나물)놓아 기르기, 메밀묵 쑤기, 같은 일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친척이나 이웃이 대신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품앗이 풍습이 있었다.
잔칫집의 음식을 대신하는 현대식 뷔페식당에서는 작은 공기에 담긴 묵을 먹어보지만 옛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지난 유월 초, 고향에서 초등학교 모교의 총동문회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해마다 치러지는 연례행사로 자리가 잡히고 전국각지의 선후배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우정을 나누는 매우 즐거운 축제다. 금년은 우리 동기들 35회가 주관기수로, 잔치를 무사히 치루고 난 이튿날에 동기생들끼리 신원면의 거창양민학살사건추모공원엘 들렀다.
20여명이 넘는 친구들과 함께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빌고 잘 꾸며진 공원 경내를 두루 돌아서 역사교육관을 관람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시간이었다. 묻히고 굴절되었던 아픈 역사의 현장학습을 끝내고 나오니 초여름의 더위 속에 하늘은 맑고 산하는 푸르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거창읍내에 살고 있는 친구의 안내에 따라 찾아간 곳이 이와 같은 날 이런 분위기와 가장 어울리는 식당이요 음식이었다.
식당 같지 않은 식당! 전혀 대중식당음식 같지 않은 음식!
주변에 정면4칸에 측면 2칸짜리 팔작지붕을 올린 멋진 정자 인풍정이 있어 운치를 더하는 양지리의 메밀묵 전문집 양지식당!
기교를 부리지 않은 메밀묵사발은 물론이요 간수냄새가 확 풍기는 전통식 두부, 그기에 쌀알이 동동 뜨는 막걸리 또한 이집의 작품이다.
이런 산골짜기에 이런 멋진 음식점이 있었구나.
빨리 먹고 싶은 생각이 앞서서 급하게 재촉을 하다가 주인아주머니와 한바탕 언쟁도 붙었다. 예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쳐 빨리 묵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주인아주머니의 역정, 불친절성 오만함도 오히려 멋져 보인다.
개인적 욕심은 이런 집은 오래도록 이렇게 남아있기를 바란다.
유명세를 타면서는 초심도 변하고 음식맛과 분위기까지 변질되어 실망을 안겨주던 음식점들을 익히 보아왔다.
훌륭한 가창력에 멋진 노래의 무명 언더그라운드 신인 가수가 있어 팬이 되어 그 노래를 은밀히 즐기는데, 어느 시점 히트를 치고 유명해져버리면 왠지 상실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듯이, 이런 좋은 음식점은 너무 유명해져서 고유성이 변질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리 귀한 식당을 안내해준 읍내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사모님 임혜영 친구에게 감사한다.
묵이란 음식이 미리 많이 만들어 두지를 못하는 것이기에, 이집 묵 맛을 보려면 전화예약과 문의는 필수라는데 114안내에도 등록되어있지 않은 이 식당의 전화번호를 그날도 깜빡 잊어버리고 그냥 왔었다.
추모공원관리사무소에 근무하시는 후배님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더니 일부러 식당까지 찾아갔었던 모양이다.
양지리 묵집은 거창읍내 쪽 길이 아닌 합천 묘산 쪽 길옆에 있는 곳이다.
딱 이 말이면 충분할 것을 쓸데없는 잡설만 길게 늘어놓았다.
“구수한 메밀묵 한 사발 쳐 먹고 싶다. 시원한 막걸리 한잔 곁들인다면 더욱 좋고!!!!”
-2012년 유월에-
첫댓글 북상 동문님들께만 귀한 정보 알려 드립니다.
신원면 양지리 메밀묵식당T:055-944,3428
너무 소문내지 마세요오~~~
ㅎㅎ쭈욱 내려오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폭소케 하네요. 맞심더 딱 한줄이면 될일을 그렇게 멋진글을 남기십니까. 항상 느끼는거지만 선배님의 글은 까마득한 옛날에 겪었던 일들이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다시 그 기억들을 살려내시는 능력이 있으세요. 오늘은 묵에 대한 어릴적 기억이랑 잔치집, 그리고 지금도 중요한 날이면 언제나 만들어주시는 엄마표 묵이 떠오르네요..전라도에선 홍어 그리고 경상도에선 잔칫집에 꼭 있어야하는 묵에 공감하고 갑니다.
경상도 음식은 짜고 별 맛이 없다고 다른지방 사람들은 말하지만, 산악지방 오지의 특성을 간직한 훌륭한 음식들이 많지요. 나이들면서 식탐만 늘고 있습니다.
전라도식 홍어 삼합! 매니아입니다. 옛날엔 광주광역시 버스터미널 뒤쪽에 몇 번 다녔던 단골집도 있었는데......
선배님께서 처 드시고 오신 묵 맛....아코코~싹싹 ...헤~
사실 우리 어린날은 이웃사촌 누구네 혼사가 치러질때
가장 가까운 사람들 끼린 묵 한당세기 해다 드렸었지요
그 다음 쪼매 사이가 나면 국수 한두다발
거창길에 꼭 한번 들려 봐야 겠습니다
경숙님 당부 땜시 소문 내지 말고 ...쉿~
암쪼록 조곤 조곤 써 내려 오신 솜씨가
꼭 옆에서 듣는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인정이 듬뿍 담겼던 그 시절의 묵 한 당새기!
맛집 기행 삼아 일부러 들리셔도 충분히 본전뽑고도 남을 식당으로 강추합니다.
후배님께 들러서 차 한잔 얻어마시고 좋은 시간 가지셔도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아버지도 메밀묵을 유독 좋아하셔 그 입맛을 닮았는지 저도 참 즐깁니다.
저 혼인때 어미니를 비롯해서 동네 어르신들 모두 칠순 할머니들이셔서 힘에 부쳐
메밀묵 잘하는 분을 알아 품삯을 드리고 해다드린걸 시작으로 명절마다 해다 드리곤 했었는데...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는 아침입니다.
소소하게 풀어내신 메밀묵에 대한 이야기에 참 군침이 돕니다...아직 점심시간 남았는데.^^
그리고, 그날 미리 예약을 해서 20명분 준비를 해 둔 것까지 전화로 확인을 했는데
좀 기다리셨나 보군요..원래 귀한 맛은 기다리는 맛도 한 몫 하는 셈이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나 북상초 몇회 누구인데 ...묵좀 묵으로 왔네"..!!
맞습니다. 그날 스무명분만 예약했었는데 나중 식구들이 많이 늘었거던요.
어릴적 각인되었던 입맛은 잊혀지지 않는가 봅니다.
어른들 잡수시기에 아주 좋은 효도음식이요, 요즘은 칼로리 적어서 웰빙음식으로 각광을 받나봅니다.
겸사겸사 신원골짜기에 또 한번 가고싶습니다.
가을밤에 속이 출출할 때
어머니가 양념장을 둘러 먹었던 메밀묵~~
어떤음식보다 정갈하고 사랑이 듬뿍담겼지요
좋은글 잘 감상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요 ^-^
북상인이라면 누구나를 막론하고 메밀묵에 대한 추억이 있을터이지만, 어머니의 사랑까지 회상하시니 더욱 뜻깊은 음식이 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건강한 여름을 나십시오.